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유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이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없어서 좋은 것도 있다. 바닷가에 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한 수평선을 바라보자. 구름 한 점 없는 가을하늘을 바라보자. 그 시원하게 트이는 마음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보석 중에서 제일로 치는 것은 다이아몬드다. 다이아몬드는 대체로 클수록 값이 비싼 줄 알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다이아몬드의 값은 4C(크기, 컬라, 투명도, Cutting)를 기준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있고 투명도가 뛰어나다고 해도, 크기에 연연해서 과감하게 잘라내야 할 부분을 잘라내지 못하여 마지막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좋은 상품이 되지 못한 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돈 몇 푼에 팔아 넘긴 가롯 유다를 보고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셨다. 가롯 유다가 한 일을 생각하면 정말 세상에 없었으면 좋을 뻔했던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자면 세상에 없었으면 좋았을 사람은 많다. 누가 뱀을 빨리 그리느냐 하는 시합에서 그리기를 끝낸 사람이 시간이 남아 뱀 그림에 발[蛇足]을 그려 넣었다가 실격되었다는 고사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고, 없었어야 좋았을 것을 지적할 때 쓰이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뱀에게는 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마릴린 몬로는 한 세기를 풍미한 미녀다. 그녀가 가진 매력은 풍만한 육체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백치미(白痴美)로 모든 남성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렇게 바보스러울 만큼 빈 곳이 있어 보이는 것도 매력 중의 하나가 된다. 이것은 그림에서 말하는 여백(餘白)의 미(美)와 비슷하다. 동양의 미(美)를 비움의 미라고 했듯이 동양화에는 여백이 많다.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공간을 그대로 남겨 둠으로써 넓고 넓은 공허한 하늘의 추상적인 모습까지 훌륭하게 표현하는 것이 동양화의 기법이다. 이렇게 없어서 아름다운 것이 동양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낚싯대를 물에 드리우고 앉아 있는 노인의 그림,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면서 한가롭게 가고 있는 아이의 그림, 사군자의 그림 등 모두가 주제가 되는 그림은 한쪽으로 치우쳐 놓고 하얗게 여백을 남겨 둔다. 불균형에서 오는 멋을 우리 동양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균형미를 강조하는 서양화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옛날 어른들은 즐겨 사용하던 흰색 이외의 모든 색깔을 무색(無色)이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가 물감으로 사물을 그리듯이 우리의 선조들은 여백을 남김으로써 물감으로 표시할 수 없는 세계를 훌륭하게 그려 넣는 지혜를 발휘했으며 이 때 물감을 아예 사용하지 않아서 하얀 부분이나, 생활 중에서 사용하는 흰색만을 오로지 색으로 여기고 나머지는 모두 무색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때 선조들이 색이라고 했던 색은 없음으로써 보기에 더욱 좋았던 진짜 색이었다. 반야심경 맨 처음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경지가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이 노래를 부르다 보면 가을달을 배경으로 기러기 몇 마리가 날아가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는 넓고 공허한 하늘을 연상하게 되어 우리의 감정이 여유를 갖게 한다. 이렇게 노래에도 여백이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제자들의 묻는 말에 연꽃을 손에 들고 소이부답(笑而不答)함으로써 대답한 것보다 더 큰 가르침을 줄 수 있었던 것도 대화에 있어서의 여백이다.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 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도종환 시인의 ‘여백’이라는 시다. 이와 같이 여백은 눈과 마음이 쉬어 가게 하고 배경이 되어 주기도 한다. 살아가는 데에도 여백은 필요하다. 시의 마지막 표현처럼 빈틈없는 사람은 남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피곤하다. 좀 모자란 듯하게 살아가면 어떨까. 조금 져 주면서, 약간 손해를 본다 하면서, 있으면서도 있는 체하지 않으면서 사는 삶이 여유를 가진 삶이 아닐까.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다.
(권중대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