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는 현재 신비에 쌓인 정체 불명의 민족으로 여겨 지고 있으나, 일부 그 문헌에 남아있는 자료를 추적하면, 조선사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① 대월지 | 大月氏
중국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江) 유역에서 활약한 이란계(系) 또는 투르크계의 민족.
전국시대 말기에는 서몽골로부터 간쑤[甘肅] 서부, 황허강[黃河] 상류, 동(東)투르키스탄, 중가리아, 서(西)투르키스탄의 일부에까지 미치는 대세력이었다.
BC 3세기 말 흉노(匈奴)가 갑자기 일어나자 그 압박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무다르야강 북안에 중심을 두고 그 남쪽의 대하(大夏:드하라의 음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北半 드하레스탄을 가리키며, 당시 그리스인 식민왕국 박트리아의 중심지)를 지배하였다. 그것은 한(漢)나라가 대월지(大月氏)와 더불어 흉노를 협격(挾擊)하고자 하여 장건(張騫)을 파견한(BC 139) 직후의 일이었다. 대월지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대하 지방의 통치에 힘써 파미르·힌두쿠시의 남북에 토착제후(土着諸侯)인 다섯의 흡후(翕侯)를 두고 다스리게 하였다.
AD 1세기경 다섯 흡후의 하나인 귀상흡후(貴霜翕侯)가 대두하고, 이어서 대월지에 대신하였다(쿠샨왕조). 또한 황허강 상류 유역에는 대월지의 잔존세력이 남아 있어서 소월지(小月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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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주석: <漢書>서역전에 대하여 보면, ‘大夏 (박트리아),에 5흡후가 존재한다, 그들은 대월지에 복속한다’ 라고 나오는데, 한서<漢書>에는 대하와 월지를 분리하여 다른 종족으로 보고 있고, 5흡후翕侯가 박트리아 고유의 제도, 즉 토착제후라고 하고 있다. 반면에 <後漢書> 서역전에는 , 대월지가 이주해간 지역이 처음부터 대하였다. ‘遂遷于大夏’ 즉 5흡후가 대월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학계는 이 사실을 가지고 후한서의 저자가 대하의 흡후가 대월지라고 오해하고 있다고 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후한서>를 편찬할 때에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대월지가 서천한 사실이 애매해 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것은 <후한서>의 저자가 오해한 것이 아니고, 후대의 역사 조작 세력이 <한서>를 조작하여, 원래의 박트리아 지역이 대하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월지가 서천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즉 조선사를 동쪽으로 옮기었기 때문인 것이다. (월지를 현 감숙성에다가 옮겨 놓았다.)
즉 박트리아가 월지족의 바로 아래, 박트리아가=대하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술책인 것이다.(결국 같은 세력이 된다) 즉, 월지의 위치는 현 아프카니스탄에서 아무하를 넘어 발하슈호 일대에 까지 인것이다. 거기에 원래 있었던 월지족을 만리 가까이 돈황 감숙성 부근으로 심어놓은 것이 지금의 역사이다.
게다가 , 한헌석 칼럼에서 이미 밝혀진 대로 함흥=발흐를 현 만주로 이식시켰기 때문에 결국 월지는 그대로 현재의 박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있었고, (그것은 조선의 역사에서 부여가 된다.) 다만 흉노에게 그 북쪽 지역이 점령당하여, 세력이 축소되어 진 것 뿐이다. 따라서 월지, 즉 박트리아 대하, 는 원래의 아프카니스탄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어 있는 부여가 되는 것이며, 흉로는 그 서쪽과 서북지역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흉노의 중심 강역을 1만리 이상이나 옮겨 놓았다. 어떻게 이렇게 교묘한 언도 도단을 할 수 있는 것 인가.. !. 이 몇 개의 단어만 살짝 바꾸어도 역사가 180도로 달라지다니, 그 마귀같은 솜씨에,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흉노는 흑해 일대에서, 이란을 제외하고 , 아랄해 부근까지에 있었고, 그동쪽 ,동남쪽으로 대하=월지와 나란히 존재했던 것이다. 흉노는 하夏의 후예라고 하였으므로 하 = 대하이며, 사카, 스키타이, 키타이,카라키타이 족이다. 결국 흉노는 통사에서의 하왕조가 멸망하고, 박트리아에서 쫓겨난 것이며, 자기 고향을 되찾기 위해 월지와 자웅을 겨루게 되는 것이다. 그 싸움에서 월지가 패하고, 아랄해 동쪽지역을 일시적으로 상실하여, 중심이, 발흐쪽으로 남진한 것을 만리 동쪽으로 강역을 조작하여 마치 월지의 고향이 돈황, 감숙성인 것처럼 교묘하게 꾸며 놓은 것이다. 또한 흉노나 월지나 똑같은 하의 후예이므로, 그것은 내전 동족상잔 일뿐 서로 완전히 다른 세력간의 싸움이 아니다, 당시는 주조, 단군 조선의 조대명, 주왕조가 쇠퇴하는 시기였으므로, 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나서 싸우는 시대였다.
결국 월지는 서천한것이 아니라 남천을 하였고, 만여리를 이동한 것이 아니라, 단 몇 백리를 잃었을 뿐이다. 결국 지금의 박트리아지역이 원래 월지국이 있던 곳이고 같은 사람들을 뜻하며, 그것은 즉 곧 부여이다. 그곳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나온것이다.
첫댓글 대단합니다. 그리고 한발짝 더 나가 봅시다. 위 지도의 파르티아, 박트리아, 마우리아를 합했던 진제국의 진시황이BC 221년 나머지 스키타이 중국을 다 통일합니다. BC 206년 한고조 유방이 함양에 들어가 진을 멸합니다. BC 202년 항우를 패퇴시키고 한왕조를 성립시킵니다. 당시의 문명권 전체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이 한제국을 서안 이동으로 옮겨 조작하고, 흉노와 구려를 조작합니다. 이 세가지가 다 HAN(HUN) KOREA입니다. 이 시기의 이 문맥에서 흉노와 구려가 조작된 것입니다. 이 시기(BC 3C 말)의 월지도 조작됩니다. 장건이 BC138년 이 대하(사기 대원전)로 사신으로 옵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가설 삼아 공부해 볼만하지요. 감사
장건전은 거짓말이실합니다. 이글을 쓰면서 느꼈던 점은 25사는 다 조작이다, 처음부터 다시 써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월지를 설명하는 도입부에서 'BC 3세기' 흉노에 밀려 서천을 하였다는 기록으로 시작하십니다... 위에서는 그 유역을 아무다르여강이라고 설명을 하셨는데, 원본의 강이름도 동일한 지요?... 보통 흉노가 나온다면, 중앙아시아 서쪽지역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기본이 아닌지요?...
만약 모든 역사기록드링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구지, 이동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요?... 당시는 유목시기입니다. 상대적으로 이동이 손쉬우며, 강력한 세력에 의해 근거지가 쉽게 옮겨 질 수 있는 시기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명적인 접근은 유목에서 도시화로 변경된 고려이후의 접근에 타당성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특정의 주장이 절대 바뀌지 말아야 할 '신념'이 되었기에, 모든 사서의 기록이 조작으로 가는 것입니다. 조작이라는 말은 상당히 심각한 단어이고, 최후의 순간에 주장할 수 있는 민감한 사항입니다.
제가 인용한 부분은 현재의 통설입니다. 그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조선과 고려의 역사가 동쪽으로 이동된 역사라면, 대월지 국의 역사도 동쪽으로 이동된 역사일 수 있을음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장건과 당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약 동이와 대월지가 서로 상반의 관계에 있는 집단이라면, 상대적으로 이집단이 위치해야하는 곳은 동이의 반대쪽인 적어도 흑해와 그 왼쪽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부디! 정착을 하여 성을 쌓으려고 하지 마시고, 지속적으로 창의적, 창조적 접근을 하시어, 가려진 역사의 진실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면 합니다. 자칫하면, 대조연이 현재까지 이루어놓은 많은 발견이 하나의 잘못된 가설로 인해, 외면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이동을 합니다. 당시가 유목사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혼동하도록 역사를 조작했고, 스키타이를 야만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유목에서 문명을 받아들여 정착생활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입니다. 왜냐하면,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니까요. 그래서 조선이 신라이후 부터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여, 결국 조선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정착만 강조했으니까요. 그 이전은 유목과 , 정착을 잘 조합하여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 중심에 황제가 있습니다. 덕이 있는 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과유불급이라고, 넘쳐도 안되고, 모자라도 안됩니다. 유목민족만 강하고 좋다고 할 수 없고, 정착이 또 더 좋다
고려의 행정구역을 보더라도, 개경을 제외한 기타지역은 상설행정구역이 아니라, 안찰사가 파견되는 비정착적 행적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것이 조선으로 오면서, 정착적 제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삼국과 그전의 시대에는 유목의 시대입니다. 그 사이에 도시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속에서, 사회의 발전과정이, 우리들의 해석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라, 고려에서 조금씩 모순이 나타나고 조선에서 결정적으로 정착을 강조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라는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그래서 안주하는 것입니다. 물이 고이면 썩게 되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유목적 색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투력은 유목력이 강해야 극대화 되는 것이죠...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양자가 조화를 이룰 때에 그 것이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극의 원리이고, 새상의 이치라고 생각하기에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고, 끝까지 진실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 늦추지 말라는 그말 새겨 듣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목(고대삼국)->과도(고려)->정착(조선)->현대(디지털유목)으로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태극의 이론이 아닐까요?... 하나는 음과 양으로 구성되어있고, 또 그 음과 양 각각에도 음과 양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도의 태극의 법칙은 '유목'에서 -> '정착'을 거쳐->다시 '디지털 유목'으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동의 합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분께서 왜 혼란을 느끼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한헌석 칼럼을 저는 맹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동의 하는 것 뿐입니다. 다시 한번 보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찾기 시작했는데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시는 것은 저같은 무지랭이에게는 벅찬일입니다. 시간을 두고 계속하여 관심가져주시고, 비평하여 주십시오
문제는 '대조명'과 '고구려/당조'가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의 역사로 볼 수 있는 사건이 어디까지인가를 규명해야 본 내용이 풀려집니다... 이민족의 역사가 우리민족 역사의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민족은 없습니다. 현 중국대륙에 있는 역사도 조선의 역사입니다. 내것 니것이 없습니다. 과거에 오랑캐 였던 사람도 중원으로 들어가 황족이 되고 이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반복이 된 것 뿐입니다. 고려,조선이라는 개념의 상당히 광의의 개념입니다.
한, 중, 일을 다른 민족으로 분리시키는게 역사조작세력들의 목표였습니다. 이이제이 방법을 써서 아직까지도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중일 아니 아시아 유럽은 모두 같은 역사 틀 안에서 있는 것인데 이것을 현대국가와 민족개념을 도입하여 갈기 갈기 찢어 놓은 것입니다.
이민족은 존재합니다. 서구에서 그린 타타르의 그림에서도 여진복장의 서양인이 등장합니다...
아시아인이 이민족이라는 이야기 아닙니다.. 아시아인이 이민족성이 나타납니까?... 이민족이라는 것은 Western을 뜻합니다...
민족개념은 서양이 19세기에 만든 것입니다. 이민족이라기 보다 서로 황제가 되려 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