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반 넘게 지나며 익숙해진 연수원 생활에 이제는 경내의 구석구석 무엇이 있고 어떤 것이 어느 철에 좋은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해질 무렵 노을은 어디서 보면 멋있고 과실수는 몇종이나 되고 어디에 있는지, 이른 봄부터 철철이 피는 꽃들은 어떤 게 있고 어디서 멋지게 피는지, 향기는 어떤 꽃이 진하고 오래 가는지, 단풍이 멋진 나무는 무엇이고 향이 짙은 것은 또 무엇인지, 괴목은 어디 있는지, 날씨에 따라 어느 공간에 주차하는 것이 좋은지, 원래 알고 있던 것들은 더 확실하게, 모르고 있던 것들은 새로운 의미로 제게 각인되었습니다. 회양목이 그리도 짙은 향을 가졌다는 것도 이른 아침 헬스장에서 땀 흘리며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계수나무의 낙엽이 달달한 향을 풍긴다는 것은 대구 근대골목투어에서 배웠지만 그 진한 향은 지난 가을 연수원 산책길에서 처음 맡았습니다. 그저께 주워온 계수나무 잎이 말라 향이 더 짙어진채로 제 책상머리에 있습니다. 유실수만 하더라도 매실, 오디, 살구, 천도복숭아, 자두, 대추, 밤, 감, 산수유, 석류, 잣 등 다양한 나무들이 있어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산책길에 입맛을 다시기도 합니다. 비료를 주는 등 관리가 충븐치 않아 대추, 산수유 외에는 제대로 영글지 않아 아쉽기도 합니다.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연수원에 근무하시는 분들의 특질도 잘 알게 되었지요.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일용직, 용역직, 공익근무자 등 다양한 근무형태가 어우러져 있습니다만 연수업무가 차질없이 잘 진행되고 있고 모두들 즐겁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경우 전직 경찰공무원, 소방공무원, 공기업 임직원, 사기업체 임직원, 기업 CEO 출신 등 경력도 다양합니다. 이 분들이 연수원의 가장 큰 덕목의 하나인 서비스 정신에 투철하시어 우리 연수원을, 청창사를 빛나게 해 주심이 언제나 감사한 일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경비아저씨들이 차가 경비실 앞을 지나기도 전에 밖으로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시는 모습에서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7시 반 경에 출근하다보니 너무 이른 아침부터 신경 쓰시게 하지 않나, 미안함 감도 조금은 있지만 말입니다. 사무실로 들어가려다 보면 열심히 청소하시는 미화아주머니들과 미화반장님을 만납니다. 청소 도중에 환하게 웃으시며 인사를 하시는데 활기찬 인사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6시 20분에 조출하셔서 연수원 구석구석을 청소하시고 계시죠. 아무도 없는 연수원에서 출근하는 직원과 연수생들을 위해 새벽같이 청소를 하시는 그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바닥 타일이 반짝반짝 빛나는 화장실을 처음 들어설 때는 기분이 좋아지면서 내가 이렇게 깨끗한 타일을 더럽혀도 되나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늦게까지 일하는 청년CEO들과 얘기도 나눌 필요도 있고 매일의 출퇴근에 쓰는 시간과 비용이 아깝기도 해서 요즘은 자주 연수원 기숙사를 사용하다보니 사감선생님들과도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헤어드라이기를 두어 번 받아갔더니 요즘은 제가 숙박 예약을 하면 아예 제 숙소에 드라이기를 가져다주시는 배려를 해 주십니다. 날씨가 춤거나 더울 때는 입실 두어 시간 전에 미리 에어컨이나 온풍기를 틀어 주십니다. 일부러 챙기지 않아도 되는데 그 마음 써주심이 고맙습니다. 아침이 준비되지 않는 날, 새벽 산책을 갔다가 들어오다 만나면 아침 밥 걱정을 하시며 컵라면이라도 챙겨주려 하십니다. 몇 개월 전 부임하신 사감님은 등단 26년차의 수필가이신데 저를 제자로 삼고 싶어하십니다만 제가 고사하자 새벽 운동하러 나가다 만나면 5분 특강을 해 주십시다. 수필 작법 관련 글도 보내주십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비록 제가 사사받는 것을 - 사실은 등단을 도와주시겠다는 것을 - 거부하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도, 연수원의 자연도 친숙해지다보니 연수원 환경을 더욱 잘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늦은 봄부터 한여름까지는 점심 식사 후 등산로 산책 대신 우리 연수원에서 가장 바람이 잘 통하여 더위가 덜한 곳, 2층 베란다에서 책을 읽습니다. 초가을에 접어들면서 점심시간에 등산로 산책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기숙사에 묵는 날, 아침 먹고 업무시작 시간까지 40여분의 시간, 창가애 앉아 책을 읽노라면 사무실 출입구 쪽에서 보면 실루엣이 잡히고 내 머리 뒤로 후광이 빛나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농도 건네는 동료가 계십니다. 더위를 많이 타지만 이 즈음의 아침햇살은 보석 같기에 창으로 그 빛을 받으면서 의자 두개를 당겨 다리를 쭉 펴고 편안하게 책을 읽는 아침이 참으로 좋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좋고 환경이 좋아 연수원에, 동료들에 더 빨리 정이 들었고 더욱 재미를 붙여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호사도, 재미도 느낄 여유가 불과 5개월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2년 계약 기간이 이제 그 정도 밖에 남지 않은 때문이지요. 3기 졸업생, 4기생들과는 정기 모임으로 연을 이어가겠지만 함께 일한 동료들은 주말편지로만 인연의 끈을 놓지 않게 되겠지요. 5개월 뒤 어떤 일을 할까 탐색 중인데 지인들이 몇몇곳을 추천해 주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일들과 이들이 소개해 준 업무 중 어느쪽을 선택해야 할지 신중하게 고민 중입니다. 해외에서도 러브콜이 왔는데 더욱 망설여지는 건이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바로 이거야'하는 일은 없지만 나름 마음 끌리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미리 챙겨주고 신경써주는 이들이 가까이 있기에 이 시간도 행복합니다. 나이 50을 지나면 인연을, 만남을 줄여야한다는 분도 계시지만 인연법을 믿고 인연을 소중히 한 덕분에 제 인연록에는 계속 좋은 분들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내년, 꽃 피는 봄이 왕성한 기운을 뻗치기 전에 저는 연수원을 떠나고 창사와 헤어지게 되겠지만 다른 곳에서도 이들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며 연결의 끈을 이어갈 생각입니다. 남은 기간, 이곳의 자연을, 여기 근무하는 이들의 따뜻한 정을 더 느끼고 나눌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포근해집니다. 즐겁습니다. 내 삶의 일부인 그들이 마음 속 깊이 있으니까요. 벌써 성급한 느티나무와 계수나무, 벚나무 잎들이 물들기 시작하였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있습니다. 가을엽서로...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깊게 생각해 보게 되는 즈음입니다.
내일 아침도 출근하며 만나는 그들과 힘찬, 정겨운 인사를 나누며,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초가을 아침햇살을 등 뒤로 받으며 책을 읽는 여유와 행복 속에 즐겁게 하루를 시작할 것입니다.
며칠간 초가을 정취를 한껏 느끼려 몇 곳을 다녔습니다.
달성습지 둑길의 살사리꽃길을 두 번이나 찾았습니다. 영원한 애인인 세 여자,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 어머니, 아내와는 함께 그 길을 걸었지만 딸과는 아직 기회를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오산 올레길과 직지문화공원을 오랜만에 홀로 거닐었습니다. 같은 장소, 다른 분위기. 그건 함께한 이, 머문 시간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누구와 함께여도, 혼자여도 좋을 가을길 산책. 일전에 전해드렸던 홍영철 님의 글 중 이 대목이 생각납니다. '산책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과정이면서 완성이듯이 삶의 한순간 한순간은 모두가 과정이면서 완성이다.' 나와 인연이 닿은 모든 이들과 인생의 길을 쭈욱 함께 산책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어머니와 함께 하였던 그길
http://blog.naver.com/bornfreelee/220140216116
아내와 같이 걸었던 길
http://blog.naver.com/bornfreelee/220147373179
나홀로 걸었던 금오산 올레길
http://blog.naver.com/bornfreelee/220148190089
직지문화공원에서의 여유로운 산책길
http://blog.naver.com/bornfreelee/220148472510
가을엽서(모셔온 글)=====================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요
사랑은 왜
낮은곳에 있는지를
-----안도현
첫댓글 흐르는 강물처럼님의 향기를 제대로 느끼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