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벨기에 브뤼셀의 한 병원.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우리 딸이 며칠 전부터 심하게 기침을 합니다"
생후 3개월이 된 갓난아기였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마른 기침을 뱉어내는 아기는 한눈에 봐도 병 색이 역력했다.
숙직 의사는 청진기로 이리저리 아기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단순한 감기가 아닙니다. 백일해입니다"
"백일해요? 안 좋은 병인가요?“
"연령이 낮을수록 위험한 병입니다.
기관지 폐렴이나 폐에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인 무기 폐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요.
이 아이는 조금 심각한 상태입니다"
의사의 말에 아기의 엄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선생님, 꼭 좀 살려주세요.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제 아기 만은 꼭 살려주세요"
다행히 아기는 의사와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걸음마도 떼기 전에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아기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 열 살이 되었을 때 부모가 이혼하게 된 것이다.
나치 추종자였던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고 아이는 할아버지 손에 맡겨졌다.
아이는 이때부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난 발레리나가 될 거야"
오드리 헵번은 발레를 좋아하는 꿈 많은 발레리나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170 센티미터에 달하는 큰 키가 문제였다. 발레리나는 신체적인 조건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지만 무대에 서고 싶다는 그녀의 욕망은 멈출 수가 없었다
50년도 넘은 것 같다.
어느 날, 아버지가 중고 흑백 텔레비를 사왔다.
텔레비를 켜자 세상에서 제일 이쁜 여자가 나타났다.
로마의 휴일, 그리고 오드리 헵번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서양 여자였다.
그녀는 그때부터 나의 우상이었다. 모든 서양 여자가 오드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후로도 한참 지나서 였다.
아마 서울 올림픽이었을 것이다. 여자 육상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서양여자들의 실체를 알았다.
그리고 일본에 가서 많은 서양 여자들과 만났다. 학교에서도 유학생 여자들을 보았고, 우에노 극장에서 全裸로 쇼를 하는 서양여자들의 恥部를 보고서야 실체를 깨달았다.
여자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러나, 오드리에게도 다른 여자처럼 그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로마의 휴일’은 그 후, 내가 영화광이 되고 글쓰기를 하면서 영화 비평을 쓰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작가가 아니었다면, 영화감독이 되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짐작을 했을 정도였다.
일본에서 태어난 딸아이가 나의 마음을 아는지 연극 영화과에 입학을 했다.
딸아이는 고3때 학교에 안가고 강릉 인권영화제에서 하루 종일 영화만 보았다고 관계자들이 나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연극영화과에 입학을 하고 나서 영화 잡지에 칼럼을 쓰다가, 영화판이 싫다면서 보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비록 ‘오드리’와 ‘로마의 휴일’이 나에게 어릴 때 스쳐 지나가는 꿈이 었지만, 나의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망한 ‘오드리’는 여전히 나의 연인이고, 나는 영화광이고 내 멋대로의 영화 후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
첫째 딸은 내 영향을 받았는지 연극영화과에서 공부를 했다.
‘로마의 휴일’에 대한 일기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소년은 영화를 보고 영화광이 되었고, 영화감독을 꿈꾸기 시작했다.
소년의 일기는 잠자던 그의 문학성을 깨워주었다.
오드리 헵번은 소년의 영원한 여인이 되었다.
그녀 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그 후 나타나지 않았다.
로마의 휴일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유럽을 순방하던 이국의 젊고 호기심 많은 앤 공주(오드리 헵번)는 딱딱하고 어렵기 만한 공식 일정과 지루한 만찬 따위에 지쳐 버린다.
로마에 도착한 공주는 늦은 밤 몰래 궁을 빠져 나와 자유를 만끽하다 미국 신문기자 조 브래들리(그레고리 펙)를 만나게 된다.
곤경에 처한 그녀를 자신의 집에서 묵게 해 준 조는 다음 날 공주가 실종됐다는 첩보를 접하게 되고 자신의 침대에서 자고 있는 그녀가 바로 앤 공주라는 사실을 눈치 챈다.
특종을 노린 신문기자와 철없는 공주는 로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꿈같은 하루를 보내며 서로 사랑에 빠지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의 관계는 불가능한 것이고 결국 서로를 위해 자신이 돌아가야 할 자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앤 공주 캐릭터는 당시 타운센트 대령과 비련의 스캔들을 일으킨 영국 왕실의 마가렛 공주를 모델로 하고 있다.
앤공주는 로마 시내를 배회 하다가 우연히 이발소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머리를 짧게 깍고 드디어 유명한 헤번 스타일이 탄생한다.
마지막 장면: 기자회견을 마친 앤 공주가 들어가고, 조는 한참을 공주가 들어 간 곳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기자회견장을 빠져 나오는 조의 구두 발자국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오드리 헵번은 15 살 소녀 시절 네덜란드에서 소녀 레지스탕스로 활동을 했다.
노후에, 그녀는 유니세프를 찾아갔다. 유니세프가 그녀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먼저 유니세프에 손을 내민 것이다.
헵번은 취임 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자신이 2차 대전 직후 유니세프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 받았기 때문에 유니세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 가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유니세프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은 평생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쟁 피해 아동의 구호와 저 개발국 아동의 복지 향상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 특별 기구인 유니세프는, 백일 해 때문에 죽음을 경험했던 오드리 헵번에게 숙명처럼 다가왔다.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보수는 1년에 1 달러 뿐이었고 교통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 것도 제공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열정을 다해 헌신했다.
첫댓글 저도 오드리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