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22강)
28. 죤 칼빈의 생애와 사상
<생애>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노용에서 제랄드와 잔느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523년 14살 때 파리로 유학을 가서 1527년 까지 라틴어등을 수학하고 1528년에는 부친의 권유로 법과대학으로 전학을 하고 1531년에 부친이 죽자 인문주의자들로부터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배운다. 1533년부터 소그룹의 개신교도들과 사귀고 친구이자 파르보대학의 교수이며 학장인 니콜라스 콥의 부탁으로 연설문<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을 작성해 주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왕실의 고소를 받아 피난과 투옥까지 당하게 된다. 이때부터 칼빈은 개신교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
<사역> 도피생활중 바젤에 머무르면서 <기독교강요>를 썼다. 이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이탈리아로 가던 중 하룻밤을 제네바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하고 있는 파렐을 만나게 된다. 파렐은 복음적인 설교로 시민들의 신앙을 많이 개혁하긴 했으나 심각한 부도덕의 문제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판에 칼빈을 만남으로써 호기라 생각하고 칼빈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제네바에 정착하여 3년 동안을 사역을 하게 된다. 칼빈은 1536년 로잔에서 열린 카톨릭측과의 논쟁에 구경꾼으로 참석했다가 갑자기 토론자가 되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재침례회 신자들도 도시 밖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여기에서 <신앙의 교훈과 고백>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제네바시를 거룩한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아래 열렬한 복음주의 설교를 하다가 시의회와 충돌하게 되어 1538년에는 파렐과 함께 추방을 당하고 만다.
그는 바젤로 가려고 하였으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개혁운동을 하던 마틴 부처의 초대를 받고 그곳으로 망명하여 함께 개혁사역을 한다. 여기에서는 중학교와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이때 재침례교도인 과부 뷔어와 결혼을 한다. 이 때쯤 제네바는 큰 난관에 처하게 된다. 1539년 사돌레토라는 추기경은 제네바시민들에게 카톨릭으로 귀환할 것을 종용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 편지에 답장을 보낼만한 사람이 없자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에게 그 서한을 보내면서 답장을 해주기를 부탁하였다. 칼빈은 6일 동안에 걸쳐 답장을 보냈는데 그로 인해 1540년 1월에 다시 제네바로 가게 되었다.
다시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은 1564년 그가 죽을 때 까지 그곳에 머물며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그의 사역은 한마디로 신정정치를 하는 일이었다. 먼저 교회의 성직제도(목사.교사.장로.집사)를 수립하고 이들로 하여금 장로법원을 구성하여 시의회(200인으로 구성된 의회)를 지배하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화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시민들에게 가르쳤고, 엄격한 형벌로 시민의 경건생활을 통제하였다.
예를들면, <성자들의 생애>라는 책을 소유한 여인, 사제에게 삭발해준 이발사, 미사용 잔을 만들어준 금속공을 재판했으며, 주일예배 불참자는 장로법원에서 재판하였다. 특히 칼빈을 시 내정 간섭자라고 비난한 사람을 속옷차림으로 양초를 들고 시가를 행진하게 하는가 하면, 목사비방하는 글을 소지하고 다닌 사람을 색출하여 고문하고 참수했다. 한 70대 노인은 자기 생일날에 친구들을 불러 댄스파티를 열었다해서 처벌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왕 헨리2세가 개신교도들을 핍박하자 왕에게 불복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설과 그리스도의 선재설, 유아세례, 전적타락등을 반대하다가 화형에 처해졌으며 그것을 비난한 카스텔로는 재판을 받는 중에 죽었다. 볼세크라는 의사는 칼빈의 예정설에 이의를 제기하다가 추방되었다. 트로리에트 역시 예정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볼세크의 재판에 불만하다가 목사직에서 파직되었다.
이러한 강력하고 공포스러운 정치 덕분에 제네바는 겉으로는 평온했다.
1564년 5월 27일에 55세를 일기로 죽었다.
<사상>
1)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기반으로 한 신학이론을 세웠다.
2) <예정과 예지>로 인한 택정교리
3) <칼빈주의 5대강령> 1618년 칼빈주의자들이 개최한 돌트회의에서 확정됨. 일명 TULIP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