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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중고32·2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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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쉼터 스크랩 유무등산기(遊無等山記)
봉곡 강영권 추천 0 조회 87 08.10.08 16:26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광주 시내가 가까워지자, 빗방울이 비쳤다.

누군가 어렵게 광주까지 왔으므로 비가 오면 안 되는데 라고 걱정하자, 무등산 밑 보리밥집에 퍼질러 앉아 막걸리나 마시면 되지 않느냐고 태평스럽게 이야기했다.


이번 등산에 내가 참석하게 된 까닭은 서울 서부지검 해오름 산악회에서 9. 20. 광주 무등산을 등산한다고 메일을 보냈고, 내가 그 산악회의 전전임 회장이므로 업서버로서 참가자격이 있다고 참석을 권유하였기 때문에, 약 4년 만에 광주 무등산을 오를 기대를 안고 등산에 참석하게 됐다.

참석자는 나와 서부지검 등산행사시 자주 따라오는 내 친구 김 모 사장, 총무 박전근 주임, 검사직무대리 유재성 과장, 고양지청의 심성용 수사관, 서부지검 민원실장 고봉훈(등산도중 서부법조타운의 3대 기관장, 즉 검사장, 법원장, 민원실장 중의 한사람이라고 누군가 너스레를 떨었다), 서부지검 수사관 김득호, 공판실 수사관 김준호, 실무관 용덕오, 조성호, 김길선, 서부지검 청사관리소장 설창환 등 모두 12명으로 너무 단촐했다.

휴일에 멀리 광주까지 원정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라고 짐작됐다.


광주 도착 직전 비가 오락가락하는 것을 걱정했지만, 무등산 증심사 부근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관광버스에서 모두 하차했다.

광주에 살면서, 서울서부지검에 근무하는 이병안 수사관이 우리를 맞았다.

이병안 수사관은 선하고도 환한 얼굴 그대로였다.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오전 10시반경 그가 안내하는 대로 곧바로 무등산 자락으로 빨려 들어갔다. 초입부터 오르막이 시작됐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심성용 수사관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땀도 별로 흘리지 않으면서 잘도 올랐다.

서울에서 금요일까지 근무하다가 광주로 내려오면, 매주 토요일 아침 일찍 아들과 함께 무등산에 오른다는 이병안 수사관과 대구출신이면서 지금은 고양지청에 근무하는 심성용 수사관이 서로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생각보다 쉽게 토끼등에 도착했다.

심성용 수사관이 광주 무등산에 처음 왔는데, 예의상 땀을 좀 흘렸다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

벤치에 앉아 후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평지로 약100미터 거리에 있는 한국의 100대 약수라는 너덜겅 약수터로 갔다.

세 군데에서 콸콸콸 시원하게 쏟아지는 약수를 한바가지 받아 마시고, 물병에 담았다.


그 옛날 광주고검에 근무할 당시 고검 등산회원들과 보름달이 휘영청 떴을 때, 검찰청 뒤 지산유원지에서 출발하여 바람재를 거쳐 토끼등까지 와, 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달구경을 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땐 정말 깊고, 푸른 밤이었다.

마지막으로 후미 두 사람이 도착하여 그들도 한숨 돌리자, 다시 동화사 터를 향해 출발했다.

이 등산로는 무등산으로 오르는 길 중 가장 가파른 길이다.

광주고검에 근무할 때는 이 길을 혼자서, 밤에도 낮에도 수없이 올랐기에 익숙했다.

혼자 이곳을 오르면서 피워 올렸던 수많은 생각들을 되새김질했다. 그런 생각의 되새김질도 목에 숨이 찰 것 같은 가파른 등산길로 인해 하얗게 지워졌다.

땀이 뚝뚝 떨어졌다. 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면 다시는 흘릴 땀이 없겠다 싶을 정도였다.

광주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너덜겅 지대에서 잠시 쉬었다. 후미가 도착하자, 기념사진을 찍었다. 처음 온 사람들은 만만치 않은 코스라고 놀랐다.

다시 가파른 등산길을 따라 걷다가 이윽고 비교적 완만한 길이 나왔다. 동화사 터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옛날에 절터였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계단도 있고, 축대도 쌓아져 있다.


동화사 터에 도착하니, 샘터에 지붕도 만들어져 있는 등 잘 단장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목을 축이고, 약50미터쯤 더 걸어 올라가 벤치에 자리를 잡고, 후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는데 후미는 상당히 지체했다. 후미 일부가 동화사 터 샘터부근에서 막걸리를 한잔씩 하고 있다고 누군가 일러줬다.

내가 심성용 수사관에게 대구 팔공산 동화사는 조계종 교구본사로서 번창일로에 있고, 광주 무등산 동화사는 페 사찰이 된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농을 쳤다.

사실 광주 동화사는 산세가 험하고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보통 신자들이 찾아오기는 어려워 폐 사찰을 면할 수 없어 보였다. 


후미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중봉을 향해서 바로 출발했다. 케이비시 중계탑이 저 멀리 보였다.

완만한 능선 길에는 억새가 무성했고, 억새들은 바람에 쓸리고 있었다. 마치 가는 붓으로 비스듬하게 칠을 한 것 같았다.

무리지어 핀 가냘픈 구절초들도 바람에 출렁이고 있었다.

능선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얼룩무늬 군복바지를 반바지로 만들어 입고, 지나치는 등산객이 낯이 익었다.

광주지검에 근무하다가 승진하여 인천지검으로 발령 나, 인천에서 근무하는 김구종 수사관이었다.

우리는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방향이 달라 다음을 기약했다.


케이비시 중계탑에서 바라보면 또 하나의 높은 산이 층을 이루고 있는 듯 동쪽으로 정상이 우람하게 서 있고, 그 정상은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듯, 깃털 같은 구름이 빠르게 지나면서 몸을 감추고 있었다. 언뜻 언뜻 서석대가 보였다.

다시 평탄한 능선 길을 따라 걸어 이내 중봉에 도착했다. 중봉에는 표지석이 없어 이곳이 중봉인지, 우리가 선 지점에서 서쪽 발  아래 솟은 봉우리가 중봉인지에 대해 다른 등산객과 이병안 수사관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누군가 왜 무등산이라고 부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수사관은 원래 무등은 무돌의 향찰표기로서, 옛날에는 서석대 부근에 사당이 있고, 무당이 지키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굿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나도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그게 맞을 거라고 했다.


일찍이 정약용 선생은 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라는 글에서“중봉의 꼭대기에 서면 표연히 세상을 가벼이 보고 홀로 신선이 되어 날아가고픈 마음이 일어나, 인생의 고락이란 마음에 둘 것이 못됨을 깨닫게 되니, 나 또한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고 표현했다.

중봉 꼭대기에서 발아래 펼쳐진 굽이치는 산하와 광활한 광주시내를 보고 있노라면, 다산 선생께서 절묘하게 묘사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후미도 모두 도착하자, 봉우리 바로 아래 풀밭에 메고 간 등산가방을 풀고, 요기를 했다.

닭볶음, 돼지머리고기를 안주로 무등산 막걸리를 딱 한잔씩 했다.

후미로 쳐진 사람들이 중간에 막걸리 두병을 마시고 오는 바람에 한잔씩 밖에 못 마시게 되었다고 내가 불평하자, 산악회원들이 걸쭉하게 웃었다.

막걸리를 한잔씩 마시고 다시 출발하여 옛날 군부대가 주둔해 있던 곳-지금은 생태복원을 위해서 울타리를 쳐 출입을 금하고 있는 평지-을 지나 해발고도 900미터인 장불재에 도착했다.

장불재에서 입석대와 서석대로 올라가는 것이 기본적인 산행코스이나 올해 12월까지는 생태복원을 위한 계단공사 등을 한다고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무등산에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입석대와 서석대의 신비로움을 보여줘야 했는데 아쉬웠다.


이제부터는 속도를 내 빠르게 가자고 말하고서 모두들 묵묵히 하산 길을 재촉했다. 중머리재에 도착하여, 이번 등산에서 항상 뒤쳐져서 온 두 사람(이름을 밝힐 수 없음 ㅎㅎㅎㅎ)을 기다렸다.

다른 때는 내가 항상 뒤쳐지는데, 이번에는 내가 선두에서 계속 가자, 웬일이냐고 직원들이 자꾸 궁금해 했다.

다른 때는 내일 등산을 가든지 말든지 전날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오랜만에 무등산 신령님 만나러 가므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산행을 함에 있어 앞서고 뒤쳐지는 것이 무슨 상관있겠는가!

그 옛날 송익필(1534-1599)이라는 분은 산행(山行)이라는 시에서 산행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는데, 삶의 진정한 뜻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좋은 시가 아닐까 싶다.


산을 가노라면 쉬기를 잊고, 쉬다보면 가기를 잊는도다.

말을 멈추고 소나무 그늘 아래서 물소리를 듣노라

내 뒤에 오는 몇 사람이 나를 앞질러 갔던고

제각기 멈출 곳이 있는데, 다시 무엇을 다투리오.

(山行忘坐坐忘行/歇馬松陰聽水聲/後我幾人先我去/各歸其止又何爭)


이병안 수사관이 세운 처음 계획으로는 중머리재에서 새인봉쪽으로 가다가 중간에 증심사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경우 적어도 30분 이상은 더 걸린다고 하므로 바로 중머리재에서 증심사쪽으로 가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하산 길은 용덕오 주임과 함께 걸으면서 이런 저런 세상사는 일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증심사에 다 왔을 무렵, 낯익은 식당, 송풍식당에 도착했다. 그 곁에는 수령 450년이라는 느티나무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헌걸찬 느티나무를 올려다봤다.

1982년도에 보호수로 지정됐다고 하니, 이제는 거의 476세가 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니, 얼마나 우람하겠는가!


증심사 앞을 지나 처음 출발했던 곳에 도착했다. 선두와 통화를 한 결과 버스정류소 부근에 선두가 있다고 하여 그곳으로 갔다. 마침 능선에서 만났던 김구종 수사관과 이병안, 심성용 수사관, 그리고 등산회 총무인 박전근 주임이 맥주를 한잔씩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시원한 맥주를 한잔하고 후미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올랐다.

다른 청 직원이라고 머뭇거리는 김구종 수사관에게, 다른 청 직원이라도 검찰가족이니 함께 점심을 같이하자고 제의했다. 그도 관광버스에 올랐다.


오후 3시반경 버스에 올라타고 검찰청 뒤 지산유원지 쪽 팔도강산이라는 보리밥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닭백숙을 안주 삼아, 이 좋은 무등산을 오지 못한 해오름산악회원들의 행운과 운 좋게 무등산에 온 우리들의 만수무강을 비는 건배를 했다.

그리고 무등산의 별미 보리밥을 야채와 온갖 나물을 섞어 썩썩 비벼먹었다.

광주에 남아 있을 사람들과 악수하며 작별을 고하고 상경했다.

멀리 빛 고을 광주까지 원정산행인데, 참석자가 적어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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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8.10.08 16:27

    첫댓글 순택이가 꽃준다고 해서 올린다.ㅎㅎㅎㅎ

  • 08.10.10 12:51

    무등산 젊었을 때 증심사 골짝에서 들머나는 처자들 귀경삼아 가곤했지 그리곤 기회가 없어서 가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가 궁금하내 한번 가 봐야제 잘 읽었내 역시 문재가있는 사람은 다르구면 좋은 한시 싯귀를 적재적소에~~굿이여!! 순택이가 안주면 나라도 줘야것다 야

  • 작성자 08.10.13 13:38

    순택이가 안주면 자네가 준다고? 흐미 고맙다야.

  • 08.10.11 08:40

    잘 읽었다.재대325회 잘 되고 있제?부산은 모두가 너무 바쁜건지 게으른건지..항상 건강하소

  • 작성자 08.10.13 13:39

    대구325 모임 날이 오늘인데, 오늘은 청에서 일이 있어 난 참석을 못할 것 같다. 지난주에는 부산 한번 갔다왔다. 항상 즐겁게 살그라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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