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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신추 추억마당 원문보기 글쓴이: 조 창덕
~~두번째 여행지, 베트남 하롱베이~~
2011년, 1월 8일 오후13시 45분, 아내와 함께 김천역에서KTX열차를 타고 1시간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리무진 버스로 갈아탄 다음, 대략 50여분이 흐른후에 인천 공항에 도착, 오후 17시30분에 여행사직원과의 미팅을 마치고 일정에 필요한 물품을 인도받았다. 베트남에서 사용할 화폐를 달러로 환전하였으며 마일리지를 신청하는 일도 잊지않았다. 여권확인과 함께 공항검색대를 무사히 통과, 대한항공 676비행기에 탑승하기까지``````, 이번이 노란풍선을 통한 두번째 해외여행이기 때문에 날짜와 목적지를 정함과 동시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시 40분, 비행기는 인천공항을 출발, 베트남 하노이를 향하여 힘차게 날아 오른다.
"여보, 고마워요."
비행기를 탈때마다 불안해 하던 아내가 정상괘도에 올라서야 안정을 찾는다. 나는 꼭잡았던 아내의 손을 놓아주곤 어깨를 감싸안았다. 돌이켜보면 이번 여행은 해남도를 다녀오던 2008년 부터 꿈꾸었다. 그때의 여행이 너무나 즐거웠기에 여건이 허락되면 매년 여행을 떠나기로 아내와 약속하였다.
하지만, 다음해인 2009년은 개인적으로 힘든일을 많이 겪었다. 새해가 시작되고 며칠지나지 않아 그동안 노환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님께서 감작스레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상처가 치유되기도 전에 건강만큼은 자신하던 아내마저 어머님을 잃은 슬픔에 몸져 누었다. 뿐만아니라 어렵고 힘든 일이 연달아 생기더니 급기야 나역시 건강이 악화돼어 병원을 찾아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며 위안을 삼는차에 시골에 계신 큰형님이 병문안을 오셨다. 그리곤 본인도 몸이 안좋다며 이왕이면 내가 있는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고싶어 하셨다. 그리고 그일 이후로 정확히 한달하고 이십여일 만에, 61살이라는 짧은 생애를 끝으로 큰형님마저 어머님을 따라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비행기는 고도 1만2천, 시속 700킬로라는 엄청난 속도로 어두운 밤하늘을 비행한다. 이런 속도로 4시간을 날아야 한다니 우리나라와 베트남과의 거리를 짐작할 만하다. 기내식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대신하고 잠시 눈을 붙이는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들린다. 멀리 호치민 공항의 불빛을 감상하며 시계를 보았더니 21시 30분을 가르킨다. 이곳과의 시차를 고려할 때 한국시간으로는 지금 23시 30분을 지나고 있겠지.
베트남의 날씨는 생각처럼 무덥지 않았다. 더군다나 비행기가 착륙한 하노이는 우리나라의 북부지방에 해당하기 때문에 남부지방인 호치민에 비해 상당히 쌀쌀했다. 지금은 계절상으로 한겨울이라 1월 평균 기온이 영상 12도 정도이다. 때문에 사전정보없이 여름옷만을 챙기고 이곳을 찾았다간 낭패를 당하기 일쑤이다.
입국장을 빠져나오는데 가이드가 대형 피켓을 들고 우리를 반긴다. 우람한 덩치에 순박한 웃음이 인상적이다. 일행은 총 22명, 자정을 앞두고 가이드의 인솔하에 관광버스에 올라 삼류 호텔로 향한다. (가이드의 설명인즉 하노이에선 엄청나게 비싼 물가때문에 어쩔 수가 없단다. 참고로 30평짜리 아파트 한채에 우리돈으로 9억을 홋가 한다는 말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랬다. 처음 맞이한 하노이 호텔은 호텔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우리나라 모텔보다 수준이 낮았다. 난방이 잘 안되고 더운물마저 나오지 않는 것을 모르고, 여행에 지친 아내가 샤워를 시작했으니``````,
1월9일 여행 첫째날.
하노이에서의 아침은 햇살을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식당에서의 첫 인상은 참 좋았다. 베트남의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수줍은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포"라는 쌀국수는 베트남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식이다. 먹고나서도 특유의 향기가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여러분, 우리가 다른나라를 관광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먹고 즐기기 위해서라면 굳이 많은 돈 들여 이 먼곳까지 고생하며 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와 생활습관이 전혀 다른, 이곳만의 문화와 전통을 설명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소개하는데 힘쓰겠습니다."
가이드인 서성수 부장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한편에선 이곳의 어여뿐 처자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둥, 저녁에 끝내주는 술집에 가고싶다는 둥,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서성수부장은 4개국을 전전하며 가이드생활만 17년째라는 베테랑이라 여행객을 능숙하게 인솔한다.
~~베트남은 국토가 대한민국의 1.5배, 이곳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인구 억제 정책을 쓰기 때문에 한자녀 이상은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당합니다. 따라서 인구는 공식적으로는 8천7백만이지만, 호적에 올라있지 않은 숫자를 합하면 9천만에서 1억까지로 추산합니다. 또한 베트남의 역사는 우리나라와 마찬 가지로 오랜외침 때문에 생활자체가 전시상황이었을 정도로 험난했습니다. 토지는 농사짓는 농지만 국가에서 관리하고 그외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사유화 하였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버스는 어느새 호치민 광장에 다다랐다. 이곳에서는 시내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군인들이 엄숙한 모습으로 관람객을 통제하고 있었다. 가져간 카메라는 가방에서 꺼내어 보관해야 할 정도로 엄겪했다. 일순간, 무질서하게 이동하던 사람들이 지시에따라 줄을 맞추고, 앞뒤로 손을 흔드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날 때면 경건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군인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깊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닌, 호치민광장에 근무 하는 것, 자체만으로 무한한영광과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호치민, 또한 호지명,으로 불리는 그분은 학교에서 배운바로는 전쟁에 미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악한이었다. 하지만, 살아생전 그 모습으로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는 그분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느낌에 혼란스러웠다. 어릴적 뜀박질하다 넘어져 울고있을때 다가와 손내밀어 일으켜세워주던,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온화한 모습이 아니던가! 1m50정도의 비교적 작은 체형에 옷음기 가득한 그분이 당시 자신의 나라를 지배하던 프랑스, 일본, 미국, 중국이라는 거대한 강대국과 싸워 조국을 통일 시킨 영웅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베트남에는 이름난 프랑스 건축물이 두군데 있다. 그중의 하나가 과거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총독부건물이며 여기에는 감동적인 일화가 전해져온다. 당시 호치민은 북베트남의 지도자로 이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때마침 방송을 시청하던 호치민의 가족은 자신의 지도자로 소개되는 인물이 베트남 독립을 외치다가 25세때 프랑스군을 피하여 집을 뛰쳐나갔던 동생임을 한눈에 알아 보고 한달음에 달려가 사랑하는 동생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호치민은 문을 박차고 달려나오기는 커녕, 창가에서서 형제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조국과 결혼한 몸이오. 설령 내가 적과 싸우다 총칼에 죽는한이 있더라도 내 나라가 독립하기 전까지 나는 결코 부모와 형제를 찾지않을 것이오. 그러니 더이상 나를 기다리지 마시오. 하지만, 언젠가 내 나라가 독립을하는 그날이오면 나는 가족앞에 무릅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할 것이오."
이에 형제들은 사랑하는 동생의 고집을 더이상 꺽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쓸쓸히 돌아섰다고 한다. 하지만, 그토록 조국의 독립을 부르짓던 호치민은 아쉽게도 1969년에 79세의 일기로 평생을 꿈꾸던 통일을 보지 못한체 눈을 감는다. 그는 평소 읽었던 많은 책 이외에 두벌의 옷, 몇 벌의 속옷, 기워신은 양말, 폐타이어를 잘라 만든 신발, 낡은 모자 등을 남겼으며 자신을 화장하여 재를 북, 중, 남부에 한줌씩 뿌려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를 너무나 사랑한 베트남 국민은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하여 하노이 한복판 바딘광장에 안치하였으며, 지금도 그의 묘소에는 참배객의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호치민의 곁에서 가족과의 눈물겨운 이별에 장면을 지켜보았던 베트남 국민들은 조국을 향한 그의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대통령궁의 창문을 항시 열어놓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바딘광장을 나서며 반문하였다. 왜 나의 조국에는 호치민과 같은 위대한지도자가 없느냐고``````,
바딘 광장내에 있는 정원사의 집으로 알려져 있다.
바딘 광장에서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불행하게도 화면이 ~~~
흔히 베트남을 호수의 나라라 부르는데 전쟁중에 폭탄이 떨어진 자리를 흙을 가져다 메꾸다보니 많은 웅덩이가 생겼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며 이곳에 물이 고이는 바람에 호수처럼 보여진다고 하니, 이 또한 웃지 못할 슬픈 역사의 한 장면이다.
호치민 생가를 뒤로하고 버스는 다시 육지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땁곱마을을 향해 출발하는데 도로사정이 너무나 열악하다. 오토바이와 차량이 뒤엉켜 극도의 혼잡을 이룬다. 베트남에 오토바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은 있지만, 이토록 많은 오토바이가 한꺼번에 몰려나와 이동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평균 시속 40K, 한국에서 삼, 사십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두시간 이상이나 걸리는 이유다. 도시를 벗어나자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낡은 집들이 줄지어 서있다. 뿐만아니라 미처 완공하지 못한 건물들이 흉물스럽게 방치되어있다.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개발할 자본이 부족해서란다.
땁곱지역에 도착하니 강바람이 심하게 불어온다. 일행은 2인 1조로 나뉘어 사공의 눈인사에 가볍게 목례를하곤 상판배에 오른다. 나무로 만든 작은배는 갈대가 만들어놓은 물길을따라 시원스레 나아간다.제주도와 마찬가지로 갖가지 형태의 용암석이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체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의 강물은 너무나 맑고 깨끗하다. 노젓는 소리에 놀란 작은 물고기들이 수초사이로 몸을 숨기는 모습이 환하게 보였다. 나는 아내의 응원에 힘입어 맞바람때문에 힘들어하는 사공을 대신해 힘차게 노를 저었다. 하지만, 처음하는 일이라 툭하면 강물이 튀어올라 바지가 젖곤하였다. 이런 나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오가는 관광객이 사진을 찍는가하면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1시간남짓 둘러보는 동안, 그곳에 산이 있었고 산 사이로 강물이 흐를 뿐인데, 작은 나뭇배를 이용해 이런 오지에까지 관광객을 불러들인 마을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였다.
육지의 하롱베이라 불리는 땁곱마을 강가에 서서 아내랑 함께~
배를 젓는 사공의 솜씨가 능숙하다. 배트남 여행중 가장 정이 가는 곳이기에 다시 이곳을 찾을 기회가 생긴다면 달이 환한 때를 기다려 아내랑 단 둘이 상판배를 타고 오붓한 밤을 보내고 싶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이날도 많은 여행객이 이곳을 찾았다. 욕심이겠지만, 이곳에서 한달쯤 머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인근 식당에 들러 간단히 식사를 마친후 버스는 다시 최종목적지인 하롱베이를 향해 달린다. 모든여행이 그렇듯이 이곳 베트남도 관람시간에 비해 이동시간이 터무니없이 길다.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건만 불편한 버스에 시달리다보면 두세시간은 기본이다. 하지만, 이럴때면 어김없이 가이드의 구수한 입담이 흘러나온다. 우리를 포함하여 자매를 데리고 대전서 오신 가족분, 전라도 광주, 인천, 서울, 멀리 제주도까지 다양한 곳에서 모인 일행이지만 가이드인 서성수부장의 생생한 경험담에 함께 울고 웃는 동안 서먹함도 잊은 체 버스는 어느새 하롱베이에 도착하였다.
"여러분은 지금 패키지상품을 통하여 이곳 베트남으로 여행을 오셨습니다. 패키지상품의 최대 장점은 여행사가 정해놓은 일정에따라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가이드의 안내하에 편리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행사의 손실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들에 양해를 구하고자``````, "
여행사의 주장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조건으로 언어마저 통하지않는 지역을 개별적으로 여행을 떠난다면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그것을 여행사가 대신하였으나 웃돈을 요구하는 것은 불법이므로 부족분은 패키지상품을 통하여 보완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서로에게 가장 민감한 사항을 안마를 포함, 선상에서의 활어회와, 50여가지의 베트남 전통요리를 자랑하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조건으로 1인 100달러에 합의를 보았다. 또한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열대 과일을 푸짐하게 제공하기로 하였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들어서는데 하노이에 비해 가이드의 설명처럼 숙박시설이 뛰어나 기분이 좋았다. 또한 남야이라 부르는 열대과일은 맛도 좋을 뿐아니라 먹는 방법이 독특하여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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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태동안 집안 우환으로 고생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추운 겨울을 떨고 보내는데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다녀 와서 부러워 하겠네요?...ㅎㅎ
형님, 사진촬영을 배워야 겠어요. 아무리좋은 곳을 여행해도 사진이 엉망이라 좀 ㅎㅎㅎ
오랜만에 사진으로나마 얼굴을 보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자주 얼굴 내밀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