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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주님 손 안의 연장들인 우리>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든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가서 감동을 받았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도 저희의 3회인 재속 프란치스코회가 저희 1회가 가기 전에 이미 있었고,
그것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입에서 독백처럼 터져 나온 말이
‘아! 한국의 재속 프란치스코회가 민들레 홀씨처럼 이곳 미국에까지 퍼졌구나!’였습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할아버지의 얘깁니다.
베드로 할아버지는 생면부지 미국에서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당신이 시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젊고 훌륭한 형제 한 분을 찍었답니다.
그런데 젊은 그분은 그때까지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생각해본 적도 없기에 당연히 거절하였는데
어른의 간절하고도 끈질긴 요청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마침내 할아버지에게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배우고 젊은이들을 모아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저희들처럼 선교사로 그곳에 가신 것이 아닙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녀들을 따라 어쩌면 원치 않았는데도 낯선 곳에 가 살게 되셨을 겁니다.
그러나 저희처럼 적극적인 선교사는 아니어도
당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작지만 위대한 선교를 하신 겁니다.
오늘 사도행전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스테파노의 사건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사도들을 제외한 그리스도인들은 풍비박산, 곳곳으로 흩어집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보면 교회가 깨지고 흩어진 것이지만
예루살렘 밖을 중심으로 보면 교회가 흩어져 퍼져 나간 것입니다.
사도들은 굳건하게 예루살렘을 지키지만
박해가 두려워 피한 사람들은 곳곳에 디아스포라(Diaspora), 곧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를 건설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박해 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지요.
박해를 무릅쓰고 천주교를 전한 분들이 있는가 하면
박해를 피해 간 곳에 공소를 세워 교를 퍼트린 분들이 있었지요.
구약의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형들의 시기질투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로 끌려갔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 안에 있었듯이
예루살렘 교회도 인간적으로만 보면 박해로 망한 것이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교회가 확장되고 강건해진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듯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날뛰던 사울이 나중에 가장 적극적으로 이방 지역에 그리스도 공동체를 건설하는 선교사 바오로로 바뀐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바오로도 쓰시고, 박해를 피해 흩어진 사람들도 쓰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주님 손 안에 도구들, 연장들입니다.
지금 내게 벌어진 일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를 성장케 하실 뿐 아니라
당신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필요한 도구와 연장으로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 작은 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예전에 잘 알고 지냈던 청년 한 명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 청년이 저와 안 본 사이에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음을 알게 되었지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사실이 약간 서운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왜 내게 연락도 하지 않았니?”
그런데 이 청년은 제게 뜻밖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부님 너무 바쁘시잖아요.”
충격이었습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 줄로 알고 늘 제 자신을 채찍질을 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점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다가서기 힘든 가장 큰 단점이었지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사제는 바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니 바쁜 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가서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하루 24시간 내내 바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가하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다는 생각에 습관적으로 “바쁘다”라는 표현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바쁜 것이 아닌, 마음만 바빴음을 반성합니다.
주님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 잠을 잘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일정이었지요.
그런데도 때로는 소위 당시에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먹고 마시면서 놀기만 하는 것처럼 보여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당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런 한가한 모습을 보이셨던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편안히 다가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요?
이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미사 영성체를 하기 힘들다면 어떨까요?
미사를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할 수 있어서 주님 모시기가 쉽지 않다면 아마 사람들은 주님과 가까워지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직접 세우시고,
지금 현재 매일 봉헌되는 미사를 통해 손쉽게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이 생명의 양식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 역시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바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 한가하게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다가와 함께 할 수 있으며, 그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도 만날 수 있습니다.
여유로운 마음을 갖도록 노력합시다.
주님께서는 바쁘게 살아가며 여유 없이 혼자 힘들어하는 것보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오늘은 바쁘다는 말보다는 이런 말을 써 보면 어떨까요?
“저, 오늘 한가해요~”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 파워 오브 원 >
남미 태생이면서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육자인 하이머 에스카란테는
유명한 컴퓨터 회사에 다니면서도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월급을 포기해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가 부임한 가필드 고등학교는 남미계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로,
학생들은 공부를 포기했으며, 갱단에 가입을 했고, 보통의 선생님들은 그런 학생들이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이머는 실망과 좌절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공부가 싫어 도망치는 학생을 잡으려다 얼굴에 주먹을 맞아도 그는 피를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배워야 한다, 배워야 성공한다.
그래야 인간이 된다.”
이런 열정에 탄복한 아이들은 구구단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이머에게 방학 동안 고등수학을 배웠고,
마침내 전국 고등학교의 2%만 지원할 수 있는 고등수학 시험에서 18명 전원이 합격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위원회에서 남미계 학교라는 이유로 부정행위를 했을 것이라며 합격을 모두 취소했습니다.
아이들이 상처받을 것을 우려해 하이머는 재시험을 요청했고
결국 더 어려운 문제와 철저한 감독 하에 재시험을 허락받았습니다.
결과는 다시 전원 합격으로 전국에 대서특필되며 하이머는 미라클 메이커로 불렸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이머의 노력으로 가필드 학교는 18명의 합격자를 배출한 이래로 꾸준히 그 수가 늘었고
구구단도 못 외우는 문제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이제는 명문대 합격자를 꾸준히 배출하는 명문고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누군가 피를 흘릴 준비가 된 한 사람을 통해
그 피의 뜨거움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초대교회의 박해도 바로 성령께서 스테파노에게 임하시어 사람들이 그에게 덤벼들게 만드셨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우리나라 박해도 바로 제사 지내기를 거부한 윤지충 바오로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세상과 타협하고 있었지만
성령께서는 윤 바오로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덕분에 우리나라에도 박해가 100여년에 걸쳐 일어났고 2만여 명에 달하는 순교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덕에 지금은 한 교구에서 일 년에 2만여 명 이상씩 세례를 받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보스턴에 가면 존 하버드가 1636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세운 하버드 대학이 있습니다.
이 대학은 한 사람의 확신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은 돈 700파운드와 책 300권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세운 지 1년 만에 작고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의 꿈과 뜻이 계속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이 하버드 대학은 지금 지도자들을 양성해내고 미국의 대통령, 노벨상 수상자들을 무수히 배출했습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을 택하셔서 그를 성령의 불로 사르고 그 불이 점점 더 옆으로 퍼져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누군가 기꺼이 성령의 불쏘시개가 되어 줄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순교의 길로 가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끊임없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를 제물로 제단에서 살라 바쳐 그 향기가 온 땅에 퍼지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불로 살라 바쳐지는 향기로운 제물인 것입니다.
가장 두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성령께서 우리를 세상에 불을 지를 불쏘시개로 선택하여 주시기를 조심스럽게 청해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내가 불타야만 옆에 있던 미지근한 사람들도 타오르게 됩니다.
모두가 미지근하기만 하다면 그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오늘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저 순종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전적인 자기 희생의 삶,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 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계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 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 가롤로 보르메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무엇을 바라면서 믿고 있는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아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들이 안 믿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말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과 다른 것을 바라기 때문에 안 믿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잘 살기만을 바라는 사람은 안 믿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은 뽑으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나에게 오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라는 말은
"모두 자동적으로 나에게 오게 된다."가 아니라, "모두 나에게 와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도 예수님이 아닌 다른 구세주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구세주는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루카 15,4).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떠나지만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 예수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은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는
"내 뜻은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도 잃지 않고' 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배반자 유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바치신 기도에도
유다를 잃었다는 것이 언급되어 있습니다(요한 17,12).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잃으신 것이 아니라 유다가 떠난 것입니다.
돌아올 기회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는 '잃은 양'이었지만,
그 자신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잃은 양'이 아니라 '목자를 떠난 양'이 되었고,
얻을 수도 있었던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거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내려주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가 됩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지 세속적인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이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와 신앙을 통해서 무엇을 얻기를 바라는 것인지...)
신앙을 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으로만 그치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지 않는다면
목적지를 잊어버린 나그네가 될 뿐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청하는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면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그 이상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잘 사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영원히' 잘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내세,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을 바라지 않고, 또 공동체와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지금 당장 자기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 바라는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었다고 해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간에 희망이 이기적인 것으로 바뀐다면
그 신앙이 기복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바람'은,
그것이 간절한 것이라고 해도 거룩한 희망이 아니라 속된 욕망일 뿐입니다.)
우리는 기복신앙만 있는 종교를 사이비 종교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해도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사이비 종교에 속한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말없이 사랑하는 믿음>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라는 것은 그분 친히 ‘먹히셔야 할 빵’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당신 희생에 일치시켜 나가는 과정임을 뜻한다.
믿음이란?
관계 속에서, 사건과 일 속에서,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의 바램과 사랑을 ‘바라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그래서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사실 복음사가 요한의 언어에는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 ‘믿는다’는 있어도,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명사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제 구체적인 삶에 비추어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보도록 하자.
사람의 삶에서 어려움도 많지만 아름다운 것들도 많이 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될 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상대를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든, 부족하든, 가진 것이 있든 없든, 참으로 크나큰 고통 중에 있든,
참된 사랑이 있을 때에는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러울 것 없이 넉넉해진다.
몰아적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촉구하시는 믿음의 행위이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믿음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말씀과 성체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살아계시는 부활하신 그분을 바라보는 행위이며,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그분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그분은 당신을 보고 당신의 참 본질을 믿으라고 초대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이웃에게 등을 돌리며 사는 삶이란
곧 주님을 배척하는 것이며 이는 곧 죽음의 길이다.
우리도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이웃을 말없이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봉사하고 좋은 일을 하도록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꾸지람을 듣더라도 변명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오해받고 따돌림 당할 때 말없이 사랑하도록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부당하게 무시당할 때 말없이 참아 받도록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깊고 깊은 슬픔의 늪에서도 말없이 사랑하도록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상처받을 때 말없이 상처받으신 그분을 생각하도록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마음 저 밑바닥에 스며든 괴로움을 그분께 되돌려드리자.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에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빈손으로 그분께 달려가자.
아!
절망감이 밀려올 때, 고통이 극에 달할 때
늘 변하고 나약한 인간에게서 눈길을 거두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을 바라보도록 하자.
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그분만이 사랑 가득한 눈길로 우리를 늘 보고 계시기 때문에.
넋을 잃고 그분을 바라보자!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요, 죽으시고 부활하신 바로 그분이 생명의 빵이지 않는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한다.
“영원한 삼위일체이시여,
당신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내가 거기에서 더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또 더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더 찾고 싶은 갈망을 느낍니다.
영원한 삼위일체이시여,
당신은 당신의 끝없는 심연 속에서 영혼을 채워주실 때
영혼이 언제나 당신을 찾아 배고파하고 또 목말라하며
당신의 빛 안에서 빛이신 당신을 보는 것을 갈망하게끔 채워 주십니다.”
(하느님 섭리에 관한 대화집)
오늘 제1독서에서 박해로 흩어진 그리스도 신자들이 사방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듯이,
우리가 말없이 참아 받는 고통과 시련 또한 생명이요 사랑이신 그분을 더욱 밝히 드러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신앙인답게 말없이 더 깊이 사랑하도록 하자!
- 작은 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구원의 전문가 - 주 예수 그리스도>
오늘은 '구원의 전문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어제처럼 절실, 절박하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세월호 유가족의 절실하고 절박한 처지도 생각이 났습니다.
수도자는 기도에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데
정말 전문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일찍암치 여유있게 피정 지도하려고 수도원을 기분좋게 떠났는데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강남터미널에 와서 휴대폰의 전지를 갈아끼려고 가방을 열으니 '000' 정확한 비밀번호에도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애당초 비밀번호를 설정하면 복잡할 듯 하여 그대로 편하게 둔 번호인데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11:30분 경부터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다급하고 절박한 마음에 신세계 백화점에도 들려 십여 명 이상 많은 이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수도원에 다시 가서 수도형제들의 도움을 받을까 망설이던 중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두분의 안내자를 발견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주 젊은 청년(류희현)이 친절하게도 해결의 물꼬를 터주었습니다.
이리저리 갖은 노력을 하다 되지 않자 상품명(Elegance)을 휴대폰 인터넷을 통해 확인한 후
본사에 전화를 걸어 고속터미널 인근에 있는 뉴코아 아울렛 구관 1층 엘레강스가방 매장을 소개받았습니다.
휴대폰 인터넷 지도를 통해 알려 준 20분 거리의 장소를 가방을 끌고 찾아 갔습니다.
매장의 자매는 도저히 복잡하여 고칠 수 없어 경기 남양주시 진접면에 있는 공장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저의 눈길에 잠시 생각하던 중 옆 매장의 자매를 불렀습니다.
와서 보더니 들고 간 후 20분 정도 걸린 후 가방을 고쳐왔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분명 손대지 않은 비밀 번호 000인데 312로 바뀌었다는 것이며 다시 000으로 바꿔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선량하고 친절한, 좋은 인상의 자매였고, 감사의 표현으로 마침 넣고 갔던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라는 제 책을 선물했습니다.
과연 전문가였습니다.
돌팔이가 아닌 각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가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했습니다.
무려 불쌍하게 헤맨 뒤 3시간 만입니다.
하여 수도원의 원장수사에게 이런 사연도 전달하여 나눴습니다.
"가방 비밀번호가 고장나 열리지 않아 이리저리 헤매다
간신히 매장 찾아 수리하고 2시30분 전주행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오늘 처지가 아주 불쌍했습니다.
밥이고 뭐고 3시간 헤맸내요.
그리고 크게 웃었습니다."
이어 원장수사는 감사하게도 배꽃들 만개한 수도원 절경 사진 5장을 위로 차원차 휴대폰 텔레그램을 통해 보내왔습니다.
가방이 수리가 완료되니 완전히 구원된 느낌이었습니다.
급한 김에 열쇠 연결 고리를 철물점에 가서 쇠톱으로 자를 생각도 했고 뜯어낼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방은 영영 불구가 될 것입니다.
이래서 어느 분야든 진정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함을, 전문가 앞에서는 겸손해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의 수도사제로서 하느님에 대해, 또 신자들의 영신사정에 얼마나 전문가인가 하는 성찰도 했습니다.
이런 훌륭한 전문가가 상징하는 바
궁극의 '구원의 전문가'인 하느님의 아드님,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의 전문가 예수님의 최고의 처방이 복음의 서두 말씀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 닫힌 마음의 비밀번호를 알아서 활짝 여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만나 내 닫힌 문이 활짝 열릴 때
결코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충만한 구원의 삶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궁극의 '구원의 전문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1독서의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신바람나게 활약하는 필리포스가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하여 많은 사람에게 붙어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똑같은 부활하신 구원의 전문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치유하시고 큰 평화와 기쁨을 선사하십니다.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시편 66,1-2)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 1,8)
이것이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전망입니다.
이제 그 계획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 가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미약하나마 밖을 향한 선교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신자들이 처음부터 선교를 목적으로 유다와 사마리아로 떠나간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나간 것입니다.
박해받는 교회가 그 박해를 피하여 흩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박해가 다른 곳에 신앙과 복음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이지만
교회 역사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스테파노와 사울의 관계도 이와 유사합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를 전하는 어제 독서의 마지막 구절은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스테파노가 죽은 다음 사울은 더욱 맹렬하게 교회를 없애려 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굳이 스테파노의 순교 마지막에서 사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사울의 회심이 스테파노의 순교와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곧,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그의 죽음으로 바오로 사도를 낳았던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이들은 가치관은 물론, 소신마저 헌신짝처럼 집어던지는 반면,
참혹하지만 장렬하게 목숨 바치는 순교자들의 피는 한 알의 씨앗처럼 수천수만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생명을 낳는 죽음,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생명의 빵에 관한 계시를 전하는 오늘 복음은,
우리가 부활하시어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신비로운 일치를 이루어 참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 성립되는 새로운 관계란 아주 가깝고 친밀해서,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과 하나 된다는 표현 이외에 더 적합한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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