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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학년도부터 중동중학교에서 배우는 역사1 교과서는 수십년 역사교사로 근무한 본인을 경악하게 하였습니다.
절대 왕정 부분에서 설마? 했는데 정말!! 이럴 수가! 엘리자베스 1세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양 근대사를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에 어떻게 엘리자베스 1세를 언급한 내용이 단 한줄도 없는 지, 저도 여러번
교과서를 집필했지만 이해가 안됩니다. 이 교과서는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와 레파토 해전까지 언급했으나 그
무적함대가 영국 엘리자베스 1세에게 대패했다는 내용은 적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타임지가 지난 밀레니엄 시기에 선정한 세계를 움직인 20인에 당당히 포함될 정도로 유럽의 한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영국을 탄탄한 대영제국으로 발돋움 시켰으며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절대 군주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아래 기사와 칼럼에는 엘리자베스 1세와 숙적 메리 스튜어트의 관계를 자세히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젊게 그려진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를 통해 중동중이 사용하는 지학사 교과서 외에 다른
출판사 역사 교과서로 가르치시는 역사 선생님들께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과 그녀를 둘러싼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몰랐던 깊은 이야기들, 예를 들면 튜더 왕조의 얽히고 섥힌 집안 배경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21]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政敵, 여왕은 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드디어 걸렸다.”
1586년 여름. 국무상인 프랜시스 월싱엄의 책상위에 편지 한 장이 놓였습니다. 18년 전 스코틀랜드 왕좌에서 쫓겨나 영국에 도망와 있던 메리 스튜어트가 안토니 바빙톤이라는 사람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앞서 바빙톤이 먼저 메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서신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바빙톤은 동료 13명과 함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할 것이며, 계획이 성공하면 메리가 여왕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리는 답장에서 계획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외국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역모는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 스파이를 심어놓고 있는 월싱엄이 모든 움직임을 처음부터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으니까요. 호시탐탐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를 노렸던 메리는 이번만은 살아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메리는 그 동안 여러번 반란과 역모에 관련됐고 그때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넘어가곤 했는데,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해 10월 말 귀족과 고문관, 판사들로 이뤄진 특별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여왕 살해 교사’ 혐의를 적용, 메리의 처형을 요구했습니다. 몇 달 동안 사형 집행장 서명을 미루던 여왕이 결국 월싱엄 등의 설득으로 이듬해 2월 1일 서명을 하게 됩니다. 메리는 7일 후 마지막 거처였던 포더링헤이 성의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바빙톤 음모 사건’은 여왕과 잉글랜드에겐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여왕은 지난 20년간 자신의 왕위를 노렸던 정적을 마침내 제거했고, 왕권은 더욱 탄탄해졌습니다. 하지만 메리의 처형은 가톨릭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양국 갈등은 군사적 격돌로 빠져들게 됩니다.
◇메리 스튜어트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재위 1485~1509)는 앙숙 관계인 스코틀랜드와 평화를 위해 맏딸 마가렛을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마가렛은 헨리 8세(1509~1547)의 두 살 위 누나였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큰 고모였습니다. 그 마가렛의 아들(제임스 5세)이 낳은 딸이 메리 스튜어트입니다. 촌수로 따지면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는 5촌지간입니다. 아홉살 많은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에겐 아줌마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메리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최대의 위험 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왼쪽)과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메리는 만 16세 때 프랑스 왕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재위 1년 반도 안돼 사망하자 곧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5세 때부터 프랑스에서 살았던 젊고 매력적인 여왕은 곧 여러 남성과 사랑을 나눴습니다. 우선 헨리 7세의 외증손자이자 자신의 사촌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복잡한 치정에 얽히게 되고 단리 경은 메리의 정부(情夫) 보스웰 백 제임스 헵번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후 메리는 보스웰 백과 결혼을 했는데, 그녀의 도를 넘는 애정행각에 분노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메리를 폐위하고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는 복위를 꿈꾸며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1568년 가까스로 잉글랜드로 도망쳐 엘리자베스 1세의 보호 아래 살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왕권은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에게 넘겨졌습니다.
불행은 메리가 엘리자베스 1세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언젠가는 자신이 그 왕좌에 않고 말겠다는 야심을 품은 데서 시작됐습니다. 사실 메리의 주장이 완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메리가 헨리 7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습니다. 문제는 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 계승 자격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봤듯이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은 잠깐 헨리 8세의 둘째 부인이 됐고 왕비 자리에 올랐지만 곧 폐위되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가톨릭 진영에서는 애초부터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고 해도 앤 불린이 나중에 폐위가 됐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엘리자베스는 왕권을 계승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메리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메리가 잉글랜드로 망명을 해 오자, 국내 가톨릭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위협은 메리의 망명 이듬해인 1569년 일어난 ‘백작들의 반란’이었습니다. 일부 귀족들이 잉글랜드 최고의 귀족이자 유일한 공작인 노퍼크 공과 메리를 결혼시킨 뒤, 엘리자베스 1세를 축출하고 메리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잉글랜드를 가톨릭의 나라로 만들려 했지요. 모의가 들통이 나자 거사를 도모했던 노섬벌런드 백과 웨스트모얼런드 백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왕의 군대에 참패한 뒤 스코틀랜드로 도망쳤습니다.
다음해에는 교황이 반란을 선동했습니다. 교황 피우스 5세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에 처하고 폐위를 선언하는 교서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가톨릭 세력이 준동을 했지요. 런던에 있던 피렌체 은행가 로베르토 리돌피가 다시 노퍼크 공과 메리의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때를 맞춰 국내 가톨릭 세력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에스파냐 군이 침공해 엘리자베스 1세를 몰아낸다는 시나리오도 마련했습니다. 교황과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의 지지를 받은 이 계획도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의회는 메리의 처형을 주장했지만 여왕이 승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퍼크 공을 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한 동안 잠잠했던 역모 움직임은 10여년 후 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1583년 국제적인 음모가 적발됐습니다. 그해 11월 메리와 긴밀히 연락하던 가톨릭 교도 스록모턴이 검거됐는데,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모든 계획을 실토했습니다. 그는 이 반란 계획이 메리의 아이디어로 시작됐으며, 잉글랜드 주재 에스파냐 대사인 베르나르디노 데 멘도사 등이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국내에서 가톨릭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고 에스파냐가 군대를 파병해 돕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목표는 물론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고 메리를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지요. 이 역모 역시 사전에 발각돼 에스파냐 대사가 국외로 추방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왕은 메리의 사형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586년 또 다시 메리가 관련된 역모가 발각됐고, 메리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운이 좋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여왕을 노렸던 상대가 능력과 자질이 부족했던 걸까요. 그보단 엘리자베스 1세가 나라를 운영하는 능력, 그 중에서도 적재적소에 능력있는 인재를 등용해 그들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도록 한 용병술이 뛰어났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뒤엔 첩보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랜시스 월싱엄이 있었습니다.
◇프랜시스 월싱엄
월싱엄은 키가 작고 얼굴이 검었다고 합니다. 여왕은 그를 ‘무어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왕보다 한 살 많은 월싱엄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였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에 다니기도 했던 그는 강경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1553~1558)가 왕이 되자 잉글랜드를 떠나 스위스와 프랑스 등을 전전했습니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가 왕이 되자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이후 정계에 입문해 승승장구 출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가운데)과 윌리엄 세실(왼쪽), 프랜시스 월싱엄(오른쪽)
1572년 8월 발생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그에게 가톨릭은 절대 공존을 허락해서는 안될 세력이라는 믿음을 각인시켰습니다. 예수의 12사도 중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 축일을 계기로 로마 가톨릭 교회 추종자들이 프랑스의 칼뱅교도, 즉 위그노에 대한 학살극을 벌였는데, 약 3개월 동안 희생된 사람이 3만~7만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월싱엄은 프랑스 주재 잉글랜드 대사로 근무했는데, 가톨릭이 개신교에 얼마나 적대적인지, 가톨릭이 지배하는 세상이 됐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1559년 콘월 지역에서 처음 하원의원이 된 그는 프랑스에서 귀국한 다음해인 1573년 국무상에 올랐습니다. 이후 1590년 사망할 때까지 여왕을 보필하게 됩니다. 이 기간 엘리자베스 1세의 모든 국정에 그가 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해외 무역과 식민지 개척 지원, 드레이크의 세계일주 지원, 네덜란드 신교 세력 지원, 여왕과 외국 왕·귀족과의 결혼 협상, 에스파냐 무적함대와의 격돌 등. 여왕은 때론 월싱엄의 직설적인 조언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편지에 “저 무어인은 자신의 피부색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월싱엄은 여왕이 싫은 기색을 보여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면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월싱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임무가 바로 ‘여왕 지키기’였습니다.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여왕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지요. 그는 국고 비자금을 들여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모아 비밀첩보망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그의 정보원들은 에스파냐의 마드리드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유럽과 지중해까지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암호 해독가까지 고용했다고 합니다.
그가 절대 눈을 떼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사람이 바로 메리였습니다. 월싱엄은 “먼저 하나임의 영광을, 그리고 다음엔 여왕의 안전을 희망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악마 같은 여인 메리가 살아 있는 한” 여왕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월싱엄은 메리가 주고받는 편지를 중간에 가로채 내용을 모두 파악한 뒤 전달했습니다. 메리가 암호로 적은 편지들은 메리와 월싱엄 양쪽에서 돈을 받은 양조업자가 맥주통 속에 몰래 숨겨 밖으로 전달하곤 했는데, 양조업자는 그 밀서를 월싱엄의 첩보원에게 넘기는 식이었습니다. 메리에게 전달되는 편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왕에게 월싱엄이라는 신하가 있었다는 것이 메리에겐 운명적 불행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월싱엄은 국무상이 된 이후 14년 동안 집요하게 매달린 끝에 결국 메리의 참수를 이끌어냈습니다.
영국의 근대를 열었던 튜더 왕조 때 등장한 월싱엄의 조직은 현대 첩보 조직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20세기 이후 가장 인기있는 첩보물 중 하나인 ‘007 시리즈’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는 영국의 해외 정보 전담 정보기관인 ‘Mi6′ 소속인데 이 MI6의 뿌리가 바로 월싱엄의 첩보 조직이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월싱엄의 좌우명은 오늘날에도 나라를 이끄는 분들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워하는 편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덜 위험하다.”
◇정적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여왕이 영국에 남긴 족적은 크고 선명합니다. 에스파냐와의 대결로 유럽의 변방 섬나라였던 잉글랜드는 이제 누구도 무시 못할 강국 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아직 제국으로 성장하려면 먼 길을 가야하지만 말입니다.
16세기 잉글랜드 사회를 묘사한 그림
국내적으로도 질적 변화와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 중 하나는 구빈법입니다. 구빈법은 아버지 헨리 8세 때 처음 만들어졌지만 그 동안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엔클로저 등의 확산과 자본의 성장, 빈부격차의 확대, 인플레이션, 1590년대의 극심한 기근 등 사회 문제가 불거지자 여왕은 치세 말기인 1597년 구빈법을 새로 제정했습니다. 이전까지 빈민 구제는 교회가 맡아왔는데 앞으로는 국가가 이를 책임진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각 교구에 책임자를 임명해 빈민들에게 주거와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 재원 마련을 위해 구빈세를 도입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때 제정된 구빈법은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250여년간 영국 빈민 정책의 골격이 됐습니다.
언니 메리 1세 때 가톨릭으로 되돌아갔던 잉글랜드 교회를 개신교 쪽으로 돌려놓은 것도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즉위하자마자 첫 의회에서 수장법을 다시 제정했습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제정했지만 언니 때 폐지했던 그 법을 부활시킨 것입니다. 잉글랜드 모든 교회에 적용하는 새 기도서를 만들었고, 1563년 개최된 성직자 회의에서는 39개조 신앙조항을 채택했는데, 칼뱅교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이 신앙조항은 1571년 성공회의 교리로 제정되었습니다. 이 교리는 오늘날까지 영국 교회의 기본 교리로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유산으로 왕위 계승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녀로 살다 죽은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습니다. 여왕의 사후, 잉글랜드의 왕권은 당시 스코틀랜드 왕인 제임스 6세가 물려받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를 죽이고 자신이 왕에 오르려 끝없이 시도했던 여왕의 일생일대 숙적 메리의 아들입니다.
왕위 계승에는 국무상인 로버트 세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세실은 제임스 6세에게 접근, 엘리자베스 1세의 비위를 잘 맞춰 여왕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이 전략은 적중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제임스 6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에 대해 역사학자 존 어니스트 니얼은 “베일에 가려진 문구지만, 여왕은 그들에게 도저히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 없도록 자신의 바람을 제임스에게 표현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엘리자베스 1세가 제임스 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뜻을 전했다는 뜻입니다.
1603년 여왕은 눈을 감았고,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 명의 왕이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두 나라의 완전 통합은 제임스 1세의 증손녀인 앤 여왕 때 완성됩니다. 1707년 그레이트 브리튼 통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의 탄생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마지막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 2021.12.21 조선일보
[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⑦] ‘차갑고 따스했던’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 공주 시절(Elizabeth I, a Princess), William Scrots, 1546-1547, Royal Collection, London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위주로 드라마틱한 그림을 그려 성공한 화가였다. ‘제인 그레이의 처형(The Execution of Lady Jane Grey, 1833, National Gallery, London)’이라는 작품의 작자이기도 했던 그는 아카데미에서 닦은 탄탄한 고전주의적 기법에 낭만주의적 스토리를 담는 방식의 그림으로 매우 유명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구약성서로부터 주제를 가져온 것들이었으나 점차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를 주로 다루었다. 그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당시 꽤 인기를 끌었는데 시대적인 요구도 있었지만, 인테리어와 의상 등 세심한 장면 설정 등이 그 이유였다.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The Death of Elizabeth I, Queen of England), Paul Delaroche, 1828, 422 x 343 cm, Musée du Louvre, Paris
1827년과 1828년 쌀롱(Salon)에서 전시되었던 작품은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The Death of Elizabeth I, Queen of England)’으로, 여왕이 세상을 떠난다는 표면적인 주제와 달리 배경 속 여러 모습, 장치들로 인하여 다소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심하게 이루어진 소도구들, 즉 가구, 의상과 같은 장식들로 인하여 어쩌면 현대적 면모를 더욱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장면 전체를 보면 위쪽부터 어두운 배경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아래로 이어지면서 점차 밝아지면서 바닥에 면한 팔걸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죽음에 이른 여왕이 있는 곳은 마치 집중 조명을 받은 무대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다.
오른쪽 부분에는 관료, 장군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서 있는데 이는 여왕이 이룩한 정치 외교적 성공을 나타낸 것이며, 왼쪽에서는 시녀들로 보이는 여인들이 큰 슬픔에 빠져있다. 그렇게 내부적으로도 안정적 치세를 이룩했던 여왕이 이제 승하(昇遐)한 것이다.
여왕의 얼굴과 드러난 팔은 이미 푸르스름한 상태이다. 들라로슈답게 여왕보다는 그녀를 둘러싼 주변 모습을 통하여 그녀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부각시키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Elizabeth Tudor, 1533~1603)은 1558년 11월부터 1603년 3월까지 무려 44년 동안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이복 언니 매리 1세(Mary I, Mary Tudor, 1516~1558)로부터 왕위를 이어 받았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의 두 번째 왕비이자 ‘1000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이라 불린 앤 불린(Anne Boleyn, c. 1501~1536)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로 인하여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스페인 및 신성로마제국 등 열강의 위협과 더불어 과다한 국내에서의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만 하던 16세기 초반 여러 악조건을 극복하고 세계 최대 제국으로의 강력한 기반을 구축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는데 이는 ‘성처녀 마리아(Virgin Mary)’라는 기독교에서의 열광과 같은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시나 초상화 등으로 그려진 그녀는 백성들에게 일반적 여성이 아닌 ‘성처녀’와 ‘여신’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구체적으로 그녀가 유지한 ‘처녀’로의 이미지는 꽤 괜찮은 미덕으로 여겨졌다. 1559년 그녀는 잉글랜드 하원(the Commons)에서 “그리고 내가 죽은 다음, 대리석 돌에 당대를 통치했던 여왕이 처녀로 살다가 죽었다고 선언하듯 새겨주는 정도면 족하다”고 강조했을 정도였다.
그에 따라 시인과 작가들이 앞다투어 그녀가 언급한 말을 채택하여 그녀를 우러러보는, 일종의 도상학(iconography)까지 개발했고, 1578년에 이루어진 ‘동정녀’에 대한 공개적 경의 표시는 여왕이 마침 앙쥬 공작 알랑송(Duke of Anjou and Alençon)과 물밑에서 이루어지던 결혼 협상에 대한 대중의 반대라는 부호(code)로까지 작용했다. 프랑스의 알랑송 공작은 국왕 앙리 2세(King Henry II)와 메디치가 출신의 캐더린(Catherine de’ Medici)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었다.
독신을 지속한 여왕의 삶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계모(Catherine Howard)가 부왕 헨리 8세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했던 토머스 시무어 제독(Thomas Seymour, 1st Baron Seymour of Sudeley)이 국왕의 허가 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던 일 등이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캐서린 파의 초상(Katherine Parre), 무명 작가, 16세기 후반, 63.5 x 50.8 cm,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한편,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Catherine Parre, 1512~1548)는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모두 죽어 홀몸이었고 왕가와 먼 인척 관계인 귀족의 딸이었다.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가 처형당한 지 1년 만에 헨리 8세와 혼인을 하면서 왕비가 되었으나 그녀는 처음부터 제인 시무어(Jane Seymour)의 오빠였던 토머스 시무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해심 많고 인내심이 강한 여성으로, 나이 든 국왕을 잘 보살피면서 자신의 자식도 아니었던 매리와 엘리자베스 두 왕녀와 왕세자 에드워드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녀로 인하여 왕가의 자제들이 다시 궁으로 돌아와 훌륭한 학자들을 모시고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1547년 11월 헨리 8세가 세상을 뜬 후 다시 홀몸이 된 그녀는 드디어 토머스 시무어와 재혼한 후 엘리자베스 공주를 불러 가족처럼 함께 지냈다.
그런데 이때 토머스 시무어가 은근히 왕권에 대한 욕심을 품고 엘리자베스에게 접근하였고, 어린 엘리자베스 공주를 끌어안기까지 하는 장면을 목격한 캐서린은 급기야 엘리자베스 왕녀를 다른 거처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문제는 토마스 시무어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서신으로 서로 소식을 이어가면서 지낼 수 있었는데, 그러는 도중 캐서린은 딸 매리를 낳은 후 산욕열로 3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http://kor.theasian.asia/archives/311163
[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⑦] ‘차갑고 따스했던’ 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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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⑧엘리자베스I세] 불굴의 여왕. 대영제국 기초 세우기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zabeth I), 무명작가, c. 1575, 113 x 78.7 cm,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에 대하여 영국의 역사학자이면서 중세와 튜더왕조 전문가로 BBC 방송에서 일하는 헬렌 카스터(Helen Castor)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어쩌면 괴물처럼 여겨지던 아버지 헨리 8세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더 빨리 그 존재가 떠 오르는 사대의 아이콘(icon)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우리에게 인식이 되어 있다. 그녀에 대한 이미지 중 글로리아나(Gloriana, 엘리자베스 여왕의 별명이자 별칭)는 가면(假面, mask)이랄 수 있다. 말 그대로 그녀의 삶에 있어서 마지막 20년 동안 그려지고 알려진 ‘젊음의 가면’ 초상화라는 뜻이다. 그 그림에서 엘리자베스의 주름이 전혀 없는 얼굴은 늙지 않고 변함이 없다. 그리고 마스크라는 방식은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전혀 미동이 없다.
엘리자베스 1세는 많은 연설을 했고 편지와 시를 썼으며 국가와 사회를 위한 기도도 했는데 그렇게 공개적 또는 사적으로 또는 궁정대신들에게 언급한 것들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그렇지만 그녀가 실제 의미했던 바를 확실히 파악하기는 더 어렵다고 한다. 그녀가 당시 썼거나 말한 모든 단어에 나타난 자신의 지적인 수준만큼은 분명하며, 그녀의 의도와 감정, 어조와 진정성 등이 항상 조심스럽게 구성된 공식적 자아라는 표면 뒤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파악하는 일은 어렵다.
그녀에 대하여 자세히 읽어내기가 힘든 일은 역사 속에서 밝은 면만으로 이루어졌던 일종의 속임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후손에게 만큼이나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런던 주재 스페인 대사가 1566년에 쓴 것처럼 – 특히 엘리자베스가 결혼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난처한 문제에 관해 – “그녀의 제안은 매우 날카로운데 또 한편으로 왔다갔다 한다. 무엇이 그녀가 가장 친밀하게 여기는 대상인지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녀의 그런 의도에 대하여 복잡하게 해석하게 된다.”
그렇게 그녀의 발언에 대한 의도를 확신하기 어려웠다면, 그녀의 침묵을 해석하는 일은 더 어렵게 된다. 그녀가 단호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침묵을 지키게 된 그녀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사건은 바로 아직 세 살도 되지 않았던 1536년 5월, 어머니 앤 불린(Anne Boleyn)이 아버지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던 일을 들 수 있다. 그것은 하나뿐인 아이가 무섭도록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직면하게 되는 매우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후 한 번도 어머니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녀가 한 번도 어머니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데 그렇게 된 근거에는 처형에 대한 책임자였던 아버지(King Henry VIII)를 매우 두려운 사자(lion)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엘리자베스는 점차 자신의 주위 환경부터 관찰했고, 조심스럽게 적응을 시도하면서 어머니의 친척과 함께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말년에 그녀는 자신과 어머니의 미니어처 초상화를 공개하기 위하여 뚜껑이 열리는 아름다운 반지를 간직했다. 그런 침묵의 행동 뒤에 숨은 구체적인 감정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해석하더라도 어머니의 폭력적인 죽음이 그녀에게 아무런 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증거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그리하여 적어도 그녀의 내면에는 과도한 자신감이 아닌, 뿌리 깊은 불안을 낳을 수 있는 일종의 정서적 외상과 그에 따른 부조화가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충분하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다섯 명의 남자와 간통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중 한 사람이 외삼촌이었으며 그들 모두 함께 참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랐다. 그런 가운데 그녀의 아버지는 그의 승인 없이 나은 삶을 희망할 수 없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확실성이라는 존재였다.
12세의 엘리자베스가 유일하게 남긴 편지에서 그녀는 헨리 8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고 가장 자비로운 아버지, 신성한 법과 아울러 모든 의무에 따라 다양한 방편으로 당신이라는 폐하에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보다 확실했던 사실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너무 어려서 당시 자신의 위치가 매우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3살이 되기 전에 그녀는 더 이상 왕위 계승자도 공주도 아닌,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 무효 결정에 따라 단순히 ‘엘리자베스 부인(Lady Elizabeth)’이라는 명칭의, 일종의 사생아였다. 이러한 지위에 대한 변화 없이 1544년의 왕위계승법에는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이복 언니 매리(Mary I)를 동생 에드워드(Edward VI) 왕실에 대한 상속인으로 지명했는데 이는 헨리 8세의 사생아 지명의 연장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고민을 전혀 하지 않은 듯하여 일종의 모순으로 여겨지면서 점차 엘리자베스의 미래는 정치적인 궁지에 몰렸다. 대부분 왕실 여성의 삶은 국내 및 대외 외교의 움직임에 따라 높은 신분의 남편과의 결혼이라는 일이 운명이었다.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이복 언니는 그런 결혼 게임에서 그 가치를 평가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여왕이 될 수도 있는 왕녀들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도 엘리자베스는 자신 앞에 놓인 삶을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어머니의 가혹한 운명과 결혼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신체적, 정치적 위험에 대하여 비교적 의혹이 덜한 삶을 이어갔고 아홉 번째 생일이 되기 전에 그녀는 세 명의 계모를 얻었고 잃었다. 그들은 제인 시무어(Jane Seymour), 클레페의 앤(Anne of Cleves), 그리고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였다.
그러는 가운데 네 번째 계모인 캐서린 파(Katherine Parr)는 1543년 여름부터 왕가의 세 남매를 불러 이른바 가족과 같은 생활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격랑은 가깝게 전달되었고 그녀를 보호할 의무가 있던 왕위 계승자로서의 동생 에드워드의 존재 역시 스페인 혼혈 언니 매리처럼 그리 친밀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1547년 1월 일어난 헨리 8세의 사망 이후 그녀 존재의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1548년 2월 무렵에 그녀는 과부가 된 캐서린 파와 그녀의 새 남편 토마스 시무어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에게 취한 매우 무례한 행동과 그 저의로 인하여 토마스 시무어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에드워드 왕과 각료들은 시무어를 지켜보다가 체포한 후 반역 혐의로 사형에 처했는데 이때 엘리자베스는 15살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시무어의 접근에 저항하지 않았는데 그랬던 사실이 잘생기고 세심하면서도 나이 든 남자에 대한 사춘기의 호감보다는 그렇게 다가오는 그 남자와 결혼과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상상을 전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시무어는 엘리자베스를 취하여 왕위를 차지하려 했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왕실의 공주들이 친숙했던 주변 환경에서 떨어져 외국으로 보내지면서 겪어야 했던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일단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아울러 당시 진행되었던 토마스 시무어의 재판에서 엘리자베스 역시 심문을 받게 되는데 주제는 토마스 시무어의 성적 희롱 또는 폭행의 정도였다. 그녀를 담당했던(나중에 고초를 겪게 되는) 로버트 티르윗 경(Sir Robert Tirwhit)은 “그녀가 매우 재치 있는, 뛰어나고 멋진 사고를 가졌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썼다. 그후 엘리자베스는 또 다른 큰 사건으로 교훈을 얻었다는 마음으로 조용히 독서만 하면서 지냈고 그러면서 불확실하기만 한 미래에 대비했다.
1553년 에드워드가 세상을 떠난 다음, 왕위 계승을 위한 또 한번의 소용돌이(제인 그레이, Lady Jane Gray, 매리 1세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그녀는 반역에 다시 엮일 수 있다는 심리적 트라우마 등으로 신체적 어려움까기 겪게 되었다. 건강 이상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지만 평정심은 시무어 사건 당시와 마찬가지로 유지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녀와 관련된 어떤 연결된 음모는 없었다. 당시 매리 1세가 의문을 갖고 그녀를 다그쳤다면 상황은 또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때 진실의 편이었다고 할 수 있던 스페인 대사가 이를 악물고 “엘리자베스를 정죄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대관식 복장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in Coronation Robes), 무명작가, 1600 and 1610 copy of a lost original of c. 1559,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1558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를 무렵 그녀는 권위와 정치적 권한은 있었지만 그리 안전한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가 갖추었던 조심스럽고 미묘하며 예리한 지능은 세상과의 상호작용에 가면을 쓴 모습으로 위조되었다. 지켜보고 기다리며, 친구를 사려깊게 선택하고, 적들을 더욱 신중하게 지켜보는 본능으로, 그녀 개인과 왕국에 대한 돌연한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그녀는 새로운 여왕으로의 길로 인도되었다.
가능하면 쾌활함을 유지하려 하면서도 파악되기 어려웠던 그녀였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숨어 있는 존재였다. 그러면서 통치 초기 그녀는 종교, 혼인, 국내 정치 논의, 외교에 관하여 명확한 입장을 취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야라는 이유로 그녀를 움직이게 하려는 시도에는 거절했다. 각료들은 변화, 전쟁, 혼인, 상속인 지명 등 대한 그녀의 거역하는 식의 방법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군주로서의 엘리자베스의 야심은 일관되었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위험을 촉발하기보다 현재 상황에서 파악된 위험들을 우선 관리하고자 했다.
그런 완전하지 못한 경험 속에서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주목할만한 군주 중 한 명이 나타날 수 있음이 확실해졌다.
http://kor.theasian.asia/archives/312537
아시아 앤 April 10, 2022 김인철 사회-문화, 칼럼
[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⑨]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왕국을 대영제국으로
무적함대 초상화(The Armada Portrait), George Gower, c.1588, 110.5 x 125 cm, Woburn Abbey, Woburn, Bedfordshire
엘리자베스 1세의 초기 초상화에서도 당시 보는 이들에게 의미 전달을 하기 위한 장미, 기도서와 같은 상징적 물건들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후기 초상화에서는 자신의 제국을 나타내는 것들(지구, 왕관, 검, 기념 기둥)과 달, 진주와 같은 고전적 순수함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이면에는 ‘처녀 군주(Virgin Queen)’를 표현하고자 하는 뜻도 담겨있었다.
아버지 헨리 8세 때부터 튜더(Tudor) 왕실에서는 초상화 전통이 생겨났는데 우선 채색필사본(illuminated manuscript)에서 이루어진 전통에 따른 초상화 미니어처(miniature)를 들 수 있다. 이 작은 인물 이미지는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 양피지 위에 수채화로 그려진 다음 딱딱한 카드놀이 판 위에 접착되어 굳혀진 것이었다. 유화로 그려진 패널(panel)화는 철저히 준비된 소묘 위에 실물 크기로 그려졌다.
잉글랜드 궁정에서의 초상화는 외국 군주에게 선물로 주고자, 또는 드물게 예비 구혼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었다. 이후 궁정은 여왕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보여주기 위해 매우 상징적인 그림을 의뢰했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후반기 잉글랜드 각 지방의 세련된 갤러리들에서는 초상화 세트로 가득 차 있었다.
튜더 왕조 시기 화가들의 스튜디오는 격동의 시기에 왕위에 대한 충성과 존경을 위한 중요한 상징으로 그녀의 이미지를 원하는 많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묵시적으로 규정을 만들어, ‘승인받은 얼굴 패턴(approved face patterns)’ 또는 인정받은 여왕의 그림을 작업하여 내놓았다.
당시 영국 초상화가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초상화 제작 기준은 16세기 전반부의 뛰어난 북유럽 플랑드르 화가인 한스 홀바인 2세(Hans Holbein Younger)가 그린 많은 초상 작품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잉글랜드 궁정에 실물 크기의 전신(全身) 초상화를 익숙하게 느끼도록 제작했던 대단했던 화가 홀바인의 작품 원본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1698년에 파괴된 화이트홀(휘트홀, Whitehall) 궁전에 있는 그의 위대한 왕조 벽화 등과 더불어 다른 원본 대형 초상화들 모두 엘리자베스 시대 작가들은 친숙했을 것이다.
이어 1570년대부터 여왕에 대한 숭배 분위기가 서서히 만들어졌는데, 왕립초상화 미술관장을 역임했던 미술사가이자 여왕 초상화 전문가 로이 스트롱 경(Sir Roy Strong)은 이를 두고 글로리아나의 숭배(The cult of Gloriana, 글로리아나는 여왕의 별칭이다)의 시작이었다고 규정한다. 그는 그것이 공공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만들어졌으며, 더욱이 종교개혁 이전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 동정녀 숭배, 성인 숭배 등 일련의 카톨릭 또는 관련 이미지, 의식, 행사와 같은 세속적 행위들을 대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여왕 즉위 기념일의 화려함, 궁정의 축시, 엘리자베스의 가장 상징적인 초상화 등으로 그녀에 대한 숭배 분위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했던 여왕의 이미지 관리와 홍보는 그녀의 통치 마지막 10년 기간에 절정에 다다랐으며 나이가 든 여왕의 사실적인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실을 무시한 채 영원히 젊어 보이도록 만드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런 과정에 나타난 기준과 양식은 1585년경의 단리 초상화(the Darnley Portrait)가 시작이었는데, 이것의 특징은 우선 여왕 옆 탁자에 왕관과 홀(笏, sceptre)이 있으며, 나중에 다시 제작되면서 추가되었던 것들로는 착용을 하되 들고 있지 않는, 튜더 왕가 소품들에 의한 왕권 상징물의 등장이었다.
여왕은 1570년 교황 비오 5세(Pope Pius V)에 의하여 파문을 당하면서 스페인의 필립 2세와의 갈등이 고조되었는데, 이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굳건한 가톨릭교도였던 매리 1세(Mary, Queen of Scots)가 잉글랜드에서 사망하면서 최고로 치달았고 그러했던 긴장과 경쟁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신대륙의 발견과 정복을 위한 바다와 육지에서, 그리고 그 결과 스페인 함대의 침공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대양의 지배권을 기반으로 한 제국의 깊은 의미를 담은 여왕에 대한 시리즈 중 첫 번째 초상화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처녀성을 지닌 여군주를 나타내는 상징이 결합되어 그녀가 운명적으로 개신교 수호자이기도 한 그림이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대양의 처녀이자 황녀(The Virgin Empress of the Seas)’의 이미지는 황금시기의 도래(Return of the Golden Age)와 그 궤도를 함께 한 것이다.
그렇게 이루어진 ‘무적함대 초상화(The Armada Portrait)’는 1588년 스페인 함대를 패배시키면서 제국의 상징으로 떠오른 여왕을 묘사한 우화적 패널화이다. 그것은 석 점의 초상화로 남아 있으며 관련한 몇 점의 회화 역시 볼 수 있는데, 베드퍼드 공작(Dukes of Bedford)의 영지 중심에 있는 워번 수도원(Woburn Abbey)의 버전은 오랫동안 1581년에 고위직 화가로 임명된 조지 가우어(George Gower)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여왕에 대한 도상학(iconography)적 이미지들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다양한 신화와 상징주의는 스페인 함대를 물리친 이후 몇 년 동안 엄청나게 여럿으로 뒤섞인 장식용 직물 작품으로도 나타났다. 시, 초상화 및 노천 행사 등에서 여왕은 정의로운 처녀인 아스트라이아(Astraea)임과 동시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Venus)로까지 찬미되었다.
이어진 디츨리(Ditchley) 초상화는 은퇴했지만 언제나 여왕의 대단한 옹호자였던 디츨리의 헨리 리 경(Sir Henry Lee)의 옥스퍼드셔(Oxfordshire) 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1592년 여왕이 이틀간 디츨리를 방문한 기념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마커스 지어래츠 2세(Marcus Gheeraerts the Younger)의 작품으로, 화가의 후원자인 리가 여왕의 행차에서 만들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미지에서 여왕은 잉글랜드 지도 위에 서 있는데 그녀의 발은 옥스퍼드셔에 있다. 그림은 잘렸고 배경은 제대로 잘 그린 편이 아니라 설명문과 단시(sonnet)가 불완전하다.
배경에는 폭풍이 몰아치지만, 그녀 앞에서 태양이 빛나고 있으며 왼쪽 귀 언저리에 천체(celestial) 또는 천구 형태의 보석을 착용하고 있다. 이 그림의 적지 않은 버전은 아마도 지어래츠 2세의 작업실에서 우화적인 부분이 제거되었고 엘리자베스의 특징인 원본에 있는 극도의 사실주의적 얼굴이 보다 ‘부드러워진’ 상태로 제작된 것 같다. 그 중 하나가 투스카니 대공(Grand Duke of Tuscany)에게 외교 선물로 보내져 지금은 프렌체 피티 궁전(Palazzo Pitti)에 있다.
1596년을 비롯하여 1603년 여왕의 사망 사이 날짜가 남아 있는 초상화에는 나이 든 여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원래의 모습과 충실한 유사성은 1597년 앙드레 위로 드 메스(André Hurault de Maisse)가 1597년 프랑스 앙리 4세(Henry IV)의 특명대사(Extraordinary Ambassador)가 되어 65세의 여왕과 함께 궁정인들을 만난 후 작성한 보고서에서 볼 수 있듯이 동시대인들의 기록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후 거의 모든 이미지가 1590년대에 니컬러스 힐리아드(Nicholas Hilliard, 여왕 즉위 초창기 세밀한 초상화를 그렸던 금세공가)가 처음 고안했던 여왕의 얼굴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는 엘리자베스에게 항상 젊음을 유지하도록 ‘젊음의 가면(Mask of Youth)’을 씌운 것이라고 미술사학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힐리아드와 그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약 16점의 세밀화(miniature portrait)는 이 얼굴 모형을 기반으로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의상과 보석의 다양한 조합이 실제에서도 그렇게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들을 궁정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던 화가들 역시 채택(또는 시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관식(The coronation) 예복을 입은 엘리자베스의 두 초상화가 1600년 또는 그 직후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하나는 유화로 그려진 패널 초상화이고 다른 하나는 힐리어드가 그린 미니어처화이다.
끝으로, 마커스 지어래츠 2세가 그린 것 중에서 아마도 여왕의 가장 상징적인 초상화는 허트필드 하우스의(Hatfield House)의 무지개 초상화(Rainbow Portrait)일 것이다.
작품은 여왕이 60대였던 1600년에서 1602년경 것으로, 이 그림에서 여왕은 마치 나이를 초월한 듯이 가면을 쓴 것과 같은 모습에 봄꽃으로 수 놓은 린넨으로 된 의상과 한쪽 어깨에 외투를 걸치고 환상적인 머리 장식과 느슨한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는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는 망토를 입고 있으면서 지혜의 뱀, 천공과 천구를 포함한 인기 있는 문장(emblem) 서식에서 찾아낸 상징을 착용하고 ‘non sine sole iris(태양 없이는 무지개가 없다)’라는 구호로 무지개를 실어 나르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이룬 역사적인 업적은 우선 종교분쟁을 지혜롭게 해소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녀가 취했던 중용정책은 성공회 중심으로 개혁을 이룬 보편적 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로 설명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경제정책에서는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장려하였기 때문에 농촌을 중심으로 급속히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으나, 양을 키우기 위해 목초지를 확대한 인클로저(Enclosure)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일이 벌어져 치안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의 방황은 심각해서 토머스 모어(Thomas More)는 저서 ‘유토피아(Utopia)’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자 여왕은 사회복지정책의 일환으로 구빈세(救貧稅)를 실시하여 빈민구제법과 함께 적용했다.
그러나 그녀의 위대한 외교적인 치적은 스페인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만들었던 일이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국력이 스페인과 프랑스와 비교하여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여 표면적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펴면서 음으로 양으로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Sir Francis Drake) 등을 지원하여 스페인 견제에 나섰다. 이어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에서는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했는데, 이에 따라 스페인과의 관계가 파경을 맞았고 두 나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다.
상복을 입은 매리 스튜어트(Mary, Queen of Scots in white mourning for her husband), François Clouet. c. 1560, 37.5 x 26.5 cm, Musée Carnavalet, Paris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카톨릭을 믿는 매리 스튜어트가 개신교 신도들이었던 귀족들의 반란으로 아들인 제임스(James I, 엘리자베스 1세가 세상을 떠난 후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6세를 겸함)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1568년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매리 스튜어트는 그 후 약 20년 동안 자신이 헨리 8세 누나의 적자임을 내세우며 엘리자베스 1세를 축출하고 왕위를 차지하고자 계속 음모를 꾸몄다. 그러다가 매리는 여왕 암살에 대한 모의였던 배빙턴 사건(Babington Plot)의 전모가 드러나 1587년 2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운영자 주: 단두대는 영국의 처형 방식이 아니다.)
스페인의 필립 2세(Portrait of Philip II of Spain), Sofonisba Anguissola, 1573, 88 x 72 cm, Museo del Prado, Madrid
이 일은 스페인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하고자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 결국 1588년 7월 필립 2세(Philip II)의 무적함대 130척이 영국해협에 나타났다. 그러나 스페인 함대는 잉글랜드 함대에게 크게 괴멸을 당하여 스코틀랜드 방향으로 퇴각하다가 북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상당수가 파손, 침몰되었고 오직 53척만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잉글랜드는 이처럼 이어진 외국과의 결전 속에서 국민의 정신적 결속과 일체감을 이루었고, 또다른 한편으로, 여왕 시대는 국민 문학의 황금기가 되기도 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경험 철학 역시 이때 나타났다. 아울러 당시 잉글랜드인들 많은 수가 집에서 악기를 즐겼을 정도로 문화의 꽃이 피었다.
식민지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독신 여왕을 기념하는 속주 버지니아(Virginia)가 만들어졌고 아시아에서는 식민지 경영관청인 동인도회사를 창설하여 그 세력을 확장시켜 훗날 잉글랜드 왕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발판을 만들었다.
이 시대를 훗날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an era)’라고 부르게 된다.
http://kor.theasian.asia/archives/314125
아시아 앤 April 30, 2022 김인철
엘리자베스 1세가 작성한 16세기 원고 발견
영국 램버스 궁 도서관에서 발견된 엘리자베스 1세의 원고/사진=램버스 궁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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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가연 기자] 영국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 엘리자베스 1세가 쓴 원고가 발견됐다. 이 원고는 16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 영어학 명예교수인 존 마크 필로 박사(John-Mark Philo Ph.D)가 엘리자베스 1세의 원고를 발견했다고 미국 폭스뉴스 등 외신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필로 박사는 지난 1월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원고 번역본을 찾던 중 엘리자베스 1세의 원고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필로 박사는 성명을 통해 "이 원고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인 1590년대에 사무국에서 주로 사용되던 특정한 지료로 구성돼있다"며 "당시 튜더 궁정에는 타키투스의 번역본을 작성하고 번역본에 사용한 종이와 같은 종이를 개인 서신에 썼던 번역가 단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게 여왕이었다"고 밝혔다.
엘리자베스 1세/사진=미국 폭스뉴스 화면 캡처
또 원고에서 발견된 세 개의 워터마크는 여왕이 개인적인 서신과 다른 번역본 작성에 사용된 종이에서도 발견된다. 이 워터마크는 사자, 이니셜 'G.B', 석궁 각인으로 구성된다.
이어 박사는 번역본이 엘리자베스 1세의 비서 중 한 명의 품격있는 필체로 작성됐지만 본문의 수정은 '더 유명한 사람'의 필체로 작성돼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저분한 필체로 정정된 부분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수정 부분의 필체는 엘리자베스 1세의 후기 필체와 일치한다"며 "당시에는 튜더 왕조의 사회계급에서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필적이 점점 더 엉망이 됐다. 여왕에게는 이해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문제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엘리자베스 1세는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이끌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9월7일 헨리 8세와 앤 볼린 슬하에 태어났으며 이복 자매 메리 1세를 이어 1558년 25세의 나이로 여왕 즉위했다.
그는 당시 해상권 장악을 놓고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1588년 전쟁을 벌여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헨리 7세 때 처음 시도됐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도 재개했다. 또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어 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1609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김가연 기자 katekim221@asiae.co.kr
https://view.asiae.co.kr/article/2019120211111767712
- 아시아경제 2019.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