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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2)
고전 13:1-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설 교 >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11 / 배 혁목사
오늘날,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성숙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모든 것이 미숙했던 어린아이와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수 많은 국민들을 책임지는 대통령에게도, 사회의 발전을 주도해 나가는 기업인에게도,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에게도, 자신 조차도 책임질 수 없었던 어린 철부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아이의 모습을 벗고, 장성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시간이 지나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는 철원에서 목회할 때, 두 주에 한번씩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요양원에 방문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고, 함께 놀아주며 봉사를 했었습니다.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주로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신체적으로도 장애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대부분 저보다도 연세가 많으신 어른 분들이었는데도, 말하는 것이 서툴렀고, 스스로 생활하기도 힘들어 하셨습니다. 어른이지만 기저기를 차시고 다니는 분도 계셨습니다. 나이는 한창 어른이지만, 몸과 정신이 제대로 성장하지 않아서 어린아이와 같이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생활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믿음생활을 할 때도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미성숙의 단계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의 성장은 육신의 살아온 나이와 상관없는 영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다른 이들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하게 되지만, 나중에는 다른 신앙인들의 성장을 위해서 살피고 돌봐주는 믿음으로 성숙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을 깨달아서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사도바울은 자신도 이러한 믿음의 성장단계를 거쳐왔음을 말합니다. 먼저 사도바울은 자신도 어린아이와 같은 때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 어린아이 때의 일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모습이 신앙적으로 미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보다 장성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사도바울과 같이 버려야 할 어린아이와 같은 일은 어떠한 일들이 있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사도바울은 자신이 어렸을 때의 일을 기억할 때에, 가장 먼저 기억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이 말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말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 1-2절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신령한 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그리고 또한 예언하는 신령한 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참 성숙하고 장성한 자의 말을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듣기에 신령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말이 아니라, 한낱 소리 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소음과 같은 말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중에서 하나가 은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영적인 은사를 받는 이들이 많아 졌습니다.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합니다. 말들은 잘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교만해 지게 되었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더 귀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교회 안에서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신령한 말을 하지 못할 때에는 그러한 일이 없었는데, 도리어 성령의 은사를 받은 후에 교회가 시끄러워진 것입니다.
사랑없이 자신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려고, 시기하고 다투는 말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요, 사랑의 사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에게도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빨리 가기 위해서는 두 지역 사이에 있는 사마리아 땅을 지나서 가면 됩니다. 그런데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 상종하지 못할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지 않고, 그 땅을 피해 멀리 돌아서 오고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지역을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요한의 말은 사랑이 전혀 없는 무자비한 말입니다.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불을 내려서 그들을 태워 멸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말에 예수님은 꾸짖으시면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십니다. 그러니 “보아너게”라는 별명은, 요한이 어린아이와 같은 말을 할 때에 가졌던 별명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장성한 후에는 그러한 말을 버렸습니다. 도리어 사도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사랑할 것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장성한 자의 말은 사랑의 말인 것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방언과 예언과 천사의 말들이 성숙한 자의 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장성한 자의 말은 사랑을 가지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사정을 살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유익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장성한 자의 말이 됩니다.
2. 또한 사도바울이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버린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깨닫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고 천진난만한데 비해, 어떤 것을 깨닫는 이해력은 어른만 못합니다. 그래서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존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때로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어린아이가 청년으로 성숙해 지는 과정에서 사춘기를 겪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탈선을 하는 청소년들이 간혹 있습니다. 부모님은 자녀가 혹시나 잘못 될까 봐 사랑하는 마음으로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녀가 서운할 정도로 생활을 규제하기도 합니다. 매를 들기도 합니다. 자녀들 중에는 그것이 못 마땅하고 부모님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기에, 부모에게 반항도 하고, 가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그것이 부모님의 사랑이었음을 비로서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가지고, 피부에 느껴지는 경험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과 선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메리 스티븐슨 이라는 사람이 쓴, ‘모래위의 발자국’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위로는 내 인생의 여러 순간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각 장면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나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나와 주님에게서 사라지려는 순간, 나는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들을 뒤돌아 보았습니다. 내 인생의 행로에서 여러 번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남겨져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내가 매우 슬프고 괴로웠을 때 일어났따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너무나 괴로웠던 나는 주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너는 항상 나를 따를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내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을 돌이켜 보니 오직 나의 발자국만 남겨져 있더군요. 어느 때보다도 주님이 필요했던 바로 그 때 어찌하여 주님을 내 곁을 떠나셨는지 나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어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는 너를 누구보다 사랑한단다. 네가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나는 한번도 네 곁을 떠난 적이 없었느니라. 네가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볼 수 없었던 바로 그 때는 내가 너를 안고 가던 때였느니라. 모래 위에 새겨진 그 발자국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란다."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은 모래 위에 난 발자국 하나를 보고서, 주님께서 나를 떠나셨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며 섭섭해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하게 되면 그 발자국 하나를 보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감사해 하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내가 눈에 보는 것이나 느끼는 감정을 가지고 판단하며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감각들은 불완전한 것이기에 그것에 근거해서 무엇인가를 깨닫고자 한다면 실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장성한 사람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을 믿고서 그 상황을 깨닫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말씀하십니다.
설령 환란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고 선한 계획이 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을 믿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깨달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근거로 해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장성한 신앙인은 상황과 감정에 의존해서 깨달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에 근거해서 상황을 깨닫는 것이 장성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3.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을 버릴 때에,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들은 자기 중심의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다른 이들을 생각하고 돌보기에는 그 생각의 틀이 협소합니다. 아직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만한 성숙함이 없습니다.
성숙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이웃,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숙하게 되면 내 생각의 폭이 넓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도 관심하게 되고,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함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에 나 또한 행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 가정 주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하루 하루 사는 것이 너무 짜증스럽고 불만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은 날마다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고, 남편과 자식들은 말도 안 듣고, 늘 말썽만 피우는 귀찮은 존재였습니다. 어느 날은 너무 지치고, 살아갈 의욕도 생기지를 않아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 더 이상 힘들어서 못살겠어요.”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 다 이해한다. 네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한가지 조건이 있다. 앞으로 9일 동안 내가 말하는 대로 몇 가지 일들을 해야 한다.” 그 여인은 반가와서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집안이 너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에 사람들이 와서 보면 창피하지 않겠니? 그래도 마지막 정리를 잘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 좀 해두렴”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났습니다.
삼일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않니? 네가 죽은 후에 아이들이 너를 기억하면서 살 텐데, 엄마가 자신들을 사랑했다는 좋은 기억은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니? 힘들겠지만 앞으로 삼일동안 만이라도 아이들을 최고로 사랑해 주렴”그 말을 들은 여인은 삼일 동안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갈 때가 삼일 밖에 남지 않았구나. 이제 마지막 해야 할 일을 말해주마.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은 들어야 하지 않겠니? 이제 남은 삼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으로 친절하게 대해 줘봐라.” 그 여인은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서 삼일 동안 최대한으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삼일 후, 하나님께서 그녀를 찾아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딸아, 천국으로 갈 시간이 다 되었구나. 그런데 가기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이 여인이 자신의 집을 돌아다 보니, 그 전과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 더러운 집구석은 깨끗하게 변해 있어서 보기 좋았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있었고, 남편은 자신을 향해서 사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집을 보면서, “아, 내 집이 바로 천국이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인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집이 어떻게 이렇게 변했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란다.” 그때 그 여인이 말합니다. “하나님,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 집을, 천국으로 만들어가며 살아 볼래요!”
믿음생활 할 때에도 나를 중심으로 해서 뭐든지 해 주기를 바라는 때가 있습니다. 처음 믿음 생활하는 단계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성숙해지게 되면,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서 관심하고, 주님의 뜻하신 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내 삶의 진정한 가치로 여기고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이기적인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맞게,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린아이 때와 같은 시절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한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말과 깨달음과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는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고 싶어하는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랑의 말을 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의존해서 나오는 메마른 말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깨닫는 것이 둔한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느껴지는 감정에 의존해서 판단합니다. 그러기에 내면에 흐르는 영적인 의미를 깨닫기에는 둔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내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사로 잡혀 있어서, 내가 다른 사람, 특히 하나님께는 어떠한 존재인가를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에베소서 4:15절에서, 바울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성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의 말과 행동으로 변화되어져 갈 때에 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없는 말과 행동, 생각들을 버릴 때에 장성한 성숙한 신앙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할 때에 다른 이들의 형편이 내 안에 들어옵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그들을 위로할 수 있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장성한 자의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제대로 알 때에 이 세상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나에게 오는 시련과 환란도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장성한 일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 교회에 장성한 자가 많아,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능히 돌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뜬히 감당할 수가 있는 성숙한 성도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고전13장 09절 ~ 13절 / 손상률목사
사람이 자기의 부족을 인식할 때 비로소 더 나은 성장과 완성을 향하여 도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빌 3:12).
그렇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13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1. 성숙된 신앙이 됩니다.
9-10절에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상태에서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하나님 보시기에 불완전하고 미숙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1) 부분적인 지식입니다.
“부분적으로 알고…”라는 말은 지식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 “부분적”이라는 말은 전체적이라는 말과 대조되는 단어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33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흔히 “한 가지는 알고 두 가지는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알지만 전체적으로는 모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율법의 조문을 따지면서 율법의 전체는 읽지 못했습니다(마 23:23). 자기중심의 편협한 지식으로 세상을 판단하려 들 때 하나님 중심의 넓은 세계를 분별하지 못하고 맙니다.
2) 부분적인 신앙입니다.
“부분적으로 예언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신비의 체험을 뜻합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될 때 사람들은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 보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이나, 예언을 하며 모든 비밀을 아는 지식이 있다든지, 또는 산을 옮길만한 대단한 믿음이 있고, 많은 물질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도록 헌신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완전하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부분적인 열심이나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온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지만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은 크게 칭찬하였습니다(눅 7:9).
3) 성숙되지 못한 어린아이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이 좁고 행동이 미숙한 사람을 어린아이라고 하든지 유치하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어린아이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3절에는 “너희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이 순전히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분량에 가까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갈 4:19). 에베소서 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1)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과 같이 멀리서 소리만 듣는 것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말씀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거울로 비춰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반사체에 불가하지만 직접 대하는 것은 실체를 바로 보는 것으로서 확실할 수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로 대할 수 있는 것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신령한 눈으로 가능합니다. 죄와 욕심으로 마음의 눈이 얼룩진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마 5:8).
2)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기독교 복음의 특징인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습니다(요1서 4:16).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어주으로써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적으로 증명되어 졌습니다(롬 5:6-8).
3)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됩니다.
요한1서 4:12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4:18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데는 사람의 지식이나 이론이나 신앙적 열정만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본문말씀 8절에는 오히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림을 받게 되면 자신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 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 5:14).
3. 온전한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말씀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1) 조화된 신앙입니다.
온전한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겸전된 것을 뜻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 위에서 만이 확실한 소망이 있게 되며, 이와 같은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므로써 그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어느 한 가지에만 치우침이 없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그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항상 같이 가야하는 변함없는 삶의 동반자입니다.
2) 사랑의 가치입니다.
여기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하신 말씀에 의미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다 소중하고 또 항상 있는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의 인격을 논할 때 여러 가지 숨겨진 요소가 있지만 결국 얼굴의 표정이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내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런 뜻으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3:10). 성숙된 믿음은 곧 성경적인 사랑(Agape)을 실천하므로 그 행위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행위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봉사와 섬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온전한 신앙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통하여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임마누엘의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므로써 더욱 확실하게 지켜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4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사랑의 단단한 줄로 우리와 예수님과 연결을 시키고 그와 함께하는 복된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3:35).
성도 여러분! 지금이야 말로 우리의 온전한 신앙을 발휘해야 될 때입니다. 온전한 믿음, 온전한 삶을 실천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칼럼 - 마음의 그릇
옛날부터 사람의 됨됨이나 인품을 두고 “그릇이 크다”고 하거나 “그릇이 못 된다”는 말로 표현하곤 하였다. 인물이 출중한 것은 외모의 준수함이나 매너 있는 행동으로도 나타나지만 무엇보다도 그 마음의 크기에 정비례 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편협한 마음 때문에 서로 분쟁이 있고 갈등이 심한 것을 보고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했다.
과연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사람은 누구일까?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인 경우 대부분 그 도량이 크고 마음이 넓어서 여러 사람을 포용하고 껴안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은 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상황이 오거나 자기의 이해관계와 맞닿는 순간이 되면 넓은 마음도 좁아져 버리는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사실 누구나 본받을만한 넓은 마음의 모델은 예수님 밖에 없다고 본다.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다. 과연 예수님의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의 크기를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는 단위로 표현 하면서 과히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경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 거기서 거기라 할 만하고 어찌보면 “도토리 키 재기”에 불가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그릇을 키운다고 할 때 근접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으로 탈바꿈 하는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그저 조금씩만 여유를 가지며 틈새를 넓혀 나가는 것으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작은 것에서부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의 공간은 점차 넓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는 것은 나의 자존심이나 인격에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이 되며 인격이 성숙해 지는 현상임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M. Luther)는 이와 같은 경우를 두고 재미나는 예화를 소개하였다. ‘산양(山羊)두 마리가 외나무다리 위에서 마주쳤다. 비켜 갈 수 없는 좁은 다리위에서 자칫 둘 다 물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중 나이든 산양이 먼저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맞은편에 있던 산양이 잽싸게 그 위를 밟고 넘어갔다. 그제야 엎드렸던 산양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유유히 다리를 넘어갔다는 것이다. 예화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어느 것이 자존심을 살리는 일이고 어떤 결과를 얻어 내는 것이 성숙된 인격의 모습인지 대답은 자명하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의 경우를 체험하게 된다. 그중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게 되고 그런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사실 조금만 여유 있게 들여다보면 별것 아닌데도 말이다. 피나는 훈련과 학습을 통하여 체력도 튼튼히 하고 지식도 높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일에 더욱 매진하여야 하겠다. 태평양 바다처럼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가이없도록 ….
하나님을 보는 신앙
>성경본문|
고전13장 09절 ~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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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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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민경설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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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신앙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청년 시절은 음란, 방탕, 타락이었지만 그의 어머니 모니카에 의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뚜렷한 음성을 듣게 돠고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눈물로 회개하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시16:8)"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
하나님 앞에 위대한삶을 산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며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 환경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며 살아갈 때 어려운 환경을 이기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과학과 문명, 사이버공간의 새로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것들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보는 성숙한 신앙을 소유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서 보는 하나님을 여기서도 볼수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자가 갖는 신앙의 요소는 어떤신앙의 요소인가를 알아 보겠습니다.
1.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없는 자는 주님을 볼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눅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지금 여기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살아 계시다는 믿음을 가져야 우리 삶속에서 눈으로 보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주님은 살아 계시다는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창28: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광야에서 돌베개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처지를 원망하고 있을 때 천사를 만났습니다.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갖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어려워지는 것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속에 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는 결정적인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자는 기도합니다.
2. 소망입니다.
꿈과 희망을 갖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미래지향적입니다. 미래가 없으면 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세계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때문입니다. (잠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무엇을 바라보고 꿈을 꾸고있는가,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 가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는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꿈, 목적이 있기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권력, 출세, 학위 이모든 것은 지나는 과정이므로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의 엠마오제자는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소망이 주님께 있다고 믿는자는 이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3. 사랑입니다.
주님이 사랑이시기에 사랑해야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세상의 사랑은 변질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사랑은 섬기는 사랑을 말합니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세상 사람들은 커지고 많아지고 높아져서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는 세상의 속성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커질수록 남을 섬기는자가 되야 합니다. 남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에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것이 참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섬기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종으로 오셨습니다. 천국은 섬기는 자에게 임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신앙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사랑의 온전성
고전13장 09절 ~ 10절 / 박상훈목사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막스 비어가 쓴 단편소설 가운데 「행복한 위선자」라는 제목의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 헬은 난폭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또 얼굴도 아주 험상궂게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것조차도 꺼려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은 미어리라는 아주 아리따운 여성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헬은 미어리와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정중하게 미어리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러나 헬은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어떤 여성이 험상궂게 생긴 얼굴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헬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어리와 결혼하고 싶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헬은 한 가지 궁리를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얼굴 모습의 가면을 만들어 그것을 뒤집어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헬은 가면을 쓰고서 다시금 새롭게 미어리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는 최선을 다해서 좋은 매너로 미어리에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헬은 다시금 미어리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미어리는 그 남자가 가면을 쓴 헬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의 인품이 훌륭하고 또 얼굴이 인자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헬은 결혼하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가면을 쓰고 살았습니다. 행여 자기 얼굴의 가면이 벗겨지면 어떻게 할까? 마음을 졸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헬은 미어리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보살펴 주었습니다. 헬은 미어리가 힘들어 할 때마다 그를 격려해 주고, 따뜻한 말로 그의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미어리는 헬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또 그런 미어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헬도 역시 행복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의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이 친구는 헬의 모든 비밀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헬과 미어리가 너무나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헬의 험상궂은 얼굴이 미어리에게 어떤 흉이 되지 못하겠구나! 내가 이번 기회에 그의 가면을 벗겨주어서 헬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살게 만들어주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서 순간적으로 헬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 주었습니다. 그러니 헬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더 놀란 것은 그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버렸던 헬의 친구였습니다. 왜냐하면 가면 속의 얼굴은 더 이상 헬의 과거의 험상궂은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헬의 얼굴은 쓰고 있는 가면처럼 정말 인자하고 따뜻한 모습의 얼굴로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헬은 자기의 아내 미어리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얼굴 모습이 실제로 그와 같이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작품에 나오는 헬이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고 해서 과연 우리는 그를 위선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겉은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속은 이리인 사람을 가리켜서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비록 양가죽을 뒤집어썼다 할지라도 양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사람을 우리는 위선자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양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는 실제로 양처럼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훈련을 쌓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굴 표정도 연습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행동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기쁘게 할 수 있도록 늘 부단 없이 연습하고 훈련을 쌓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옛날 고린도 교인들은 사랑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은사에만 목말라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또는 다른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은사를 구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은사를 뽐내고 과시하고 싶어서 은사에 목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은 이제 더 이상 은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사랑에 초점을 맞추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영원하지만 은사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온전하지만 은사는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9∼10절 말씀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성숙한 것이지만 은사는 초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11∼12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첫 번째 해당되는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사랑의 온전성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은사는 부분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분적"이라는 말씀이 세 번씩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2절에도 보면 "부분적"이라는 말씀이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부분적"이라는 단어를 네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은사는 결코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온전하지 못합니다.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저 부분적으로 알뿐입니다. 누구든지 신학교에 처음 들어가면 성경지식을 금방 쉽게 터득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도서관에 가보면 책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손쉽게 성경지식을 터득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더 깊이 공부하게 되면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들도 성경지식을 알아 가는데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배우면 배울수록 점점 더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8:2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우리는 그저 부분적으로만 알뿐입니다. 부분적으로 아니까 예언하는 것도 역시 부분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고 공간적인 의미가 강한 말씀입니다. 헬라어로 예언을 "프로페미"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어의 prophesy가 나왔습니다. "프로"는 영어의 before에 해당되며 우리말의 "∼앞에"라는 뜻입니다. 또 뒤에 나오는 "페미"는 영어의 to speak로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문자적으로 "to speak before"입니다. 여기에 쓰인 before가 시간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공간적인 의미로 해석을 해야 타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은 무엇을 미리 앞당겨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들어야할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오늘날의 설교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할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아니까 부분적으로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라고 하면서 자신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3:8을 보십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자랑거리들을 이제는 배설물처럼 하찮게 여겨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넘어가서 12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서 그것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가까운 그 순간에서도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는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 곧 낙원에 이끌려갔던 신비한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후12:4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하늘나라의 놀라운 영광을 인간의 한계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아니까 예언하는 것도 역시 부분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예언이 부분적이라고 해서 그 자체가 틀렸다든지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1+1=2"라고 가르칩니다. 그 자체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엄청나게 복잡한 수학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곱하기, 나누기, 분수, 미분, 적분, 기하학 등 엄청나게 복잡한 수학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예언도 그런 것입니다.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온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수밖에 없습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한계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 어찌 무한하신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컨대 우리 예수님은 100% 온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아울러 우리 예수님은 100%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십니다. 이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부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유한한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어찌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1:33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인간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타락성 때문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나면 남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슬픈 듯이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뒤돌아서면 속으로는 다 웃고 좋아한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이고(I go)!"하는 말이 영어로는 "나는 간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합법적으로 새 장가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타락한 심성을 가진 인간이 어찌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달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은사는,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주셨든지 간에 이것은 결코 교만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감사의 동기가 되고 겸손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와 직분은 어디까지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면서, 우리는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또 성도들을 섬기는 자세를 취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둘째로,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인 것은 폐하기 마련입니다.
전깃불이 환하게 비추이면 촛불은 꺼지기 마련입니다. 또 태양 빛이 환하게 비추이면 전깃불도 폐하여 지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인 것은 자연히 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루는 해와 달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서 고집했습니다. 해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나뭇잎은 초록빛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바삐 움직인다. 그 결과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다."
반면 달은 다르게 주장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뭇잎은 은빛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잠자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세상은 언제나 쥐죽은듯이 조용하다."
서로 자기 주장이 옳다고 내세웠습니다. 그때 바람이 지나가다가 그들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람이 웃으면서 중재에 나섰습니다.
"얘들아, 그만 싸워. 너희들은 괜히 싸우고 있는 거야! 나는 너희들이 알다시피 낮에 해가 떠 있을 때도 불고, 밤에 달이 떠 있을 때도 불잖아? 그러니 내가 다 아니까 말해줄게. 낮에 해가 떠오르면 해가 말한 그대로야. 나뭇잎은 초록빛이 되고 또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그 결과 세상은 시끄러워진단다. 그러다가도 밤에 달이 뜨게 되면 사정은 달라져. 달이 말한 대로 된단다. 나뭇잎은 은빛이 되고 또 사람들은 보금자리를 찾아서 잠에 골아 떨어진단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은 쥐죽은듯이 조용해지는 거야. 어디 그것뿐인 줄 아니? 행여 구름이 달빛을 가리우게 되면 나뭇잎은 빛을 잃어버리고 검은색으로 바뀌어버리고 만단다. 너희들은 전부를 알지 못하고 극히 작은 한 부분만 알고 있기 때문에 쓸데없이 서로들 싸우고 있는 거야."
우리의 은사는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결코 절대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옳은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나만 주장하고 나만 고집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과연 어느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우리 개인적으로 말하면 육신의 장막을 벗고 우리의 영이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일 것입니다. 또 전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 타시고 영광 가운데 우리 모두를 새 예루살렘 성으로 인도하러 오실 때일 것입니다.
사실 천국에는 설교자가 필요없습니다. 교사도 필요없습니다. 심지어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거기서는 필요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면전에서 뵈옵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주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줄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는 직접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그때는 우리 모두가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이 땅에서 은사가 필요합니다. 예언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잘 받들어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결코 온전하지 못합니다.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어떠한 직분을 맡기셨든지 우리는 그것 때문에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우리가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온전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사랑과 은사를 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부분적입니다. 사랑은 온전합니다. 사랑만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과연 어떠한 점에서 온전하겠습니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사랑은 시간적인 면에서 온전할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은사가 필요합니다. 은사는 이 땅에서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언제나 존재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천국은 빛과 사랑이 넘치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사랑만이 시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부부가 대판 싸움을 했습니다. 남편은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남편이 나가고 나니까 아내는 허전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내는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 이 찬송만 불렀습니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한편 남편도 홧김에 집을 나오기는 했지만 불편했습니다.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몇 일을 이리저리 맴돌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남편은 자기의 심정을 찬송가 가사에 담아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없이 다니니."
집안에 있던 아내는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아내는 살며시 대문을 열면서 그 역시 노래로 화답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만이 시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정과 환경을 초월하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사랑은 공간적인 면에서도 온전할 것입니다. 사랑이 존재하지 못할 영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어디에서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만 있으면 어떠한 문제라도 근본적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미 작고를 하셨습니다만 우리나라의 대법관 가운데 김홍섭 판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겸손하시고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믿음도 깊으셨습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감옥에 찾아가서 죄수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사도 법관이었습니다.
그가 판결을 내릴 때면 언제나 그의 앞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과 육법전서가 나란히 놓여있었습니다. 그는 판결을 내리기 전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나 나나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내가 대한민국의 법관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법에 의해서 당신에게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가정법원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어떤 부부가 그에게 판결을 받기 위해서 그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성격이 맞지 않아서 별거하다가 이제 이혼하기로 결정하고 판결을 받기 위해 그 앞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서로 그 아이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홍섭 판사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명을 내렸습니다.
"두 사람은 성경에 있는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을 앞으로 100번 읽으십시오. 그리고 한 달 뒤에 다시 만납시다."
이 부부는 김홍섭 판사의 명에 따라서 그때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장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문제가 상대방에게만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장을 찬찬히 읽어 나가는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사랑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고 또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화목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사는 부분적입니다. 사랑은 온전한 것입니다. 그저 우리의 심령을 간지럽게 하는 은사나 직분에 연연해하지 마십시다. 우리의 심령을 언제나 풍성하게 하는 온전한 사랑에 힘쓸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사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전부입니다. 전부를 소유한 사람은 사소한 부분을 떨쳐버리는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한 주간을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힘써 사랑을 연습하십시다. 사랑을 훈련하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절로 사랑의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게 되고 사랑의 열매도 아름답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형상을 점차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장성한 성도가 되라
고전13장 09절 ~ / 김양인목사
본문은 ‘사랑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요점은 성도들이 신령한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면서 사도 바울은 어린 아이가 점점 자라서 장성한 어른이 되는 것에 비유합니다. “9)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아이와 어른의 차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기본적인 차이점을 하나 들라면. 이해력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이해하는 수준과 장성한 사람이 이해하는 수준은 다릅니다. 아이는 사물을 부분적으로 알 뿐 전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유치한 것은 그들의 이해 수준이 낮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는 자기 엄마나 아빠를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엄마는 모든 필요와 욕구를 채워줄 수 있고,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못하는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같은 어린 아이의 생각을 비웃지 않고 용인해 줍니다.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이는 자기 부모가 만능이 아님을 알아갑니다. 청소년이 되면 아빠가 더 이상 슈퍼맨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서운해 할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가 그만큼 철이 들었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린 아이는 행동이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어른이 볼 때에는 엉뚱한 짓도 하고 실수도 많이 합니다. 집안에 있는 값나가는 물건도 손에 닿으면 망가뜨리고 맙니다. 부모 입장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화를 내고 매를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각이 어리고 신체적 조건이 미숙하고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의 세계에서도 적용이 되는 원칙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영적으로 어린아이도 있고 청소년도 있고 장성한 어른도 있습니다. 주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자가 장성한 신자처럼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14장 1절에 이르기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따라서 믿음의 수준이 점점 향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신앙생활을 수십 년 하였으나 여전히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두 살 먹은 아기는 엄마에 대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아기는 실제로 울음으로 신호만 보내면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부모에게 어떤 기준이 있어서 울고 보채도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음을 알고 부모가 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이해해 갑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식도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따라 성숙해져야 합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성경도 잘 모르고 신앙 경험도 거의 없다시피 하므로 하나님을 막연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숙한 수준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니까 성경의 가르침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린 신자의 무지를 책망하지 않고 받아주십니다. 이는 그 신자의 신앙 수준이 어린아이인 것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언제나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을 받아야 할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까 정말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고아처럼 이 세상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 하시면서 보살펴 주시는 분이시므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을 내가 무슨 죄를 짓고 악을 행해도 눈감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치한 신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믿기 시작한 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탓할 일이 아니지만 믿은 지 십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렇게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이르기를 “28)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멸망할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아낌없이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죄를 미워하시고 악인들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장성한 신자는 하나님을 단편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죄를 미워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신자들이 영적으로 장성하려면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우리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방법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크게 네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피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 만상을 보면서 이를 창조하신 조물주가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와 천체들의 오묘한 운행을 보면서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전능하심과 무한하심과 지혜로우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3장 4절에 이르기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였고, 로마서 1장 20절에 보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겸손한 마음으로 우주 만물을 대하면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가 계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은 평생 하나님을 경외했던 과학자였는데 그는 자기의 과학적 업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㰡’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있어 나 자신은, 진리의 큰 바다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대로 아득히 놓여 있는 바닷가에서 뛰놀면서 좀 더 둥그스름한 조약돌을 찾았거나, 보통 것보다 더 예쁜 조개를 주웠다고 좋아하는 작은 소년에 불과합니다.㰡“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그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창조론을 인정하는 대신에 이 우주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빅뱅 이론이 그것입니다. 약 150억 년 전에 지금 우주를 이루고 있는 물질과 에너지가 하나의 작은 점에 응축되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대폭발을 일으켜 이 우주를 이루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빅뱅 이론은 그 태초에 존재했던 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연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셨습니다. 까마귀 뿐 아니라 지구상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새와 짐승과 물고기와 곤충을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비와 바람과 햇빛을 주셔서 곡식과 과실을 맺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자연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대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벌레의 생태를 알에서부터 성충이 되기까지를 관찰해 보면 그 신비로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벌레의 놀라운 변신을 보면서 그것이 우연히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벌레의 생태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탁월하신 지혜를 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를 보면서도 하나님께 대해 많은 것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 속에 심어놓으신 기준으로서 우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착한 일을 하면 양심이 떳떳함을 느끼고 악행을 하면 양심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칸트는 “저 하늘에는 별들이 있고 여기 내 마음에는 양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칸트는 사람에게 있는 양심이 자율적인 도덕 기준이 되어 사람을 통제한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2장 14-15절에 이르기를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양심은 우리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없는 웅변으로 설명해 줍니다.
셋째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은 자연계와 인간의 양심을 가리켜 일반계시라고 하고, 성경을 특별계시라고 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우주만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었고,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수 있었으나, 범죄한 이후로는 마음이 어두워져서 우주만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고, 양심도 더러워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비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장은 이 같이 말씀합니다.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타락한 인간은 영적 소경과 같아서 제 스스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해와 달과 별들과 강, 바다, 산, 짐승 등과 같은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양심은 오염되어 더 이상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었고 온전한 기준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을 주시고 올바른 삶의 기준을 주시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심과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거룩하심과 전지전능하심과 무소부재하심과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죄가 무엇이며, 죄인에게 임할 심판이 어떠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방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자연계나 양심으로 알 수 없으며,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들을 때 하나님을 더 깊이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어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옛적에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본질이 하나님 아버지와 같으십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아들도 영원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전능하신 것처럼 아들도 전능하십니다. 이외에도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품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의미하는데, 그 분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놀랍고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생자께서 성육신하신 결과, 무슨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요한복음 1장 18절에 이르기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은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미천한 인간이 거룩하시며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보고서 살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근본이신 말씀이십니다. 곧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자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하나님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보고 인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은 한없이 복 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올바로 알려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보아도 예사로 보아 넘기지 말고 그 가운데서 조물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솜씨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심을 청결하게 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반영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상고함으로써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서 인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영적 어린아이의 단계를 벗어나서 점점 장성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본받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었으니 성도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는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처럼 전혀 실수가 없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장성한 신자도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실수와 죄를 곧바로 깨닫고 회개하며 시정합니다. 이것이 영적 어린아이와 다른 점입니다.
장성한 신자일수록 더 자주 회개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했습니다. ‘나는 이제 사도로서 아무 흠도 죄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장성한 신자의 바른 모습입니다.
장성한 신자일수록 더 조심하고 절제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고 했습니다.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세상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대접 받고 싶은 것 다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습니다. 더구나 어린 신자들이 장성한 신자들을 보고 배운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매사에 삼가고 절제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성한 신자일수록 겸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8)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겸손한 사람인 것이 아닙니다. 한 때 그는 자기의 가문과 혈통과 지위, 학식, 종교적 열심 등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 회심하고 복음을 전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고나자 그만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겸손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비천한 사람으로 오셨으니 이보다 더한 겸손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같은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갈 4:19).
모든 사도들과 앞서 간 믿음의 선배들이 다 우리의 모범이 되지만,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최종적인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을 보니 이 같이 말씀합니다.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 되고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고 묻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마 26:41). 우리는 때때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자라듯이 매일 같이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장성한 성도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9-10절에 이르기를 “9)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였고, 12절에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장성한 신자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온전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12절에 이르기를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고 성도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과 주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지내는 동안 장성한 신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할 일은 어린아이의 단계를 벗어나서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장성한 신자들은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거기서 한 단계 더 성장하려는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장성한 성도가 되어 어린 신자들을 이끌어 줌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의 성숙 단계
고전13장 08절 ~ 13절 / 김태복목사
「유에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誌)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불과 20세에 뉴욕 발레에서 주연급으로 혜성같이 나타났던 월터 패트릭 비셀이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死因)은 마약 과다 복용이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연 수입 25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2억 5천 만 원 정도요, 수많은 박수갈채 속에 사는 미남 청년인 그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이 안타까워서 마약을 먹어야 했을까? 결국 밝혀진 것은 사랑의 결핍증이었다고 합니다. 월터는 이 세상에 원치 않게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집은 가난하고 이미 세 아이가 있는데 또 임신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태어난 아이들은 쌍둥이였습니다. 바쁘게 일해야 먹고사는 엄마는 월터를 구박하고 자주 매질하면서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엄마는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를 겸한 착실한 교인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화가 났다하면 아이들을 혁대로 사정없이 매질했다고 합니다. 그런 신앙적인 위선자요, 이기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춤에 대한 재주는 비상했으나 정신적으로는 분열증 끼가 나타나 결국 약물 복용이 점점 늘어갔던 것입니다.
죽은 월터가 남긴 메모에는 ‘나는 약물로 나를 파괴하고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약 없이는 살 수 없다. 내 머리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일만을 명령한다.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전혀 사랑을 공급받지 못한 채 성장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은 생명과 같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피히테는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主成分)이라.’고 했고, 어거스틴은 ‘사랑은 곧 인력이라.’고 했습니다.
정신분석자인 칼 메닝거는 ‘병들고 늙은 이 세계에 유일한 치료약은 사랑이라.’고 했고,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또한 건강의 비결도 사랑이 큰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뉴욕 데일리 뉴스는 예방 의학 전문가 피터 한센 박사의 연구를 보도하였습니다. 그는 건강을 위하여 (1)건강 음식 (2)규칙적인 운동 (3)해로운 습관, 즉 술 담배, 과로, 과식, 수면 부족을 버리는 것인데 이것이 건강의 50%의 좋은 영향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50%의 건강법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의 관계에서 신체의 저항력이 강해지고 병균과 싸우는 자연의 힘이 배양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하나님 주신 생명으로만 영생할 수가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라는 자양분으로만 온전한 삶, 온전한 성숙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지난주에 헬라어로 분류하는 사랑은 다섯 가지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1)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 (2)가족 간의 사랑인 스톨게 (3)친구 간에 사랑인 필리아 (4)자선적인 사랑인 필란드리아 (5)신적인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카페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때로 많은 사람들이 남녀 간의 사랑에서나 친구간의 사랑, 혹은 동지간의 사랑에서 완전한 사랑을 찾다가 낙심하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에게서는 완전한 사랑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 십자가 사랑에서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요, 그런 사랑만이 진정한 만족이 있고 우리 인간들이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큰 책임 중의 하나가 이 아카페적인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가정과 직장, 사회에 나가서 나타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설교 초두에 말씀 드린 월터 어머니처럼 가정이나 직장, 그들이 활동하는 곳에서 사랑의 빛이나 향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기독교인은 생명을 잃은 자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으로 성숙됨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식구나 직장동료가 그 사랑 가운데 변화되는 역사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성숙하려면 오늘 본문에서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1-3절에 보면 유아기의 사랑의 단계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의 단계를 말합니다. 어느 의미에서 위의 열거한 다섯 가지 사랑 중 네 가지인 남녀 간의 사랑이나 가족 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이나 자선적인 사랑도 아카페적인 사랑의 요소가 얼마큼 있으나 그 대부분이 자기중심적인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어머니의 사랑이 그 많은 사랑 가운데 가장 아카페적인 사랑이 많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에도 자기중심적인 것이 많아서 자식이 커서 어머니의 사랑을 몰라준다든지, 자기가 희생적으로 사랑한 것에 비하면 그 효도심이 너무나 작을 때는 대단히 섭섭히 여기거나 원망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섭섭함이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갈등으로 나타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연속극에서 보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좋은 가정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도 많은 가정들이 고부간에 갈등 때문에 적지 않은 트러블들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때문인지 요즈음 인터넷에 보면, “최근 아파트 이름이 점점 길어지고 타워팰리스, 미켈란쉐르빌, 아카데미스위트, 현대하이케리온, 롯데캐슬모닝 등 외국어로 되어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라는 유머스러운 질문이 나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엉뚱합니다. “시어머니가 아파트에 찾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우습기도 하지만, 우리 시어머니들에게는 너무나 섭섭한 이야기입니다. 고부간의 갈등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어머니에 관계된 미국 농담도 좋은 것은 별로 없고 대개가 악평에 속합니다.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왜 낙원이라고 하는지 아니?”라는 질문에, “하와에게는 시어머니가 없기 때문이야.”라는 대답입니다.
왜 가장 사랑이 많은 어머니들에게 이런 모습이 나타납니까? 어머니의 사랑에도 이기적인 면이 많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카페 이전의 사랑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유아기 단계에 불과한 사랑입니다. 유아기에는 모든 사랑을 자기중심에서 합니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 기분에 따라 사랑합니다. 오늘 1-3절에 보면 유아기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가 명심할 말은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말과 “내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방언이나 천사의 말이나 구제나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나 순교가 별거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너무 귀하고 너무 아름다워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요, 내게는 결코 유익이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남편이 속에는 사랑도 없고 뒤에서는 딴 짓을 하면서 여러분에게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합시다. “여보, 나는 당신 없으면 한 시도 못 살 것 같아. 당신과 결혼한 것은 내게는 큰 축복이야.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해.”라고 한다면 그 소리가 너무나 역겨울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여자 분은 빈말이라도 좋으니 남편으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면서 통나무처럼 무뚝뚝한 남편을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소리하지 마십시오. 미국인들 보세요. 영화를 보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항상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자녀들 앞에서도 입을 쪽쪽 맞추는 모습은 보기가 민망합니다. 그런 부부는 너무나 행복할 것 같지요. 그러나 하딩 박사는 미국의 부부들에 대해서 글을 쓰기를 <결혼한 부부 열 쌍 중 10년이 지난 뒤 네 쌍이 이혼을 한다. 이혼한 사람 중 80%가 재혼을 한다.>
<그러나 다시 10년이 경과하면 재혼한 열 쌍 중 다섯 쌍이 또 다시 이혼한다. 그러므로 해마다 약 10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버림받거나 학대, 혹은 소외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남편, 돈도 많이 불어오는 능력이 있는 남편이라도 사랑이 전혀 없는 남편과 사는 것은 지옥과 같을 것이요, 차라리 단칸방에 살만큼 가난하더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사는 것이 더 천국적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카페 사랑이 빠진 방언이나 천사의 말, 아카페 사랑이 빠진 예언의 능력이나 구제, 혹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과 순교는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자기중심적인 것이기에 인정하지 않으시므로 내게는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유아기의 사랑을 버리고 이제는 아카페 사랑을 가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4-6절까지는 소년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유아기 때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크게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떼를 쓰던지, 아무 데나 대소변을 보든지 용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년기에 와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깨우치게 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을 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 때는 부모나 교사로부터 ‘하지 말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밥을 흘리지 말라’ ‘떠들지 말라.’ ‘늦잠을 자지 말라.’ ‘싸우지 말라.’라는 말을 들으면서 소년들은 성장합니다. 본문 4-6절에서 보면 ‘아니하며’라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4절에서 보면 아카페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다른 이에게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합니다.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합니다.
5절에서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합니다. 성내지 아니하며 남의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6절에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합니다. 이는 전부 남에 대해서 해서는 안 될 것을 나타내면서 아카페 사랑의 단계에서 소극적인 부분부터 배워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유아기 때는 나만 알고 내 중심적인 사랑만 하던 성도가 ‘이제는 남에게 상처주지 않을까?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는 않을까?’라는 데 신경을 쓰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끄러움이 무엇인가 알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어느 분이 교회를 나오면서부터 한 가지 달라진 것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술을 먹고 동네방네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아이들 앞에서도 아내를 때리면서도 그것이 남자답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한 가지 달라진 것은 남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러한 점이 사랑이 자라간다는 과정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 중에 아직도 유아기 성도처럼 말과 행동도 막 하고, 남에게 무례히 행함으로 상처나 고통을 주며 사는 자가 있습니까? 혹은 남의 악을 들추어내기를 기뻐하는 자가 있습니까? 아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서 은사를 받은 자일지라도 사랑의 불법을 저지르는 자라는 책망을 면치 못하는 줄 아시고 앞으로는 사랑이 더 성장하는 단계에 이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7절에 보면 청년기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청년기는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부모에게 대한 사랑이 나타나고 가정을 책임지려 합니다. 즉 적극적인 사랑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4-6절은 아카페적인 사랑의 소극적인 면이 소개되고 있다면 7절은 적극적인 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적극적인 아카페적인 사랑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1)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이 참는다는 말은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집니다. 벧전 5:8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형제의 잘못을 사람들에게 들어내지 않고 덮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2)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아카페 사랑은 형제를 믿는 것입니다. 남들은 비난하고 욕하고 정죄할지라도 그의 모든 것을 믿는 사랑을 말합니다. 기도에 대한 책을 많이 썼던 오 할레스비라는 분의 고향에 신앙 좋은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녀의 먼 친척을 찾아가 자신을 맡아달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맡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잘 믿는 성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맡아달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내 비록 나이는 많지만 결코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죽음이 아름답게 하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 드렸고 주님은 나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누가 그의 말을 믿겠어요? 아무도 받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혼부부가 이 할머니의 간증을 듣고 맘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어머니처럼 그 할머니를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이 할머니는 장담처럼 여생을 평온하게 사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 날도 다른 날처럼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기척이 없어서 젊은 부부가 방에 들어가 보니 할머니가 주무시는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옆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담긴 편지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맞아 주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나를 믿어 주었고, 내가 믿는 예수님을 믿어 주었으며, 나의 신앙과 기도를 믿어 주어서 나와 함께 살아주고 베풀어 준 은혜에 참으로 감사하오.” 그리고 할머니가 가졌던 깜짝 놀랄만한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면서 “당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재산을 가장 잘 관리할 사람들로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이 재물을 써 주십시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아카페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대방이 거짓말을 할지라도 믿어줄 때 상대방은 감동이 되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아카페 사랑은 오늘의 부족, 오늘의 결점, 오늘의 연약을 보지 않고 먼 미래의 원숙을 바라보고 참으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부모님 여러분이여,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자녀나 제자 중,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라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나포레온은 어렸을 때 학교 성적이 42명 중 42등이었고, 뉴턴은 꼴지 부터 둘째였으며, 문학가 엘리엇은 국어 시간에 글짓기를 못해 줄곧 야단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인가 그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바라보았기에 세계적인 인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4)아카페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여기서 ‘견딘다.’는 말은 수동적으로 참는 것과 다릅니다. ‘견딘다’는 말은 어떠한 난관이 앞을 가로 막는다 할지라도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전진 하면서 나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신 것만 아니라, 그것을 지시고 견디어 가시면서 부활을 향해 전진해 가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어떠한 고난, 어떠한 난관이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아카페 사랑을 가지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딤으로 마침내 사랑의 큰 성숙을 가져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8-13절에 보면 장년의 사랑의 단계가 나옵니다.
장년의 단계는 원숙한 단계입니다. 1-3절까지의 말씀에다가 ‘사랑이 없으면’라는 말 대신에 ‘사랑이 있으면’라는 말을 넣어보면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이 있는 방언과 천사의 말, 사랑이 있는 예언의 능력과 믿음의 능력, 사랑이 있는 구제와 순교는 모든 것이 유익한 자요, 모든 것을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단계가 장년의 단계입니다. 그 단계는 나누어주는 단계입니다. 사랑으로 은사를 베풀며, 사랑으로 따뜻한 말과 격려를 합니다. 사랑으로 용서와 희생을 줍니다. 장년의 단계에 이르니 유아기의 단계를 벗어납니다. 유아기 때는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자기중심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장년의 단계에 이르러서 나누어주기 시작하니 부분적으로 체험하던 것에서 온전한 것으로 체험이 됩니다.
8-11절을 읽어 보십 시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이나 예언은 다 페하는 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방언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가 대단한 것 같으나 천국에 가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은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은사만은 천국에 가서도 너무나 귀한 것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 중에 그런 은사를 받았다고 우쭐거리는 모습은 아직도 어린 신앙의 단계에 불과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과거에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했으나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처럼 분명해졌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거울이란 지금과 같은 유리 거울이 아니고 구리거울 입니다. 그러므로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와 같이 과거 자기중심적일 때는 욕심의 눈으로 보므로 하나님의 세계가 희미했으나 이제는 아카페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하나님의 세계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를 깨닫게 되고 부활생명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카페 사랑이 신령한 눈을 열게 한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단계가 사랑의 은사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도 말씀 드린바가 있지만, 김익두 목사님에게 이런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높은 산길을 걸어 오른 후에 너무 더워서 웃옷을 벗어 놓고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어떤 술 취한 사람 하나가 올라오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느냐?”고 시비하면서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럼에도 김 목사님은 이리 치고 저리 치는 대로 아무 저항 없이 고스란히 맞았습니다. 이윽고 그 사람은 때리기를 멈추었습니다. 그 때 김 목사님은 말하기를 “형님, 다 때렸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 때렸다. 왜?”라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정색을 하면서 “예수님을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라고 말했습니다. 상대방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내가 김익두야.”라는 순간, 그 사람은 사색이 되었습니다. 황해도 지역에서 유명한 깡패 김익두를 모를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즉시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싹싹 빕니다. 그러자 김 목사님은 점잖게 말하기를 “내가 방금 뭐라고 하던가?”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런 일을 당했으면 자네는 여기서 장례식을 치렀을거야.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을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내가 예수님을 믿은 덕에 자네가 살았지 않았나.”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러면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고 묻습니다. “무얼 어떻게 해 따라와야지.”고 하면서 그를 강제로 부흥회에 참석시켰고, 후일에 그 사람은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을지라도 급한 성질이 완전히 사라졌겠습니까? 아마, 이유 없이 한 두 대 매 맞을 때는 ‘뭐 이런 잡놈이 있어.’하고 번쩍 들어 패대기를 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이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아무 이유도 없이 때리는 것을 어떻게 참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사랑의 은사를 받으니까,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혈기대로 성질을 부렸다면, 사랑의 은사는 물론이고 믿음의 능력이 떠나감으로 부흥집회는 실패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김 목사님은 십자가 사랑으로 그의 행패를 참았습니다.
그 결과,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 행패 부리던 사람이 변하여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더 나가서는 그 부흥집회가 큰 은혜로 넘쳤던 것입니다. 과연, 김익두 목사님은 사랑의 장년의 단계에 이른 모습입니다. 왜 믿는 성도가 있는 가정이나 직장이 변화하지 못합니까? 자기중심적인 유아기 사랑에만 머물 뿐, 아카페적인 십자가 사랑으로 나누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 사랑으로 밀알이 될 때만이 여러분의 가정이나 직장에 큰 변화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이번 여름동안 사랑의 은사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러므로 유아기 단계에서 소년의 단계로, 소년의 단계에서 청년의 단계, 더 나가서는 장년의 단계에 이르심으로 여러분의 가정이나 직장에까지 변화를 나타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13장 08절 ~ 13절 / 곽선희목사
어떤 어머니가 자기의 어린아이 하나를 나무라고 있었습니다. 네가 부엌에서 과자를 훔쳐먹었는데 "훔쳐먹을 때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그러니까 이 아이 대답하기를 "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늘 지켜보고 네 마음속까지 다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네" 그랬어요. 꼬박꼬박 "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다 못해서 "그럼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보면서 네가 과자를 훔쳐먹을 때 뭐라고 말씀하시던?"하고 물었습니다. 이 어린아이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던 걸요. '이곳에는 너와 나 둘 뿐이구나. 그러니 두 몫을 훔쳐라'" 그럽니다. 어린 아이는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지켜보신다, 하는 것도 자기에게 이롭도록 해석합니다. 뭐든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에게 이롭도록 해석하는 그러한 속성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말합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심리학자 데이빗 엘킨트 라고 하는 분은 이 박사님께서는 The Hurried Child라고 하는, '재촉받는 어린이'라고 하는 책을 쓰십니다. 부제로서는 Growing up Too Fast Too Soon 이라고 하는 부제가 있습니다. 최대한으로 아이들은 지금 재촉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모든 것의 성장 성숙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과정이 필요합니다. 상당한 시간 기다려 주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재촉했습니다. 빨리 크고 빨리 알고 빨리 천재가 되라고 몰아칩니다. 그래서 '초등교육부터 잘해야겠다.' 요새 '초등학교 교육부터 영어를 가르쳐야겠다' 뭐 이런 거예요. 그런가 하면 '아∼ 초등교육은 늦다. 유치원부터 해야 된다.' '유치원도 늦다. 나자마자 말도 못할 때부터 그때부터 가르쳐야 된다.' 좀더 나아가서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모교육부터 해야되겠다.' 이렇게 서두르다 보니 '빠를수록 좋다.' 학습의 압력, 대단합니다. 이 속에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몸이 커지는 것을 성장이라고 합니다. 속에 있는 내적 인격이 커지는 것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장은 있는데 성숙이 없다. 없는 것만이 아니라 반비례해서 더 작아졌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새 아이들 많이 컸어요. 우리집에도 중학교 1학년 손녀가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저희집에서 쭉 키웠는데, 요새는 제가 집에 들어가면 "할아버지"하면 쳐다봅니다. 쳐다봐야 돼, 얼마나 큰지. 내가 인사를 받는 건지 내가 인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새 밖에서도 아이들 만나면 우리 교회 청년들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할 때 보면 어떻게 큰지 전부 쳐다봐야 됩니다. 많이 컸어요. 대단히 컸는데, 문제는 속은 옛날 얘들만도 못해요. 너무 어려요. 유치해요. 군대에 나간 청년들이 말입니다, 군대에 나갈 나이면 얼마나 좋은 나이 입니까? 여기에 나가서 마음이 얼마나 여린지요 군대생활을 감당하지 못해가지고 정신병원에 치료를 받는 사람이 5%예요. 그 중에도 대표적인 예는 얘들이 불안에 떨구요 정신을 못차려요. 하도 괴로워해서 어머니를 오시라고 했어요. 특별 휴가를 주어서 그 부대 가까이에 있는 하숙방에 들어가서 하룻밤 어머니하고 자고 오라 그랬지요. 얘가 어머니를 만나가지고 밤새껏 울더랍니다. "왜 우느냐?" 대답이 없어요. 뭐, 우는 이유가 없잖아요. "울지마라" "왜 우느냐?" "울지마라." 밤새껏 시달리다가 어머니가 그만 피곤해서 잠들었어요.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까 목매달아 죽었어요. 여러분, 이게 현실이에요. 얘들이 너무 어려요. 마마보이요. 결혼을 한다구요? 요새 결혼, 연상의 여자하고 결혼하는 것이 27%예요. 나도 결혼 주례 늘 하지만 척 보면은 이쪽이 위야. 신부가 확실히 나이가 몇살 더 위거든요. 내가 물어보지는 않습니다만은 뻔해요. 그 결혼주례하는 순간에도 여자한테 꼼짝을 못해요. "이래"하면 "예잇"하고. 아이고 벌벌 떨면서 반지를 제 손가락에 못 끼우고 여기다 끼우고 그래요. "이게 뭐야?" 그러면 꼼짝을 못합니다. '너는 죽었다' 내가 속으로 생각합니다. 왜 이 모양이 되었지요 이게? 심지어는 이게 왜 이런가 심리학적으로 연구를 해보니까 너무 어렸을 때 어머니의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라면서 잔소리가 많으면 주도력이 없어져요. 자기 주체 의식이 없어진다 말입니다. 자기 의지가, 자기 판단 능력이 다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차라리 나이 많은 여자하고 결혼해서 또다시 잔소리를 들어가며 사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그 많은 잔소리가 아이들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못 자라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합니까? 내버려둬서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고, 그래가면서 이게 성장을 해야 되겠는데, 일일이 보살펴 주는 가운데 얘들이 성숙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 자, 얘들만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구요, 요새 보니까 정치가라는 사람들이 그래요. 유치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문제될 것이 아닌 걸 가지고 문제되구요, 시시한 일 가지고 온통 국민을 혼란하게 만들어요. 왜 이렇게 어른스러운 데가 없나? 옛날 어른들의 그 은근한 덕, 좀 이런 것들이 풍겨나오면 좋겠는데 전혀 이런 걸 볼 수가 없어요. 왜 이렇게 유치한가? 그걸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말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이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뭡니까? 어린아이라는 것은 부분적으로, 오늘 성경에 자세히 나타납니다, 부분적인 것에 집착하고 전체를 모르는 거예요. 그것이 문제요. 부분적인 것, 종합적이고 통합적인 인식이 없고, 한 부분만 보고 전체를 다 판단하려고 그럽니다. 거기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전체를 보면 예술이요, 부분을 보면 외설"이라고. 소설을 보던지 영화 한편을 봐도 전체 흐르는 테마를 알아야지요. 거기서 주는 메시지를 찾아야 하는데 이건 모르고요 어느 한 부분의 키스장면만 보고, 홀랑벗은 여자만 보고, 뭐 어쩌구 저쩌구. 유치하기는요. 왜 이모양이 되었느냐? 그 정신이 어리기 때문이에요. 전체를 볼 줄 몰라요. 나무는 보는데 숲을 못봐요. 땅은 보는데 하늘을 못봐요. 부분에 부분적인 것에 매여있는 것이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중심적이요. 자기 밖에 몰라요. 어린아이의 심리가 그러하다고 해요. '어머니가 왜 젖이 둘이냐? 하나는 먹으라는 거고,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거다.' 이 젖 하나를 누구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둘 다 내꺼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아버지는 돈 벌어 오는 사람, 어머니는 나에게 음식을 주는 사람. 오빠들이라는 것은 내가 타고 놀라는 거고요 전부가 나, 나 밖엔 몰라요. 여기서부터 점점 성장하면서 자기 인식이 넓어지고 커져야 하는 것인데 항상 거기에 매여 있거든요. 또 어린아이들은 지극히 물질적인 것이에요. 물질을 받았으면 사랑이고 못받았으면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현세적이고 순간적이에요. 보다 더 먼 미래를 생각하지 못해요.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대로 있습니까, 젊은이가 젊은이대로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결혼 주례할 때 말합니다만은 "자, 지금은 신랑 신부다. 며칠 있다가는 아버지 어머니다. 조금 있다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다. 그것을 잊지 마라." 할아버지, 할머니 때를 생각하면서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 되자' 하고 살아야겠는데 지금 조그만 것을 가지고 마음에 드느니 안드느니, 취미가 어떠느니, 재주가 있느니 없느니, 티격태격하다가 차버리니 이게 도대체 유치하고 말이죠. 당신이라고 항상 젊었더냐구요. 머지않아 저 나이가 내게 다가오고 있지 않아요? 결정적인 미래, 보다 더 먼 미래를 볼 줄 알아야 되는 것이거든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요 항상 300m 앞을 봐야 되는 거예요. 처음 운전하는 사람은 발 밑밖에 못봐요. 바로 1m 앞밖에 못봐서 휘청휘청 하지만은 운전에 능숙한 사람은 먼 곳을 보면서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것까지 종합적으로 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숙이라는 거죠. 또한, 유치한 사람들은 분쟁을 해요. 고린도 교회가 분쟁이 있어서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너희들은 유치하다"하고 그렇게 판단을 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아볼로파다, 바울파다, 게바파다, 예수파다. 왜 파가 있느냐? 자기가 잘났다는 거죠. '나는 아블로가 한, 그런 정도가 아니다. 나는 예수를 만나본 사람이다, 내가.' '내가 사도바울에게 세례받은 사람이다.' 뭐 이런 자랑을 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도 시원치 않으면서 남의 권위를 빌려서 자기를 높이고 어쨌든 자기를 높이려고 몸부림을 치니까 분쟁이 생기는 거죠. 단 두 사람 결혼생활 하는데도 자기를 높이면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자기 특권을 주장하면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결국은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면서만이 하나가 될 수 있는데 이 유치한 사람은 끝끝내 저만 잘난 거예요. 그런고로 어린아이죠. 유치하다는 것이죠.
또한, 자기 집착에 매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만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하는 일은 다 잘못했고, 내가 하는 직업은 좋은 직업이고, 남의 직업은 나쁘고. 전부 그런 식의 판단이 알고 보면 유치한 것이에요.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고린도서에서 가르쳐 줍니다. 자, 여기에 농사를 짓는다고 하자. 심는 자가 있고, 가꾸는 자도 있고, 물주는 자도 있고, 추수하는 자도 있다. 각각 자기 일을 할 뿐이다. 다 소중하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시다. 누가 물을 줬느냐? 누가 거름을 줬느냐가 중요하지를 않아요.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있지요.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이거예요. 그걸 볼 줄 알아야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경륜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자의 지각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유치하게 분쟁하고 잘난척하고 뭐 이거 비판하고 이런 시시한 거 다 버렸노라, 하고 말합니다. 성숙이란, 바로 사랑의 이해에 있고 사랑의 성숙에 있습니다. 내 사랑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랑을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유치한 사람은 사랑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사랑받는 것만 생각하는 중에도 또 있어요. 그것도 정신적으로 높은 차원에서의 사랑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물질적, 육체적인 것만 생각해요. 얄팍한 것만 생각해요. 사랑받는 그 자체도 유치해요. 그런가 하면 성숙한 사람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요. 사랑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것도 높은 차원에서 사랑해요. 때로는 상대방이 이해하던지 못하던지, 때로는 오해를 하더라도 멀리 내다보며 그 언젠가 다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사랑하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들이 성숙한 부모님들은 때로는 자식을 괴롭히기도 해요. 자식을 멀리 떠나보내기도 해요. 그러나 언젠가는 네가 내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게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유치한 사람은 말이 유치하고, 행동이 유치하고, 생각이 유치하고, 전부 유치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생각하는 것, 이해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다 높은 수준에, 성숙한 수준에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심리학자인 고든 올파트라고 하는 박사님께서 Pattern and Growth in Personality 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요 이 사람의 성품의 성숙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기에 성숙을 몇가지로 지적해 말합니다. 먼저는 "성숙이란 자아감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랬어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커지는 거예요. 내가 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요. 이제 어린아이들이 처음에는 나 혼자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크면서 아니요, 부모가 있고 내가 있는 거예요. 형이 있고 내가 있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존재의 인식이 점점 커지는 거예요. 여기에 가정이 있고, 나라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잖아요. 이 자아감이 점점 확장해서 큰 뜻에서의 나를 생각하게 되는 거죠. 얼마나 크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죠. 그래서 지금 내가 편하고 불편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보다 더 넓은 의미의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면서 저 사람이 편해야 내가 편한 것이고, 아내가 편해야 내가 편한 것이고, 남편을 기쁘게 하고야 내가 기쁘게 될 수 있어요. 누구를 슬프게 하고 누구를 아프게 하고는 내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거죠. 선린관계를 이루면서 비로소 내가 편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게 큰 사람이요. 성숙한 사람이예요. 가령 남을 손해 끼치고 남의 눈에 눈물을 내게 하면서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 유치한 사람이에요.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한 성격이라 이말이에요. 그런가 하면 정서적 안정을 가지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수용하게 됩니다. 이제 전후좌후 불편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내가 책임을 집니다. 그게 성숙한 사람이에요. 가끔 이런 사람 있다면서요? 하도 성격이 못돼가지고 자꾸만 화를 내고 집안에서 짜증을 내니까 그 아내가 말하기를 여보, 왜 전에 없이 요새 와서 자꾸 짜증을 내느냐고 무슨 잘못된 일이 있냐고, 왜 그렇게 스스로 화를 내기를 하느냐고 그랬어요. 남편이 하는 말이 "나는 본래 안그랬는데 너하고 살면서 나빠졌다" 그랬대요. 이 남자 나빠진 것이 아내 탓입니까? 물론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성숙한 자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관리합니다. 이걸 남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누구도 탓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경문제도 나 자신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또 나아가서는 현실을 정확히 인식합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봅니다. 순간만 보지 않고 다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성찰 능력이 있습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볼 줄 알고, 자신을 객관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칭찬을 듣는다고 해서 정신 못차리고 촐랑거리지 않아요. 교만해지지도 않고. 또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당장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자기 실망하지 않습니다. 자기 성찰의 능력을 확고하게 지켜갑니다. 동시에 통일된 인생관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삽니다. 이랬다 저랬다 휘청거리고 있는 동안은 아직도 유치한 겁니다. 아직도 제자리 찾지를 못했습니다. 확고한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일관성 있게, 누가 뭐라던 말던, 나는 내 길을 의연하게 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삶의 보람을 찾습니다. 후회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무디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르게 섬겼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숙도를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여기의 장성한 사람이라는 말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떻게 성장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성장하도록 키워가고 있는 겁니까? 많은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우리는 성장해 나갑니다. 평안하고 안일한 가운데에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비바람을 많이 맞은 나무라야 튼튼한 나무가 됩니다. 인격도 많은 환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높은 수준의 성장을 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크게 성장한 그 사람은 유치한 것을 버린다 그랬어요. 큰 것을 발견한 사람, 참 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유치한 것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모든 전에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다 버리게 됩니다. 사도바울을 말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나니까 전에 소중하던 것을 분토와 같이 해로운 것으로 여겼노라. 다 쉽게 내버렸다고 말합니다. 큰 것, 소중한 것을 깨닫고 나면은 시시한 것은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사랑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벤허'라고 하는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이 없을 겁니다. 당대에 유명한 영화가 아닙니까. 언제 보아도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그런데 벤허는 한평생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칼을 들지 않습니다. 누구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온유한 사람으로 진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 모릅니다. 칼을 들지 않습니다. 영화장면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지시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렇게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시는데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올 때, 내 손에서 칼이 떠나는 것을 느꼈노라."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는 그 거룩한 사랑의 선포를 보면서 그 사랑에 이렇게 부딪히는 순간 내 손에서 칼이 떠나버렸다고. 나는 누구도 칼로 대할 수가 없고, 누구를 미워할 수가 없다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다 버렸습니다. 십자가 사랑에 대한 이해 인식과 그 거룩한 말씀 속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나타나게 될 때, 유치한 것,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 다 떠나게 됩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있는 것이올시다.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영원성
고전13장 08절 ~ 13절 / 김동국목사
“주님이 행한 모든 것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났습니다.
사랑을 따라 말씀을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한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폴트레인은 20세기를 가리켜서 ‘터전이 흔들리는 시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기본적인 질서와 원칙들이 무참히 깨어지는 현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분열과 다툼이 있는 교회
우리는 살아가면서 두 번 실망합니다. 첫째는 세상에 대한 실망입니다. 학업을 마치고 어른이 되어 포부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봤더니 세상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정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에는 부정직하게 살아가는 비결을 가르쳐주는 선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실망하고 낙심해서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 두 번째 실망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도 다투고 싸우고 때로는 지저분한 면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 실망을 한 뒤에는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왔고 진리 안에 거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진리로부터 실망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찾아 어디로 가겠습니까?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분열과 다툼이었습니다. 이들은 많은 능력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투는 교회로 소문이 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인들이 싸우는 이유가 진리의 모순성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8절에서 10절까지 말씀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저는 목사가 되며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본문으로 주어질 때 마다 내가 경험한 진리를 간증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 말씀에 의해 새롭게 거듭난 사람입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중학교 3학년 전까지는 재미삼아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중 3때 수련회를 갔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면 헛된 것이다. 생각해 봐라. 주일, 수요일, 목요일에도 교회를 오는데 그 시간을 십년, 이십년, 삼십년 합산해보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느냐? 그러니 너희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 시간이 오히려 너희의 삶을 축복하는 시간이 되게 하라”고 저희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나보자’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따라 계곡 돌 위에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제대로 기도가 되지 않았지만 마음을 바로잡고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성령님께서 저를 붙잡고 저의 모든 죄를 회개케 하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까지 모두 기억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저는 성경에서 말하는 신비한 영적 은사들을 체험했습니다. 방언을 말하게 되었고 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후 제 삶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헌신적으로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자 장로님, 권사님, 목사님이 저를 기도모임에 데리고 갔고 저는 기도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6개월 동안 한 주간도 빠짐없이 친구들과 철야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한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고 그 깊이를 보게 되면서 많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권사님, 장로님, 목사님들은 그렇게 존경할만한 생활을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저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힘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는 제가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더 고통으로 몰고 간 것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명한 진리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는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선과 악이 제 안에서 싸우는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칼을 갖다놓고 울면서 “하나님 이 칼로 제 손을 자르면 다시는 범죄하지 않을까요?”라고 기도드린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들은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병자들도 치유하고 집 나간 제 친구들도 돌아오게 하는 영적인 일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수련회 때 하나님의 목자로서 부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제 유일한 희망은 신학교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신학교에 가면 교수님들이 다 목사님, 전도사님일테니까 나의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말리는 아버지를 일주일 내내 설득해서 신학교에 갔습니다. 선배들과 수업 전 30분 동안 예배 드리고나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신학교 생활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첫 시험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바빠서 시험감독을 못한다며 “여러분은 모두 신학생이니 자율에 맡기겠다”며 나가셨습니다. 교수님이 나가시자 옆에 선배가 “잘 모르겠다. 중간고사도 아닌데 책을 볼까?” 하며 책을 꺼냈습니다. 그러자 다른 선배들도 책을 보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실망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모든 일은 제게 절망과 실망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기도해서 신학을 하게 된 친구도 자퇴했고, 저와 함께 기도하며 병이 나았던 자매도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입에 술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술에 취해 거리를 배회하기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알고 있고 은혜를 경험했는데 왜 내 안에 이 모순이 극복되지 않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시요, 생명을 구원한 분이라고 했는데 그 분의 교회 안에는 비리와 다툼과 분열이 있는 것일까”하며 해결할 수 없는 의문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완전한 진리
저는 날마다 술을 마시며 제 인생을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가기로 했습니다. 입대하기 며칠 전 그날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어머니 얼굴 뵙기가 죄송해서 조용히 마루에 나와 앉았습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성경이 눈에 들어온 순간 혐오감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그래도 성경인데 하는 생각으로 펼쳐들었습니다. 그때 제 눈에 들어온 말씀이 오늘 본문인 8절부터 10절입니다. 이 말씀은 제 심령 가운데 송곳처럼 꽂혔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 모든 갈등과 모든 모순이 해결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 그렇구나. 우주와 만물보다 크고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 어찌 그 하나님이 모순과 거짓이 있을 수 있으며 어찌 그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는가? 예수님의 문제가 아니요, 교회의 문제가 아니었구나. 나의 문제였구나. 이 유한한 존재가 어찌 그 하나님의 무한한 진리를 다 담을 수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 속에 있는 진리는 조각에 불과했구나. 그런데 나는 마치 그것이 전부이고 절대인양 생명처럼 붙잡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진리를 잘 표현한 예화 하나가 있습니다. 장님들이 사는 마을에서 세 사람이 코끼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았고, 두 번째 사람은 코끼리 배를, 세 번째 사람은 귀를 만졌습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코끼리 생김새에 대해 얘기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전봇대같이 크고 우람한 놈이었어”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니야. 내가 본 코끼리는 벽처럼 생겼어”하고 말합니다. 세 번째 장님은 “다 틀렸어. 코끼리는 커다란 부채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서로 자기 주장이 맞다고 싸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 장님의 의견은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합니다. 내 안에 와 있는 진리가 거짓되거나 바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진리를 다 알지 못합니다. 다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분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포틀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불완전한 진리가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분이기 때문에 모순이지만 그것은 우리를 영원으로 이끄는 생명의 진리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깨닫는 순간 다시는 이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세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첫째는 남을 비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님께서도 “남을 비판하지 말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저는 제가 전부가 아닌 조각이고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겸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세 번째로 결심한 것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부분이고 조각이기 때문에 내 삶이 가치없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내 안에 있는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그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자”는 결단이었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고린도교회의 분열은 그들 가운데 양보하지 않으려는 진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언과 예언을 말하고 능력을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졌는데 어찌 양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이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나는 부분입니다. 내 안에는 진리의 조각이 있습니다. 그 진리는 나를 영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애쓰지 마십시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진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리는 부분이요 조각이요 모순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간곡한 말로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불완전한 진리, 모순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밖에 없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싸운 두 번째 원인은 ‘진리의 미성숙’ 때문이었습니다. 11절과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교회의 다툼은 교인들의 믿음이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스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부터 3절에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퉜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에서 모순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장점인 단순, 순진, 절대 의존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절대적인 의존을 갖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른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행동 중 부정적인 ‘고집’은 자기 생각 안에 갇혀서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 안에서, 자기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어린 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요?
사랑이신 예수님
히브리서 5장 12절은 믿음의 사람이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일을 명쾌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히브리서는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말씀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 말씀을 삶 가운데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어린 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사랑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말한 모든 것은 진리를 선포했고 행한 모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행한 모든 것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났습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진정 우리의 구주시고 모범이십니다. 사랑 없이 말씀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따라 말씀을 실천할 때 머리로 알고 있는 지식을 마음과 가슴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활동하고 성장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비판하지 말고 따지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따지시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오셨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이루기 위한 기적, 성공하기 위한 기적을 구합니다. 그러나 이루는 기적, 성공하기 위한 기적, 능력으로 나타나는 기적보다 더 위대한 기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포기하는 기적, 버리는 기적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찾아가는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들을 이루셨지만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위대한 것은 바로 여러분 한 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기적을 이루신 일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근심이 그치지 않을 것이고 고통이 쉬지 않고, 모순이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그 사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그 날이 오면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는 그 하나님과 완전한 사랑 가운데 거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들의 한계
고전13장 08절 / 김남준목사(열린교회)
I. 본문해설
고린도 교회는 은사들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2장에서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지 은사를 받은 사람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13장에서 사랑의 속성을 이야기 한 후, 8절에서 사랑이 어떻게 모든 영적인 은사들보다 탁월한지 서술합니다.
본문을 해설하기 전에 은혜를 먼저 정리하려고 합니다. 은혜는 세 가지 용례로 사용이 됩니다. 첫째는 객관적인 의미로 사용을 하면 쓸모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구원의 길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셋째는 주관적인 의미로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하여야 할 바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에 비해서 은사는 은혜와는 달리 일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결과는 사랑이고, 은사의 결과는 효용성입니다.
II. 신령한 은사의 한계
A. 탁월한 은사들
8절에 나오는 은사는 사랑과 비교되고 대조 될 수 있는 탁월한 은사들입니다. 즉, 예언과 지식과 방언입니다. 사도는 이것들이 사랑에 비해 어떻게 열등한지 서술합니다. 희랍어 성경으로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만약 예언들이 있다고 해도 폐지될 것이며 방언들이 있다고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폐지될 것이다.”
B. 하나님의 뜻을 알게함
이 세가지 은사는 얼핏 보기에 병고침의 은사나 능력 같은 것에 비해 열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 안에서 이것들은 매우 높임을 받는 은사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은사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1. 예언(propheteiai)
예언이라고 나오는 ‘프로페테아이’(προφητεία)는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이 행하던 예언을 가리킵니다. 이들의 예언 활동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신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가 대부분의 예언 사역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는 일반적인 말씀 선포도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의 연속성 안에서 검토되어야 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현저히 달랐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제사장과 삼직을 이루면서 신정국가 전체를 솥발처럼 떠받친 직분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때로는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예언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들은 구약의 권위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아래, 사도들의 권위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정적인 범위에서 예언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현저한 차이가 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구속사역의 전개의 현실에 집중되어서 과도기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성경이 완성되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잠정적인 선지자의 직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 예언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바울이 늘 붙박이처럼 담임 목사로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다는 신탁의 예언은 매우 중요한 권위를 갖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2. 방언(glossai)
이뿐만 아니라 방언도 하나님의 뜻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방언에 대해 활발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신약 성경 안에서 방언이 변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방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 2장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불에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고 임재의 경험 후 첫 번째 쏟아져 나온 것이 방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창세기 11장의 빛 아래서 구속사적으로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 서로가 흩어지기를 두려워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이것을 하늘에까지 닿게 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널리 드러내자고 도모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각한 불순종을 징계하는 수단으로써 주신 것이 언어의 혼잡이었습니다. 결국 흩어지게 되었고 언어의 장벽 속에 갇혀서 단절된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러한 저주가 풀리는 구속사적 사건이 사도행전 2장의 방언 사건입니다. 두 본문을 비교해 보면 놀라운 일치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서 흩어지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하시자마자 하나님께서 방언을 주시고, 각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신의 말로 방언을 하는 것처럼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오면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언어인지는 모르지만, 언어로 사람들이 말을 했기에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통역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방언은 어떤 성격의 방언인가입니다.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오늘날의 방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성령의 방언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통역을 하면 방언이 담고 있는 매우 신비로운 하나님의 지시사항들이 파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은 성령의 역사와 무관하며 심리적인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방언은 이미 사라졌고 하나님의 신령한 것에 대 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둘 다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방언은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우선 우리의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청취력의 방언과는 다르고,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 지금 우리가 받는 방언의 은사도 넓은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다고 하는 것에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올바르게 통역이 되면 교회에 하나님에 관해서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에 반해 오늘날의 방언은 그런 계시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그렇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가 없는 방언입니다. 그리고 통역의 은사는 완벽하게 종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방언은 계시를 주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영적 세계를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방언을 경험하고 나면 영적인 세계가 있고 성령이 실제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은 비록 효용성은 끝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로 남아서 믿음을 격려하고 우리를 성경으로 향하게 만들어 주는 유용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3. 지식(gnosis)
또 한 가지는 지식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 8절에서 언급했던 지식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노시스’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그노시스는 복음의 신비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을 가리키는 것이며 성령의 매우 탁월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인데도 복음의 신비를 깨닫도록 놀라운 방식으로 통찰력을 주시면 구약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도들의 설교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가르칠 수 있는 탁월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C. 은사의 한계
당대의 맥락에서 보면 이 은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는 탁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예언과 지식과 방언은 병 고침과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훨씬 탁월한 은사였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은사일 뿐입니다. 은사는 사람을 바꾸어 놓지 못하며 다만 그가 잘 섬길 수 있도록 도구로 받은 것입니다. 은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만, 은혜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줍니다.
바로 고린도교회에 은사는 있지만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의 한계입니다. 은사는 두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은사의 일시성의 한계입니다. 본문 8절의 폐지될 것이라는 종결의 시점이 언제인지를 놓고 은사중지론과 은사계속론, 중간입장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철저한 중지론자들은 사도 시대가 끝나는 지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사도 시대가 종결의 시점인 것은 지나친 해석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모두 부활하여 마지막에 완성될 영화의 그날이라는 데에 보편적으로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고린도서의 방언이나 지금의 예언이나 계속될 것이니까 모든 것이 똑같은 권위를 갖고 살아 있는 것이라는 주장인데, 그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은사들은 완전히 종결됐고 어떤 은사들은 직접적인 전달과 탁월성의 방식으로는 중단되었지만 그와 상응하는 은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록 폐지의 시점이 완성이 되는 그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유한한 일시성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날들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가르쳐 주는 탁월한 은사라 할지라도 영원한 흐름에서 보면 그 시간은 짧은 박막의 시간이며 그 시간 안에 모든 은사들도 종결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둘째는 은사의 수단성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우기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문제들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 은혜가 떨어졌을 때 교회에 심각한 위협으로 등장하게 될 때 생깁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방언이 주어지면 방언 못하는 사람을 하찮게 여길 것입니다. 예언하는 자신을 예언 듣는 사람보다 우월하게 여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최악의 상황이 현실화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은사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두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III. 결론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적인 은혜와 하늘의 궁창에까지 미치는 여호와의 진리를 보도록 탁월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은혜에 달린 것입니다. 그는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지만 은혜에서 멀어지자 육욕을 위해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수단에 불과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에서 존중하는 탁월한 은사일지라도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충만하게 받아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은사와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을 영원토록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나라에서도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모든 신령한 은사들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갈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탁월한 신령한 은사들조차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갖는 것일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사랑
고전13장 08절 / 열린교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Ⅰ. 본문해설
그치고 폐하는 은사와는 달리 사랑은 떨어지지 않고, 영적인 은사가 눈에 띄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만은 못하다고 오늘 사도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Ⅱ. 본문의 정확한 의미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여기서 ‘떨어지다’란 단어는 문자적으로 ‘떨어지다, 넘어지다. 박살이 나다. 붕괴되다.’ 라는 뜻이며 상징적으로는 어떤 것이 멸망하거나 없어지거나 사라지다라는 의미이다. 특별히 고전 희랍어에서는 무대에서 연기하던 배우가 무대 아래로 끌려 내려오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사랑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은 사랑은 없어지지 아니하며 혹은 실패하지 아니하며 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 ‘언제까지나(우데포테)’는 시간적으로 언제까지나 라는 길이라기보다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무엇 무엇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혹은 없어지지 않는다. 혹은 망하지 않는다. 끌어내려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끝으로 우리말 성경에서는 ‘사랑은’이라고 번역했지만 희랍어 성경에는 정관사 ‘헤’가 붙어있으므로 ‘그 아가페는’, ‘그 사랑은’이라는 의미로 13장 8절의 전반부를 이렇게 번역을 하면 가장 은혜로울 것이다. “그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패하지 아니하고 혹은 그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사라지지 아니하고…”라고 말이다.
Ⅲ. 떨어지지 않는 사랑
Α. 떨어지는 은사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8下) 하나님이 교회에 주시는 신령한 은사는 불완전함과 관련 있다. 사랑과 대조하고 있는 예언, 방언, 지식의 은사는 아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의 아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 아는 것의 한계는 이중적인데 하나는 아직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완전한 표준인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주신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성경이 완성된 후에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 모든 우리의 아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한계를 보충시켜주실 목적으로 이 은사들을 맨 처음 주어질 때와는 좀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같은 은사로서 우리에게 남겨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한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선은 우리 영혼의 어두움이다. 죄는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만들어 마땅히 사랑해야할 것 대신 사랑하지 말아야할 것을 사랑하게 함으로서 사물과 가치의 질서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서 당신을 알도록 계시의 말씀을 주셨지만 이 계시를 온전히 아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아는 것이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주셨지만 성경을 모두 아는 것도 아니요. 자연 속에서 주님을 알 수 있는 흔적을 주셨지만 주님이 알라고 주신 것조차 알지 못하는 지성의 눈멂 때문에 우리의 아는 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와 아름다움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로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본래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찬란한 빛을 상실하였다.
인간이 아는 것은 하나님이 아는 것처럼 무한하고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인간에게 알라고 주신 그 한계조차도 이런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눈멂 때문에 올바로 알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이 되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조차도 불신자보다는 낫지만 이런 여전한 어두움과 약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언, 방언, 지식과 같은 은사를 주셔서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알게 하셨다. 이 모든 은사는 그러므로 구원과 이 모든 구원의 완성 사이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Β. 떨어지지 않는 사랑
이에 반해 사랑은 완전함과 관련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까리따스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로부터 와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고 마지막으로 그 사랑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결국에는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시지만 당신 자신이 이 모든 피조물들을 통하여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사랑의 회귀 속에 우리 인간과 이 모든 세계를 두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모든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은 시간 속에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 불쌍한 영혼들, 도덕적인 가치들 이 모든 것들이 시간 속에 있다. 그러나 시간 속에 사랑의 대상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이 세상에 붙잡혀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가능하고 그 사랑은 성향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사람에게로 한 사람의 사랑이 흘러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랑의 대상이 사라져버리고 그 사랑만 남을 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 존재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의존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 속에도 사랑의 대상이 있지만 까리따스는 시간을 초월한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랑이 우리를 감화시켜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할 때에는 그 사랑의 근거가 하나님이 되게 함으로서 실망하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구원과 완성사이에서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구원이 완성된 후에도 끝까지 유용한 사랑이 되어서 영원이 지속되는 사랑인 것이다.
Ⅳ. 천국 - 사랑의 나라
Α. 사랑 : 관계의 성향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사랑으로 엮어진 나라이다. 그래서 이렇게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또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전체 하나님의 성도를 휘돌아 하나님 자신이 당신 자신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형이상학적으로 관계의 성향이다. 이 관계는 어떤 존재와 존재 사이에 있는 위치 그리고r의미를 뜻한다.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데 베푸시는 그 선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또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 그들은 우리를 통해 사랑을 받지만 그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흘러 온 사랑이고 흘러가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이타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 사랑 안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사랑은 거미줄처럼 엮여져있어서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지체들에게로 이 사랑을 흘려보내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고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도 또한 우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통하는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사랑을 받음으로서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받기도하고 우리를 사랑하기도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덧입기도 하고 우리에게 자신들이 받은 사랑을 덧입혀주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가 천국이고 그 안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이 아가페의 거미줄 같은 연결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전체가 흘러들어오고 흘러들어가는 통로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천국은 사랑의 나라이고 이 사랑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Β. 교회 : 그 나라의 모형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교회는 그 나라의 모형이다. 하늘나라에서나 이루어질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도록 하신 선취적 모형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천국에서와는 달리 이 세상에서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유지되고 증진되는 사랑이다.
이 세상의 교회는 천국의 맛보기이다. 이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사슴처럼 기대며 사는 것, 세상은 춥고 눈보라쳐도 교회에서 성도들이 서로 기대어 체온을 나누며 사랑하게 하시는 것은 이 맛보기를 보고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 천국을 사랑하고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의 가치를 사랑하지 말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라고 가르쳐주시려고 교회를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는 천국의 맛보기이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맛보기이다. 그러나 교회가 천국의 맛보기인 것은 틀림없지만 제대로 된 맛보기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하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입술로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감화가 계속 지속될 때에만 이 사랑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 이 은혜의 전적인 의존을 배우게 된다.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만하여 자랑할 수 있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을 그것이 불가능하다. 은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건물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의 아름다움은 관계의 아름다움이다.
Ⅴ. 결론 : 은혜를 사모하라
비교적 은혜 안에 있을 때라도 불쑥 불쑥 솟구치는 이기심,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고라도 행복하고자 하는 나 자신의 욕망과 이욕들, 하나님보다 나 자신에게 나의 사랑을 더 받으려고 하는 정욕 같은 것들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그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고 나의 더러움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발견하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 발라 주신 우리의 심장을 그리스도의 보혈에 깊이 담궈 주님밖에 영원히 사랑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없이는 누구도 이 교회의 지체로서 하늘나라의 맛보기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떨어지는 은사보다 떨어지지 않는 사랑을 하나님 앞에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이것 없이는 일반 섭리 안에서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 사랑은 은혜의 결과이기에 이 사랑을 원하는 사람마다 어린아이 같이 타는 목마름으로 주께 이 은혜를 구하고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교회는 사랑의 교회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물처럼 교회를 덮고 있어서 가장 짐승 같은 사람도 교회에서 그 사랑의 물에 녹아져서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교회, 언제나 하나님이 목회를 통하여 그 은혜를 거두지 않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초월적인 은혜가 언제나 깃들여 있는 교회, 그래서 성도들이 이 죄악 된 세상을 살면서 서로 사랑의 관계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교회이다.
이것은 사람이 가진 무엇으로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을 열고 열린 하늘을 통해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 이기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며 이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신령한 은사도 사라지지만 사랑은 영원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실패하지 않으니 이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숨 쉬는 날 동안 주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티끌만큼이라도 더 빛나도록 그래서 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보석과 같은 성도가 되길 빈다.
사랑의 영원성
고린도전서 13:8~13 / 박덕기 목사
그 동안 성례 주일, 찬양대 정기 연주회, 추수감사주일, 총동원 전도주일 등과 같은 절기 설교를 하느라, 잠시 중단했던 고린도전서 강해 설교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일명 사랑 장에 대한 강해로는 여섯 번째로, 마지막 시간이 되겠습니다. 먼저 지금 까지 상고한바 있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헬라어에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 4 가지가 있는데, 1)에로스 2)스톨게 3)필레오 4)아가페라고 했습니다. 이 아가페가 없으면 어찌 된다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에게 이 아가페 사랑이 없으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모든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가페의 특성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1)오래 참고-사람에 대한 참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2)온유하고-인간관계의 불편은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마 11:28)
3)투기하지 않음-타인의 칭찬에 삐쭉이고 비아냥거리고 체! 흥! 하지 않습니다.
4)자랑하지 않음-자기 능력, 중요성, 헌신을 자랑 않음(바울-약한 것, 십자가를)
5)교만하지 않음-교만이 오면 욕이 오고, 다툼만, 멸망, 하나님께서 대적하심.
6)무례하지 않음-아가페는 질서의 세계. 권위에 존경, 최고의 신사 숙녀이어야
7)자기 유익을 구치 않음-에고이즘-죄의 원천. 하나님도 우리가 섬겨야 함.
8)성내지 않음-성낼 때, 성난 귀신이 성령 대신 발언. 자신을 망치는 줄 알아야
9)악한 것을 생각지 않음-타인의 잘못을 기억하여 복수하려 들지 않는다.
10)불의를 기뻐하지 않음-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11)진리와 함께 기뻐하고-진리가 무엇? 성부, 성자, 성령, 말씀이 진리이다.
12)모든 것을 참음-허물을 ‘덮는다.’는 뜻.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13)모든 것을 믿음-하나님과, 말씀, 사람을 믿고 신뢰함, 의심이 많은 사람?
14)모든 것을 바람-사랑은 염세주의를 모른다. 사랑은 소망의 형제이기 때문.
15)모든 것을 견딤-바위 덩어리가 누르는 듯한 시련도 능히 견디어 승리한다.
이제 8절은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여기 ‘떨어지지 아니하나’란 말은 꽃이나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꽃은 마르고 잎은 떨어지지만, 아가페는 영원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가페야말로 영원한 상록수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예언, 방언, 지식 같은 은사들은, 모두 고린도 교회에서 중요시하던 은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사랑의 영원성에 비하여 모두 일시적인 은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1)구약의 경우-미래사에 대한 예언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사 7:14절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고 한 예언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으로 성취되고 끝이 났습니다. 신. 구약의 모든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전히 성취될 때 끝나는 것입니다.
2)신약의 경우-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치며 설교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이런 일들이 다시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이란, 배우지 아니하고 다른 나라의 언어들을 능통하게 구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방언의 유래를 살펴보면,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혼잡케 되었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제자들이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시급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오직 한 방언만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힘든 어학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한 방언으로 의사가 충분히 상통될 것입니다.
‘지식’이란, 복음의 사실에 대한 해설, 교리, 신학 전반과 모든 학문까지를 포함합니다. 이런 것이 다 소용없게 될 때가옵니다. 그렇다고 천국 백성이 무식하다는 결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일 것입니다. 아담이 얼마나 지혜로웠습니까? 솔로몬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났습니까? 그러나 천국에서는 누구나 그들보다 더 지혜로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혜와 지식의 근본 되신 주님과 직접 대면하고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다 폐할 때가 오고, 아무 소용없을 때가옵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절대 영원합니다.
9-12절은 아가페의 절대 완전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9절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3회나 사용되고 있는 ‘부분’이라는 뜻의 헬라어 ‘메로스’는,‘조각’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즉 은사는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고 대단한 것 같아도, 사실은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방언의 은사가 빠져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렌스키는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을 높이고 자랑했으나, 사도 바울은 방언이 훨씬 낮은 은사라는 것을 지적해 주기 위해 언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분적으로 알고’-우리의 지식은 모두가 부분적인 것입니다. 제아무리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지식의 총량에 비하면, 도대체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 유명한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은 “나는 지식의 변두리를 방황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발명왕이라 일컫는 에디슨은 “나는 점점 몰라집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지식의 불완전은 어떠합니까? 신학적인 문제에서-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 고난 문제? 우리가 그 의미를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연계에 대한 지식은 어떠합니까? 생명, 빛, 전기, 인력의 법칙에 대해서 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유명한 과학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아는 것에 있어서 부분적이고, 그 점에 있어서는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입니다. 유한자가 무한자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인식론에 대한 문제인데, 유한자가 어떻게 무한자에 대해서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는가? 한 마디로 불가지론자들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어떠한 것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한도 내에서, 그 지식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참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올 때란,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지식이나 예언 같은 부분적인 것들은, 모두 그 기능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침 해가 돋으면 뭇별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그 때에는 모든 부분적이며 상대적인 것들은 모두 폐하여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이들은 그것을 방언, 지식, 예언 같은 은사들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고, 다만 일시적인 은사에 대한 또 다른 비유인 것으로 봅니다.
현세에서의 성도는 어떤 의미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합니다. 어린 아이는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깨닫는 것이 유치합니다. 어린아이의 말은 항상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변호적입니다. 또한 어린아이의 지식이란 것은 감각적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지 못하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의 생각하는 것도 현재만을 보고 느끼고 하지,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소망하지 못합니다. 신령한 이치를 모르고, 보이지 않은 것을 두려워 할 줄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어른이 볼 때, 어린아이는 유치한 부류에 속합니다.
여러분,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한축구협회의 정몽준 회장이 일등공신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숨은 공로자가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호랑나비’를 불렀던 김흥국씨 입니다. 그의 축구 사랑은 많은 국민들이 잘 아는 바인데, 우리나라가 월드컵을 개최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오자마자, 김흥국씨가 민간 대사로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FIFA의 미셀 장 루피낸 사무총장, 요한손 유럽 회장, 그리고 제프 블래터 회장 등 거물급 인사들을 모시고 미니콘서트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가 부른 첫 번째 노래는 그의 18번인 ‘호랑나비’였습니다. ♪아싸-호랑나비♪ 그렇게 신나게 노래를 불렀더니, 그 사람들이 듣다못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 유치해, 유치해!” 물론 유머입니다.
어린아이 때는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 등 모든 것이 다 유치하지만, 그러나 어른이 될 때, 어린아이의 모든 일을 저버립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고 나면, 유치한 것들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른이 되어서도 장난감 같은 걸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습니다. 천국에서의 성도는 지금과 비교하여, 마치 장성한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던 것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아가페는 영원히 남게 됩니다.
12절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거울에 대한 이해를 우리가 바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거울은 결코 희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지금처럼 사물을 완전하게 비췰 수 있는 거울을 갖게 된 것은 13세기 때부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발길에 차이는 돌 뿌리처럼 흔해졌지만, 거울은 과거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선사 시대부터 인류는 자신의 모습에 관심을 가졌으나, 구체적으로 거울이 등장하는 것은 지중해 문명들에서였다고 합니다. 일찍이 이집트에서는 금속 거울이 생산되었으며, 그것은 대부분 구리와 주석의 합금, 그리고 녹을 방지하는 청동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유리 거울이 등장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고, 1650년 이후 파리 지역 재산목록 세 건 가운데 두 건이 거울이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 거울이 희귀했는데, 17세기 후반 마지막 20년 동안 파리 인구의 절반이 거울을 장만하였고, 1700년부터는 거울의 기술이 발달하여 가격이 엄청나게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19세기 말에는 파리의 거의 모든 부유층이 거울을 장만하고, 하층민들도 어렵지 않게 거울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그래도 거울이 시골에서까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는 20세기 초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합니다. 이제 거울은 우리 삶의 사치품이 아니라 일상품이 되었습니다. 거울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보게 됩니다. 실험에 의하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생물은 인간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의 거울은 구리나 쇠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거울이란 희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아는 것은, 마치 사도 바울 당시의 구리거울을 통해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밤에 하늘을 보면 별들이 많이 있는데, 어떤 별들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희미하게 보이는 별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세에 대한 우리의 지식도 완전하지 못한 면에서 어린아이와도 같고, 옛날의 거울로 보는 듯이 희미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사람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정확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후 3:18절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13절은 사랑의 절대 최고성, 사랑의 제일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은 금세와 내세에도 항상 필요한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만이 천국에 필요하고, 믿음과 소망은 필요 없게 되므로, 사랑이 제일이라는 의미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탓입니다. 분명히 믿음, 소망, 사랑은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믿음이 천국에서도 필요합니까? 천국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지, 결코 자행자지하고 자립하며 살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소망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잘못 생각하기를, 천국에 가면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졌으니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소망은 무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제일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칼빈은 “사랑의 영속성이 다른 두 가지보다 더 현저하기 때문이다.”고 하였고, 고데트(Godet)는 “다른 두 가지는 사람이 가지는 것이나,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마이어(Meyer)는 “다른 두 가지는 자기를 위한 것이나, 사랑은 남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믿음, 소망을 일컬어 홍옥이나 청옥처럼 단색의 보석이라 한다면, 사랑은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이 제일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믿음도 가능케 하고, 우리의 소망도 가능케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 문제 특히 방언 문제로 불협화음이 많았던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은사, 이를 테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은사 등을 거론하면서, 이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한 후, 13장에서 모든 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인 사랑에 대하여 강력하게 역설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역설한 아가페는, 지상의 모든 방언, 천상의 말보다 뛰어나고, 신학적인 모든 지식, 산을 옮길 만한 믿음보다 뛰어나며, 전 재산으로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는 희생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보다 영원하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은사 등은 이 땅에서만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질병이 없는데, 무슨 병 고치는 은사가 필요하겠습니까? 그 때에는 모든 것을 알게 되는데, 무슨 지식의 은사가 필요하고, 방언이 필요하고, 방언의 통역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때에는 물론 귀신도 없는데 무슨 능력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러한 미래의 사실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있어야 하는 것은 믿음과 소망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은사는 없어도 되지만,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어떤 환경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은사로 세상을 이겨냈습니까? 신기한 능력으로 세상을 이겨냈습니까? 오직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으며, 미래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이 믿음과 소망으로 그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은 믿음과 소망으로 모든 것이 충만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세상이 그들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성도는 이렇듯 믿음과 소망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본질적이고 영원한 믿음과 소망 중에서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천국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사랑, 우리 주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른 어떤 은사보다 이 귀한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위로는 하나님을 미칠 듯이 사랑하고, 아래로는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성도들을 거짓 없이 사랑하고, 생명의 가치를 알아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면 됩니다
고전13장 07절 / 조상호목사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어느 유머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학생이 전학을 왔습니다. 선생님이 아버지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이 "진가진 씨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그 학생을 호되게 야단을 쳤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의 함자를 그렇게 부르니? 다시 제대로 말해봐” 그런데도 그 학생은 주저주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다그치는 선생님의 성화에 그 학생이 아버지 이름을 제대로 대답했습니다. "진짜, 가짜, 진짜, 진가진씨이십니다.“ 유머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바다의 대왕 고래가 큰 사고로 피를 많이 흘려 죽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있는 물고기들이 앞 다투어 자신들의 대왕인 고래를 위해 헌혈을 했습니다. 그런데 평소 고래의 사랑을 많이 받던 붕어가 헌혈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에 있는 물고기들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붕어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난 붕어가 아니고, 붕어빵이었어!“
요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가짜 달걀, 가짜 참기름, 가짜 다이아몬드, 가짜 금, 가짜 은, 가짜 청심환, 가짜 화장품까지 있습니다. 제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 몇 가지를 조사해보았습니다. 먼저 진짜와 가짜 금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열을 가해보면 압니다. 진짜 금은 열을 가해도 검게 되질 않지만, 다른 합금들은 열을 가하면 검게 변해 버립니다. 진짜와 가짜 은을 구분하기 위해서 계란 노른자를 터트려서 발라보면 압니다. 노른자를 발라 검게 되면 진짜 은입니다. 그 이유는 은은 공기 중에서 오래두면 검게 퇴색되는데 공기 중의 황 성분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란 노른자에 황이 많기 때문에 진짜 은은 색깔이 변하는 것입니다. 또 진짜와 가짜 꿀을 구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숟가락에 담아 떨어뜨렸을 때 물엿처럼 주르르 흘러내리면 가짜이고, 응축력이 있어 또박또박 잘려서 떨어지면 진짜라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에 있는 물건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주님의 제자인지 가짜 주님의 제자인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일까요? 어떻게 진짜 제자인지, 진짜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까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다시 말하면 아무리 잎이 무성하다 할지라도, 만약 열매가 없으면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 43절과 44절에서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시나무가 절대로 무화과를 맺을 수 없고, 찔레나무에서 절대로 포도를 따지 못하는 것처럼, 각각의 나무는 그에 따른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통해 알 수 있다(The tree is known by its fruit)”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인에게는,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에게는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무슨 열매가 나타납니까?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화려한 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그에 따른 열매가 나타납니다. 저는 지난 주중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앞으로 9주 동안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지난 주중에 타지역에서 오신 모 목사님으로부터 설교 10개가 들어있는 동영상 설교집을 받았는데, 그 설교집 겉표면에 <성령의 열매 시리즈>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성령께서 다시 한 번 확증해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까지 그 안에 있는 내용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가 성령의 열매 시리즈를 마칠 때까지 그 동영상 설교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동영상 설교를 보다보면, 그 목사님의 말씀에 묶여버려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을 놓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아무튼지 오늘부터 9주 동안 <성령의 9가지 열매>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흔히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4절부터 7절까지를 보면, 사랑의 중요한 특징 15가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7절에 언급하고 있는 4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1) 모든 것을 덮어준다
첫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다같이 7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에서 첫 번째로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한글 번역으로는 원래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 원어로 '판타 스테게이’라는 말인데, ’모든 것을 덮어서 숨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12절에서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사랑의 핵심은 덮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덮어주라는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덮어주라는 것은 죄를 보호해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죄인을 걱정해 주고 보호해주라는 의미입니다.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만, 2007년 12월25일자 연합뉴스에 기가 막힌 사연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20대의 이모씨는 어머니로부터 주식투자 명목으로 받은 3천700만원을 유흥비 등으로 날려 버렸습니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가족들의 질책을 받게 되자 어머니와 누나 2명을 생명보험에 가입시킨 뒤 보험금을 타내려고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2007년 8월11일 새벽 2시30분께 경기도 수원시 자신의 집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든 아버지(56세)를 흉기로 3~4회 찌르고 아버지의 비명을 듣고 안방에서 나온 어머니(50)마저 흉기로 마구 찔렀습니다. 이어 작은방에서 잠을 자던 누나 2명이 거실로 나오려고 하자, 방안으로 들어가 흉기로 누나들을 찔러 중상을 입힌 뒤 다시 거실로 나와 아버지의 온몸을 또 다시 10여 차례 이상 찌르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씨의 어머니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아버지는 급히 병원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오전 6시54분께 결국 숨졌습니다. 집에서 나와 친구 집에 숨어 있던 이씨는 범행 2시간30분만에 아버지가 있는 병원을 찾아와 ‘친구 집에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건현장 주변에서 발견된 흉기와 장갑 등을 들이대며 추궁한 경찰에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씨의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병원에 실려 가기 전 딸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절대 동생이 범인이라고 말하지 마라.” 아버지는 아들의 흉기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얘들아, 절대 동생이 범인이라고 말하지 마라.”라고 말하며 아들의 범행을 덮어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범인을 묻는 형사들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다 덮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세상의 어떠한 보자기보다 넓습니다. 사랑으로 덮이지 않는 죄와 허물은 없습니다. 주님의 공생애를 보면, 죄와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덮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약점이나 허물을 보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드러내지만, 주님은 오히려 사랑으로 다 덮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즉 아가페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은 덮어주는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덮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된 줄로 믿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는 아가페의 실천자들이 된다면,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직장과 사업장에서, 우리 사회에서 갈등과 분열이 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죄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덮어주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아가페의 실력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모든 것을 믿어준다
둘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줍니다. 다시 한 번 7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에서 두 번째로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NIV 영어 성경은 ‘모든 것’을 ‘always' '항상’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사랑은 항상 믿는 것입니다.” 또한 ‘끝까지’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어느 전쟁터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적군의 공격으로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정신없이 후퇴한 후 다시 전열을 정비하다가 자기와 가장 친한 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퇴각하다 심한 부상을 당했든지 죽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병사는 지휘관에게 호소했습니다. “제 친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서 그 친구를 데려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 지휘관은 “허락할 수 없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 때문에 너의 목숨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진으로 달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채 죽은 친구의 시신을 메고 돌아왔습니다. 그 광경을 본 지휘관은 몹시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죽었을 거라고 했잖아. 그래, 시체 하나를 메고 오기 위해 거기까지 가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그러자 그 병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이 친구는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난 자네가 올 줄 알고 있었네.‘”
여러분, 이 병사와 같이 여러분을 끝까지 믿어주는 친구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친구가 있습니까? 주님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면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주님께서 사랑하시되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누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까? 여기 ‘자기 사람들‘이란 당신의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가룟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아셨고,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할 줄도 아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비겁하게 다 당신을 버리고 달아날 줄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믿어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실수와 허물투성이 제자들이었지만, 나중에는 갈릴리 바닷가로 도망을 쳤지만, 주님은 도중에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보면, 부인을 믿지 못하는 ’의처증(疑妻症) 남편‘이 있고, 남편을 믿지 못하는 ’의부증(疑父症) 부인‘이 있습니다. 만약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를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믿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항상 믿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끝까지 믿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사랑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모든 것을 바란다
셋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다시 한 번 7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에서 셋 번째로 ‘모든 것을 바라며’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NIV 영어 성경은 ‘바라며’를 ‘hope' '소망’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소망은 관계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망을 가지고 기대를 한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이웃집 아이가 비뚤어져도 회초리를 들지 않습니다. 아니 들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가 잘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자녀가 비뚤어질 때 회초리를 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 안에는 소망이 들어 있습니다.
1967년 8월 충청남도 구부광산에서 매몰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때 양찬성 씨라는 광부가 갱 속에 갇혀 있다가 무려 16일 만에 구출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세계 기록이었다고 합니다. 그 칠흑 같이 캄캄한 지하의 갱 속에서 양식도 없이 어떻게 살아난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바로 갱과 지상을 연결해주는 전화 때문이었습니다. 양찬성 씨는 전화기를 통해 가족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데, 바로 이것이 절망의 상황에서 그의 생명을 지탱해준 원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바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바라게 하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면 포기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가정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대해 실망하시고 포기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에 대해 기대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남편과 안내와 자녀,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메신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모든 것을 견딘다
셋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다시 한 번 7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 "견딘다"는 말은 헬라어로 ‘Hupomeno’로 군사적 용어입니다. 환경에 대한 인내를 말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직장에서 실직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어려워질 때도 있고, 자녀가 비뚤어질 때도 있고, 건강에 적신호가 올 때도 있고, 가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사랑을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욥기에 보면, 하루아침에 욥은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모든 자녀를 잃어버리는 등, 큰 환란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의 아내가 어떻게 했습니까? 남편인 욥을 저주하고 도망쳐버렸습니다. 평상시에는 잘 알 수 없지만, 고난과 역경이 닥치면 진짜로 사랑을 했는지 가짜로 사랑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잘 풀릴 때, 잘 나갈 때는 누구나 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 가짜 사랑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때는 누가 진짜 교회를 사랑하는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려울 때 보면, 진짜 교회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 동안 교회를 사랑하는 척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과 인내는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15가지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랑에는 인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견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9장 20절을 보면, 사랑에는 인내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야곱은 한 여인을 위해 7년 동안 견뎠습니다. 그럼에도 7년이라는 세월을 수일처럼 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면 7년도 며칠처럼 여길 정도로 인내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최근에 주목받는 CEO 한 사람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동통신회사 KT의 조서환 부사장입니다 그 분은 23세의 나이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그런데 임관한 해에 수류탄 사고로 오른손을 잃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수류탄을 다시 집어서 던지면서, 최대로 팔을 뒤로 뻗는 순간 터져서 앞은 다 괜찮고, 뒤에는 철모를 뚫고 파편이 머리에 몇 개 박히고, 등허리에 파편이 박히면서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당시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뇌가 깡통 찌그러지듯이 줄어드는 아픔을 느꼈다고 합니다. 너무 심한 고통에 기절했는데,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습니다. 당시에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손을 잃은 처지라 여자 친구에게 쉽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에 어렵게 연락을 했더니, 여자 친구가 병원에 왔습니다. 그의 모습을 본 여자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자 친구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30분을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물었습니다. “아직도 나.... 사랑해?” 여자 친구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두 번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고 합니다.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고 합니다. 여자 친구는 나이는 어렸지만 조숙한 면이 있었습니다. 병원 근처로 이사를 와서 아침저녁으로 그에게 식사를 챙겨주고 간호하는 일에 전념을 했습니다. 비록 한쪽 손을 잃었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는 무척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기의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 친구 아버지가 병원에 나타나 딸을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딸이 싫다고 하자, 아버지는 “너, 저놈 아내 할래, 아니면 내 딸 할래?” 양자택일하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절대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잖아요. 만약 아버지가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다면, 어머니가 어떤 태도를 보이기를 원하세요? 한쪽 팔 없는 남자와는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집을 나가 재혼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나는 당신의 팔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체를 사랑했어요’하고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세요?” 이 말에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조서환 씨의 마음속에 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여자 친구에게 빚진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합니다. ‘내 평생 이 여자 하나만은 행복하게 해 주겠다!’ 그 때 그는 인생의 목표를 설정했다고 합니다. '그래, 내 곁에 있어만 준다면, 내가 이 남은 목 숨 다 바쳐서라도 당신한테 고생 안 시키겠다.' 그 후에 그는 서울대 영문과에 가기로 결심하고 병실에서 편입시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영어 문장을 세 번 정도 읽기만 해도 외워졌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줘야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하니까, 쉽게 암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면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파워가 나옵니다. 사랑하면 어떤 수모도 이길 수 있습니다. 조서환씨는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을 하려고 해도 장애인이라고 취업도 쉽지 않았습니다. 낙심될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왜요?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애경의 신입사원 최종 면접장에 한 지원생이 흥분된 표정으로 들어왔지만, 면접 중간에 오른 손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동 탈락됐습니다. 억울함을 못 이긴 그는 면접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목소리는 높이지 않은 채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며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었습니다. “저는 깡패 노릇을 하거나 교통사고로 오른손을 다친 것이 아닙니다. 내 민족 내 겨레를 위해 자의든 타의든 군에 갔고, 또 희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회사 모집공고에는 분명히 국가유공자 우대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써놓고 지키셨습니까?” 결국 이 지원생의 남다른 배짱을 눈여겨본 장영신 애경회장은 그를 뽑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취직이 되어 애경의 하나로 샴푸를 기획할 때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경쟁업체 두 군데에서 이미 선점했기 때문에 시장성이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장영신 회장은 11번 퇴짜를 놨습니다. 그러나 조서환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회장에게 ‘하나로 샴푸가 망하면 분양 받은 목동 아파트라도 팔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회장에게 12번 보고한 끝에 승낙을 받아내 생산했는데, 그것이 바로 샴푸, 린스, 트리트먼트가 하나로 된 ‘하나로 샴푸’라는 제품입니다. 또 20개의 치아를 80세까지 보존해준다는 의미에서 ‘2080’ 이라는 치약을 기획해서 대 히트를 치게 했습니다. 최근에는 3세대 이동통신 브랜드인 ‘show'의 마케팅을 담당했는데, 그 상품은 WCDMA(제 3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팔이 조서환에서 가장 주목 받는 CEO 조서환으로 변화된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로 하여금 견디게 했습니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위에서 종종 자존심이 상해서 못해먹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존심도 내려놓게 만듭니다. 사랑하면 7년도 수일처럼 기다리게 만듭니다. 사랑하면 포기하지 않게 만듭니다. 그런데요, 이 사랑을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랑을 우리의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2010년 한 해 동안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십시오. 가정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공부가 하기 싫습니까? 학교를 사랑하고 선생님을 사랑해보십시오.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 질 것입니다. 직장생활이 짜증이 납니까? 직장동료를 사랑하고 직장상사를 사랑해보십시오, 직장생활이 재미 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사랑으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2010년 한 해 동안 더 크고 넓고 높은 사랑의 능력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합니다
고전13장 05절 / 강성찬목사
옛날 연탄을 태우는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어느 추운 겨울날 저녁 연탄을 피워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밤중에 너무 추워 나가 보았더니 그토록 잘 피던 연탄이 없어졌습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눈치를 챘습니다. 이는 세든 옆집 사람의 소행이라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하게 되면 이웃집과 싸움으로까지 번질 것 같았습니다. 교회 다니는 집사가 싸울 수도 없어서 참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저녁 잠을 자는 척하고 나가보니 건넌방 부인이 연탄을 또 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뛰어나가 잡을까 했으나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간신히 참았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두 주일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이 찾아와 "제가 연탄을 가져간 줄 알고 계셨죠?" 하며 사실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여 점쟁이 한테 물었더니 누구와 실컷 싸우면 액운이 물러가고 행운이 온다고 하여 싸움을 하려고 연탄을 가져갔는데도 도저히 싸움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그녀에게 점쟁이의 잘못됨을 깨우쳐 주고 전도하여 그의 가정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성내기도 더디하라)
성내는 것은 내재하였던 증오가 폭발할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대개 악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악한 것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 생각한다는 '기장하다, 적어두다'는 뜻으로서 악을 악으로 갚고자 다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는 것이 모든 분쟁과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알기에 성내지 않으며 악행자의 비난을 묵묵히 참을 뿐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누군가를 향해 갑작스럽게 자기의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억압, 좌절, 분노의 감정은 우리 모두가 품게 되는 감정입니다. 분노'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기 이외의 대상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나 자신을 향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족속의 언어는 분노의 이 같은 주관적 측면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민족의 표현은 우리에게 생소한 감이 있으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멘데 족은 분노를 말할 때 '베인 마음'이라 하고 미스키토 인디언은 '쪼개는 마음'이라 합니다. '쪼개는 마음'은 분노의 주체가 당한 불의의 결과일 뿐 아니라, 내가 자신의 감정을 지배한 적의(적의)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멕시코의 치이파스에 초트칠 조는 "분노는 달구어진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분노를 느낄 때 어떤 뜨거운 것이 마음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것 같은 우리 감정의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테말라 국경 근처에 거주하는 코놉 족은 분노를 '붉은 영혼'이라 합니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던 '붉은 몸 속'이다. 분노한 사람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은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붉은 영혼이 몸 밖에까지 비치는 것입니다. 서부 아프리카의 맛시 족은 분노를 '썩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분노로 이글이글 타는 가슴은 곧 썩어버립니다. 우리말에도 "속 썩는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분노를 나타내는 감정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냄은 마음속에 잠재해있던 증오가 폭발함을 말함인데,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며, 때로는 패배의 표시로도 나타나게 됩니다. 성냄은 남들로 부터 모든 것을 잃으며, 자신에게는 살인독이 된다고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 학생이 선생님에게 "선생님 저는 성은 내지만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해할 수 있네, 그러나 학생 수소폭탄이 떨어져도 오래가지는 않네. 그러나 무엇으로 그 재난의 상처를 복구할 수 있겠나?"라고 되물었다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성내지 않아야 합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중한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창1:27,28).
그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땅에서 살고 있지마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사는 것 같지만 저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선물은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물을 다스리는 특권 안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특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후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그 말씀 속에는 " 네 마음을 네가 다스려라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책임도 네가 책임지라" 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마음을 다스릴 특권을 우리 자신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스린다고 할 때 사람에 따라 그 다스리는 방법이 차이가 있습니다.
이성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이성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지성인, 또는 문화인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을 비문화인 심하게 애기하면 야만인 이라고 합니다.
자기 양심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일이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양심에 묻고 이것이 도덕적으로 선한 일인가 악한 일인가 남에게 해가 될 것인가 이익이 될 것인가 등 이런 것들을 먼저 생각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우리는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의지에 의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이 의지를 가지고 어떤 어려운 시련이 있어도 끝까지 참고 잘 견딥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후에도 흑인이 백인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미국 남부에서 키가 여섯 자가 넘는 흑인이 마차에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처사로 하차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검둥이 빨리 나가"라고 차장이 그를 향해 크게 호통을 쳤습니다. 몸집이 큰 이 남자는 꾹 참고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전부터 싸움을 좋아하던 그의 친구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말했습니다. "이봐, 조지. 어떻게 된 거야. 어디 한번 주먹을 먹여 주게. 내가 합세해 줄게." 그러자 그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여보게, 하나님이 나의 울화통을 빼앗아 버리셨다네. 그래서 더 이상 싸움을 할 수 없네. 작은 칼을 불에 태우면 날이 무디어지는 것처럼 나도 신앙에 들어가고부터는 싸움을 하는 난폭한 성격이 무디어졌다네." 그러고는 기분이 좋다는 듯이 소리 내어 크게 웃었습니다.
누가 흑인의 마음을 다스린 것이겠습니까? 지성이겠습니까? 양심이겠습니까? 교양이겠습니까? 강한 의지이겠습니까? 아니면 학벌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다스리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물론 지성이 있어야 됩니다. 의지도 있어야 됩니다. 양심도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 참 그리스도인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을 내지 않는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이루어져야 하지만 의로운 분노 역시 사랑의 마음을 품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내는 것은 분내는 것과 진노와는 다르다고 보기도 합니다. 의로운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전에 가득한 장사꾼들을 향해서 분노를 보이셨던 주님의 분노를 의분이라고 합니다. 아덴에 가득 찬 우상을 보고 분노했던 바울의 분노가 의분입니다. 이 분노는 긍정적인 힘이 될 수 있다합니다. 분노는 핏줄기 속에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고 고단한 근육에 글리코겐을 주입시켜 다시 기운을 회복하게 한다합니다. 찬닝 폴로크는 "인간과 자동차는 내부의 폭발에 의해서 앞으로 나간다."고 그의 책에 쓰고 있다합니다.
구약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350회 가량 나오는 데 비하여 '분노'라는 말은 450번 가량 나오는데 그 중에 375회가 하나님의 분노와 연결된다고 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창조적인 경험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남아프리카 므리츠버그에서 경험한 분노였다"라고 대답했다합니다.
병든 분노, 이기적 분노가 아닌 건강한 분노, 이타적 분노는 매우 창조적인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분노라고 자제함 없이 막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때에라도 우리의 분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스려져서 올바른 방법으로 표현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분노하실 때 결코 그 행동이 이성을 잃어버리신 행동은 아니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이하에 보면 양이나 소를 성전 밖으로 몰아내시면서 비둘기장은 부수지 않으시고 다만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고만 말씀 하셨습니다. 양이나 소는 주인들이 밖에서 찾아갈 수 있지만 비둘기는 일단 날아가 버리면 주인이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동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그대로 뒤집어엎기만 하셨지 내던져버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에게는 일체 손을 대지 않으셨습니다. 이 분노의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결코 냉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성내지 아니하는 모두가 됩시다.
우리에게 주신 사랑가운데 행하라 하신 의무를 생각하며 성내지 않아야 합니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합니다.
성내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의무를 감당하는 일입니다. 남들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어떻게 반응 하느냐에 따라 두부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한 종류는 자기의 권리만을 생각하는 사람이고 또 한 종류는 자기의 의무를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권리에만 더 집착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서도 우리의 의무를 더 생각한다면, 특히 성도의 가장 큰 의무인 사랑의 의무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당한 억울한 일이야말로 성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수년 전 남부 캘리포니아 주에 부랑인 폭동이 일어났을 때 일인데 어느 주일 저녁 한 젊은이가 교회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초라하였습니다. 몸은 더럽고 셔츠는 찢어져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수염은 덥수룩하였으며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눈은 퀭하였습니다. 몸에서는 악취와 함께 술 냄새도 풍겼습니다. 그러나 교인 중의 한 사람이 외모를 보지않고 이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게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평생 교회에 발을 들여놓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들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차고 안의 간이침대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낮 동안은 콘칩을 먹고 밤에는 약물을 복용하며 연명하였던 그는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개인적으로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몇 사람은 계속 보살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이 사랑으로 보살피게 되자 스티브란 이름의 청년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관심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러한 매력을 느낀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진심으로 돌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천천히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스티브는 어떠한 강요도 없이 자신의 삶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의 마음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태도가, 습관이, 언어가, 외모가, 드디어는 옷차림까지 변했습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갈망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터로 돌아가기로 결심했고. 나중에는 학교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의 대인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종종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이 그 젊은이를 완전히 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갔고 마침내 졸업했습니다. 현재 그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목회하고 있다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죄나 잘못과 상관없이 오해와 비난과 누명을 받을 때 어떻게 그 분노의 유혹에서부터 승리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사랑에 찬 일념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맡기신 사명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잘못과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우리의 가장 큰 의무인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하신 사랑 실천의 의무를 생각하면서 성내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노력합시다.
성내기는 더디하라는 말씀 따라 참고 평화를 만드는 자로 성내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1:18-19)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성내지 않도록 잘 참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시를 당하면 성을 내게 마련입니다. 이때도 잘 참아 내야 합니다.
케리는 인도의 선교사였는데 성경을 일부 혹은 전부를 인도의 34말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 구둣방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인도에서 선교할 때 지식층에 속한 사람들이 모인 연회 석상에서 한 사람이 케리에게 무안을 주기위하여 거만한 태도로 "당신은 한 때 구두짓는 직공이었다면서요 "주위의 사람이 들을 만큼 큰 소리로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 케리는 "각하 구두 짓는 일이 아니라 헌 신을 고치는 일을 했습니다. "하고 한층 더 자신을 낮추어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키플링은 "사람들이 성내어 네 잘못이라 공박해도 침착할 수 있음이 장부요 남들이 너를 미워해도 미워함으로 대하지 않음이 남자의 표다 "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시카고 대학의 라이트 교수(Quincy Wright)가 <전쟁 연구> (Study of War)라는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거기에는 1480년부터 1941년까지 461년 동안에 각 나라가 전쟁을 한 횟수가 발표되었습니다. 영국 78회, 프랑스 71회, 스페인 64회, 오스트리아 52회, 터키 43회, 스웨덴 26회, 이탈리아 25회, 화란 23회, 독일 23회, 덴마크 20회, 중국 11회, 일본 9회 등입니다. 미국은 지난 150년 동안에 13회 전쟁에 가담했습니다. 이 모든 숫자를 합치면 461년 동안에 458회의 전쟁을 각 나라가 한 것입니다.
사람의 역사는 싸움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싸워서 서로 죽이고 시설을 파괴하고 고아와 과부와 불구자를 산출하는 비극은 이 땅에 지옥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뿐만아니라 엄청난 힘과 비용이 들기 때문에 다른 방면의 건설적인 발전에 막대한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툼이 잦은 사람의 인생은 발전이 없습니다. 오히려 쇠퇴만 있습니다. 특히 다툼의 원인은 분을 참지 못하는데서 시작이 됩니다. 사람과의 사이에서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경건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이 가는 곳마다 시비가 그치게 되어 평화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다툼이야말로 지옥을 만드는 것 같은 비극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서 어떠한 이유로든지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야할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의 시비를 그치게 함으로 이 땅에 평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평화를 만드는 자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모세는 온유함이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인도자로서 온유함이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물을 원하면서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로 인해 낙심하게 되고 격노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온유함이 승하였던 모세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노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극한 분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요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그처럼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노하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입니다. 노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옥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언 25장 28절에서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은 고난 중에도 성내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참기 어려운 일도 나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님을 바라보면 어떤 것도 참고 나갈 수 있습니다. 잘 참음으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을 뱉고 얼굴을 때리며 채찍을 가하는 자들을 향하여서도 성내지 않으시며 잠잠하셨습니다. 이방집권자 빌라도에게 넘겨주셔도 성내지 않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는 잔악한 로마 군병을 향해서도 성내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용서를 빌기까지 하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럼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고 하신 주님 바라보며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을 실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