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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모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대한 대로 된다
2024년 다해 12월 19일 목요일
복음: 루카 1,5-25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선지자가 그에게서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못합니다. 그것을 믿었다가 아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창피만 당할 것입니다. 그가 평생 청해온 것이면서 믿지 못하고 청했던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 시간이 지나 보면 알 것을 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천사가 즈카르야의 입을 막아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런 벌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믿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지 못하고 엘리사벳과 합방을 하지 않았다면 요한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부모의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자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차곡차곡 자녀의 미래를 설계한 부모는 자녀의 성공을 지켜보게 됩니다.
리처드 윌리엄스는 두 딸, 비너스와 세레나 윌리엄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들을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로 키우겠다는 확고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TV에서 한 테니스 선수가 우승 상금으로 4만 달러를 받는 것을 보고, 테니스의 잠재적 기회를 깨달았습니다. 흑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스포츠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는 딸들이 태어나기 2년 전부터 전혀 무지했던 테니스에 관심을 가지고 78페이지에 달하는 ‘챔피언 육성 계획서’를 작성하였습니다. 비디오 레슨과 도서를 통해 독학하며 딸들에게 직접 테니스를 가르쳤습니다. 특히, 그는 딸들을 벽에 세우고 빠른 속도로 공을 쳐 내며 방어 능력을 키우는 등 독특한 훈련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리처드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과 같다.”라는 신념 아래, 딸들의 훈련뿐만 아니라 정신적 성장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딸들은 아버지의 지도 아래 혹독한 훈련을 견뎌냈으며, 나중에는 아버지의 헌신과 비전에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세레나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항상 우리를 믿어주셨고, 그 믿음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리부터 믿고 계획하여 자녀를 키우면 자녀는 성공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야 테니스 재능을 깨닫고 시작한 이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된 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실험을 자녀에게 한 대표적인 심리학자가 루돌프 폴가르입니다. 헝가리의 심리학자 루돌프는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자녀들을 체스 천재로 만들 것이다.”라고 계획을 세웠고, 그 믿음에 따라 자녀들에게 체스를 가르쳤습니다. 첫째 수잔 폴가는 세계 4위까지 올랐고, 둘째 소피아 폴가는 여성 선수 1위, 셋째 주디트 폴가는 당시 최고의 체스 천재였던 바비 피셔를 꺾고 당당히 최연소 세계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서 자녀에게 어떤 삶을 바라는지 깨닫고 그렇게 준비하고 키우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훌륭한 자녀를 키워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 앞에서도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의 선택권을 박탈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빼앗긴 자녀는 부모에게 이용당한다 느끼기에 온전한 자존감으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은 모호합니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는 자녀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란 믿음은 가져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만 그렇게 창조하셨을까요? 우리 모두도 세례자 요한처럼 귀한 인간입니다. 다만 부모가 그렇게 믿어주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자녀가 어디까지 성장하느냐가 달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부모는 유대인들이 자녀가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목적이 있을 것이란 것은 믿어주지만, 그의 삶을 구체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찾아가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보면 될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긋나는 아우구스티노를 보면서 하느님은 그런 삶을 살라고 창조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노는 회개하고 하느님 앞에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분명 우리 자녀가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앞에 큰 인물이 되려고 창조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방향은 본인이 찾아가도록 유도하며 믿어주고 기도해주면 될 것입니다.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계획된 성취된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목적의 분명함 속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단순하게 말하면 이미 예언된 태어남과 가르침, 그리고 수난과 부활의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예언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자유가 없으셨기 때문일까요? 그 예언이 행복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매일의 행복을 약속하는 예언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예언을 따라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 예언에서 벗어날 때가 많습니다.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왜 우리는 행복의 길을 알면서도 매일 헤맬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뱀은 자꾸 다른 행복의 길이 있다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는 가끔 그 목소리를 듣고 불행을 선택합니다.
이와 관련된 좋은 영화는 ‘사랑의 블랙홀’입니다. 주인공 필 코너스는 똑같은 하루를 반복해서 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 단조로움을 혐오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황을 악용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 다른 사람들을 돕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자신을 개선하면서 — 만족을 느끼고 결국 끝없는 반복에서 벗어납니다.
법칙은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 행복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 법칙을 믿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합니다. 이젠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멈추고, 대신, “이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설명하는 좋은 실험이 있습니다. 쥐와 인간이 제비뽑기를 계속해서 하면 100% 인간이 쥐에게 지고 만다는 결과의 실험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A와 B, 두 개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 안에 1,000원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200번을 선택하여 얼마를 벌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입니다. 당첨 확률은 A가 75%, B가 25%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보통 100번 정도 하면 이런 확률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음 100번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쥐에게는 돈 대신 먹을 것을 줍니다.
이때 쥐는 보통 사람보다 1만 2,500원이나 더 땁니다. 인간은 A에서 나오지 않는 25%까지 B에서 찾으려고 하다가 A만 누르면 받을 수 있는 돈보다 작게 받습니다. 그러나 쥐는 100번을 넘어가면 이 패턴, 곧 법칙을 알고 믿기 때문에 그냥 쭉 A만 누르는 것입니다. 3살 아이에게 시켜도 항상 어른을 이깁니다. 아기들은 자기 생각이 별로 없기에 법칙에 순응합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자유는 우리 스스로 주어진 법칙보다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법칙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은 돈, 내일은 쾌락, 모레는 명예나 권력을 행복으로 여기고 추구해봅니다. 매번 우리가 해 왔던 많은 경험들을 무시하면서.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예언처럼 반복하면 매일 행복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예언을 성취하며 사셨던 이유는 그렇게 순수하게 행복의 법칙에 순종할 수 있을 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행복의 예언인 그리스도의 삶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 전삼용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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