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을 겸한 반상에다
전날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은 사월 첫째 일요일이다. 춘분과 곡우 사이 청명 절기였다. 지난겨울 소한 이후 혹심한 추위가 며칠 있었지만 따뜻한 날이 지속되었다. 봄이 오는 길목에 비가 잦아 예년보다 매화와 벚꽃이 일찍 피었다가 저물었다. 다른 들꽃들도 한꺼번에 피어나는 듯했다. 도심 도로변 느티나무 가로수는 연초록 잎이 돋아 싱그럽다. 사월 하순과 같은 계절감이다.
웃비가 개었다면 아침나절 산책이라도 나가 봄직했다만 그럴 여건이 못 되었다. 새벽녘 잠을 깨어 어제 빗속에 다녀온 산행기를 남겼다. 이어 시골 형님의 한문 문장과 한시를 워드로 입력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학에 조예 깊은 형님이 펜으로 써둔 문장과 시는 상당한 분량이었다. 문집으로 엮으려니 자료를 출판사로 바로 넘길 수 없어 한자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먼저 하고 있다.
창밖으로 기상 상황을 살펴보니 흐린 하늘에 가느다란 빗방울이 날렸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앞 베란다는 다른 아파트로 가려져 시야가 가려져도 뒤 베란다는 탁 트여 전망이 좋다. 강이나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은 아닐지라도 반송공원 숲이 가깝고 멀리 창원대 캠퍼스와 도청 뒤를 에워싼 정병산과 비음산 날개봉이 드러난다. 연두색 신록이 물드는 산자락은 운무가 걸쳐 운치를 더했다.
점심나절이 되자 비는 그쳤다. 점심 식후 같은 아파트단지 지기 차에 동승해 거제로 향했다. 전에는 도청 앞을 지난 25호 국도에서 창원터널을 지나 장유에서 굴암터널을 거쳐 용원으로 갔더랬다. 지난 주말부터 국도 2호선 진해터널이 개통되어 그곳으로 가려고 안민터널을 지났다. 석동에서 시루봉과 웅산 밑으로 뚫어 소사마을로 통하는 진해터널은 국도에서는 국내 최장 터널이었다.
진해 거리 벚나무는 꽃이 저문 가지마다 연초색 잎이 피었다. 석동에서 진해터널 입구로 향하니 불모산에서 뻗쳐간 웅산 시루봉과 천자봉이 우뚝했다. 연두색이 번져가는 산자락과 바위봉우리로는 구름이 걸쳐져 있었다. 시원스레 뚫린 진해터널을 지니니 굴암터널에서 빠져나온 신항만으로 가는 민자 도로와 합류했다. 금방 용원에 닿으니 신항만 크레인과 컨테이너 물류기지가 드러났다.
가덕도로 건너는 눌차대교에는 거제 방향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눌차대교를 건너는 차량들이라고 모두 거가대교를 건너지는 않았다. 최근 신공항 건설 부지가 가덕도로 가닥이 잡히자 그곳이 어딘지 궁금해 차를 몰아 나선 이들이 늘어난 듯했다. 신공항 예정지는 가덕도 남서쪽 대항 일대인데 거가대교 침매터널 입구 천성마을 선착장은 주말마다 외지에서 온 차량이 북적댔다.
침매터널을 빠져나와 연륙 구간 중죽도와 저도를 지나니 거제 장목이었다. 외포 대금산 나들목에서 율천마을을 지나 고개를 넘었다. 갓길에는 지난주까지 대금산 진달래를 보려는 상춘객이 몰아온 차량들이 보였으나 꽃이 지자 산행객 발길은 끊어졌다. 나와 지기는 주중 와실에서 들 반주를 마련하기 위해 대금산 주막 공 씨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먼저 들린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삼남매를 성혼 출가시켜 적적한 할머니는 소일거리로 농주를 빚어 팔았다. 누룩은 금정산에서 택배로 부쳐 온다고 들었다. 우리처럼 알음알음으로 단골 고객이 더러 확보되어 있는 듯했다. 할머니는 봄이면 일거리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집 앞 다랑논은 혼자 손에 벼농사가 힘에 부쳐 고사리를 심어 팔았다. 올봄 꺾은 햇고사리를 삶으려고 추녀 밑에 쌓아둔 게 보였다.
둘은 알맞게 발효 숙성된 농주를 두 병씩 마련했다. 명동마을에서 연초댐을 둘러 다공리를 지나니 연초삼거리였다. 지기는 나를 연사에 내려주고 옥포로 되돌아갔다. 와실로 들어 환기를 시키고 보일러를 가동해 방바닥을 데웠다. 서안을 겸한 반상에다 저녁 식사보다 먼저 곡차 상을 차려 자작으로 잔을 비웠다. 안주는 주말 빗속에 여항산 미산령을 넘으면서 산채한 머위와 두릅 순이었다.21.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