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보'는 누군가에게 어떤 사실이나 정보를 알려준다는 의미다.
이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 이 단어 때문에 좀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지난 주말 밤에 내가 그랬다.
우리 가족은 한 달에 한 번씩 '사당역'에서 만나고 있다.
아주 오래된 우리들만의 '월례행사'였다.
작년 3월부터 아들의 초대로 그의 애인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규 멤버가 4명에서 5명으로 늘었다.
아들 여친은 작년 3월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가족 식사 모임'이나 '여행'에 빠진 적이 없었다.
드디어 지난 주말 밤.
사당역 식사모임에 딸이 새로운 멤버를 한 명 데리고 왔다.
자기 애인이었다.
그렇게 우리 멤버는 6명으로 늘었다.
딸과 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엄마, 아빠, 드디어 우리가 '완전체'가 되었네요"
"하하, 그렇구나"
6명 모두가 크게 웃었다.
과연 그랬다.
토요일 밤에 딸의 애인을 처음으로 보았다.
남자라는 것, ROTC 동기라는 것, 소령이라는 것 말고는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이름도, 사는 지역도 몰랐다.
딸에게 묻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서른세 살, 성인이 된 지 이미 십수 년이 지나버린 내 딸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어련히 알아서 잘 선택했을까 싶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딸이든, 아들이든 자녀들의 선택과 결정을 늘 믿고 신뢰했다.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일진대 얼마나 심사숙고를 했을 것이며 많은 고민을 했을까 싶었다.
안 봐도 훤했다.
그래서 굳이 묻지 않았다.
대학생 때 딸이 ROTC에 지원해 장교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에도, 아들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거나 회사에 취업할 때에도, 이미 결정이 난 뒤에 나는 뒤늦게 통보 받았다.
내가 애들을 키울 때 견지했던 자녀양육의 원칙 제1장은 늘 동일했다.
그것은 '선조치 후보고'였다.
애들이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어떤 분야든 많이 상의했고, 수시로 머리를 맞댔으며 의견을 상시적으로 주고 받았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후로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적용했다.
지들 스스로가 알아서 판단하고, 각자의 행동에 당당하게 책임지며 자신있게 살라고 당부한 뒤로는 인생에 대한 작은 조언조차도 거의 하지 않았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지 자녀들을 믿었고 사랑했으며 강하게 신뢰했기에, 성인이 된 이후론 각자의 인생을 스스로가 판단하여 실행하고 개척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또한 그렇게 한결같이 기도했다.
그래서 캠퍼스 라이프가 시작된 이후로, 딸과 아들이 각각 집을 떠나 홀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 자식간의 소통은 '선조치 후보고' 시스템으로 과감하게 변경했고 나부터 그대로 준수했다.
자녀들도 좋아했다.
나는 내 자녀들의 부모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입장을 차치하고서라도, 자녀들보다 인생을 먼저 산 인생의 선배로서 자녀들의 다양한 시추에이션에 참견하고 싶었다.
인지상정이었다.
먼저 살아보았고 경험했으니까 아무래도 해줄 얘기가 많을 터였다.
그리고 때론 답답한 심정에 애들의 행동거지에 훈수를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참고 인내했다.
내가 내 허벅지를 수도 없이 꼬집어 가며 기도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세웠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간섭하지 않았다.
오래 오래 기다려 주었다.
오히려 그게 더 힘들었지만 묵묵하게 지켜나갔다.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ROTC 52기로 임관 후 장교가 되었으며 대위로 복무하다 전역해 시험을 보고 6급 군무원이 되었다.
지금도 예비 장교들을 훈육하는 직종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아들도 해병대 6여단(백령도) 기습특공대를 전역한 뒤 대학 4학년 2학기 때 '롯데그룹'에 입사했다.
지금은 입사 8년 정도 되었는데 4년 전부터 같은 직장의 2살 연하 여성과 열애 중이다.
이제는 아들 커플도 양가의 부모들과 자주 식사를 하며 서로 친밀도와 신뢰를 쌓고 있는 중이다.
예쁘게 연애하는 모습이 귀엽고 생기발랄해 좋다.
지난 주말 밤의 첫 대면.
나는 딸과 딸의 애인에게 각각 한번씩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희들의 사랑과 결혼결심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판단이며 최종적인 선택이냐?"
"예, 그렇습니다"
딸도, 딸의 애인도 굵고 짧게 대답했다.
"결정과 선택엔 엄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느냐?"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두말하면 잔소리일 게 뻔했다.
"오케이, 좋아 좋아. 우리 모두 건배하자"
6명이 힘차게 브라보를 외쳤다.
소맥 한 잔을 비운 뒤 그에게 비로소 이름을 물어보았다.
'손창훈'이라고 했다.
그는 키가 큰 편이었다.
핸섬했고 진중했다.
시종일관 차분했으며 그의 눈빛은 신뢰를 머금고 있었다.
6명 모두에게 행복과 감사가 흐르는 주말 밤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술이 몇 순배 돌아갔다.
분위기도 좋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먼저 딸이 입을 열었다.
"아빠, 우리 가족의 '선조치 후보고' 스타일에 입각하여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좋지, 뭔데?"
"저희들 결혼 날자를 잡았어요"
"오잉? 네 남자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인데 벌써? 엄청 빠르구나. 언젠데?"
"금년 가을입니다. 시월 00일 이에요. 이 사람이 서른다섯이라 시댁 어르신들도 올해를 넘기기 전에 빨리 혼사를 치르는 게 좋겠다고 하셨고, 남친도 내년부턴 전방 훈련부대 근무가 유력하여 시간을 내기가 만만치 않을 듯해요. 그래서 저희들이 먼저 결정하여 날을 잡았습니다"
"요 녀석들 2년 간 비밀연애를 하면서도 각자의 상황에 맞게 준비할 건 다 해두었구나"
나와 아내는 사실 살짝 당황스럽긴 했지만 잘 했다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진심이었다.
잠시 후 아들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아부지, 저희들도 내년 3월 00일로 날을 잡아둔 상태입니다. 잠실에 여러 군데를 알아보았는데 식장에 자리가 전혀 없어요. 이날도 겨우겨우 잡은 거예요. 요즘 실정이 이렇습니다"
"그래 잘 했다. 분당 부모님께는 말씀드렸니?"
"예, 지난 주에 부모님과 함께 식사했는데 그 자리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두 분 다 좋아하셨어요. 특히 어머니께서요"
"그래, 너희들도 애썼고 모두 수고했다. 그리고 스스로 알아서 차근차근 잘 준비해 주니 고맙다. 금년 시월과 내년 삼월이라. 좋긴한데 갑자기 마음이 엄청 분주해 지는 느낌이다. 하하하"
진정으로 즐겁고 유쾌했다.
식사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단골 카페로 이동했다.
커피를 마시며 다시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딸과 아들이 그랬다.
"신혼집, 예물, 가구와 가전, 살림준비, 신혼여행, 결혼식 컨셉과 절차, 비용 등 모든 문제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알아서 할 테니 부모님은 마음속으로 응원하시면서 지켜보고 계시라"고 했다.
얼마 전에 혼사를 치른 친구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고, 금년 9월에 조카를 시집보내는 처제도 우리에게 요즘 애들의 일처리 방식이 이렇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내가 막상 혼사의 절차와 과정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현실이 이렇게나 많이 변했나 싶었다.
"결혼자금도 부모님께서 약간 지원해 주시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으니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했다.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모아둔 자금이 있다"고 했다.
우리 부부도 어느새 환갑이 되었고, 내 자녀들도 서른셋, 서른둘이 되었으니 세월이 엄청나게 흘렀음을, 그리고 세상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음을 실감했다.
우리가 결혼했던 1990년도를 생각해 보았다.
그땐 양가 부모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갔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했던 건 사회자를 선정하는 것 하나 뿐이었다.
신혼여행지는 당근 제주도였고.
딸은 신혼여행을 카리브해의 '칸쿤'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면에서 격세지감이 들었다.
아무튼 시종일관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고 밤 10시가 넘어 사당역에서 헤어졌다.
다음달 가족 모임은 '한라산 등정'이라 제주에서 2박3일 간 6명 모두가 재회하기로 약속했다.
지하철로 돌아오는 길.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각자의 인생을 행복하게 엮어가렴. 늘 선조치 후보고다. 누구에게나 한번밖에 없는 인생길. 열정적으로 살아라. 오래 전에 이미 성인이 되었고, 매사에 스스로의 삶을 주도적으로 잘 개척해 나가는 너희들에게 부모는 기도 말고 더 이상 무슨 조언을 해줄 수 있겠니?"
두 커플의 앞길에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늘 충만하기를 기도했다.
이 지면을 빌려, 인생의 청춘기를 열심히 걷고 있는 삼십대 초,중반 네 명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브라보.
"아,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 두 분도 자식들 혼사를 준비하실 때 이런 느낌이셨을까?"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가을과 봄
좋은 계절로 날을 잡았네요. ㅎㅎ
미리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