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바라는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로자리오에서 미숙아로 태어났다.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귀족의 후손이었으며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는 독립전쟁 당시의 군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결국 그의 부모는 부르조아 계급 출신인 셈이다. 어린 에르네스토의 부모는 무신론자였고, 공산주의자까지는 안되었지만 자유주의적 좌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돈을 모으는 데 억척스러운, 그런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고 또 돈을 버는 기술도 별로 없었다.
에르네스토가 두 살 때 천식에 걸려 고생을 한 이후 그의 가족은 모두 코르도바(근처의 알타그라시아)로 이사를 갔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건강을 위해 에르네스토에게 여러 가지 운동을 가르쳤다.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그는 활동적이고 자립심이 강했다고 한다. 돈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옷차림에도 신경쓰지 않았으며 자유롭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종종 고독을 즐기기도 했으며 미친 듯이 책을 읽고 공부에도 열심이었다고 한다.
청년 에르네스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탐험심 많은 사람이었다. 열일곱살 때, 모우터를 붙인 자전거로 아르헨티나의 중부지방을 돌아다녔다. 이 여행 후에는 자동차 운전과 비행기 조종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잠시라도 집에 붙어 있지를 못했다. 에르네스토의 부모는 결혼생활에 불화를 일으켜 1950년에 이혼한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맡게 되었다. 청년 에르네스토는 어려워진 집안살림을 돕고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했다. 그래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한 건설회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다.
천식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 에르네스토는 이 경험 때문에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의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여행을 떠났다. 1952년에는 같은 의대 친구(친구하고 하기에는 게바라 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알베르토 그라나도스와 둘이서 10개월에 걸쳐 바이크로 여행을 했다. 칠레에서 바이크가 고장이 나자 페루의 마츄피츄까지 도보로 여행하였다. 한동안은 상 파울로의 나환자촌에서 환자들과 생활하기도 했다. 그후 아마존강을 횡단하여 콜롬비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의 친구는 카리카스에 남고, 에르네스토는 비행기로 마이애미까지 갔다. 여행을 그에게 남미대륙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대조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상 파울로 나환자촌에서의 노동을 통해 "인간들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는 진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비행기의 출발이 지연되어 마이애미에서 1개월간 더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미국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8월에 귀국한 후, 의학공부에 몰입하여 1953년 3월,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게바라는 남미 도보여행을 통해서 그곳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사회과학적 안목을 길렀고 인간해방에 기초한 인식의 굳건한 토대를 쌓게 되었다. 훗날 그는 남미의 어느 땅에서도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는 안락한 의사에서 급진적인 변혁주의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알레르기에 대한 연구>로 의사가 된지 두달만에 게바라는 까운을 벗어던지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볼리비아로 갔다. 게바라의 주된 관심사는 아직 정치적인 문제에로 향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남미 일부국가에서 이미 현실화되어가는 사회개혁운동과 부딪히면서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이념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에 앞서 볼리비아의 라 파스에서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변호사 리카르도 로호와 만났다. 조국에서 추방된 이 반페론주의자와의 만남이 결국 그의 삶을 변화시켰다. 로호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1953년 볼리비아 혁명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였고 그의 설득으로 베네수엘라(달러를 벌 수 있는 유일한 곳)로 가지 않고 과테말라(미대륙에 있어서 모범적인 혁명이 시작된 곳)로 가게 된다.
1954년 과테말라 중미의 이 작은 나라에서 자유주의적 좌파인 하코보 아르벤즈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혁신적인 정책을 폈으며 당시 막강했던 유나이티드 프루츠사(미국 곡물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경작지를 국유화시킨 후 그것을 인디언과 소농에게 분배하려는 개혁을 실시하려는 중이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이 나라의 지독한 빈곤상테에 충격을 받고 아르벤즈이 정책에 절실히 공감했다.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아르벤즈의 사상에 대한 경외심을 게바라는 일생동안 간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외심을 품고 게바라는 혁명의 실천을 위해 패덴드 순켈에서 의사를 지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으로 향하는 여행도중에 과테말라의 우익 망명인사인 호세 카스틸료 아르마가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원조받고 군대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아르벤즈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일으킨 쿠데타를 목격하게 되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체 게바라'가 되었다. 이름을 새로 지어준 사람들은 코스타리카의 수도 산 호세의 한 찻집에서 알게 된 쿠바인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1953년 7월 26일, 쿠바의 몬카타병영 공격 때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즉 피델 카스트로의 동지들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토는 그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운동 지도자들과 만나고 싶어했다. 코스타리카에서 이미 '체'로 이름이 알려져 있던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을 일기 시작했다. 과테말라 좌익정부의 전복이 계기가 되어 그는 맑스-레닌에 관한 학습을 시작했다. 이 학습을 통해 알게된 것은 가난하고 착취받는 나라의 혁명정부는 계속적인 착취와 수탈을 위해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자본가 세력에 의해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과테말라 침공을 통해 게바라는 미국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과 제국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의 범죄에 정면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대항하였다.
나는 아르벤즈 정부의 요직에 앉을 생각은 전혀 없소. 명백한 정치경제적인 침략을 자행한 미국과 미국자본의 횡포에 덩달아 날뛰는 반민족적인 매판자본가들에게 맞서기 위해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군대를 조직하여 했을 뿐이요. 과테말라는 지금이야말로 투쟁이 필요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 게바라가 아르헨티나 신문기자 호르헤 리카르도 마셋티(현재 행방불명)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CIA는 처음부터 '진지하게' 라틴아메리카에 대하여 간섭했다. 그 결과 라틴아메리가의 거의 모든 나라가 선교사를 앞세운 미국식 민주주의란 것을 통해 미국 소유의 식민지가 되어 갔다. 과테말라도 예외는아니었다. 과테말라의 여러 지역이 CIA의 조정을 받고 있는 군대에 의해 폭격을 받았다. 아르벤즈는 피신할 틈도 없었다. 과테말라 혁명은 시작되자마자 어어하는 순간에 끝나버렸다. 게바라는 투쟁에 직접 뛰어들어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했다. 투쟁을 촉구하기도 하고 무기를 운반하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미 CIA의 사주를 받은 과테말라정부의 재판부가 이미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결정, 공고하였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과테말라인 친구 엘 파토호와 함께 혁명이론을 배우러 멕시코의 수도로 향하여 달렸다. 이때가 1954년 9월 21일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 게바라와 파토호는 겨울참새처럼 극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이곳에서 혁명이론과 맑스주의, 각국의 민족해방전쟁의 전술을 두루 섭렵한다. 굶주림과 억압 그리고 독서를 통해 게바라는 철저한 급진주의자로 변해갔다. 게바라는 1955년 여름, 멕시코로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쿠바해방운동에 가담해 달라는 피델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피델은 그를 쿠바 진격대의 의사로 임명했다.
피델과 나는 밤을 지새우며 토론을 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그의 부대의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 자신의 다리가 라틴아메리카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과테말라에서는 가장 잔인하게 숨통을 조였던 제국주의의 실체를 본 후였기 때문에 압제자에 대항하는 혁명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내 한 몸을 바치는 데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있을 수 없었다. 피델은 비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들이 세운 계획은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낙관적인 태도에 공감하게 되었다. 아무튼 혁명은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고 온몸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울부짖기만 한다든지 대충 적당히 해치워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게바라와 멕시코에 있던 망명 쿠바인들은 철저하고 강도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교관은 스페인 외인부대의 대장으로 게릴라 전투에 다년간 경험이 있는 알베르토 베이요 대령이 맡았다. 베이요는 멕시코에서는 살바로르 태생의 지주로 통하고 있었다. 망명 쿠바인들은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멕시코주 찰코 지방 부근에 있는 오래된 농장을 구입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고된 훈련과 사격연습에 들어갔다.
726운동의 지도자들은 수개월 동안 카리브해를 건너 전사들을 무사히 쿠바까지 실어다 줄 튼튼한 배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피델이 베라쿠르즈주의 리오타투스판이라는 작은 항구에 묶여 있던 고물이 다 된 보트 그란마호를 찾아냈다. 이 배의 주인은 미국인인 로버트 에릭슨이었는데, 피델일행은 멕시코인 안토니오의 중개로 5만페소를 주고 이 낡은 배를 별수 없이 사들였다. 이 배는 1939년에 건조된 것인데 전체 길이는 19미터, 폭 4.5미터로서 정원은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약 20명 정도였다. 250마력짜리 두 개의 엔진을 탑재할 수 있었지만 거의 모든 부분을 수리해야 할 만큼 고물이었다.
그란마호는 1956년 11월 25일 일요일, 동이 틀 무렵 닻을 올렸다. 정원을 훨씬 초과하여 82년이나 승선했다. 게다가 연료, 무기, 전투복, 식량을 적재했으니 최대 시속 9노트에 48톤의 고물 보트는 출발하자마자 허덕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멕시코에서 쿠바의 동부 오리엔테주 해안까지 가는 가장 길고 비효율적인 항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도중에 FBI나 멕시코 경찰을 만나는 일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보트는 언제 격침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더구나 승무원들은 모두 배멀미를 했다. 게다가 식량도 충분치 않았다. 게바라는 지병인 천식이 도져서 심하게 고생했다. 그란마호는 마침내 연료가 떨어졌고 휩쓸려오는 파도에 떠밀려 항로를 잃고 말았다. 상륙예상지점인 코로라다스 해안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배는 산호초에 좌초되었다. 해안에 배를 갖다댄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82명의 탑승자는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자맥질쳐서 간신히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망그로브 숲은 상륙지로는 최악이엇다. 붉은 망그로브 숲은 바다 쪽에서는 두터운 장벽처럼 보였다. 그 거대한 나무들의 밑둥에는 라카로운 빛을 띤 굴조개 따위가 칼끝처럼 빛을 발하며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게다가 물 위로 드러난 망그로브의 뿌리에는 바늘깥은 가시가 돋혀있어서 밟으면 발바닥을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발밑은 뻘밭이어서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지기 쉬웠고 마치 뜨듯미지근한 고기국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기분마저 불쾌했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커다란 게들이 우글거리며 기어올라와 전사들을 괴롭혔다. 설상가상으로 모기나 파리떼가 몰려오면 망그로브숲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세시간이나 걸려서 간신히 이 지긋지긋한 늪지대를 빠져나와 일행은 아침 9시에야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오전 9시 30분 원정대원들이 늪지대를 막 벗어나자마자 귀청을 때리는 폭음이 들려왔다. 바티스타의 군대와 비행기가 그들이 상륙한 것을 발견하고 폭격을 개시한 것이다. 11시에는 폭격기 세대가 다시 나타나 피델과 그의 동지들이 휴식을 취하
고 있던 농가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원정대원들은 다시 쫓겨 나가야 했다.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쿠바에서의 악몽과 같은 첫 날에 대해 기록하였다.
12월 2일 우리들은 도착예정지인 코로다스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벨릭이란 지점에 상륙했다. 이때 이미 대부분의 장비는 분실되었다. 게다가 새로 준비한 군화를 신었기 때문에 늪지대를 빠져나오는 동안, 대원들의 발은 부르터지고 물집이 생겼다. 문제는 이 상처에 스며들어오는 파상풍균만이 아니었다. 카리브해를 항해하는 도중 내내 몰아친 폭풍속을 7일간이나 헤쳐왔기 때문에 항해에 익수치 못한 대원들 거의 모두가 심한 배멀미로 탈진해버려 기진맥진한 상태여서 다음의 작전을 수행해 내기가 어려웠다.
원정대원들의 모습은 무모한 계획롸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표본이었다. 물론 초기의 이러한 자살행위에 가까운 실수들이 후에 성공할 수 있는 생생한 교훈이 되었지만..
장비중에서 우리 손에 남은 것이라곤 총, 탄약대, 눅눅해진 탄환뿐이었다. 대부분의 구급낭과 배낭은 늪지대를 빠져나오면서 잃어버렸다. 밤새도록 제당공장 소유의 사탕수수 밭을 헤치고 걸어나갔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던 우리 대원들은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행군 도중에 버렸기 때문에 나중엔 식량이 모자라서 사탕수수만으로 허기와 갈증을 달래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심코 버린 음식 찌꺼기가 후에 화를 자초했다. 수색대가 이를 발견해서 우리를 추격하는데 좋은 단서들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길을 안내했던 사람들을 돌려보낸 것도 커다란 실수였다. 그들이 돌아가서 바티스타의 정부군에게 우리의 행로를 밀고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쿠바진격 부대원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주해야 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레지스탕스들과 접선하는 일은 이미 불가능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