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김태길 수필집 『웃는 갈대』에 있는 '정열·고독·운명'이라는 수필은 한 젊은이의 질문에 김태길 교수님이 회답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젊은이는 세상에는 서로 경계가 없는 진정한 친구도 없고, 불변하는 사랑도 없으므로 차라리 멋대로 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고 토로한다. 이에 김 교수님은 보통 사람은 현실에서 가질 수 있는 정도의 불완전한 사랑 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고, 변하는 것을 변하는 것으로서 바라보는 체념이 주어진 운명 속에 사는 유한자 인간에게 요구되는 지혜라고 조언한다.
소설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목사인 아버지의 집에서 온화한 광채, 맑음, 깨끗함 속에서 살다 하녀, 직공들을 통해 유령, 스캔들 같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대해 듣게 되고, 불량한 친구 크로머로 인해 빠져든 악의 세계 초입에서 자신을 구원해주는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태어나려는 새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하고, 그 새는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간다고 한다. 아브락사스는 빛과 어둠, 선과 악 등과 같은 모든 대립물들이 한 존재 안에 결합된 상징이다.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보면, 사람이 성숙해 가는 과정은 세상을 획일화하여 극단적으로 보는 단계에서 중간의 애매한 세계가 존재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선과 악의 구분도 이와 같은 면이 있다. 사람들은 어떤 행위에 대해 선하다 또는 악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선한 의도로 한 행위가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경우, 선과 악을 행위자의 의도로 판단하느냐, 행위로 판단하느냐, 결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하나의 행위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선과 악은 도덕적 가치평가이다. 그런데 니체는 도덕적 가치평가는 해석에 불과하며 해석 자체는 특정한 정신적 수준에 대한 징후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특정한 정신적 수준은 시간, 공간, 지위, 환경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선과 악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인간과 그 행위의 다면성을 받아들여 어떤 현상을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사회적으로는 아노미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과 악에 대한 또 다른 이해로 칸트는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도덕법칙으로 받아들일 만한 선한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따르기로 자발적으로 결단하는 것을 선의지라고 본다. 또한 이렇게 발견된 선이 최고의 선이 아닐 경우도 있으므로, 최고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선한 의지 자체인 신이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재해석해보면 칸트의 신은 자유로운 국민이 자발적 결단으로 투표를 통해 만든 헌법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 헌법기관인 국회가 만든 법률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법칙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자칫 전체주의적 사고나 법률만능주의에 빠질 수 있다.
선과 악은 어려운 주제다. 대학교 시절 일본의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라는 책을 읽으며 무엇이 선인가를 이해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선과 악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양하다. 따라서 선과 악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다면성을 이해하면서도,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선한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지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가 성숙해 가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