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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마이피
한국광복군의 표상 박시창 선생
한국광복군 박시창(朴始昌)선생
(1903. 11. 5 ~ 1986. 6. 7)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가던 1903년 11월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선생의 부친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의 임시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한국통사 등 역사연구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선각자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 박은식의 강렬한 민족정신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911년 4월 선생의 모친이 병사하였다. 같은해 5월에는 국사연구를 통한 국혼 유지를 결심한 부친 박은식이 오랜 계획 끝에 국경을 탈출하여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때문에 선생은 주로 누님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선생은 1916년 서울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졸업하였다. 오성학교는 나라가 위기에 처할수록 민지(民智)를 일깨우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로 생각하고 교육사업에 치중하던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장 박은식이 설립했던 학교였다. 박은식은 오성학교를 설립한 후 직접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부친이 설립한 민족교육기관이자 근대제도에 의한 중등학교에서 수학하였던 것이다.
오성학교 졸업후 선생은 부친 백암 박은식의 지인을 따라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선생은 부친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그때부터 선생은 부친 박은식이 1925년 11월 타계할 때까지 그를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노령(露領)에서 3ㆍ1운동 소식을 접하였으며 같은해 9월말 부친 박은식과 함께 하얼빈을 거쳐 상해(上海)로 갔다. 당시 상해에는 3ㆍ1운동 직후 출현한 국내외의 임시정부를 하나로 합친 이른바 통합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민족지사들이 운집하고 있었다.
상해에 온 선생은 아직 스물이 채 안된 나이이지만 부친을 도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후인 1921년 10월 선생은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 망평가(望平街) 261호에서 부친 박은식, 박경산(朴景山), 박태하(朴泰河), 황훈(黃勳), 최중호(崔重鎬), 김문세(金文世), 이영운(李英雲) 등과 함께 중국 광동 출신의 부호 임택풍(林澤豊)의 지원으로 사민보(四民報)를 발행하였다. 임택풍은 중국 광동성(廣東省) 공교회(孔敎會) 회장으로 박은식과는 뜻이 잘 맞는 절친한 사이였다. 재력가이기도 했던 임택풍은 박은식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박은식은 그의 원조로 몇 년 동안 경제적인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독립운동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한때 선생은 부친 박은식, 기타 동지들과 함께 사민보 사내에 기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민보는 16면의 일간지로 배일의식을 고취하는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발간 부수는 3만여부로 그 가운데 2천여부는 한국내에 우송되었다. 특히 부친 박은식은 사실상 사민보의 주필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 신문에 강렬한 항일논설을 게재하거나 이순신장군 전기를 연재하여 일제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 선생은 부친 박은식이 저술한 명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수백부를 휴대하고 북경(北京)으로 가기도 하였다. 선생은 북경에서 한국인 및 중국인의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이 서적을 배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923년경 선생은 남경(南京) 중앙대학(中央大學)에 수학하다가 휴학하였다. 그 원인은 학비 등 생활고 때문으로 보인다. 남경에서 상해로 돌아온 선생은 조선인청년동맹회(朝鮮人靑年同盟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상해지역의 청년 회원 117명을 보유한 동맹회의 목적은 혁명적 정신을 고취하고 단합적 행동을 훈련함으로써 민족독립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선생이 독립운동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부친이자 독립운동계의 원로였던 박은식선생이 평소 소원이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 상해에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1925년 11월 1일 오후 8시 선생의 임종 하에 부친 박은식이 상해의원(上海醫院)에서 서거하였다.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을 지냈던 그에 대한 장례는 국장례(國葬禮)로 거행되었다. 1925년 11월 4일 고인의 유해는 상해 정안사로(靜安寺路)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독립신문에 의하면, 임시정부는 백암 박은식의 영윤인 선생에 대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때까지 당분간 생활 지원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1926년경 선생은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5기 포병과(砲兵科)에 입교하였다. 이곳에 수학하던 선생은 1926년 7월 중국의 제1차 북벌전쟁(北伐戰爭)이 시작되자 중국 국민혁명군 포병대에 편입되어 참전하게 되었다. 1926년 10월 중국 국민혁명군이 무한(武漢)에 입성하고 이곳에 북벌군의 초급 간부 확충을 목적으로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黃埔軍官學校 武漢分校)가 설립되었다. 이때 무한은 한국인 장교와 각처에서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이 일시에 운집하여 혁명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 학생들 다수가 이 무한분교에 입교하는 동시에 북벌에 참가하였다. 1927년 7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이후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한편으로는 한국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혁혁한 업적을 세운 의열단(義烈團)과도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이는 선생이 후일 의열단이 주축이 되었던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참여하여 활동하게 되는 인연이 되었다. 1919년 창설된 의열단은 1926년 이후 단의 주력이 혁명의 성지였던 광동성 광주(廣州)로 집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의열단은 한인 운동자층과 황포군교 입교생들 가운데 다수의 신입자를 충원함으로써 조직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그리고 국민혁명군의 북벌 이후 점령되었던 무창(武昌)과 남창(南昌)에도 의열단 지부를 두게 되었다.
무창에는 이미 많은 한인청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에 다녔던 진공목(陳公木)ㆍ진갑수(陳甲壽)ㆍ안재환(安載煥)ㆍ김영재(金英哉)ㆍ송욱동(宋旭東)ㆍ장기준(莊驥俊) 등과 규합하여 중국군 기술교관으로 있던 백득림(白得林)ㆍ홍의균(洪義均)ㆍ권준(權晙)ㆍ전창무(田昌武)ㆍ노세방(盧世芳) 등과 같이 무한한인혁명청년회(武漢韓人革命靑年會)를 조직하였다. 혁명청년회는 안으로는 동지들에 대한 훈련에 치중하는 한편 밖으로는 독립운동의 선전사업을 펼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후에 의열단 무창지부로 확대발전하였던 것이다.
의열단 무창지부의 단원으로 파악된 인원은 선생을 비롯하여 진공목, 진갑수, 박태섭(朴泰燮), 유원도(劉元道), 백계(白桂), 최승년(崔承年), 이벽파(李碧波) 등 8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학생들이었다. 무창지부의 모든 단원은 매주 일요일에 무한분교에서 소조회(小組會)를 열어 국제정세, 혁명운동의 동향, 동지획득 상황 등을 보고ㆍ토론하고 민족운동에 대한 지식을 함양하였다.
그후 선생은 1928년 남경의 군관단(軍官團) 입대를 거쳐 1929년에는 국민혁명군 경위군(警衛軍)에서 8년 동안 복부하였다. 경위단은 나중에 제87사단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1932년의 상해사변에 투입되는 정예부대였다. 선생은 1930년 하남(河南)의 염풍전(閻馮戰, 閻錫山과 馮玉祥의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1932년에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1931년 9월 만주를 점령한 일제는 1932년 1월 28일 장갑차로 무장한 일본 해군육전대를 앞세워 상해를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중국군 제19로군(第19路軍)이 응전함으로써 제1차 상해사변이 발발하였다. 제19로군은 용감하게 저항하였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정부에서는 중국군에서도 가장 정예부대로 일컬어지는 제5군을 대일항전에 투입하였다. 이때 선생은 육군 대위의 계급으로 중국군 제5군 제87사단 예하의 중대장으로 참전하였던 것이다. 선생이 속한 중국군은 2달 이상 용감하게 저항하였지만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승에 취한 일본군은 ‘천장절’을 기하여 홍구공원에서 ‘전승기념식’을 거행하려다가 윤봉길(尹奉吉)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응징된 것이 이 무렵의 일이었다.
1935년경 선생은 김구(金九)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활동에도 협력하였다. 1934년에는 김구는 만주에서 남하한 이청천(李靑天) 등과 합작하여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여 한인 군사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김구는 각지에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원을 파견하였으며, 주요 지역에는 지방 연락원을 배치하였다. 이에 1935년 9월 무렵 김구는 북경, 광동(廣東), 낙양(洛陽), 상해 등지에 중견인물들을 파견하여 연락업무를 맡겼다. 김구와 지방 연락원의 통신에는 남경(南京)우체국 사서함이 이용되었다. 이 가운데 선생은 노태연(盧泰然), 염온동(廉溫東)과 더불어 낙양에 배치되어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선생은 낙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렸다. 1936년 선생은 황해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중호(崔重鎬)의 여식인 최윤신(崔允信)과 결혼하였다. 1917년 상해로 망명한 이후 상해 교민단(僑民團) 단장,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을 역임하였던 최중호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제인 최채(崔采), 최윤경(崔允慶)도 모두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던 집안이었다. 특히 최중호는 임시정부 초기부터 선생의 부친 박은식과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이러한 점이 선생이 최윤신과 결혼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선생은 낙양군관학교의 교관으로 있다가 사천성(四川省) 중경(重慶)의 신병훈련처로 전임되었다. 이때 선생은 신병훈련처의 대대장으로 재직하였다. 그후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던 1940년경 선생은 호북성(湖北省) 의창(宜昌)으로 가서 근무하였다. 이곳에서는 일본군의 치열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장강(長江) 북방 고지를 3개월 동안 사수하는 수훈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중국군에 복무하던 선생은 1941년 김홍일(金弘壹)과 함께 당시 중국 군사교육과 관련하여 최고의 엘리트과정이었던 육군대학(陸軍大學)에 입교하여 군사학을 연마하였다. 여기에는 최용덕(崔用德)이 한 기 앞서 입교하였는데, 한국인으로 중국의 육군대학을 수학했던 것은 이들 세 사람이 유일하였다. 원래 3년제인 육군대학은 당시 전시상황을 감안하여 전적(戰蹟) 시찰 여행과 하계 및 동계방학을 단축하여 2년 졸업으로 되어 있었다. 대신, 학교의 수업은 평시와 달리 전술과 전략 연구에 더 치중하였다. 선생은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육군대학에서의 2년 동안의 수학은 선생이 군사학을 매우 체계적으로 또 깊이 파고들어 연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다. 아울러 이 경험은 선생이 한국광복군 및 광복후 국군에서 중책을 맡게 되는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한편 1940년에는 윤봉길의거(尹奉吉義擧) 이후 오랫동안 피난살이를 했던 임시정부가 최종적으로 중경(重慶)에 안착하였다. 임시정부는 산하에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였다. 임시정부의 국군에 해당하는 한국광복군은 창설 직후 총사령부를 최전선인 서안(西安)으로 이동하는 등 대일전열을 재정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2년 5월에는 화북(華北)의 팔로군지역(八路軍地域)으로 북상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주력을 제외한 중경에 잔류하고 있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던 1938년 10월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되어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 대일본군 반전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선생은 이때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1943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의 기구에 대한 일부 개편이 단행되었다. 이때 선생은 광복군 총사령부에 편입되어 고급참모(高級參謀)에 선임되었다.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후보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44년 8월에는 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던 한국광복군 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이 폐지되었다. 임시정부의 끈질긴 취소요구의 노력으로 마침내 1944년 8월 중국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로부터 9개준승의 취소가 통보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부는 자주적인 조직체제를 갖추기 위한 편제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총사령부는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조직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때 광복군에 파견되어 있던 중국군이 대부분 철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총사령부 각 부서에는 한국인 장교들이 임명되었다. 1944년 10월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선생과 문일민(文逸民)을 참모부의 참모로 임명하였다. 선생은 참모부(參謀部) 참모(參謀)로 동년 12월까지 재직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의 끈진길 항일투쟁과 연합군의 승전으로 드디어 일제가 무조건 투항을 하였다. 일제 패망후 임시정부는 ‘현체제 그대로 환국한 뒤, 민의(民意)에 따른 정부를 재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전후 처리와 환국 준비에 착수하였다.
임시정부의 국군인 광복군은 일제패망후 중국 대륙에서 확군사업을 추진하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임시정부에서는 중국정부에 일본군에 동원된 한인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주도록 요청하였다. 확군사업의 목적은 광복군의 규모를 확대하여 귀국후 건군의 기초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확군의 주대상은 중국 주둔 일본군 소속 한적사병(韓籍士兵)들이었다. 이들은 비교적 높은 학력과 건강한 신체를 지녔으며, 정규 군사훈련까지 받은 군사, 정치 인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외에 교민들 가운데 청년들도 광복군의 확군 대상이었다.
광복군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의 명령으로 광복군 각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역에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파견하는 동시에, 일본군내 한적사병을 접수하여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중국의 주요도시에 설치하게 되었다. 광복군의 기존의 3개 지대 외에 7개의 잠편지대를 증설하여 도합 10개 지대로 확장하며 각 지대는 완전한 사단 편제로 조직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특히 선생은 1945년 8월 한국광복군 상해잠편지대(上海暫編支隊)의 지대장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8ㆍ15직후 많은 한국 교포들이 몰려있던 상해 및 인근지역 교포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한적(韓籍) 사병들의 귀국 알선에도 진력하였다. 선생은 8ㆍ15 일제 패망후 일본군에서 이탈하여 상해에 집결하였던 한적 장병 청년들을 수용하여 광복군을 확대하였다. 확대된 한국광복군 상해잠편지대는 오송(吳淞) 호강대학(滬江大學)에 주둔하였다.
한편 1945년 10월 7일 광복군 상해잠편지대장이었던 선생은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駐滬) 판사처장(辦事處長) 김학규(金學奎)와 함께 상해에 도착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에 대해 특파단 활동 상황과 한적 사병 인수 집결에 관한 업무를 보고하였다. 그런 다음 선생은 10월 10일경 상해 호강대학에 집결 중인 한적 사병 6천여 명의 사열식(査閱式)을 대학 광장에서 진행하였다. 비록 일본 군복을 입은 그대로의 대열이었으나, 새로 광복군으로 편입된 이들의 씩씩한 모습과 늠름한 행진은 보는 사람으로 깊은 감명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던 광복군 확군활동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미군정은 광복군이 군(軍)으로서의 편제를 유지하여 귀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는 미군정의 정책은 중국 국민당정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광복군 확군활동을 지원하던 중국 국민당정부도 1945년 12월에 접어들면서 광복군의 확군활동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선생을 비롯한 광복군 전원은 교민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혼란한 전후 사정으로 1946년 2월에 가서야 미 제7함대의 협조를 얻어 귀국을 시작하게 되었다. 광복군은 상해를 비롯한 중국 해안의 여러 항구에서 선박편을 통해 1946년 2월 하순부터 6월 말 사이에 귀국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광복군 총사령부는 ‘한국광복군 복원선언(韓國光復軍復員宣言)’을 발표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한국 광복군의 해산 선언’이 되고 말았다.
선생과 상해잠편지대 대원들도 이때 귀국하였다. 1946년 7월 귀국 후 선생은 국군에 입대하여 중령의 계급으로 1948년 신설 제16연대 연대장, 1949년에는 제102여단장을 역임하였다. 그후 선생은 6ㆍ25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등을 거쳐 1959년 6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1976년 선생은 안춘생(安椿生)에 이어 제5대 광복회(光復會) 회장에 선임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ㆍ자필이력서(박시창)
ㆍ공훈록(국가보훈처) 5권
ㆍ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63·381면
ㆍ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47면
ㆍ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185·197면
ㆍ벽옹김창숙일대기 148·151면
ㆍ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60·448·479면
ㆍ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514·614·775면
ㆍ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25·343면
ㆍ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57면
ㆍ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30면
ㆍ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24·371·607면
ㆍ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7권
ㆍ독립신문(대한민국임시정부) 1925년 11월 11일자
ㆍ백암박은식선생전집(동편찬위원회) 6권
ㆍ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1권, 10권
ㆍ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
ㆍ대륙의 분노(김홍일)
ㆍ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한국정신문화연구원)
ㆍ한국광복군연구(한시준)
ㆍ한국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김영범)
ㆍ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한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