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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5일(화)
* 시작 기도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주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여실히 폭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공공연히 말로는 하면서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영적 전투를 할 때 그 제물을 받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들의 신앙도 믿음도 아니고 오직 눈으로 확인하여 하나님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극히 이기심의 발로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은 아닌지요?
저 또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하나님을 믿으려 했던 자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시고 주의 의를 드러내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아도 하나님이시지만 설령 받지 않으셔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만홀히 여기는 우를 범치 않기 원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며 따르는 우리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호 11:12-12:14
제목 :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12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12:1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2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5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7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도다.
8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9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10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11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과연 그러하다. 그들은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
12 야곱이 아람의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사람을 섬기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첬고
13 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이스라엘이 한 선지자로 보호받았거늘
14 에브라임이 격노하게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의 주께서 그의 피로 그의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그의 수치를 그에게 돌리시리라.
* 나의 묵상
이스라엘이 어린 아기와 같은 연약한 존재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 어제 본문은 지적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렸을 때에 애굽에서 불러내셔서 사랑의 줄로 이끄시며 멍에를 풀어 주셨다.
그리고 계속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들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더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런 그들을 결코 진멸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모진 심판을 통해서라도 부르시며 결국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들의 집, 곧 아버지 집에 거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다.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나 공히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하지 못하고 거짓과 속임수로 일관하며 신실하신 하나님께 부정한 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11:12).
이스라엘의 양식은 동풍인 바람이다.
바람은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고 만다.
게다가 그들이 잡으려는 바람은 동풍으로써 이는 ‘시로코’라 불리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아주 뜨거운 바람인데 이는 모든 식물을 다 말라 죽이는 죽음의 바람이다.
이런 죽음의 바람인 시로코를 친구 삼아서 앗수르와 애굽에 대하여 이중 계약을 맺으며 위선적인 플레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앗수르와 계약을 맺으면서 또한 애굽에는 기름이라고 표현되는 조공을 바치고 있음을 보여준다(1).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위선적이고 악행을 일삼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책망하시고 그들을 심판하고자 하신다(2).
3~6절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려고 애쓰며 노력하는 야곱의 모습을 묘사한다.
야곱은 모태에 있을 때부터 형과 다투고 나올 때는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
그런데 이는 야곱의 경쟁적인 기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의 야망이나 기질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 25:22-23)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또한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겼고 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기보다 오히려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셨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 곧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와서 경쟁적으로 속이며 간사한 자의 면모를 보이던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싸워서 이겼다’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형 에서를 만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식솔들과 짐승들을 세 떼로 나누어 먼저 얍복강을 건네면서 형을 만나거든 예물로 주도록 하고, 자기는 혼자 남아 있을 때 한 천사와 강가에서 씨름을 하게 된다.
그는 천사와 씨름할 때 그의 허벅지 뼈가 위골되어 다리를 저는 불구자처럼 절뚝거리며 걸었다.
또한 강가에서 씨름을 하였기에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온 몸이 진흙탕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에서를 만나게 되었고 형 에서는 몰골이 거지꼴에다가 다리까지 절뚝거리는 동생 야곱을 보았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애잔하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죽이려고 왔던 야곱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끌어안고 보호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고 참으로 놀랍다.
완전히 거지꼴에 다리뼈까지 위골되어 볼썽사나운 야곱.
형 에서가 쫓아오면 도망가야 하는데 절뚝거리는 불구자가 되어 더 이상 도망갈 수도 없는 그런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런 상황을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지난 세월 속이며 거짓으로 살아왔던 야곱에게 심판하시지만 또한 그 심판이 긍휼로 변화되는 역사를 목도하게 하시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 집을 떠나온 야곱은 첫 날 밤을 루스라는 들판에서 유숙하게 된다.
밤에 꿈을 꾸는데 거기서 하늘과 땅을 서로 맞닿은 사닥다리와 함께 거기를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창 28:13-15)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뵙고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하면서 이름을 벧엘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자신이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면서 서원을 하는 것이다.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두 아내를 위하여 14년을 또한 삼촌을 위하여 6년을 섬기며 도합 2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지냈다.
그리고 삼촌을 떠나 하나님과 약속한 벧엘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그 약속을 잊고 세겜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거류하려 할 때 그의 딸 디나가 강간당하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다시 기억하고 벧엘로 올라가게 된다.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요 여호와는 야곱으로 하여금 기억해야 하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원문으로는 ‘에히예 아쉐르 에히예’로써 이는 로마자 표기로 야훼 또는 여호와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시해 주신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시해 주신 이름의 뜻은 ‘나는 ~이다’이며 이는 히브리어 ‘하야’이다.
하야는 1인칭 미완료형으로 항상 존재하심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 하야에는 3가지의 뜻이 담겨져 있다.
첫째는 존재로써 변함없이 항상 존재하시며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시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둘째는 생성으로써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을 붙이기도 하시며 또한 사건을 만들기도 하신다.
셋째는 활동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앉아서 관망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루기까지 함께하시면서 활동하실 것을 약속하는 이름이다.
이 하야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셨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노라고 말이다.
이와 같이 야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로 지금 패역하여 불순종하는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하나님을 바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속이는 자로 살아간다.
저울을 가지고 속여 파는 장사꾼들처럼 속이기를 좋아한다.
또한 자신들을 가리켜 부자라고 자부하면서 자기가 얻은 재물을 아무리 살펴봐도 거짓과 속임수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자랑한다.
이들은 마치 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가장 가난한 자들이라고 평가하셨다.
그들이 안약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는데 남들에게만 안약을 팔지 말고 그 안약으로 너희 눈에 넣어서 제발 눈을 영적으로 똑바로 뜰 것을 권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들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또한 이스라엘은 이 선지자를 통해서 보호를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격노케 함이 너무 극심하여 하늘을 찔렀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피가 그들 위에 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제 본문에서 이들이 이렇게 패역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멸의 진노로는 임하지 않으실 것이기에 이 심판 역시 그들이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은혜의 심판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곱의 자손임에도 어쩜 그렇게 야곱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지 그저 답답해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비록 야곱도 순간순간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정욕대로 살았지만, 하나님의 엄중하신 심판 앞에서 그는 즉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것처럼 그리 행동하는지 그저 화가 날 뿐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이 과연 누구의 모습인가?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닌가?
나 역시 지난 60여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패역하여 하나님을 떠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항상 주일을 지키면서 예배하고 가정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읽고 찬양도 제법 잘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사역도 곧잘 하여 칭찬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모른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능력을 인정받았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내적으로는 여전히 바알과 아세라 등 온갖 우상을 섬기는 이중적 삶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처럼 철저히 이중적인 삶을 살아왔다.
때로는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찬양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심지어 목사가 되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은 모른 채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도구로 이용하는 패역한 자였다.
하나님의 뜻이요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한 선지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물과 피를 쏟기까지 나를 죄에서 구원하셨으며 또한 나를 보호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은혜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주님을 떠나 외인처럼 행동하는 자가 된 것이다.
지금 나는 나의 죄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는 우상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끊는 것은 결코 결단이 아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다면 나는 더 이상 죄로 발걸음을 옮겨서는 안 된다.
이제 나는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죄로 나아가기보다 존재로 임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이끄시며 보호하시기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는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생명이신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어 영생을 누리는 자로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연약한 육신의 한계로 인하여 수시로 넘어지지만 파레시아로 다시 일어나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기에 주님의 도구로 온전히 쓰임받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주님의 입이 되고, 눈이 되며, 귀와 손발이 되어 오직 주님으로만 가득 채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안에 이처럼 죄의 속성이 많은 자가 또 있겠는지요?
나를 가득 메운 이 죄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진정 불구자로 살기를 원하나이다.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케 하시고 이제 나는 죽고 오직 주님으로만 살게 하여 주소서.
그토록 돌아오기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세상으로 더욱 멀어져 가는 이스라엘이 여기 있나이다.
나를 심판하소서.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여 주의 것으로 삼으소서.
주님만이 하실 수 있사오니 나를 그렇게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소서.
양면성을 가진 이중적인 삶을 청산하고 세상에서는 비참하고 부끄러울지라도 오직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로 나를 세우소서.
그리하여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의 그 크신 은혜 앞에서 잠잠히 주를 바라며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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