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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먹어야만 산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먹어야 한다.
먹어야 산다.
너나없이 먹어야 산다.
씨름 선수가 씨름을 잘하려면 기술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기술이 좋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씨름 교본을 많이 보면 되나?
물론 이론을 잘 배워야겠지만 반복해서 씨름을 해야 기술이 는다.
그러나 씨름을 잘하려면 기술만 있어서는 안 된다.
힘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기술을 써먹을 수 없다.
그렇다면 힘은 어떻게 생기나?
역시 씨름을 해야 한다.
반복해서 씨름을 함으로써 힘이 생긴다.
그런데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씨름연습만 하면 힘이 생길까?
옛날 먹을 것 없을 때 먹지 못하고 일을 너무 많이 해 황달이니 늑막염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을 많이 봤다.
먹기만 하고 힘을 쓰지 않으면 힘은 없고 비만이 되고, 먹지 않고 힘만 쓰면 빼빼 마르다 못해 병에 걸리듯이
먹으면서 힘을 써야 힘이 더 생기고 더 건강하게 된다.
그러므로 잘 먹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잘하려면 사랑에도 기술이 있어야 하고 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과 힘 역시 힘들어도 사랑을 하면서 생기지만
받는 사랑 없이 주는 사랑만 하면 사랑이 고갈되어 무관심이 되거나 사랑이 미움으로 바뀐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사랑을 하되 주는 것만큼 받으려 한다.
아니, 조금 주고 많이 받으려 하고, 받기 위해 사랑을 한다.
그러나 서로 그러하기에 서로 늘 결핍을 느낀다.
그러므로 결핍이 없는 충만한 사랑을 사랑해야 하고,
그런 사랑을 받아야지만 그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만이 결핍이 없는 충만한 사랑이다.
생명도 마찬가지다.
생명력과 활력은 주고받아야만 유지된다.
주지 않는 생명력과 활력은 죽은 것이다.
사랑은 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듯
생명도 주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다.
없는 사랑을 할 수 없듯이
죽은 것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아무런 활력도 없다.
그러나 생명력과 활력은 줘야 있게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받아야만 있게 되는 것이다.
성자께서도 성부로부터 생명을 받으셨고
죽으셨지만 성부께서 살려주셔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고, 우리는 더더욱 그러하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부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빵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씀하신다.
살고자 한다면 먹어야 한다.
먹어야 할 것이 주님인지, 밀가루인지 그게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 작은 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저는 지금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틈없이 하는 교육이라 쉽지는 않지만, 어제 강의를 들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기적이 아닐까?’
솔직히 안식년 동안에 할 계획들을 쫙 세워 놓기는 했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우선적으로 공부를 무척 싫어합니다.
그러한 제가 안식년 동안 할 계획들을 다 무시하고, 지금 이렇게 제일 싫어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떠올리면서
인간의 생각들을 뛰어넘는 주님의 섭리에 놀라움을 갖게 됩니다.
가르쳐주시는 교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여러분은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비싼 강의료를 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렇게 평일에 시간을 내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보통 사람들은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교육을 받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해보니 내 삶 안에서 특별하지 않은 날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여지는 특별한 날이었지요.
그리고 그 순간에 불평불만을 던졌을 때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 순간이 가장 내게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먼 훗날 깨닫게 되기도 함을 기억하게 됩니다.
부족하고 나약함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주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부족함과 나약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주님을 이해하고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한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다는 것인지를 의아해했지요.
인간적인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 곧 가장 좋고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이해하게 되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모습은 일상의 삶 안에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서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에 움직이고 있음에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때 주님을 더욱 더 가깝게 만나게 될 것이며,
일상의 삶에서 접하는 기적이 너무 많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주님이 선택한 그릇>
큰 박과 작은 박이 나란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큰 박이 작은 박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바가지가 될 거야.
그런데 우리의 용량에는 큰 차이가 있어.
만약 네가 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담는다 해도 그것은 극히 소량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만약 내가 담을 수 있는 분량을 내게 쏟는다면 철철 넘치고 말 거야.
그러니 내가 너보다 더 우월한 거지.”
작은 바가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와서 두 박을 따 반을 가르고 바가지를 만들었습니다.
큰 바가지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데 사용하였고 작은 바가지는 물을 뜨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집 찬장엔 많은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 중에서 매일 사용하는 그릇이 가장 귀하고 비싼 그릇은 아닐 것입니다.
비싼 것은 나중에 귀한 손님이 올 때나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그릇들이 주인에게 항의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쓰임 또한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그릇을 사용할 것인가는 주인이 결정합니다.
그리고 주인의 결정이 가장 완전합니다.
어제 독서에서 성령께서는 필리포스를 사로잡으셔서 에티오피아 고관 내시에게 세례를 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잡아채듯 데려가시어 아스돗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분명 누군가가 어디로 파견되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내가 좋은 곳에 쓰이건 나쁜 곳에 쓰이건 그것은 주님의 몫이지 내가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 독서에서 나오는 바오로의 선택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스캔들이 될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니아스도 주님의 선택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불만은 단 한 마디로 일축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바오로는 ‘주님이 선택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은 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는데
바오로만큼 적당한 사람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면 더 잘 할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을 뽑아주지 않으면 불평을 합니다.
자신이 이런 하찮은 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자신을 잘 아십니다.
‘나를 선택해 주셨으면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파견되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갖거나 혹은 주님의 선택으로 파견된 이들을 거부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까지 눈에 비늘이 씌어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크기와 다양한 능력을 지닌 그릇들입니다.
그저 주님께서 써 주시는 것이 가장 나에게 맞는 것임을 잊지 말고 그분의 선택에 저항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맛있는 음식>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네 밥이야!’하는 ‘먹힘’으로써 하늘과 소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통을 이루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유사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고해성사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미사 참례 횟수를 늘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
(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
“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나를 먹어라.>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이해한 척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해한 척 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어떻든 그들은 모두 예수님 말씀을 안 믿은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끼리 다툰 것입니다.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예수님 말씀은 믿어야 할 말씀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다투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과 다툴 필요도 없습니다.
다투고 싸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학문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또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이 말씀은 설명이 아니라 선언입니다.
"나를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 라는 말씀과 비슷한데,
두 말씀이 같은 말씀으로 보이기도 하고, 다른 말씀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먹는 것'과 '믿는 것'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예수님을 먹는 일도, 예수님을 믿는 일도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안에 머무른다.' 라는 말이 그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같은 일인데, 믿는다는 말은 먹는다는 말보다는 거리감이 있는 표현입니다.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과 그분을 믿는 내가 분리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는다는 말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내가 예수님을 먹으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 완전히 들어오셔서 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먹는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떻든 우리는 믿는 것과 먹는 것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을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을 먹는 사람'은 우선 먼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을 먹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먹는 일을 막연히 생각으로만, 또는 마음으로만 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또는 상징적인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일이 실제적인 일이 될 수 있도록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을 먹는 일은 상징적인 일이기도 하고, 실제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성체는 상징이기도 하고, 실제이기도 합니다.
성체를 먹어서 얻게 되는 '생명'은 실제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먹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아서 그 생명력으로 살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먹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은 원래 '한처음부터' 하나이기 때문에 믿는 일도, 먹는 일도 필요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하고, 먹어야 합니다.
아직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또 그 나라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이고,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고,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분이고,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그 나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빵으로' (또는, 밥으로) 내어주신 일은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고, 그 일 자체가 사랑입니다.
우리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랑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면 그분께 우리 자신을 모두 내어드려야 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에게 자신을 모두 내어주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삶>
우리는 때때로 공중을 떠도는 먼지처럼 마음과 영혼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모른 채 살아갈 때가 있다.
늘 물리적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정작 내 인격 전체가 하느님과 하나되어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방황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집, 천상 고향을 향한 순례길임을 잊은 채
길들여진 애착과 고착된 습관에 매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하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성체를 받아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제 그분은 성체가 그리스도인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지를 묘사한다.
‘있다’, ‘머물다’, ‘거처하다’는 뜻의 그리스어 ‘메네이’(μ?νει)는
영원히 변치 않을 관계, 친밀한 일치를 뜻한다.
곧,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영원히 변치 않을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일치를 이루는 결속관계가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 안에 머무는 삶이 어떤 것인지 묵상해보자.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곧 삶의 모든 면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그분과의 ‘존재적 일치’ 곧, 깊은 친교를 유지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친히 확인해주셨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4-5)
요한복음에서 ‘머무른다’는 것은 또한 ‘말씀 안에 머묾’을 의미한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32)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 15,7)
주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곧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9-13)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은 편안한 장소나 일시적으로 정서를 충족시켜 주는 공간이 아니라
예수님이요, 그분의 말씀이며 그분의 사랑이다.
우리도 현세적인 만족을 가져다주는 ‘공간’이 아니라
그분과의 친교를 이루고 진리를 깨달으며, 사랑의 존재가 되기 위해 주님 안에 머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참 행복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은
언제 어디서든 주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말씀을 새겨들으며, 자신을 내놓는 사랑임을 명심했으면 한다.
마음이 허전하고 앞길이 막막할 때
오직 믿음 하나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 안에 머물러보자.
- 작은 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만남의 여정 -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요즘 '렉시오 디비나(성독)' 수행이 널리 보급되고 있습니다.
어제 오후 피정 강의 주제 역시 렉시오 디비나였습니다.
저는 항상 세 종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를 강조합니다.
첫째가 신구약 성경, 둘째가 자연성경, 셋째가 내 삶의 성경입니다.
신구약성경이 하느님과 인간의 무수한 만남으로 이루어졌듯이
내 삶의 성경 역시 무수한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과연 우리 삶의 여정은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남의 신비, 만남의 선물, 만남의 기쁨, 만남의 행복 등 만남을 예찬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무수한 만남이 내 운명을 결정하며 만남들을 통해 내 삶의 꼴도 형성되어 갑니다.
하루하루 죽을 때까지 써가야 할, 완성되지 않은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만남 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무수한 만남들을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되고 삶은 더욱 깊어지고 풍요로워집니다.
사람의 신비는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고유한 삶의 성경책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만의 고유한 역사가 있는 삶의 성경책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 없듯이 똑같은 삶의 역사, 삶의 성경도 없습니다.
하여 내 삶의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자는 타인의 삶의 성경도 소중히 여깁니다.
그 삶의 성경을 통해 부단히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제 좋아하는 '방문객(정현종)'이란 시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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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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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사람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살아있는 성경이라 생각하면
사람 하나하나 소중히 환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며칠전 신문 컬럼에서 '이름을 불러주세요(이명수)'라는 글을 감동깊게 읽었고 그 일부 내용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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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304명이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영상을 봤다.
이름만 부르는 데도 10분이 넘게 걸린다.
한명의 이름만이라도 나지막이 불러주시라.
천천히 적어 주시라.
그러면 세월호 지겹다는 얘기 안 나온다.
나일 수도, 내 부모형제일 수도 있는 이들이었다.
하나하나 이름을 적다가 오래 울었다.
304개의 우주가 우리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졌다.
그게 세월호 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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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우주입니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고유의 성경책입니다.
저 역시 요즘 하루 한명씩 '남자수도자장상협의회'에서 나온 공문의 명단에 따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낯선 이름을 적고 기억하며 연미사를 봉헌하는 데 아픔을 느낍니다.
오늘 이름은 '최민석'입니다.
모두가 소중한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경책이요,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한쪽의 써가야 할 성경책입니다.
오늘 1독서의 사도행전은 그대로 사도 바오로의 삶의 성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뿐 아니라 바오로 서간 모두가 바오로 삶의 성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과 만남의 생생한 증언들로 가득한 삶의 성경입니다.
오늘 주님과 바오로의 극적인 만남이 충격적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 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다 하는데
바로 사울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의미합니다.
마침내 주님의 사람,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이 열려 다시 보게 된 사울은
며칠 후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선포하며 복음의 일꾼으로 활약합니다.
만남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만남 중의 만남이 예수님과의 만남,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운명이 극적으로 바뀐 사울이듯이
우리 역시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고 지금은 수도생활에 몸담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삶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까요.
상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미사를 통한 생생한 주님과의 만남이 하루하루 의미충만한 삶의 원천이 되고
내 삶의 성경 내용을 풍부하게 해 줍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오늘도 우리 모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복된 하루가 되었습니다.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어떤 일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리저리 재 보고 나서,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의 모임에서 누가 사울을 데려오자고 했다면 아마 모두가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부르심을 받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사울은 사도 8,1에 등장합니다.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그는 살기를 내뿜는 박해자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 신자들은 쉽게 그를 신뢰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박해자였던 그가 신앙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의심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사울을 찾아가라고 하셨을 때 하나니아스도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주님께서 “가거라.” 하시니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사울이 안수를 받을 만하다고 판단해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는 이렇게 선택되었습니다.
사도들도, 하나니아스도, 신자들의 공동체도 그를 선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을 선택하지 않았으니,
그 선택은 분명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선택과 결정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된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하느님의 개입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전개된 일들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깊숙이 관여하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는 처음부터 인간의 결정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선택받은 바오로는 회개하여 새사람이 된 다음,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전부이며 그분을 아는 지식 이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고 선언합니다(필리 3,8 참조).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리스도인은 천상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현세라는 광야의 여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여정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양육되어야 합니다.
성체를 주님의 몸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자기 희생의 길이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그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오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듯이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도 새롭게 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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