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서 왕이란 직책은 세속 국가의 왕처럼 왕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거나 명예를 높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참 왕이심을 만방에 전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사울 왕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자신의 왕위를 지속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자기 자리를 위협한다고 느껴지는 다윗을 가차 없이 제거하려 했다.
다윗을 죽이려 했던 세력은 사울뿐만이 아니었다. 다윗의 아들들 역시 왕이라는 직위가 탐이 나서 그 자리를 넘보며 기회만 되면 아버지를 살해하려 했고, 형제들끼리 죽이고 죽는 반인륜적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했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가? 좁은 시각에서 보면 자리다툼처럼 보이지만 더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간의 치열한 싸움이다. 다윗의 생명을 노리고 죽이려하는 사건 역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을 짓밟아 소멸시키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자신의 꿈과 노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원해서 그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었다(백성의 요청에 의해 왕이 된 자는 사울이다). 그렇다면 그가 왕으로서의 자질이 탁월했기에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셨나? 이것도 아니다. 그는 한 국가의 왕으로서 백성들에게 평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경제를 부강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하게 할 자질이 있어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면 그는 왜 왕이 되었는가? 그리고 왜 그 자리를 지키려고 그렇게 많은 세월을 도망 다니며 살육의 전쟁을 치러야 했나? 왕이 권세나 명예나 부를 상징하는 자리도 아니요 그저 하나님이 왕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리라면, 아들들이 왕의 자리를 탐내면서 아버지를 죽이려했을 때, 그냥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떠나면 되지 왜 굳이 왕 자리를 끝까지 고수하려 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본문을 통해 답해보자.
1절에서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라고 외치는 소리는 참으로 연약하고 가련한 자의 울부짖음이다. 도무지 자신을 편드는 사람도 없고, 어느 곳도 자신의 몸을 피할 만한 데가 없는 처량한 신세를 읽을 수 있다.
2절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라는 말은, 대적들의 세력에 쫓겨 멀리 도망가서 그곳에서 떠나온 성전을 바라보며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땅 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더 이상은 도망칠 곳도 없는 땅 끝.
그리고 그 땅 끝에서 그는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부르짖는다. 과연 자신보다 높은 바위는 어디일까? 이것은 물리적으로 안전하고 높은 자리를 상상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자리도 생명을 노리며 달려드는 세력들 앞에 안전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윗이 생각하는 높은 바위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의 보살핌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높은 바위는 주님의 품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3절) 라고 고백하고 있다. 4절에서도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라면서 같은 고백을 반복하고 있다. 영원히 거할 곳,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는 무엇을 말씀하는 것인가?
주의 장막에서 뿌리지는 제물의 피는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는 영원한 사죄의 은총이 쏟아 부어지는 곳이다. 이 자리가 바로 다윗의 피난처이며 견고한 망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자리에서 그는 마음껏 외칠 수 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5절) 라고.
6절에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라는 고백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차지하는 자리가 이스라엘의 왕 자리가 아님을 선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들 예수가 영원한 왕으로 세워지는 그날까지 언약에 따른 왕이 지속될 것을 확신하면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다.
7절에서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라는 기도 역시 언약을 믿으며 하나님이 세우실 영원한 왕, ‘인자와 진리’ 되시는 분을 악한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기도한다.
다윗의 기도는 단순한 자기 욕망이 아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기도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부르짖는 것을 기도라 할 수 없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만이 온전한 기도이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8절)하기를 소망하면서.
시편 62:1-12절
다윗의 신앙 고백을 보면 참으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가 처한 현재의 환경이 어떠한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란다’(1절)고 했다. 이 표현은 하나님 외에 다른 일체의 것을 소망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것이 과연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인가?
하나님만 바라는 이유를 2절에서는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하나님이 필요치 않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다윗처럼 하나님만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외에 세상 물질, 권력, 명예, 건강 등등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라며 소망하고 있는가?
혹자는 말한다. 다윗이 하나님만 바란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세상에서 필요한 많은 것들을 그는 이미 소유했기에 그런 것에 대한 아쉬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다만 현재의 왕위를 지속하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이 하나님의 보살핌이기에 그런 기도를 했을 것이라고.
그러나 본문을 계속해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일컬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3절)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지극히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한 죄인의 적나라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다윗 자신이 한 국가의 왕으로 있지만 그는 악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살수 없는 존재임을 밝히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신자와 불신자의 시각 차이가 뚜렷이 나타난다. 불신자들을 세상 것이 전부이기에 어떻게 하든 그것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런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자가 있다면 여지없이 제거해서라도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다윗이 여러 세력들로부터 살해의 위협을 당하는 것은 전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인은 세상의 것들이 의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근원이란 사실을 믿는다. 그러기에 그분만을 바라게 되고, 그분을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다.
피난처는 위험한 순간에 내 몸을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그런 장소를 일컫는데, 여기에서는 단순히 그런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이 피난처란 표현을 했을 때는,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정죄 받지 않고 용서받는 그런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제단에서 뿌려지는 어린양의 피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다윗은 하나님만 바란다고 고백하고 있고, 저만 나의 구원이라고 했다.
사실 인생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참으로 무능한 존재들이다.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9절) 라는 구절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는 천한 자가 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반대로 높은 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주님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죄인들의 귀천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든 무슨 업적을 쌓든 모두가 쓰레기더미에서 나는 악취와 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단순한 논리인데, 이것이 납득이 되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는 것은 머리가 둔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쓰레기장에 버려진 것은 이미 주인의 관심에서 떠나 더 이상 쓸모없다고 판정 났기에 버린 것이다. 그런데 버려진 존재가 쓰레기더미에서 자꾸 자신을 가꾸고 가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며 뽐내고 있다.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전혀 무가치한 존재이며, 아니 무가치한 정도가 아니라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어서 멀리 내팽개쳐진 자란 사실을 모르니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수고와 땀, 업적과 영광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본문 말씀에서는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입김보다 가벼운 것이라고 했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11절) 라는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런 존재들이다. 힘을 이용해서 재물을 모으고, 그 재물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는다. 다 허망한 것들인데.
‘인자함은 주께 속한 것’(12절)이라고 했다. 쉽게 말하면, 긍휼과 용서는 주께 속한 것이란 말이다. 바꿔 말하면 주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무서운 심판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사실을 믿는 자라면 어찌 주님의 인자하심 외에 다른 세상 그 무엇을 바라겠는가?
시편 63:1-11절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진 것이고, 이 생명을 보존하고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3절) 라는 참으로 생소한 구절이 등장한다. 도대체 ‘주의 인자’가 어떤 것이기에 생명보다 나은(소중한) 것이라고 했을까?
시인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갈망하며 앙모한다(1절)고 했고, 또 그 주님을 찬양하고(3절) 송축하며(4장) 찬송한다(5절)고 했다. 이런 모습들도 보편적인 사람들의 갈망하는 바나 즐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2절을 보면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을 놓고 보면, 성소는 주의 권능과 영광을 확인하는 곳이고 그곳에서 참 주님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주님과 성도의 만남은 단순히 몸과 몸이 대면하는 식의 만남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만남인가? 성소는 제물의 희생(죽음)이 있는 곳이고, 그 희생을 근거로 제물 드리는 자의 사죄가 이뤄진다. 이렇게 될 때 성도는 주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으며 그분의 자녀로 인정받게 된다. 이런 관계성 속에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1절)는 고백이 이뤄진다.
이처럼 ‘주의 인자’는 자기 백성의 허물과 죄를 대신하는 속죄 제물이며, 그 제물을 통해서만 죄 용서의 사랑을 입게 된다. 따라서 이런 은총을 받은 자는 당연히 ‘주의 인자(仁慈)가 생명보다 낫다’는 고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주의 권능과 영광”도 성소에서 발견하는 것이 합당하다. 성소를 떠나 주의 권능을 생각하고 영광을 말하게 되면 굉장히 피상적인 주님이 된다. 즉,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그분의 권능이며 영광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십자가의 죽으심이 권능이 되며 영광이 되는가? 우리가 인식하는 십자가는 실패와 좌절, 아픔과 고통, 절망 즉 희망의 종결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 주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말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또 그 비참한 죽음이 영광이라는 소리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하는 권능과 영광은 힘과 권력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고 승승장구하는 강력함과 높은 지위에서 마음껏 권한을 행사하는 그런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소망했다. 자신들을 로마의 압정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경제적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온갖 더러운 질병으로부터 건져줄 그런 메시아 말이다. 그러나 참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잡혀 처참하게 죽었고, 당연히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못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아버지와의 언약을 다 이루셨다고 선언하셨다. 이것이 아들로서의 영광이며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 이렇게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실패의 모습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바로 창조주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권능이었다.
만약 이런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을 상정해 보자. 인간의 노력과 열성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애쓰고, 그 정성을 갸륵히 여겨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다면 거기에는 사람들의 자랑과 긍지가 묻어날 수 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드높이는 일은 발생될 수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죄인을 구속하셨고, 이것을 통해 주님 홀로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셨으며, 그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깨닫게 된 성도는 오직 주의 인자(사랑)가 생명보다 귀한 것을 기쁨으로 찬양하되 평생을 그런 고백 속에서 살게 된다.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4절) 라는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성도의 이런 기쁨과 감사와 찬송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 십자가의 피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인간의 땀과 노력으로 맺어지는 결실을 영광이라고 유혹하는 사단의 무리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힘으로 대적할 수는 없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9-10절)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꺾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인자하심만이 성도에게는 유일한 소망이다. 이것 외에는 그 무엇도 죄인을 파멸의 길에서 구원할 방법은 없다. 성도를 집어 삼키려는 무서운 사단의 세력마저도 주님이 방패가 되시기에 우리는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노래할 수 있다.
시편 64:1-10절
원수 혹은 대적이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대적이 사라질 때까지는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고 불안한 가운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적을 만들지 않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희망한다. 물론 서로가 자기 이기심으로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뺏고 빼앗기는 상황이 발생하고 나 아닌 타인은 적이 되기도 하지만 이런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더불어 협력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그런데 성경을 펼치면 적이 있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시 되고, 적과 끝도 없이 계속 싸우는 양상이 일상처럼 전개된다. 정말 우리 바람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삶이 진행되고 있음에 짜증이 나고 때로는 화가 치밀기도 한다.
다윗이 언제 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는가? 아니면 자기의 욕심 때문에 타인의 것을 빼앗기라도 했단 말인가? 성경 그 어느 곳을 펼쳐도 다윗은 그런 일들로 인해 적이 생겨 그 적과 쫓고 쫓기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아니었다.
원수, 행악 자, 칼, 화살, 올무 이런 단어들이 반겨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성도에게는 늘 이런 용어들이 거론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대적이 발생하고 그 대적으로 인해 살해의 위협을 받고,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숨어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인 것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다툼은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세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도록 세상은 창조되었다. 그런 연유로 여자의 후손 편에 속한 성도 역시 뱀의 후손과의 싸움으로 평생을 보내게 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이 말씀처럼 다윗은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는 순간부터 끝도 한도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든다. 쉼 없이 공격해 대는 대적의 칼날을 피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상대를 해할 마음이 없는데 상대는 다윗을 멸하려 한다. 그들은 악한 도모를 일삼고, 비밀히 올무를 놓고, 묘책을 찾았다고 기뻐 날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대적들의 계교는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윗이 여자의 후손 편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 전쟁은 여자의 후손이 최후 승리하는 것으로 확정되어 있기에 상대가 어떤 술책을 쓴다 할지라도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다윗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대적을 막을 재주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이 싸움이 결코 자신이 나설 싸움이 아니며, 이 전쟁은 어디까지나 주님이 용사가 되셔서 싸우는 전투라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분의 날개 그늘에 피난처를 마련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내 지혜와 능력, 노력으로 대적을 상대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적을 상대할 만한 자질이 없다. 마귀는 끝없이 속삭인다. 세상 영광, 권세, 명예, 욕망을 바라지 않느냐고. 만약 바란다면 얼마든지 제공 하겠노라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바라지 않는 인간은 없다. 모두가 꿈꾸고 소망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 사실을 마귀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우리에게 이런 것들로 올무를 놓고 유혹한다. 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자도 없다. 아무리 절제하고 인내하고 스스로를 수련한다 할지라도 우리 힘으로는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본문은 이 다른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여호와를 앞세우고 그분 뒤에 나를 감추는 방법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10절) 이것이 유일한 성도의 전쟁 무기이다.
마귀는 우리들에게 죄인이라고 협박한다. 그리고 죄를 범했기에 지옥으로 가야한다고 위협한다. 만약 그것이 싫다면 자신에게 절하라고 요구한다. 죄를 씻기 위해 착한 일에 매진하고 열과 성을 다해 스스로의 의를 쌓으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이 모든 속삭임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무위로 돌리기 위한 사단의 전략이다.
성도는 마귀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에 귀를 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9절) 라는 다윗은 진술은,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한 그 놀라운 사실을 유념하라는 것이다. 그 아들 예수의 대신 죽으심만을 내세우는 것이 마귀와 대적해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전술이다.
시편 65:1-13절
성령이 임한 성도의 자기인식은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 한다. 만약 이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허물어질 바벨탑을 쌓는 꼴이다. 자기 긍정,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이 거론된다는 자체는 모두가 자신을 인식하는 출발부터 잘못 되었다는 말이다.
3절 말씀에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라는 표현은 다윗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노골화 시키는 구절이다. 그는 생의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죄를 이긴 적이 없고, 늘 죄악이 자신을 이겼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런 고백으로부터 하나님과 성도의 만남은 시작된다. 그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라고 하면서 주께 나아간다.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1절)는 말씀 역시 죄인이 주를 향해 바라고 소망하는 간절한 심정을 그대로 나타내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지음 받은 성도가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근거는 바로 시온(성전)에서 주님의 대속을 기다리고, 그 대속의 은총에 대한 감사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2절)라는 구절 역시 죄인의 허물을 사하시고 용납하시는 은총 때문에 모든 자들이 주께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는 말씀을 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는 법이다. 그래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교만에 빠진 자들은 배척하셨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을 찾아가셨다.
과연 어떤 사람이 복된 자인가? 많은 재산을 소유한 자, 혹은 높은 직위에 오른 자, 아니면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듣는 자가 복된 사람인가? 결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성경에서 복된 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4절에서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이 복된 자라고 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주께서 택하시지 않은 자가 있고, 이들은 주께 가까이 올 수 없다는 말이며, 이런 자들은 참으로 불행한 자이다.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들 중에 주님이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아니한가? 주님은 모든 자에게 다 찾아가시는 분은 아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수많은 병자들이 운집해 있었지만 38년 된 병자에게만 찾아 가셨고, 야곱은 사랑하였지만 에서는 미워하신 분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에 무조건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어떤 죄악도 남김없이 말끔히 씻어주시는 분이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 주님이라고 하면서 그분의 크신 용서와 사랑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가볍게 취급해 버린다.
과연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것인가? 그분의 십자가 대속이 하나님이기에 당연히 해야 할 지극히 당연한 일인가? 그리고 날마다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자들을 팽개쳐 버리지 않아야만 하나님다운 것인가? 그렇다면 4절에 나타난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라는 구절은 별 의미 없는 말씀이 되고 말 것이다.
성전의 아름다움은 건축물의 미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씻을 수 없는 죄가 하나님의 독특한 자비와 사랑으로 정결케 되는 놀라운 광경에 감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의 성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성전에서의 사죄만 있다면 죄인에게는 전부 다를 얻은 것이다. 이것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어야 충만한 것이 아니라, 사죄 그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이 된다.
이렇게 용서받은 자는 그분의 사랑에 도취되어 모든 것이 감사하고 기쁘고 즐거운 법이다. 지옥 갈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그분의 능력은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뿐 아니라 만민의 훤화까지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주님의 은혜로 용서 받음을 아는 자는 모든 것을 감사한다. 그 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정말 온갖 것들이 다 아름다고 감사한 일들뿐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13절) 라는 표현은 실제적인 상황이 그러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 성도의 눈에 주님의 은혜가 이렇게 풍족하고 넉넉하다는 것을 말함이다.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는 자, 그는 진정한 십자가의 은총을 믿는 자이며, 용서의 감격을 맛본 자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주님을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한다.
시편 66:1-20절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5절)로 외치는 시인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자. 자기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6절)한 일일 것이다.
이런 능력으로 열방을 통치하시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분이 여호와시다. 그러므로 그분의 권능을 목도한 자들은 당연히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2절)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여호와의 능력은 비단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실 때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오늘날도 변함없이 자기 택한 백성을 이런 방식으로 인도하신다.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40년 광야 길을 인도하신 여호와는, 오늘도 여전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매는 어리석은 양 같은 자기 사람들을 눈동자같이 아끼고 보살피며 이끄신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애굽은 참으로 크고 두려운 존재였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했지만 그 큰 권세에 눌려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런데 그런 굴욕의 굴레에서 기적적으로 건져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아무리 애굽이 크고 강대한 나라이지만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사31:3)는 사실에 주목하자.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 받고, 육은 영에 의해 끌려갈 수밖에 없기에 육의 강성함에 두려워하고 기대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영은 손으로 붙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늘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긴다. 그래서 강한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물질의 풍성함을 부러워하며 군침을 흘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권세아래 있고 그분의 다스림에 굴복할 뿐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9절) 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믿음을 근거로 한 고백이다. 외형적, 표면적 힘의 우위가 승패를 좌우할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능으로 영원히 통치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7절)하시는 여호와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그러기에 그분의 백성은 실족할 수 없으며 파멸의 길로 가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12절) 라는 고백은 아무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고백이 아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주님의 손길을 맛보고 위험을 무사히 통과한 자들의 신앙 고백이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불문하고 이 땅에서 육을 지닌 채 살아가는 성도는 항상 주님의 보호와 감찰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보며 산다. 그러니 당연히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성도의 삶이다.
극진한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가? 즐겁고 기쁜데 어찌 찬양하지 않겠는가? 믿어지고 느껴지고 깨달아지는데 어찌 그 사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심정은 강제적으로 어떤 것을 명령하고 규제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내가 수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15절) 라는 다짐 역시 사죄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행해질 수 있는 일이다. 모든 은혜가 여기에서 출발한다. 방탕, 부패, 음란, 교만의 죄악들을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인생들이다. 그런데 주께서 이 죄의 짐을 대신 짐으로 우리를 죄의 짐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이것에 대한 확신과 고백이 번제를 드리면서 나타난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17절) 라는 고백 역시 모든 허물과 죄를 사하시고 용납하시는 그분의 긍휼과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출이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입으면서도 여전히 육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런 우리들을 그냥 방치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보살피사 실족치 않게 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20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20절).
변함없이 지속되는 주님의 인자하심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주 앞에 설 위인은 없다. 그래서 ‘인자하심을 거두지 않으시는 주’를 영원히 찬양할 뿐이다.
시편 67:1-7절
시편에 나타난 기도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보통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그런 내용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본문도 예외는 아닌데, 본 시편의 기도는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케 하소서’라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만약 우리에게 기도문을 작성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6:31) 염려하면서 그에 대한 요청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시편의 기도는 어찌된 영문인지 전혀 그런 내용의 기도를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시편 저자는 먹고 마시는 일에 관심이 없는 자인가? 그렇지는 않다. 모든 인간은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도 이런 일들이 관심 밖의 일이라고 하면 거짓말이 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중요한 일이 그들의 기도 내용에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생사와 별 관계도 없을 것 같은 “주를 찬송케 하소서”라는 것을 기도했을까?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사31:3)는 말씀이 있다. 세상 나라가 아무리 강성해도 그 힘이 우리를 허물과 죄에서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 또 세상에서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의 일, 즉 허물어 없어져 버릴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의 영이 성도에게 임하게 되면 그 전에는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들이 보여 지고 깨달아 진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 삶을 유지하는 줄로 알았던 시절에는 먹고 마시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고부터는 주님이 먹고 마시는 일보다 더 소중하고,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기 전에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더욱 더 갈망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만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찬송하자고 외치며 호소하고 있는지 본문으로 눈을 돌려보자.
1절 말씀을 보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추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짧은 한 구절 속에 시인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차곡차곡 포개져 있는데, 이제 하나씩 펼쳐보자.
먼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이 사실이 시인에게는 너무도 감사, 감격할 일로 다가왔다. 만약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하심이 있었기에 그분의 대속이 있었고, 대속이 있었기에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주님의 긍휼을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다음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복을 스스로의 힘으로 확보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스스로 복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은 이 땅의 것들을 복으로 여기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신령한 하늘의 것을 복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긍휼의 대상에게 복을 주셔야만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까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데 그 복이 바로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사하시는 것이다.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시는 하나님’ 역시 긍휼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을 보이신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셔서 의롭게 하실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만약 죄 사함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면 이것은 저주이며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얼굴빛을 비추신다는 것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화목케 되었다는 말이다.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 아닌가.
확실히 주를 찬송해야 할 이유를 아는 자들은 끊임없는 찬송이 터져 나오는 법이다. 이것은 누가 말릴 수 없으며, 어려운 형편과 처지가 온다 할지라도 찬송을 중단케는 못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을 비추시는 일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은총을 입은 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를 찬송할 자들이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만드시고 구원하신 이유도 자기 이름을 영원히 찬송케 하기 위함(사43:21)이라고 하셨으니 온전히 경배, 찬양할 일이다. 찬송 부름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은 모든 사람, 즉 만민이 함께 할 일이다. 교회는 바로 이런 사명을 위해 모였다. 기쁨으로 주를 찬송하자.
시편 68:1-18절
기쁨이든 슬픔이든 사람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4절)라는 외침에서 그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대해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3:15)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성도에게 소망이 있음을 당연시한 말씀이고, 이 소망에 대해 누가 언제라도 묻거든 소상히 대답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하라는 것인데, 이 소망을 전하는 것이 바로 성도가 이 땅에 살아있는 이유이다.
그러면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렇게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인지 말씀을 따라 살펴보자.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감 잡을 수 없는 분이다. 그 앞에는 늘 원수가 도사리고 있고 그 원수를 향해 분노를 쏟아 내시는 분인가 하면, 자기 백성들에게는 한없는 사랑과 용서와 보살핌을 베푸신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을 향해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나누셨다는 사실에 대해 정말 우리는 감사하고 있는가? 분명히 다윗은 이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나눠지는 것에 대해 혹시 우려와 함께 원망과 불평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솔직한 심정으로 우리는 원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별로 유쾌하지 않다. 또 이쪽과 저쪽이 대립하는 것보다는 하나로 합쳤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악인과 의인이 서로 맞서서 미워하며 싸우지 말고 다 같이 화목하게 지내고, 그래서 진노와 멸망의 대상은 사라지고 모두가 사랑받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무리들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원수를 설정해 놓으셨고 또 자기 백성을 구별해 두셨다. 그리고 악한 원수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이 싸움은 계속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 또한 하나님과 한편이 되어 싸워야 할 운명에 놓여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싸우는 일이 힘들고 두렵다고 해서 회피할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용사가 되어 전투에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전쟁을 싫어하는 이유는 패배가 두렵기 때문인데,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승리만 있을 뿐 패배는 없다. 그 이유는 우리의 전술과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전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즉 주께서 승리하신 싸움에 목격자로 동원되는 것이 성도이기에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승리의 확인 작업에 참여하는 것뿐이다.
악한 원수를 물리치신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찬양하며 기뻐하고, 탈취물을 나누고 승전의 소식을 만방에 공포하는 이 즐겁고 신나는 일을 왜 우리가 두려워하며 피하겠는가? 구원의 소식을 널리 전하고 주님의 용사들이 같이 춤추며 기뻐할 일인데.
성도는 늘 이 땅에서 여호와의 전사로 살아가는 자이다. 항상 적들이 도사리고 있고, 그 적들과 끊임없는 전투를 해야 하는 자들이다. 십자가의 원수들이 온 사방에 흩어져 있다. 말씀의 검을 가지고 그들과 대적해 싸워야 한다. 우리 대장 되시는 예수님의 지휘와 명령에 따라 전장을 누벼야 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딤후4:2)하는 것이 성도가 세상과 싸우는 일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장이란 사실을 전하고, 그분과 한 편이 될 때 최후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릴 것임을 천하에 선포해야 한다.
세상은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모두 같이 평화를 누릴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어느 한 쪽은 반드시 파멸해야 하고 반대쪽은 승리의 깃발을 펄럭이도록 되어 있다.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1-2절) 하는 다윗은 기도는 필히 응답될 기도이다.
이제 다윗이 기뻐하며 주를 찬송하는 이유를 알겠는가? 그 기쁨이 바로 성도 모두가 누리는 기쁨이며 찬송이다. 내 소망이 이뤄져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 기쁘고, 하나님의 편이 되어 그분의 전사로 세워졌다는 사실이 또한 감사, 찬양할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4절) 아멘!
시편 68:19-35절
누군가가 대신 짐을 져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분이 계신다. 바로 우리 주님이 그런 분이다. 만약 주께서 우리 짐을 대신 지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죄의 짐에 짓눌려 신음하며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다윗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19절)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다.
날마다 우리 짐을 대신 지시는 주님 때문에 성도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생명이 되었다. 이 사실을 20절에서는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음’(20절)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주 여호와가 아니면 사망의 길에서 피할 방법도 재주도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런 자신들의 처지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냥 하루하루 육신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점점 쇠약해져 가는 자신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종교적 몸짓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찾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 짐을 대신 져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을 행복하고 좋은 곳으로 인도해 줄 신을 구할 뿐이다.
주님이 대신 짐을 져 주지 않는 자의 운명에 대해서는 21절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21절) 라고. 이것은 자기 죄의 짐 때문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고 멸망할 것을 확실히 말씀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신다는 사실이다. 즉 주께서 날마다 짐을 대신 지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생명이 있고, 자기 죄의 짐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면치 못할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이런 분류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희괴한 나눔이다. 우리가 사람을 분류하는 방식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얼마나 들었는지, 학력은 어느 정도 인지, 직장은 어디인지, 성격은 어떤지 등등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에 걸맞게 상대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처럼 사람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무척 단순하다. 즉 자기 아들의 피가 묻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고, 이 기준에 따라 구원할 자와 멸망할 자로 분류하신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한 부모에게서 한 날, 한 시에 쌍둥이로 태어났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이들을 나눌 이유도 없고 방법 또한 모호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독특한 기준으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롬9:13 참조).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신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도 마찬가지다. 멸망 받을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시고, 구원 얻을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 기준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피가 기준이 되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 구원이란 것이 그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구원을 쉽게 생각하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밧줄이나 낚싯대로 건져내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죄악으로 멸망할 인생들을 구원하는 방식은 그렇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죄를 씻는 방법은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죄가 씻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심판의 자리로 내 몰았다. 그렇게 해서 자기 백성의 죄를 아들이 대신 짐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방식을 취하셨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장차 자기 아들을 보내 자기 백성의 죄를 씻어주실 것을 예언하면서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라고 선포했고, 이 예언대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멸망할 자와 구원할 자를 나누시고, 그 기준을 자기 아들의 흘린 피로 삼으신 분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며, 다윗이 시편에서 찬양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으며 모든 성도는 다윗과 같이 우리 짐을 지시는 주를 날마다 찬양하게 된다.
세상은 영적 전쟁터다. 이 사실은 주님의 손아귀에 붙잡힌 자만이 느끼는 냉혹한 현실이다. 다윗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보니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쳐 나올 수 없는 극한 상황임을 알게 되었고, 이런 형편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여호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시인이 당면한 현실이 어떠했기에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지 본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절에서는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라고 했고, 2절에서는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4절에서는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나이다”라고 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입장이 되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좌절에 빠질 것 같은데 시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기에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1절) 라고.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모습이다.
어느 누가 화평 대신 싸움을 원하겠는가? 이것은 약자들이 자신을 위험에서 지키기 위한 바람만은 아니다. 설사 본인이 강자의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전쟁을 반기고 서로 대립해서 다투는 것을 즐기는 자는 없다. 그래서 세상은 늘 화목을 부르짖고, 서로 돕고 협력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노래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뜻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애초부터 전쟁터로 삼으셨다. 자신의 뜻을 세우고 펼치기 위해 사단의 세력을 등장시키시고, 이들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일을 통해 더욱 하나님의 뜻이 표면화 되고 굳게 세워지도록 세상을 활용하신다.
이런 과정에서 성도는 세상에서 고난의 삶을 살게 되고, 그 고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으며, 세상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표출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안식할 곳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이란 사실을 확인시키고 그 나라를 사모하게 만든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는 도무지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세상은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는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지. 그리고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마저 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지를.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9절) 라는 말씀이 이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고, 그분이 보내실 메시야를 학수고대하며 살았다. 그런 자들이 어찌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예수님을 그렇게 학대하고 핍박하며 죽였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의아하지 아니한가?
기대하고 사모한 메시야가 왔으면 누구보다 더 기뻐하며 영접하는 것이 당연한데 결과는 정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인간의 상식으로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이처럼 세상은 무지와 어둠에 갇혀 있다.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메시야를 기다리지만 참 메시야를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기에 자신의 잘못된 기준과 판단에 의해 참 메시야를 배척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죄인 됨을 폭로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들이 죄인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즉, 예수님 외에는 모두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아들 예수 외에는 모두가 미움과 저주의 대상이란 것이다.
지상에 있는 모든 이들이 죄인이란 사실이 노골적으로 밝혀진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유일한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아 죽인 일이다. 이보다 더 인간의 죄악을 확실히 폭로하는 사건은 없다.
이로서 모든 인간은 지옥에 가야 할 자임이 드러났고, 이런 처지에 있는 자들을 위해 예수님의 흘린 피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는 사랑이었음이 드러나고, 그 사랑의 능력을 만 천하에 공표하신 일이 십자가 사건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이 사랑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을 전쟁터로 만드셨고, 죽음의 굴레에 있는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분으로 등장한다.
세상은 둘로 나눠진다. 주님의 편이 된 사람과 그 반대편에 선 사람으로. 이 사실은 주님의 편에 불려온 사람만 안다. 이 편가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라는 혈연(인간의 피)도 소용없다. 예수님의 피는 모든 것을 나누고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내세우는 자는 다 십자가의 원수다.
이제 왜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나를 구원하소서”(1절)라고 부르짖고 있는지 알겠는가? 하나님의 편이 된 자는 세상으로부터 우겨 쌈을 당하게 되어 있고, 그 형편에서 성도는 주를 찾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받는 길을 예수님 그분의 십자가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에 당연히 주를 부르고 찾는 것이다.
시편 69:21-36절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22절),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23절),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24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27절),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28절).
위 구절을 대하면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는 성도가 과연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이런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 하실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런 한 맺힌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참 잔인하다고 느껴질 만큼 원수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이런 심정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저주받아야 할 원수가 원인 제공을 했다. ‘무고히 나를 미워’했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4절) 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원수가 밉고 나에게 위협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성도가 되었으면 약간의 긍휼과 자비의 심정으로 원수를 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만약 원수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 수 없다면 그가 더 이상 나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 정도 선에서 원수를 대하면 좋을 듯하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다윗이 원수를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끔찍하다고 할 만큼 엄청난 저주를 퍼붓고 있다는 사실에 좀 당황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면 과연 성도의 이런 기도가 하나님 앞에 정당한 것인가 하는 점부터 생각해 보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5:44)는 말씀은 있는데, 원수가 파멸되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다윗은 지금 개인의 감정으로 자기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다윗의 심정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 개인이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가 미워서 저주를 퍼붓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 사단을 향한 주님의 진노이며, 악한 세력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언한 말씀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편지 말미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 라는 무서운 선포를 했다. 이것은 단순히 바울을 싫어하고 대적하는 세력들이 미워서 그들을 욕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단순히 보면 그런 식의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진리와 생명에 관한 문제이다. 즉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했는데 그 진리 선포에 대해 거부하고 외면하며, 거짓 복음, 거짓 예수, 거짓 영을 전파한 악한 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을 향해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지 못해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다 저주받은 자라는 내용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다윗은 지금 자기 개인을 괴롭힌 자들을 향해 악담을 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훼방하고 진리를 거스르는 악한 세력들의 최후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다윗의 기도는 개인의 원한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기도하고 있는 내용이라 하겠다.
이제 마지막으로 성도가 어떤 심정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주님의 편에 속한 성도는 더 이상 나 개인의 삶이 존재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원수도 나의 원수가 아닌 주님의 원수와 대적해 싸우고, 나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감사, 찬양하는 삶이어야 한다.
나 개인의 힘으로는 원수를 대적해 승리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의 편에 속한 성도는 주님의 인도와 보살핌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싸움은 나의 싸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대장이 되어 싸우는 싸움이다.
그러기에 성도가 원수를 대적해 싸운다는 것은 우리가 나서서 사단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믿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최후 승리의 능력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것이 성도의 싸움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십자가 피의 능력을 믿으며 그 사실을 만방에 선포하는 것이다.
시편 70:1-5절
다윗은 본 시편에서 두 종류의 인간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는데, 첫째 부류의 인간은 “내 영혼을 찾는 자”(2절)이며, 이들을 향한 저주를 선포하고 있고, 둘째는 “주를 찾는 모든 자”(4절)인데, 이들에게는 축복을 선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나뉨이 정당한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고, 또 이런 분류 외에 다른 분류는 없는가 하는 점도 따져봐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을 나누고 있는데,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이며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난다. 구체적인 구절을 예로 들면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는 말씀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는 말씀 등이 있다.
스가랴 6장의 말씀은 파괴된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을 두고 하신 말씀인데, 인간의 노력과 재주, 솜씨로는 성전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주지시키고, 오직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만 가능할 것이라는 말씀이고, 마태복음 19장 말씀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쉽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을 나누는데, 오늘 본문은 사람과 사람을 나누고 있지 아니한가? 즉 성경에서는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으로 나누고 있는데, 본문은 의인과 죄인을 나누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여기서부터 좀 생각을 깊이 해야 할 지점이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과 인간으로 나눈다. 그런데 이런 분류에 인간이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편에 서는 자가 있고, 그냥 죄인으로 남는 자가 생긴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분류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눠지는 것에서 시작되는 나뉨이다.
이렇게 나눠 주님은 자기의 뜻을 펼쳐 가시는데, 그 반대편에 선 악한 세력들은 주님의 일을 방해하고 핍박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과정에서 두 세력들은 서로 대립과 다툼의 양상으로 진행되다가 마지막에는 주님의 승리와 사단의 처절한 패배로 막을 내린다. 이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인데, 이것 외에 달리 펼쳐지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도 이런 측면에서 읽으면 정리가 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편이 된 자인데, 1절에서 “내 영혼을 찾는 자”는, 다윗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악한 자의 편에 소속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자의 운명은 “수치와 무안을 당케” 될 것이며, “물러가 욕을 받게”(2절) 될 것이다.
반대로 “주를 찾는 모든 자”는 다윗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소속된 자로 이들은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기대와 희망을 갖지 못하고, 오직 주님께만 모든 소망을 두는 자이다.
이런 나뉨은 분명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선택 사항이다. 주님의 편에 선 자인가 아니면 그 반대편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자인가 둘 중 하나이지 제 3의 인물은 없다.
그러나 인간들의 안목과 시각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나누지 않는다. 여자와 남자로 나누고,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나누고,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를 나누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로 나누고, 주인과 종으로 나눈다. 그러기에 어찌하든 유리한 편에 서기 위해 모든 지혜와 노력을 총동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런 인간의 노력과 열성을 일절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힘쓰고 애쓴다 할지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편에 설 수 없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안목으로는 좋고 나쁜 편을 분별할 능력마저도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 바라보고 기대할 뿐이다.
이 지점에서 은혜를 입은 성도와 저주 받을 백성이 확연히 구별된다. 성도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길 수밖에 없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5절) 라는 고백은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계속 자기의 능력을 의지한다. 그래서 더 큰 능력, 더 큰 지혜와 힘을 모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들의 입에서는 자신이 무능하다거나 가난하고 궁핍하다는 소리를 내뱉지 못한다. 이것은 패배를 선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난과 궁핍은 수치요 부끄러움이기에 설사 자신이 가난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입 밖에 내지 못할 소리이다.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5절) 하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허물과 죄를 발견하고, 주님의 십자가 용서만을 믿고 감사하는 자, 그는 분명 주님의 편에 속한 성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