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안부를 묻습니다.
살아 세운 허술한 집보다
단정한 햇살이 결 고운
식솔 거느리고 먼저 앉았는데
먼 산 가치운 산
무더기째 가슴을 포개고 앉은
무심한 산만큼도 벗하고 싶지 않아
우리보다 무덤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승사람일 적
우리만큼 미련퉁이였을
그가요 살아 세운 허술한
집에서 여즉
그와 삶을 나누고 있는 우리에게 요
점심밥만큼 서늘한 설움이
장한 바람에 키를 낮추는데
낫을 겨누어 베어버리는 건
누워 앉은 무덤입니다.
- 시집〈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허수경 시인〉
△ 시인 허수경은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 시집으로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산문집으로 '모래도시를 찾아서' '너 없이 걸었다' '그대는 할망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길모퉁이 중국식당', 번역서 '끝없는 이야기' 등이 있다.
△ 2001년 '동서문학상', 2016년 '전숙희문학상', 2018년 '제15회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다.
△ 2018년 10월 지병으로 별세했다.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폭풍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사막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심해가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의 탱크가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의 테러리스트가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의 전쟁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군인이 있다면
내가 기다리는 곳까지 와서
맑은 차를 마시다가 잠이 들 거야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잘 차려진 저녁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잘 저문 저녁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잘 여문 밤
별이 새처럼 지저귀는 언덕에서
잠드는 해도 잎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잠든 해 별의 먼지 아래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있다면
얼마나 순한 눈썹을 당신은 가지고 있을까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이미 뭉개진 꽃의 세월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타고
우주를 달리면서 세월은
잎새, 잎새라고 속삭이지 않을까
파블로 피카소 / 사진 〈Bing Image〉
폐병쟁이 내 사내
허 수 경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사진 〈Bing Image〉
한 그루와 자전거
허 수 경
저 나무는 한번도 멈추지 않았네
저 자전거도 멈추지 않았네
사람들의 마을은 멈춰진 나무로 집을 짓고
집 속에서 잎새와 같은 식구들이 걸어나오네
멈추지 않는 자전거들의 동심원들은 자주 일그러지며
땅위에 쌓여갔네 나무의 거름 같은
동심원들 안에서 사람의 마을은 천천히 돌아가네
차륜의 부챗살에 한 그루의 그림자를 끼워 넣으며
자전거는 중얼거리네
멈춘 나무 사이에서 멈추지 않는 자전거가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한 그루와 자전거가 똑같이 멈추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천천히 멈추면서 한 그루가 되는 것은 얼마나 아려운가
사진 〈Bing Image〉
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
허 수 경
나는 그렇게 있다 너의 눈 속에
꽃이여, 네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너를 바라보던 내 눈 속에
너는 있다
다람쥐여, 연인이여 네가 바삐 겨울 양식을 위하여 도심의 찻길을 건너다 차에 치일
바라보던 내 눈 안에 경악하던 내 눈 안에
너는 있다
저녁 퇴근길 밀려오던 차 안에서 고래고래 혼자 고함을 치던 너의 입안에서
피던 꽃들이 고개를 낮추고 죽어갈 때
고속도로를 달려가다 달려가다 싣고 가던
얼어붙은 명태들을 다 쏟아내고 나자빠져 있던 대형 화물차의
하늘로 향한 바퀴 속에 명태의 눈 안에
나는 있다
나는 그렇게 있다 미친 듯 타들어가던 도시 주변의 산림 속에
오래된 과거의 마을을 살아가던 내일이면 도살될 돼지의 검은 털 속에
바다를 건너오던 열대과일과 바다 저편에 아직도 푸르고도 너른 잎을 가진
과일의 어미들 그 흔들거리던 혈관 속에
나는 있다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며 뻘게를 찾는 바닷가
작은 남자와 그 아이들의 눈 속에 나는 있다 해마다
오는 해일과 홍수 속에 뻘밭과 파괴 속에
검은 물소가 건너가는 수렁 속에
과거에도 내 눈은 그곳에 있었고
과거에도 너의 눈은 내 눈 속에 있어서
우리의 여관인 자연은 우리들의 눈으로
땅 밑에 물 밑에 어두운 등불을 켜두었다
컴컴한 곳에서 아주 작은 빛이 나올 때
너의 눈빛 그 속에 나는 있다
미약한 약속의 생이었다v
실핏줄처럼 가는 약속의 등불이었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허 수 경
아이들은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가고
할미는 손자의 손을 잡고 노천 화장실로 들어간다
할미의 엉덩이를 빛은 어루만진다 죽은 아들을 낳을 때처럼
할미는 몽롱해지고 손자는 문 바깥에 서 있다 빛 너머로
바람이 일어난다
늙은 가수는 자선공연을 열고 무대에서 하모니카를 부른다
둥근 나귀의 눈망을 같은 아이의 영혼은 하모니카 위로 날아다닌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빛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이의 영혼에 엉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처럼 허덩거리며 하모니카의 빠각이는
이빨에 실핏줄을 끼워넣는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Double Bass Quartet No. 2 in D Major: I. Allegro modera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