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띄우는 편지》
✤황혼의 로맨스는 반드시 성적 열망과 함께할 필요가 없다.
시월은 노년을 공경하는 달이요, 다가온 10월 2일은 ‘노인의 날’기념일이다. 우리나라가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100세 시대’를 살아 갈 노년들은 희비(喜悲)가 엇갈린다. 건강하고 넉넉한 분들 가운데는 황혼 이혼이나 사별(死別)로 말미암아, 외로움과 애정문제로 애를 태우는 분들이 많다. 대부분 황혼의 나이에 들면, 소녀들처럼 물소리와 솔바람 소리, 꽃향기와 새소리가 아름답게 느껴지면서 애틋한 사랑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을 나눌 상대가 없거나, 자녀들과의 갈등으로 경계하는 수가 많다. 그런데도 일반적으로 노년들은 사랑의 감정이 메말랐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사랑을 할 때는 말과 눈빛, 몸짓으로 하는 대화(對話)를 통해서 서로의 마음과 감정을 나누게 된다. 따라서 사랑의 행위는 육체적인 것만 아니라, 자기 내면의 마음과 정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육체적인 관계만 하면 그게 곧 사랑의 전부인양 잘 못 인식하고 있다. 사실 연인들의 가장 친밀한 관계는 성적인 것보다, 감정적인 정서의 교류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관계가 없이도, 진정한 로맨스(romance)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캐나다 오타와 대학의 앤서니 보개트 교수는, “섹스 없이도 상대방을 여전히 사랑하는 커플들이 많았다”는 연구 결과를 밝혔다.
곧, 그들은 그런 관계가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워, 서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육체적인 관계가 없이도,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플라토닉(Platonic)한 사랑’은 예부터 동서 성인(聖人)들이 만끽해 왔다. 그래서 오히려 육체적인 관계가 정신적인 사랑을 침범하여, ‘사랑의 본질’을 흐려지게 한다는 주장도 있다. 낭만주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는 ‘백조의 호수’에서, 한 왕자와 아름다운 아가씨로 변신한 백조(白鳥) 여인과의 순수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아름답게 그렸다. 또, 김연수의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했던 한 여인이, 어느 날 남자와 함께 제주도로 자취를 감춘다.
이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산지 석 달이 지나자, 본처가 아이를 데리고 찾아와 남편을 데리고 가버렸다. 그 뒤로 남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 거기서 죽었다고 한다. 세월은 흘러 노년이 된 그녀는 옛날 그들이 사랑하며 살았던, 제주도 함석지붕이 있는 집을 사들인다. 그녀는 그 집에 들어가 홀로 살면서, 옛날 그대와 함께 ‘함석지붕에 떨어지던 빗소리’를 들으며, 사랑하던 감정을 되새기며 여생을 마친다는 이야기다.(사진) 사람은 갔지만 아름답던 추억과 플라토닉한 사랑은, 그녀에게 어려운 삶을 지탱해 주고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대학자 이율곡(李栗谷)은 말년에 황해도 황주 감사로 와 있을 때다. 잠자리 시중을 드는 어린 기생 유지(柳枝)는 율곡을 존경하고 받들며 따랐다. 율곡은 용모가 예쁘고 행동이 민첩한 유지를 귀여워하면서, 글도 가르치고 놀기도 했지만 관계는 맺지 않았다. 율곡이 황주를 떠나고 나서, 오랜만에 다시 황주에 원접사(遠接使)로 다시 왔을 때도, 유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지는 율곡이 떠날 때 소사(蕭寺)에서 송별까지 해주었다. 그 후, 율곡이 벼슬에서 물러나 강촌(江村)으로 돌아오자, 유지가 그곳으로 찾아왔다.
그 때도 율곡은 그녀를 사랑했지만 결코 품지는 않았다. “타고난 그 자태 선녀처럼 아름다워 / 사귄지 십 년에 사연도 많았노라 / .../ 문을 닫는 건 인정 없는 일 / 같이 눕는 건 옳지 않은 일 / 촛불을 밝히고 밤새우는 것 / 너도 나도 목석은 아니건만 / 다만 몸이 약해 사양했을 뿐이로다”라고 타이르며, 하룻밤을 재워 보냈던 것이다. 율곡이 세상을 떠난 뒤에, 유지는 한양으로 올라와 삼년상을 입었다고 한다. 비록 육체적 관계야 맺지 않았을망정, 이미 마음을 바쳐 사모하던 유지야말로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었던 것은 분명하다.
정신 분석가 메나사에 따르면, “사랑과 성적 열망은 굳이 함께 할 필요가 없다. 만일 그 둘이 만난다면, 대부분의 경우 오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성불구자(性不具者)들도 사랑을 할 수 있듯이, 성이 위축된 황혼의 노년들도 보다 세련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어떻게 해서 노년들은 로맨스 커플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가끔은 노년들도 젊은이들에 못지 않게, 엉큼한 ‘비둘기족’들에게 피해를 보는 여자들이 있다. 그리고 매끈한 ‘꽃사슴’들에게 당하는 남자들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황혼의 로맨스를 건전하게 즐기는 노년들은, 서로의 흥미와 가치를 존중하며 사랑을 나눈다고 한다. 비용이나 일처리를 함께하고 서로 편안하고 신뢰를 쌓는다는 것이다. 서로가 새로운 취미나 관심사를 함께 하고, 문화행사나 공연을 즐긴다. 그리고 서로에게 마음을 담은 글을 보내며 애정을 표현하고,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여행을 하기도 한다. 그리니까 황혼의 로맨스는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망인 애욕(愛慾)보다, 이성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애정(愛情)을 주로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적 열망과 함께할 필요 없이, 플라토닉한 사랑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황혼에 찾아온 사랑/'늙은 부부 이야기'/https://youtu.be/GGMZrBZ0wFM
*율곡 이이의 마지막 여인/https://youtu.be/ulEMSrlhSNQ?t=2
*'황혼 로맨스'/노년 연애 新풍속도/https://youtu.be/jmDu9ChO23k?t=1
*황혼의 로맨스도 타이밍/https://youtu.be/eGih59qilv0
*황혼의 엘레지/최양숙(1964)/https://youtu.be/OiuWeshUTV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