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형제회 소속 루이지 팔리치 신부
교황
알바니아서 신앙에 대한 증오로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사제 복자품 오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6월 20일 오전 교황청 시성부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 추기경의 예방을 받고 작은 형제회 소속 루이지 팔리치 신부와 교구 사제 존 가줄리 신부의 순교 그리고 수도자 3인과 재속회원 평신도 1인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는 교령을 공포하도록 승인했다.
Tiziana Campisi
지난 세기 알바니아에서 신앙에 대한 증오(in odium fidei)로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사제가 순교자로 복자품에 오를 예정이다. 작은 형제회 소속 루이지 팔리치 신부는 주민들에게 자행되는 학대 그리고 몬테네그로의 가톨릭 신자와 무슬림을 정교회로 강제 개종시키려는 운동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몬테네그로 군인들에 의해 체포, 구타,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또한 알바니아의 교구 사제 존 가줄리 신부는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에서 벗어난 국민 통합을 이루려는 계획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에 따라 허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20일 오전 교황청 시성부 장관 마르첼로 세메라로 추기경의 예방을 받고 순교한 두 신부를 복자품에 올리고, 작은 형제회 소속 이사야 콜룸브로 신부, 거룩한 성체 흠숭 시녀회 설립자 마리아 코스탄자 자울리 수녀, 크루사다 에반젤리카 재속회원 아센시온 사크라멘토 산체스 산체스, 예수의 딸 수녀회 소속 빈첸자 갈라르테 알론소 수녀 등 ‘하느님의 종’ 4명의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는 교령을 승인했다.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수도자
루이지 팔리치 신부는 1877년 2월 20일 코소보의 잔예보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실한 환경에서 자랐고,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형제 중 두 명도 하느님께 봉헌했다. 이탈리아의 코르테마조레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입회해 1907년 사제품을 받았다. 알바니아 선교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그는 1907년 자코바의 프란치스코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됐으며, 1912년에는 제1차 발칸전쟁 이후 세르비아의 동맹국 몬테네그로가 점령한 지역인 페야 본당의 협력자가 됐다. 몬테네그로 정부는 알바니아인들에게 매우 억압적인 정책을 펴면서 가톨릭 신자와 무슬림들을 정교회로 개종하도록 강요했다. 팔리치 신부는 두 종교를 옹호하며 그들의 신앙에 충실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자신이 직면한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사명에 대한 충실함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1913년 3월 4일, 몬테네그로 정부는 팔리치 신부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감옥에 끌려간 팔리치 신부는 구타와 고문을 당했고, 3월 7일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수도복이 벗겨지고 군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용감한 사제
존 가줄리 신부는 알바니아 자드리마의 스쿠타리, 다지치 인근의 작은 마을 출신이다. 1893년 3월 26일 태어난 그는 1919년 사제품을 받았다. 가줄리 신부는 그야데르, 푸카의 켈레즈, 코만 지역에서 본당 신부를 지내며 어디서나 도움과 격려를 주며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가톨릭 신앙 교육을 위해 본당 학교를 설립했지만,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의 공교육을 방해하는 활동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가줄리 신부는 도덕적, 종교적 차원에서 지역 주민들과 다른 교구 사제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정부 당국의 미움을 샀다. 아흐메트 조구 공화국 대통령이 수립한 정권의 지배를 받는 동안 많은 신부들이 알바니아를 떠났지만 가줄리 신부는 주민들 사이에 남았다. 1926년 12월 28일, 그는 체포돼 가짜 재판을 받고 허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결국 1927년 3월 5일 스쿠타리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존 가줄리 신부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의 발자취를 따라
1908년 2월 11일 이탈리아 폴리아니세에서 태어난 이사야 콜룸브로(세속명 니콜라 안토니오 마리아) 신부는 농부 집안 출신으로 고요하고 독실한 환경에서 자랐다. 작은 형제회에 입회해 1931년 7월 25일 사제품을 받고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신부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으며, 성인의 조언과 모범을 따랐다. 겸손한 사람이었던 콜룸브로 신부는 도움과 위로, 영적, 물적 위안을 구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것으로 유명했다. 수많은 신자들이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도와 축복을 청하기 위해 줄을 섰다. 지치지 않고 고해성사를 거행하는 것으로 존경을 받고 큰 사랑을 받은 그는 특히 1980년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이르피니아 주민과 함께했다. 콜룸브로 신부는 나이가 들면서 건강 문제가 악화돼 성사 집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2004년 7월 23일 선종했다. “환대의 수사”로 불린 그의 성덕에 대한 명성은 선종 후 더욱 널리 알려졌다. 콜룸브로 신부의 하루의 중심은 성체성사에 있었고, 이를 통해 일상의 어려움과 맞서고 다른 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청빈 정신을 열정적으로 실천했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작은 형제회 소속 이사야 콜룸브로 신부
기도로 보낸 삶
1886년 4월 17일 이탈리아 파엔자에서 태어난 마리아 코스탄자 자울리 수녀는 19세의 나이로 볼로냐의 “성심의 시녀 수녀회”에 입회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볼로냐에 있는 군병원의 간호사로 파견된 그녀는 1916년부터 잦은 병치레로 인해 1923년 이후 수년 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야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세상의 회심, 사제와 수도 성소, 교회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목표로 거룩한 성체를 끊임없이 흠숭하는 데 헌신하는 새로운 관상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려는 의지가 성숙해졌다. 수도회 설립에 필요한 인가를 받은 그녀는 1933년 8월 3일 첫 수도원 축복식이 열린 날 병상에서 일어났다. 거룩한 성체 흠숭 시녀회는 1935년 정식으로 인가됐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입회했다. 코스탄자 수녀는 볼로냐에 있는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4년 4월 28일 선종했다.
거룩한 성체 흠숭 시녀회 설립자 마리아 코스탄자 자울리 수녀
여성들 곁에 있는 여성
열 명의 자녀 중 일곱째인 아센시온 사크라멘토 산체스 산체스는 1911년 6월 15일 스페인 손세카의 부유하고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18세 무렵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전기를 읽은 후 그녀의 삶은 바뀌었다. 특히 성녀 데레사의 모범은 가톨릭 액션(가톨릭 운동)에 전념하면서 복음화 활동에 최선을 다하도록 이끌었다. 이후 종교적 증오가 확산되자 1937년 12월 8일 산탄데르에서 크루자다 에반젤리카라는 공동체를 설립한 도로테오 에르난데스 베라 신부를 알게 됐다. 아센시온은 베라 신부와 함께 교정 사도직을 수행하며 크루자다 에반젤리카의 영성을 계속 전파했다. 훗날 마드리드에서 나온 이후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1년 동안 돌보는 시설 운영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해당 시설의 책임자가 되어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을 가진 수백 명의 여성들을 환대했다. 아센시온은 종신서원 후 1946년 장티푸스에 걸려 8월 18일 마드리드에서 35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아낌없이 맞아들이고 봉사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신중하고 지혜롭고 분별 있게 이끌었던 리더십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한 질병을 그리스도인의 인내로 견뎌낸 “용서의 사도직”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덕행은 영웅적인 것으로 인정받았다.
크루사다 에반젤리카 재속회원 아센시온 사크라멘토 산체스 산체스
레오폴디나의 “산티냐 델 콜레지오”
스페인 사람 빈첸자 갈라르테 알론소 수녀는 1879년 1월 21일 부레바의 로하스에서 태어나 칸디다 마리아 데 헤수스가 살라망카에 설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부르고스의 예수의 딸들 수녀원에 입회했다. 1909년 첫 수도서원을 하고, 같은 해 5명의 동료 수녀들과 함께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해 브라질로 파견됐다. 숲 속 오지인 피레노폴리스에 정착하게 된 빈첸자 수녀는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며 사랑으로 헌신했다. 이렇게 현지 공동체의 환대를 받은 그녀는 1927년 미나스제라이스주의 레오폴디나로 떠났다. 그곳에서 부원장 역할을 수행했지만 수녀원 문지기와 제의실 담당도 맡았는데 불만을 표하지 않고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여 동료 수녀들을 놀라게 했다. 빈첸자 수녀는 자신의 역할을 통해 다양한 방문객들을 평온함과 열린 마음으로 환대해 그들의 사랑을 받았다. 낙상으로 인한 대퇴골 골절 후 1960년 7월 6일 선종할 때까지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다. 빈첸자 수녀 생전에 이미 많은 신자들이 그녀의 기도 덕분에 자신들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여겼으며, 수녀의 선종 소식을 전해들은 레오폴디나 전역에서는 ‘산티냐 데 콜레지오’로 존경을 받던 그녀를 위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예수의 딸 수녀회 소속 빈첸자 갈라르테 알론소 수녀
번역 이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