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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국회의원 22명이 추모위원으로 참여한
「간첩·빨치산」추모행사가 열렸다.
<배일도 의원, 『문제 되지 않는다』> 좌파연합체인 한국진보연대 등은 10월13일 오후 5시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열사(烈士)의 정신으로 일어서라! 민중이여!」라는 구호 아래 소위 「제1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개최했다.
열린공원에 설치한 분향소·전시물의 추모대상인 500여 명의 소위 「열사(烈士)」 중 상당수는 건국 이후 간첩·빨치산 활동으로
실형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 공식자료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한나라당 배일도, 원희룡 의원을 비롯해 강기갑, 강창일, 권영길, 김원웅, 김희선, 노회찬, 단병호,
문병호, 심상정, 오영식, 우상호, 이기우, 이목희, 이상민, 이영순,
이인영, 정청래, 천영세, 최순영, 현애자 등 국회의원 22명이
추모위원으로 참여했다.
기자는 이들 국회의원 가운데 한나라당 소속 원희룡, 배일도 의원과 통화해 보았다.
원희룡 의원은 『
민주화운동 관련 팩스가 여러 차례 왔던 것 같기는 한데, 이런 행사에 이름을 넣으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간첩·빨치산 출신들을 추모하는 행사임을 알았다면 수락했을 리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배일도 의원은 『추모대상에 간첩이나 빨치산 출신들이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나는 국가보안법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간첩에 『통일조국 사업 위해 남한에 파견』>
이날 행사 추모대상에는 남파(南派)간첩 출신 「금재성·김도한·김남식·신창길·왕영안·윤용기·진태윤·최백근·최남규·최인정·」, 빨치산 출신 「권양섭·김광길·김병인·김용성·김현순·류낙진·박판수·손윤규·안상운·윤기남·장광명·정대철·정순덕·주명순」 등 다수의 共産혁명기도자들이 포함됐다.
행사장 전시물은 남파간첩 출신과 빨치산 출신들을 가리켜 『동지』와 『열사』로 호칭하며, 각각 『통일조국을 위한 사업을 위해 남한에 파견』, 『조국통일투쟁에 전념하시다』 등으로 미화하고 있었다.
간첩·빨치산 출신들 이외에도 1979년 검거된 共産혁명조직 「남조선민족해방애국전선(南民戰)」의 주범 이재문·신향식, 1968년 검거된 조선로동당 지하당 「통일혁명당(統革黨)」 간부로서 越北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던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 간첩전력자들도 추모대상에 들어가 있었다. 수령영생론(永生論) 등 김일성주의를 퍼뜨려왔던 김남식이나 범민련남측본부에서 이적(利敵)활동을 벌여 온 신창균 등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던 反국가행위자들은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였다.
<『反통일(?) 세력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도록...투쟁』>
이날 행사는 오후 3시 시청 앞에서 집회를 마친 좌파단체 회원 5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앞선 집회에서 10·4선언 실천을 위한 평화협정 체결,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었다.
추모제는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오종렬(舊전국연합 상임의장)의 대회사로 시작됐다.
오씨는 『자주평등 평화통일 민중해방 세상은 열사(烈士)의 꿈이자 살아있는 우리의 꿈』이라며 『민족을 목 조르는 한미동맹을 해체할 것』『멸망의 재앙덩어리 전쟁기지를 없애버릴 것』『생존과 번영의 6·15선언을 이행해 자주통일·민중해방을 앞당길 것』을 주장했다.
행사는 「섬뜩한」 결의문 채택으로 마무리됐다.
결의문은 『열사(烈士)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신의 목숨을 민중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동체 속에 자신을 던지셨다』며 간첩·빨치산 출신을 미화하면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위해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철수를 반드시 이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냉전적 법·제도를 즉각 폐지시키길 것』과 함께 『냉전수구세력을 역사의 뒤안길로 내려 보내야 할 것』,
『反민주·反민중·反통일적 세력이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도록 투쟁할 것』 등을 결의했다.
![]() [관련기사-1] <소위 「민족민주열사 면면(面面)」> 추모제가 진행됐던 소위 「민족민주열사」들의 구체적 面面은 좌파단체의 발간책자와 인터넷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밖에도 좌익들이 출간한 《쓰여 지지 않은 역사(김민희 著)》, 《감옥에서 죽은 비전향장기수들의 이력서(1992년 3월 월간 말지 민가협 권낙기 著)》,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월간 말지 刊)》 및 2006년 1월 소위 『파쇼독재 잔당들과 후예들에 대한 매장, 처벌, 처형』을 주장하며 북한이 보내 온 《비전향장기수 공동고소장》에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기술돼 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소위 「민족민주열사」들 중 간첩·빨치산 출신들은 검거 후 전향을 거부하다 옥사 또는 출소 뒤 지병(持病)으로 사망한 인물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29년을 복역한 뒤 1995년 사망한 빨치산 출신 윤기남은 비전향장기수를 다룬 영화 「송환」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과 조국에 대한 임무를 마무리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나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조국의 젊은이들이 승리해줄 것을 바랍니다. 끝까지 굳게굳게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최후까지그날까지나아가겠습니다』
<『백두산 장군에 대한 충성』으로 전향 거부한 간첩> 소위 「민족민주열사」 중 간첩·빨치산 출신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최남규는 1957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체포된 후 1973년 출소했다. 출소 후 3년 간 엿장수 생활을 하다 75년 7월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돼 89년 풀려났다. 그는 출소 직전인 89년 5월11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쓴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가고픈 내 고향에 가고파도 내 못가네. 광복된 이 조국에 38선 웬 말인가 이 땅 뉘 땅인데 주인행세 누가하고 아름다운 금수강산 짓밟질랑 말고서 돌아가라, 사라져라, 어서 꺼져버려라. 고-홈 고-홈 양키 고 홈』 1999년 사망한 최남규는 스스로 『백두산 장군(金正日)에 대한 충성 때문에 전향하지 않았다』고 밝혔었다. △류락진은 6.25사변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57년 가석방된 후 63년 「혁신정당」사건, 71년 「호남통혁당재건委」사건, 94년 「구국전위」사건, 2002년 빨치산위령비 비문(碑文)작성 사건으로 거듭 처벌받는 등 2005년 사망 시까지 대한민국 파괴활동에 매진(?)해왔다. 이 중 구국전위는 「조선노동당」의 남한 지하당으로서 창립선언문과 강령 및 규약에서 북한의 主體思想을 조직의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류낙진은 이적단체(利敵團體)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그의 가족들은 부의금 5천만 원을 통일운동에 써달라며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탁했다. 류낙진은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조부로도 알려져 있다. △금재성은 1956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체포돼 1972년 출소한 뒤 1998년 사망했다. 최인정은 1964년 목재보트를 타고 남파했다가 체포됐다. 왕영안은 해방 직후 남로당 활동을 벌이다 월북, 1958년 남파됐다 체포됐다. 윤용기는 북한 건축국 문화부장 출신으로 1959년 남파됐다 체포됐다. 신창길은 1959년 간첩으로 남파된 후 암약해오다 1973년경 체포됐다. 최백근은 해방공간에서 국회프락치 공작 등을 벌이다 6·25당시 월북한 뒤, 1952년 지하당 재건 사명을 띠고 남파됐다가 위장 자수했다. 이후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표로 한 사회당건설을 주도하다 5·16직후 사형됐다. 박융서과 김용성은 각각 1958년과 1962년,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미수로 검거돼복역하던1974년과1980옥사했다.
1968년 비전향 만기출수 후 1971년 지하당 사건으로, 1979년 반공법 위반으로 거듭 구속됐다. 장광명은 1951년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검거됐다. 김용성은 간첩미수죄로 1964년 검거됐다. 권양섭은 남로당 활동하다 복역해 나온 뒤 1972년 조선로동당 지하당 통혁당 사건으로 다시 복역했다. 박판수는 남로당 항양군 군당부책으로 일하던 중 6·25가 벌어지자,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검거됐다. 정순덕은 6.25사변 발발 후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남편을 따라 1951년 이후 빨치산 활동을 벌이다, 63년 11월 체포됐다. 김병인은 1950년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벌여오다, 1951년 전남 도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53년 검거됐다. 손윤규는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됐다. 김광길은 화순군당 위원장으로 빨치산 활동을 벌이다 검거돼 1969년 출소했다. 정대철은 빨치산 출신으로 21년 6개월간 수감됐다가 1990년 사망했다. 장광명은 6·25당시 전북인민위원회 간부로 활동 중 체포돼 1971년 출소했다. 안상운은빨치산활동을벌여오다1953년검거됐다.
[관련기사-2] <『단속 안 하느냐』에 『세상이 그렇게 됐습니다.』> 간첩·빨치산 출신에 대한 노골적 미화와 그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전시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둘러 본 후, 행사보호(?)를 위해 대기해 있던 전경들에게 『저런 실정법 위반행위를 단속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들은 『이미 허가 난 행사』라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가? 호통> 『주최 측이 신고했다. 신고하면 된다. 허가 사항이 아니다』 남파간첩들에 대해 『조국통일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는 게시물까지 있다. 이런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나?
국가보안법 등 현행법 위반으로 보이는데? 『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가?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집회 신고가 들어오면 처리하는 곳이다』
-경찰에서 단속하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빨갱인지, 빨치산 행산지 우리 소관 사항이 아니다.
보안과에 물어봐라』
<『답변 드리기 어렵다』는 보안과>
기자는 다시 보안과로 전화를 돌렸다. -광화문 민족·민주열사 추모제가 열리는데 내용을 보니 간첩·빨치산 추모까지 하고 있다.
간첩들에 대해 『조국통일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는 게시물까지 있다.
단속하지 않나?
『예민한 사항이라 뭐라 말하기 어렵다』
-국가보안법 등 실정법 위반 아닌가? 경찰이 법집행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전 잣대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예전 잣대라니?
남파간첩이 『조국통일을 위해 내려온 민족·민주열사』라고 시내 한 복판에서 반국가단체 종사자들을 찬양·고무하고 있다.
예전 잣대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나도 책임자가 아니라 딱히 말씀드리기 어렵다.
아마도 보고는 있을 것-누가 보고 있다는 말인가? 아무도 채증하지 않고 있다.
『채증해서 자료를 보내주면 조치하겠다.』
-경찰이 이런 식으로 답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채증해서 기사를 쓰고 자료를 보내줘도 단 한 번도 조치를 취한 적이 없었다.
경찰 차원에서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나로서는 그 부분은 답변 드리기 어렵다』 <왜 단속 안 하냐는 질문에 『허허허』>
오후 5시, 행사 시작이 가까워오면서 경찰 배치가 늘어났다.
기자는 간부로 보이는 경찰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지금 하는 행사 내용이 뭔가? 간첩·빨치산까지 열사라고 추모하고 있다. 남파간첩들에게 『조국통일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는 게시물까지 있다.
경찰은 왜 단속하지 않는가?
허허허』-... 단속은 하지 않는가? 『지난 10년 동안 저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그렇다고 단속 안 하나? 『세상이 그렇게 되 버렸다』
<배일도 『나는 국가보안법을 반대한다』>
기자는 제18민족민주열사추모제의 추진위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배일도·원희룡 의원과 통화해 보았다.
아래는 배일도 의원과의 일문일답이다.
-민족민주열사추모제 추진위원에 동의하신 것인가? 『그렇다』
-행사내용을 보니까 간첩·빨치산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간첩들에 대해 『조국통일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는 게시물까지 있다.
알고 있었나? 『그렇다』
-문제라고 보지 않나? 『한 단면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민족민주열사에는 간첩·빨치산 출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노동열사들도 많다.
나는 노동자 출신으로서 그에 동의해 서명했다.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
간첩·빨치산 추모제가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인가?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인가?
나하고 싸우자는 것인가?』
-이런 행사는 현행법 위반 아닌가?
『지난 시대에 현행법을 위반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묻는 것은 지금 광화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사가 구가보안법 등 현행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의원께서 이런 행사의 추진위원을 맡은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가?
『나는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국가보안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다』 |
첫댓글 광화문 열린공원에서'간첩,빨치산'추모행사 라니…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있거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