제목: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부제: 제안서를 다시 설명하다
<프롤로그>
<프롤로그>의 글 순서
가. 머리말
나. 최초 제안서 작성의 과정, 그리고 게시 후의 경과(經過)
다. 최초 제안서 작성의 후기(後記), 그리고 다시 이 글을 쓰게 된 배경
라. 몇 가지 반론(反論)에 대한 답변
마. 개인적 신상(身上) 소개
바. 맺는말
가. 머리말
금년은 교회 문제로 한 해가 시작되었고 교회 문제를 안은 채 한 해가 끝나게 되었다. 불을 보듯 쉽게 끝날 것 같았던 문제가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음력 초하루 날, ‘담임목사의 6번의 눈물’로부터 시작되었던 교회의 문제는7인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서만 나오면 어떤 모양으로든 결말이 날 줄 알았다. “표절한 적이 없다. 목사의 인격을 걸고 맹세한다. 만약 표절이면 담임목사직을 사퇴하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인격적 약속이 있었기에 사실관계(事實關係)만 밝히면 되는 일이라고 간단히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었던 그 어이없는 결과 앞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은 물론,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사랑과 용서’란 말로 포장된 ‘거짓과 불의’에 의해 ‘교회의 성결’이 더럽혀지고 ‘진리의 말씀’이 무참히 농락당한 역사적 현장을 목도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필자의 경우 거의 하루도 교회를 걱정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없었고, 입술로나 마음으로나 기도를 하지 않고 지낸 날이 없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교회 생각뿐이었다. 내 혈육이 중병에 걸렸는데 내가 희희낙락하며 다닐 수 없듯이, 내가 몸 담고 있는 모교회가 병들어 죽어가는데 내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낼 수 없었다.
눈물이 나왔다. 그것은 교회 일에 무관심했던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었고, 병든 교회를 향한 슬픔의 눈물이었고,나와 같이 유리하는 양떼들을 향한 동병상련의 눈물이었다. 하나님께서도 함께 우셨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벌써부터 울고 계셨는데, 나는 그제서야 하나님의 눈물을 알게 되었으니 불효한 자식이었음이 틀림없다.
나. 최초 제안서 작성의 과정, 그리고 게시 후의 경과(經過)
선교지에 있으면서 이 불행한 소식들을 접한 필자는, 이방 땅 ‘바벨론’에서 훼파된 조국의 형편을 전해 들은 ‘느헤미야’의 애통했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기도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비록 둔필(鈍筆)이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열심히 글을 써서 올렸다. 많은 성도들이 공감해 주셔서 감사했고 영적 전사(戰士)로서의 보람을 느꼈다. 나 역시도 많은 성도들이 올린 글을 읽으며 공감했고,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싸워야 하며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지를 고민해 왔다.
그러던 중, 드디어 11월24일로 예정 된 SGMC입당을 한 주 앞둔 막바지 시점이 다가왔다. 그렇지만 새 건물에서는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고민하던 상당한 수의 성도들이 분명히 있었는데, 이들을 붙들어 줄 새예배처소에 대한 대책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 먼 곳까지 이들의 하소연이 들리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별다른 제안이 없었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나’라도 한 번 제안을 해보자.”- 이런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바쁜 사역 중에도 쉬는 시간 반납하고 여러 날 동안 제안서를 준비했다. 마지막 날은 밤을 꼬박 샜고 드디어 11월 22일 동이 트는 아침, 사랑넷 카페에 ‘제안서’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분들은 가만히 있는데, 왜 멀리 있는 당신 같은 선교사가 나서야 하느냐”는 아내의 볼멘소리가 있었지만, 필자는 ‘소리치는 돌멩이’(눅19:40)가 된 심정으로 제안을 했다. 때가 때였던 지라 간절하고 급박한 마음을 담게 되었다. 카페회원들의 반응은 활발했다. 특별히 양원길 장로님과 황의각 장로님의 진심어린 댓글에 격려를 받았다. 댓글에 나타난 다수의 찬성의 반응을 통해 ‘새예배처소 마련’이나 ‘새교회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분들이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반대의견도 많았다. 나도 인간인지라 그 말들이 입에는 썼지만 그 분들도 논의와 소통에 참여해 줘서 고마웠다. 그러나 필자의 글을 ‘제대로’ 읽었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분들이 자신들의 원래의 생각을 고집하기 위하여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때는 마음이 아팠다. 어쨌든 오프라인에서 성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필자에게는, 카페를 통한 이러한 찬반 의견들이 현재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필자의 제안서가 게시된 다음 날인 토요일 아침, 황장로님을 비롯한 은퇴장로님들의 긴급한 건의와 갱신위원회 김두종 장로님의 신속한 화답으로 ‘주일본당마당기도회’라는 결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임은 틀림 없었지만, 필자의 제안에 대한 ‘잠정적 대안’일 뿐 ‘완전한 해답’은 아니었다. 이제 이로써 급한 불은 껐으니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차분하고 진지한 논의가 ‘온 오프’ 양면으로 시작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동안 정작 ‘제안자로서의 필자’는 기다리고 있던 갱신위원회로부터 ‘카페를 통하여’ 아무런 답변이나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제안 후 약30시간 뒤인 토요일 오후에 “갱신위의 답변을 기다립니다”는 요청(要請)의 글을 올리게 된 것이다. 나는 ‘갱신위’에 결코 불가능한 것 또는 어려운 것을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필자는 최소한 “검토 후 답을 드리겠다” 또는 “갱신위원회 회의에서 논의해 보고 답을 하겠다”라는 정도의 ‘유예성(猶豫性) 답글’이라도 받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제안자에 대한 예의요, (카페란 소통의 마당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는데 필요한) 상호간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러한 글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웠던 점은 그 ‘재촉성’ 게시글을 보고 ‘갱신위’의 공식적 답변대신 그제서야 제안서에 대한 반대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안타까웠던 것은 그 중 몇 분의 댓글이 다소 감정적이었다는 점과, 또 반대의 논지(論旨)를 ‘실정법적 문제’나‘재산권’이나 ‘투표권’의 문제로만 축소시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 분들에게 아쉬웠던 것은 빨랫줄처럼 긴 글로 댓글난을 도배할 것이 아니라 정식 게시글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어야 했다. 어쨌든 필자가 ‘갱신위’의 답변을 요청하는 글을 올리지 않았더라면, 그 많은 반대의 목소리들을 들을 수 없을 뻔 했다. 역설적인 면이 있었지만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본다.
다. 최초 제안서 작성의 후기(後記), 그리고 다시 이 글을 쓰게 된 배경
필자의 제안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게 된 것이 아니다. 2009년 건축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필자는 선교지에 있었다. 1달러도 아껴서 써야 하는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로서, 천문학적 고액의 건축계획에 대해 처음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었다. 그러나 어느 날 ‘옥목사님의 동영상 광고’을 본 후 마음을 바꾸어 힘써 건축헌금을 했고, 또한 생각날 때마다 건축을 위해 기도를 해 왔다. 따라서 필자도 떳떳한(?) ‘유임승차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3월 이후 건축에 얽힌 불법과 편법과 많은 의혹들을 확인한 이후에는, 나의 무지와 무관심을 통절하게 회개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내가 헌금을 했더라도 그 곳에서 예배드릴 수 있는 권리를 과감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 후 점점 더 많은 정보들을 접해 오면서, SGMC란 건물이 오직 한 사람의 ‘탐욕의 산물’임을 알게 되었고, 그의 잘못된 야심이 앞으로 유형무형의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이러한 사실들을 성도들과 나누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고함’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SGMC는 아니다’ 시리즈 글 4편에 이어 ‘여호수아 프로젝트의 허구성’ 8편을 쓰기까지, 성령님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특히 SGMC입당이 더 가까워 온 시점에는 더 절박한 심정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공룡건물 입당을 앞두고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던 ‘목자 없는 양떼들’의 마음을 느끼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사랑의교회 장로님들께 드리는 말씀’(10월15일자)이나, ‘그들은 어찌하여 침묵하고 있는가/ 부제: 중간지대 성도들에게 고함’(11월6일자) 에는 ‘SGMC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성도들이 있음에 대한, 즉 그들의 실체(實體)와 존재(存在)에 대하여 분명한 언급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즉 게시글을 올리고 댓글을 통한 반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SGMC에는 따라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 생각보다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동안 부족한 사람의 글을 관심 있게 읽어주셨던 분들은, 필자가 진작부터 그 중 한 사람이었음을 감지(感知)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의 모든 글에는 ‘SGMC 건축물’이 배태(胚胎)하고 있는 상징적 또는 실질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있었고, 앞으로 거기에 베이스를 두고 시작될 ‘허구적인 SGMC시대’가 초래할 영적 문제점들이 열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밝히진 않았었지만, 필자가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해법(解法)은 ‘원 트랙’(One Track)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현재 갱신위원회의 방침과는 반대되는 ‘원 트랙’이었다.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다음과 같다;
(1) 위임을 받은 개혁진영의 대표자들이 ‘친오진영’의 대표자들과 SGMC 입당을 기점으로 한 ‘분리’를 전제로 10월 안에 협상을 마침.
(2) 협상안은 ‘개혁진영은 본당을 물려받고, 친오진영은 SGMC를 인수해 가는 것’임.
(3) 협상이 결렬되면-그럴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더 이상 소모적인 싸움을 지양하고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맨 손으로 떠나서 분리된 개척교회를 개척함 (학교강당이나 변두리 건물을 빌려서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천막에서라도 시작할 수 있음. 단SGMC에는 절대 따라가지 않음.)
(4) 오목의 거짓과 비리에 대한 조사와 폭로 활동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로 편성된T.F.(Task Force)팀을 조직하여 계속해 나감. 교회적으로 추진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면 ‘기존 언론매체와의 협력’ 또는 ‘평신도 개혁운동단체 설립’ 또는 ‘인터넷신문 창간’등과 같은 방법으로 끝까지 추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함, 등이었다.
그러나 11월16일 갱신위원회의 최종입장이 ‘SGMC에 들어가서 싸운다’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 입장은 필자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동안 많은 글을 통해 SGMC에 따라가면 안 된다는 암시를 해왔었기에, 갱신위의 입장을 보고는 큰 낙심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을 추스르고, 아울러 비록 필자의 생각과는 반대되었지만 갱신위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도들도 많음을 고려하여, 11월22일 이른바 ‘투트랙’(Two Tracks) 제안서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갱신위의 방침과 필자의 개인적 소신을 절충(折衷)한 안이었다. (필자 주: 원래 제안서 상에 필자가 사용했던 표현은 ‘두 개의 영적 전선(戰線)’이었다. 그것을 ‘투트랙’이란 깔끔한 용어로 정리해 주신 어느 회원님께 감사 드린다. 또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을까’란 글로 같이 고민해 주신 어느 젊은 목사님께도 감사 드린다.)
그런데 그 제안서가 게시 된 이후, 필자의 의도와는 달리 카페의 분위기가 점차 예민해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법’ 또는‘분열’이란 선동적 단어가 자주 등장함으로써 그러한 분위기가 상승되어 갔다. 무엇보다 필자의 제안에 대한 갱신위원회의 오랜 침묵이 이해하기 힘들었고, 필자의 제안서를 ‘가뜩이나 일손이 달린 상태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갱신위원회의 사기를 저상(沮喪)시키고 개혁진영의 하나됨을 저해(沮害)하는 나쁜 제안’이라고 규정하는 듯한 카페의 전체적 분위기를 수용하기 힘들었다.
그 후 필자는 기도하는 가운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절필(絶筆)을 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글을 쓸 것인가? 나의 제안이 개혁진영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인가, 아니면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유익이 될 수 있다면, 나의 설명이나 설득 노력이 충분했는가, 아니면 부족했는가? 여러 날에 걸친 기도와 숙고의 끝에 내리게 된 결론은 후자의 답이었다.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나의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주에 걸쳐 이 글을 준비했다. 한 자 한 자 성령님의 간섭을 간구하며 썼다. 사역하는 시간 외에 잠자는 시간 줄이고, 교제하는 시간 줄이고, 휴식시간 반납하고 쓴 글이다. 글의 분량이 많기에 총 8회에 걸쳐 게시하고자 한다.
라. 몇 가지 반론(反論)에 대한 답변
필자의 제안에 대한 반론들을 종합했을 때, 제안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거나 오해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의견들이 있었다.본 글의 게시에 앞서 먼저 그 부분부터 해소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우선 간단한 답변으로 대신한다. 더 구체적인 답변은 향후 게시될 글들에서 접하실 수 있을 것이다.
반론 1- 갱신위원회는 지금 일들만으로도 감당하기가 벅차다. 대안예배의 필요성은 동의하나 그것을 ‘갱신위’가 이루어내도록 요청하는 것은 너무 많은 부탁이다.
답변 1- ‘갱신위’가 이 일을 감당할 필요가 없다. ‘갱신위’는 단지 물꼬만 터 주면 된다. 당회원이 아닌 은퇴장로님들이과 협동장로님들이 그 산파의 역할을 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갱신위’가 간섭할 필요도 책임질 필요도 없다. 서로 협력적 동반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반론 2- 교인 자격을 유지해야 소송(訴訟)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분리 개척교회는 고려할 수 없다.
답변 2- 소송은 SGMC에 계속 남겠다는 분들의 몫이다. 떠나 분리된 새 교회를 설립하려고 하는 분들은 소송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서로의 사역내용(Job Description)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소송에 참여되어 있는 분들 중 교회 설립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소송인 명단’에서 빠지면 될 것이다. 그것은 ‘공동소송인 독립의 원칙’에 따라 문제가 되지 않을 줄로 안다. 설령 소송인 자격 포기 등으로 인해 소송절차가 다소 지연된다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에 따른다면) 절차지연이 교회개척을 지연시킬만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교회개척이 법적소송보다 하위목표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반론 3- 교인 자격을 유지해야 재산권(財産權)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분리나 분립은 고려할 수 없다.
답변 3- 위의 2번 사안과 마찬가지다. 재산권은 SGMC에 남아서 계속 교인 자격을 유지하며 싸우고자 하는 분들의 몫이다.새 교회 설립에 참여하려고 하는 분들은 이미 SGMC 재산권 참여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론 4- 교회의 분열(또는 분리/분립)이 발생하면 ‘집단적으로’ 교인자격(敎人資格)의 박탈이 일어나 SGMC나 담임목사를 향한 문제제기를 위한 ‘모든 자격’이 상실된다.
답변 4- 위의 사안들과 마찬가지다. 개혁진영에 있는 모든 교인들이 모두 새 교회 설립에 다 참여하라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처지와 생각이 다르므로 그것은 개개인이 선택할 사항이다. 따라서 떠난 분들만 교인 자격 박탈이 될 뿐이다. ‘집단적으로’ 교인자격 박탈이 일어나 문제제기를 위한 ‘모든’ 자격이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논리적이지도 실제적이지도 않다.그리고 그 분들은 대부분 이미 교회를 떠났거나 떠나려고 마음 먹고 있는 분들이다. SGMC에 계속 남아 투쟁할 분들은 계속 교인 자격을 유지하며 문제제기를 하시면 된다.
반론 5- 교인 자격을 유지해야 투표권을 잃지 않으며, 투표로 담임목사를 심판할 수 있다.
답변 5- 남은 분들만 투표를 하면 “투표를 통해 심판할 수 있는 길이 막히게 된다”는 것은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공동의회 소집의 가능성, 그리고 투표의 공정성과 효과성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게시될 글에서 충분히 다룰 것이다.
마. 개인적 신상(身上) 소개
얼마 전 ‘갱신위’ 총무가 오목사에게 보냈던 ‘신상털기’에 대한 경고성 메일을 읽은 적이 있었다. 또한 무교병에서는 SGMC가 ‘청정지역’이니 ‘죄인들 출입금지’라고 하는, 세계교회사(敎會史)에 길이 남을 것 같은 해괴한 짓을 하고 있는 이야기를 접하기도 했다. 아무리 저질(低質)이라고 해도 너무 저질이다. 이것이 명색이 지난 35년 동안 제자훈련에 목숨을 걸었던 교회의 현 주소란 말인가? 슬프고 안타까웠다.
그것을 배후 조종하는 오목사와 주동하는 무교병 가짜 목사는 차치하고라고, 그런 짓을 보면서도 아직도 오목사의 정체를 모르고,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고, 추종하고 있는 그 맹신도(盲信徒)들의 존재가 한심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도리어 그 신도들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담임목사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다. 장로들의 도덕성이 아니다. 출석교인 4만 명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아무나 맡을 수 없고, 거기에 걸 맞는 도덕성을 갖추어야 하기에, 반복된 거짓말로 그 조건에 한참 미달해 버린 오목사를 퇴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목사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장로들의 신상을 털겠다면, 그 주장을 하는 부목사들과 권사들과 집사들의 신상도 다 털어야 한다. 결국 우리 교회 4만 교인들 중 오목사를 지지하지 않는 모든 교인들의 신상을 다 털어야 된다는 말이 나온다. 이 해괴한 논리가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이것을 두고 본말(本末)이 전도(轉倒)되었다고 하고, 궤변(詭辯)이라고 한다.
원하지 않았던 바 지극히 치사한 방향으로 싸움이 전개되니, 마치 ‘이세벨’과의 더러운 전쟁 제2라운드로 접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필자의 입장은 그런 전쟁에는 절대 말려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항간의 속담에 “X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로 대신한다. 필자는 신상털기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공인(公人)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 신상 공개(公開)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두어 달 전 실명(實名)을 밝히고 난 후,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무교병에서 필자를 많이 공격했다고 들었다. 또 신상 뒷조사도 했다고 들었다. 무엇을 밝혀냈는지 자세한 사항은 모르지만, 일부 그들이 밝혔다는 것들 중에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도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칭찬이든 비난이든 사실이 아닌 것들이 떠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 필자의 신상을 잠깐 소개하려 하니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지금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실상 무교병 때문이 아니라 사랑넷 회원들을 위함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한 사람의 논객으로서 자신의 글을 책임지기 위해서, 또 독자들이 그 글을 신뢰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신분이 드러나야 하고 삶이 투명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는 53년 3월 생이다. 학교는 부산중학교(68년 졸업)와 부산고등학교(71년 졸업)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현재 사회과학대학) 지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4학년인 74년 5월초에 ‘유신(維新)반대’ 학생데모를 꾀했다 하여 ‘긴급조치 위반’에다 ‘내란예비음모’란 죄목까지 더해져 잡혀갔다. 필자가 과(科) 대표로 활동을 하던 중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된 친구들을 도와주었던 것이 죄목이었다.
어쨌든, 끌려 갔던 4~500명의 학생들 중의 한 명이 되어 당시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감방에서 여름 가을 겨울을 다 지내고 이듬 해 2월에, 9개월의 옥살이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비록 석방은 되었지만 학사제명을 당해 학업의 길이 막혀 버렸다. 그 결과 청년 시절 오랜 고통의 터널을 지나게 되었다. 그 후 82년에 복적이 허락되어 입학 12년 만인83년도에 졸업하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학력의 전부다. (무교병에서는 내가 대학을 졸업 못했다고 했다는데 그것은 잘못된 정보임. 현재 사면, 복권에 이어 명예회복이 되었고, 국가로부터 ‘민주화 유공자 인증’도 받았음)
한편 내 인생의 가장 암울했던 이 시기에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이윽고 출감 후 어느 목사님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래서 이 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나를 감옥으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요셉의 기사(記事)를 읽을 때마다 남다른 감동으로 읽게 된다. 하나님은 감옥이라는 인생의 광야를 통해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통해 우리 집안을 구하셨다. 또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게 하셨고, 지금은 캄보디아의 어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오묘하신 경륜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필자가 운동권에 있었다는 사실로, 좌파성향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다니던 70년도 초반의 학생운동은 좌파와 거리가 멀었다. 좌파적 학생운동은 80년대 이후의 일이다. 더구나 필자는 운동권 서클에서 민주화 투쟁을 위한 ‘의식화’교육을 받지 않은 개별관련자다. 한마디로 운동권에서도 ‘아웃사이드’였다는 이야기다. 당시에,지금은 총리를 지냈던 사람이나 대통령 후보를 했던 사람과 함께 옥살이를 했지만, 출감 후 나는 예수님과 교제하기에 바빠 운동권 학생들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그렇다고 나의 민주화 운동 이력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아웃사이드’로 참여했지만 나는 독재정권 앞에서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젊은이였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금 필자의 정치성향은 ‘개혁적 우파’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은, 아이러니컬하게 들리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이다. 나는 당시 민주화도 중요했지만 산업화는 더 중요했던 국가적 어젠다(Agenda)였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가장 싫어하는 집단은 북한인권에 침묵하는 ‘종북좌파’들이고, 그 다음으로 혐오하는 집단은 ‘부패한 우파’다. 왜냐하면 부패한 우파는 ‘종북좌파’들이 번식할 토양을 만들어주고 또 실제로 그들에게 상납 또는 하사하며 공생 공존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당연히 조용기 목사나 오목사처럼 ‘부패한 종교권력’도 혐오한다.
군 경력으로 말하면 육군에서 30개월 만기 제대한 예비역 병장이다. 이등병시절부터 제대할 때까지 최전방인 15사단에서 근무했다. 일반공병이었지만 부대에서 틈틈이 군종사병의 역할도 했다. 어쨌거나 운동권 학생이었다는 이유로 군 징집도 미루어져, 결혼을 앞둔 27살에야 영장이 날라왔다. 덕분에 20대의 남은 고난을 군에서 마지막으로 다 채우고 30살에 제대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을 군대에 빼앗긴 아내도 몹시 힘들었을 것이다. 늦은 나이의 사병생활이 쉽지 않았는데다가, 죽을 고비도 세 번이나 넘기는 등 남 달리 힘들고 요란한 군대생활을 했다.
필자의 평생 직업은 의류수출무역업이었다. 76년부터 2006년까지 종사했으니 군 생활 제외하면 최소한 25년 동안 한 업종에서만 종사했다. 해외바이어들에게 세일즈를 했으니 수 백 번 해외출장을 다니며 달러를 벌어왔다. 필자가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필자도 소위 ‘수출입국과 산업화 역군’으로서 25년 동안 조국에 많은 달러를 벌어다 준 존재였다는 것이다. 고용창출에 기여했고 꼬박꼬박 각종 납세의 의무도 다한 기업인이었다. 또한 교통티켓 미납 한 장 없는 ‘클린 시민’이라는 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필자는 2003년 사랑의교회에 오기 전에, 같은 ‘예장합동측’ 황동노회(黃東老會) 소속 동원교회(東園敎會)에서 10년 동안 장로로 시무했다. 동원교회는 필자가 3-40대 인생의 황금 같은 시기에 20년 동안 몸 담았던 교회였으니, 사실상의 모교회(母敎會)라 할 수 있다. 나는 중고등부교사를 8년간 했고, 장로가 된 후 새가족 부장과 전도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영혼구원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다시피 했다. 지금 동원교회 교인들이 산 증인이요 그분들은 필자의 자랑이요 기쁨이다.
중소교회 장로들은 무척 바쁘다. 목사님들은 월요일이면 쉬는 날이지만, 장로들은 쉬는 날이 없다. 주일 새벽에 교회에 와서 캄캄할 때 집에 돌아가면, 월요일부터는 또 직장과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며 한 주가 지난다. 그래서 필자는 골프장 문 앞에도 가본 적이 없다. 교회와 직장과 가정에 충실하려면 골프 칠 시간이 어디 있는가? 그런 점에서 골프를 좋아한다는 목사님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든 중, 2000년대 초에 당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전임목사님의 사임과 후임목사님의 청빙 이란 큰 두 가지 대사(大事)를 앞장서서 치르면서 영적으로 완전히 탈진(脫盡)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장로로서의 명예를 지키는 것보다, 주님과의 관계 회복 곧 영적 회복이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힘든 결단을 내렸다. 목사님과 동료장로님들과 많은 교우들의 간곡한 만류가 있었으나 결국 정든 교회를 떠나왔다. 그 후 6개월 동안 이 교회 저 교회 헤매다가 결국 제자훈련으로 유명했던 사랑의교회로 오게 된 것이다.
필자가 사랑의교회 온 이후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받고 순장으로 일 년 섬겼다. 아내와 함께 사랑부 교사로도 일 년 섬겼다. 세계선교부 바나바기도회에도3년 동안 참여했다. 이 훈련과 봉사의 과정을 통해 필자가 늘 기도했던 제목은, “후반인생이 주님께 온전히 열납(悅納)될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2006년 여름, 손 때가 묻고 눈물과 땀이 서렸던 정든 사업체를 정리함으로써 인생의 한 획(劃)을 긋게 되었고, 그 후 1년 반 동안 아내와 함께 각종 선교훈련을 받았다.
그 후 드디어 2008년 4월, 필자 나이 만 55세에 캄보디아로 왔다. 선교단체는 Hischild란 곳인데 각국에서 온 10여 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팀사역을 하고 있다. 그 중 필자 부부가 맡은 사역은 남자 중고학생 및 대학생들을 돌보며 그들을 제자로 양육하는 ‘학사(學舍) 선교사역’이다. 지금 우리 부부는 24명 학생들의 아버지요 어머니다. 내년 이 맘 때가 되면 30명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아들들을 두고 떠나는 것은 현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앞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자. 혹자(或者)는 “선교사가 얼마나 한가하면 (게으르게 사역을 하면) 저렇게 글이나 쓰고 있냐”고 말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그런 말 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부지런하고 자신 있으면 직접 나와서 선교해 보라고 말이다. 이 곳에서는 오래 전부터 장기로 사역할 선교사들을 찾고 있으니 꼭 자원해 주기 바란다. 게으른 선교사는 들어 가고 부지런한 선교사들이 나와야 할 것이다.
필자가 부지런한 선교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게으른 선교사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은 기도후원자들이 더 잘 아실 것이다.여기 동료선교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더 확실할 것이다. 사실 금년 한해는 필자의 안식년(安息年)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선교지의 사역 공백(空白)을 염려해서 석 달 반만 쉬고 돌아왔다. 일 년을 다 쉴 걸, 괜히 잘 난 척 했나 보다. 선교사들에 대해서 자기들이 부리는 종(從)인양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교사 생활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님은 와서 지내봐야 안다. 와서 일해 보라!
또 다른 혹자는, “선교사가 하라는 선교나 할 것이지 주제넘게 교회 일에 관여하느냐”고 나무랐다고 한다.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내 집에 불이 났는데 보내주는 후원금만 챙기면서, ‘불 난 내 집’은 멀리서 구경이나 하라는 것인가? 파송교회여 묻는다! 당신들은 선교사들을 전부 그러한 무뇌인(無腦人)들로, 비양심적인 사람들로, 비겁한 자들로 키웠는가?
조국이 없는 백성이 있을 수 없음 같이, 파송교회가 없는 선교사가 있을 수 없다. 파송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지 담임목사가 아니다. 교회가 기침하면 선교사는 감기가 든다. 교회가 병들었는데 어떻게 한 몸의 지체라고 하며 무관심하게 지내라는 것인가? 교회가 세속화되면 선교사가 세속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어쨌든 교회를 살리려는 안타까움에서, 특히 장로님들에게 읍소(泣訴)를 하기 위해 실명을 밝히고 글을 썼는데, 그 성적표가 너무 혹독하다. 장로님들의 반응은 ‘제로 퍼센트’에 가깝고 세계선교부의 반응은 ‘백 퍼센트’다. 필자에게 아직 공식적 통보는 없으나 최근 사랑의교회 세계선교협의회에서 필자의 선교사 자격을 취소하고 후원중단을 결정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각오는 했었지만 막상 당하니 착잡한 심정이다. 그들이 불쌍하다. 선교사 죽이기에 앞장선 그 인생들이 불쌍하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어린 양’(羊)들을 두고 떠나진 않을 것이다. 자비량(自備糧) 하더라도 최소한 앞으로 4년,아이들과 한 약속은 지킬 것이다. 어쨌든 겪지 않았어도 좋았을 일을 겪고 있으니 불행이란 것이다. 누구 때문인지는 원망하지 않겠다. 감사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도리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질 수 있어서 영광이다.
바. 맺는말
이상으로 <프롤로그>를 마친다. 앞으로 올릴 글들은 부족하지만 필자가 우리 교회를 위한 ‘마지막 봉사’라는 심정으로 진액을 쏟으며 쓴 글이다. 아무쪼록 제대로 읽혀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필자의 제안이 ‘받아들여지고 아니고’의 차원을 떠나, 최초 제안서에 대한 ‘충분한 보충설명’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향후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결과적으로 필자의 제안서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폐기되게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해 주실 줄로 믿는다.(끝)
첫댓글 귀한 글 다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분립을 선동하기보다는 교회를 새로시작하심이 어떠실지요? 검찰고발을 통해 법적판단을 받아 교회갱신의 단초를 마련해보고자 했던 소수의 분들이 이를 실행했듯이 교회분립을 원하신다면, 분립을 원하는 분들이 소수라도 모여 시작하면 될 일입니다. 지금은 뭐라해도 전쟁중입니다. 전쟁중에 전장에서 맘을 돌려 하나둘씩 돌아갈 수는 있겠으나 전체가 회군을 하자고 하는 것은 아군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식으로 영적권위를 내세우지 마시고, 상식수준에서 먼저 생각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선교사님의 제안을 교회분립선동으로 이해했다면 다시 한번 글을 꼼꼼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선교사님의 제안내용이 전체가 회군하자는 것이 아니고, 투트랙으로 서로 협력하면서 싸우자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종려나무 님의 제안 지난 번에 하셨었구요 투트랙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지금으로선 오목을 잡지 않고 두 개를 병립할 수 없습니다 뉴구든 그렇게 하실 수 있으면
먼저 시작해보십시요 본인이 뜻맞는 분과 함께요
갱신위와는 관계없이 본인이 직접 시험해보십시요
교회 회복과 함께 오목 잡는 것도 동시에 해보십시요
갱신 그룹은 이런 모양이든 저런 모양이든 오목 입장에서 보면 다 불법이고 적인데
투트랙으로 이것도 저것도 다 망가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분립, 새교회 이런 표현까지 쓰시면서 글 쓰신 것은 선교사님 답지 않습니다
댓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이미 사라져버렸네요...Good bye를 하시지 않았기에 글이 올라오실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얼마나 많은 묵상을 하셨을런지요... ㅡ우리 모두는 돈 받고 돈때문에 일하는 삯군 목사도 아닐뿐더러, 어쨋든 프로가 아니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던 교회와 목사를 상대로 난생 처음 당하는 일로써 여러 생각과 의견이 나오며 이에 따른 얼마간의 갈등과 마찰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다양한 의견을 테이블위에 올려놓고 모자라는 사람들끼리 함께 기도하고 고뇌하면서 걸음을 뗀다면... 주님께서 앞서 인도하시며 주님의 뜻(선)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올 겨울 남이섬 풍경.
어느해 겨울 남이섬.
Merry Christmas!!!
안녕하세요.글을 읽어보니 선교사님께서 저보다 몇년 선배이시네요. 평소에 선교사님의 수고와 애통한 마음을 이해하고 존경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 생각입니다) 지금은 치열한 영적 전쟁이 치러지고 있는 중입니다. 분리와 분립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교회 전체를 놓고 ,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이, 마치 다윗이 물맷돌 몇개로 거대한 골리앗을 향해 싸우듯이, 권력을 쥐고있는 거짓세력을 대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선교사님을 위해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장로님!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질문드리고 싶은 것 있습니다.
원트랙 투트랙 다 좋으신 말씀인데
분리 ,분립, 오목사사임...
이 셋 중,
장로님께서 생각하시는 제1목표는 무엇인지요?
종려나무님, 님의 선교사역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님의 글을 다시 볼 수 있어 기쁩니다. 의견의 일치 여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서로의 의견을 개진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님의 의견에 100%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나 앞으로 님께서 제시할 의견을 기대하고, 필요하다면 댓글로써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적합한지를 생각해보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강건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내 조카도 베트남에서 의료선교를 하고 있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샬롬~
앞으로 올려질 글들이 기대됩니다.
사역반 동지였지만 이렇게까지는 세세하게 알지 못했던 선교사님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또 앞으로 제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한 가슴으로 와닿는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목 복귀 이후 영적으로 피폐해지기 시작하다 서초센터 입당 후에는 완전히 넉다운되었습니다. 아내는 서초센터에는 발걸음을 완전 끊었구요. 완전방전된듯한 영적에너지를 리차지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급선의 일인듯합니다. 그래야 전의도 가다듬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캄보디아에서 전해주시는 선교사님의 기운을 받아 열심을 다하겠습니다.
선교사님, 메리 크리스마스 & 샬롬~
선교사님 괴로워하며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우리들을 위한 고견 너무나 고맙습니다. 갱신위와 함께 지혜를 모으면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힘내십시요!
선교사님의 의견에 개인적으로 동의합니다 건강한 교회 사랑의교회로 분립되어 그를 통해 한국의 대형 교회들의 변화와 개혁을 유발시키는 촉매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교인 수와 재정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싸움이 외부인들게는재산다툼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기에
선교사님의 제안은 명분과 우호적인 여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적극 검토하여 공론화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