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부터 산책구간을 수명산까지 넓히기로 했다. 지난겨울 혹한을 핑계로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체중이 4kg이나 늘었다. 택시기사 5년 8개월 동안 체중 11kg 뺀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는데, 기를 쓰고라도 반드시 원상회복을 해야 한다. 매달 한두 번, 경조사를 비롯하여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두문불출한 건 사실 순전히 내 게으름 탓이었다. 기억이 미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참으로 게을렀다. 덕분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장래를 도모해야 할 젊은 시절을 허송해버려서 제대말년에 나도 가족들도 고단한 신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세돌은 바둑 다섯 판에 체중이 7kg이나 줄었다는데, 나는 결국 내 인생 어느 순간에도 그만큼 집중을 못했던 것이다. 임종의 순간 나는 내 불성실했던 젊은 시절을 후회하며 소리 내어 울게 될 터이다. 내 인생에 미안해서. 어쨌든 하루 7~8시간씩 책을 읽으며 겨우내 지성이나 살찌울까 기대했지만, 살이 찐 건 결국 아랫배뿐이었다.
봄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에 와 부딪힌다. 추위를 크게 타는 편은 아니라서 겨울을 썩 싫어하지는 않지만, 봄의 어귀에서 만나는 이 따스한 기운은 참으로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1주일 동안 1.5km쯤 되는 아파트단지 주위를 한 바퀴씩 돌면서 이미 이 익숙한 훈풍을 만끽한 터다. 영하 10℃를 훌쩍 넘는 날 아내 심부름으로 찬거리를 사러 길 건너 마트에 다녀올 때면, 추위보다 발걸음이 무거워 겨울을 실감하곤 했었다. 같은 거리를 걷는데도 봄은 역시 몸을 경쾌하게 해준다. 아파트 뒷길은 언제나 한적해서 걷기가 편하다. 길 건너 마곡들판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입주가 끝났지만, 이따금 아이들을 데리고 왕복 2차로 좁은 도로를 건너다니는 젊은 엄마 외에는 인적이 뜸하다.
유수지공원의 사각정에 잠시 쉬어갈까 했더니 내 또래의 남자가 앉아 있어 내처 걷기로 했다. 어린이놀이터를 거쳐 강서농수산물센터 둑길을 걸어가는 동안 땅에서는 아직 봄기운을 발견하지 못했다. 잔디는 솟을 생각도 않고, 나뭇가지에도 아직 새순이 돋아날 기미가 없다. 유수지 경계에 솟아 있는 상수리나무 잎은 진한 갈색으로 바싹 마른 채 낙엽져 내리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달려 있다. 아파트단지를 돌 때 동쪽 경계선의 대왕참나무 잎이 전부 그대로 달려 있는 걸 보면서, 곧 새잎이 돋을텐데 저 형님 낙엽들을 어떻게 하지 싶던 생각이 떠오른다. 잎이 돋아날 때까지 매일 대왕참나무를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겨울에는 틀어박혀 있느라고 시내의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살펴보지 못했다. 계절에 거역하여 한겨울에도 새파랗게 버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통해하곤 했었는데…

지난여름부터 가을까지 늘 공사 중이던 7단지 맞은편 요양병원은 그새 완공되어 층마다 실내등이 켜져 있다.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들이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병원, 그래서 그런지 드나드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저기도 상당한 재력가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이 든다니 나와는 상관없는 공간이다. 군복을 입은 청년 10여명이 병원을 둘러싼 채 더러는 앉아 있고 더러는 서 있다. 수명산중학교 앞 변전소 주변에도 탄창까지 장착한 총을 들고 한 무리의 군복 차림 청년들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걸로 보아 예비군들인 모양이다. 아마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 있다는 한미군사훈련의 일환이 아닌가 싶다. 팽팽한 남북 긴장상태가 이 외진 수명산 자락까지 뻗혀 있다.
산자락을 돌아갈까 하다가 봄내음이 상쾌하여 중턱길을 택했다. 가파른 고개를 20여 계단 올라가면 산허리를 따라 평탄한 산책로가 나 있다. 오른쪽 무릎관절이 삐걱거리면 중간에서 내려올 작정이었는데 다행히도 경미한 통증만 인다. 참 신기하다. 지난여름 재룡이 친구 덕분에 부석사를 다녀온 뒤부터, 지하철역 같은 데서도 일곱 계단만 올라가면 비명을 질러 나를 주저앉히곤 하던 오른쪽 무릎관절의 통증이 꾀병처럼 사라졌다. 그 이전에는 이 계단을 올라올 엄두도 못 내고 산자락만 돌아가곤 했었다. 이후 잠시 통증이 오는 듯하더니, 오늘 시험을 거뜬히 통과했다. 올봄 산책코스가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고관절에는 윤활유를 좀 쳐야할 듯 걸음이 뻑뻑하고 몸이 무겁다.
그새 팔각정에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여럿 펼쳐져 있다. 오랜만이라 구경 좀 해볼까 했지만 멀리서도 담배를 꼬나문 훈수꾼이 눈에 띄어 지나쳤다.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는 꼴을 지켜보기도 싫고 담배연기를 맡기는 더 싫어서다. 시간이 일러 그런지 테니스코트도 비어 있다. 수명산 줄기를 헐어 만든 어린이놀이터 벤치에 잠시 다리품을 쉬기로 했다. 숨이 차지 않아 쉬어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인적 없는 호젓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다. 모자와 마스크를 벗는 순간 토끼 한 마리가 산책로에서 놀이터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지난봄부터 가을까지 산책로 여기저기서 이따금씩 만난 참이라 무척 반갑다. 누가 기르는 토끼를 내놓은 듯 사람이 다가가도 여상스럽다. 오래지 않아 여중생 네 명이 과자를 먹고 음료수를 마시며 왁자지껄 다가오는 바람에 토끼도 숲속으로 몸을 숨겼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단을 내려서 골목길로 꺾어들기 직전, 빌라 뒤꼍에 심어놓은 백매화가 환하게 나를 맞는다. 수명산을 오르내린 지 9년째지만 여기 백매화가 피어 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벌들이 만개한 꽃 사이를 분주하게 드나들며 마치 겨우내 죽 그래왔던 듯이 익숙하게 꿀을 따고 있다. 35년 만이라는 혹한에도 생명은 이처럼 제각기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꽃송이에 코를 대니 진한 매향이 가슴 그득 밀려든다. 두향! 그 순간 왜 뜬금없이 470년 저쪽의 퇴계와 두향이 떠올랐을까? 하긴 신문이나 책에서 매화 사진을 볼 때마다 이따금 떠오르곤 했었다. 더욱이 지난여름 퇴계와 두향이 마지막 눈물의 작별을 하던 죽령고개 옛길을 오른 적도 있지 않던가. 아마 앞으로도 어디서든 매화를 만나면 두 분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떠올리게 될 터이다. 남녘의 지리산 자락에는 매화가 얼마나 장하게 피어 있을까?
첫댓글 봄내음을 한껏 들이마시며 걸었겠구마는...
내가 그 길을 걸었어도 꼭 그렇게 걸었겠네.
끝자락에 두향이 생각까지는 못따라 했겠지만...
봄 내음을 맡고 기지개를 켜셨네
주위를 둘러보며 체력도 열심히 기르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