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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永 德
* 일타 큰스님 다비식(은해사).
한없이 자애로웠던 스승, 일타스님
나는 이 세상에 와서 참으로 소중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매운 겨울을 지내보지 못한 사람은 봄바람의 훈훈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내가 우리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허락을 받기까지,
열다섯에 출가한 후의 여러 해들은 아마도 추운 겨울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내가 출가수행의 길에 자애로운 어머니와도 같은 스승인
일타(1929~1999) 스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저 행자시절 한 노 보살님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리 복된 출가자로 서 있을까 싶습니다.
내가 열다섯에 출가해 여러 우여곡절 끝에 우리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새롭게 재출가한 것은 스무살 초엽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우리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열아홉, 동화사 선방에 방부를 들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스님은 그때 태백산에서 다섯 해 동안 홀로 수행하시다 막 나와서
선방의 수좌들에게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설하시는데
얼마나 진지하고 재미있었는지,
나는 그때를 아직 잊지 못합니다.
당시 스님의 세수는 서른둘. 스무 살에 팔만대장경을 독파해버린데다,
스물여섯에 손가락 네 개를 연비해서 부처님께 공향한 분입니다.
허공 같으신 부처님께 한결같은 마음으로 통절히 머리 조아립니다.
오직 부처님께서는 가피를 내리시어 저의 미혹을 열어주소서.
제가 지금 발심하여 결정코 삼매를 닦고자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앞에서 손가락 마디마디를 태우며 큰 서원을 발하옵나니,
세간의 모든 번뇌 다 벗어나고 오직 결정심(決定心)만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원컨대 사생육도와 법계의 모든 유정들이
다겁생을 오가며 지어 온 죄업장 모두 소멸되기를 제가 다시 참회하며 머리 조아립니다.
바라노니, 모든 죄와 업장 다 없어져 세세생생 보살도를 닦게 되어지이다.
마하 반야바라밀.
이 발원문은 일타 스님께서 1954년, 스물여섯일 때 연비를 하면서 서원한 내용입니다.
이 연비공양으로 스님은 이미 서른 전에 비구ㆍ비구니를 막론하고
제방에 대단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도 스님에게 강의를 들었는데,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정확하고 명쾌했던지
신심이 절로 나면서 스님께 광장히 좋은 느낌을 갖게 되었고,
그 후 해인사 선방에 와 같이 살면서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절에 들어오던 첫날로 『천수경』을 그 자리에서 다 외워버릴 만큼 명석하고
불연이 깊은 스님은 강원에 들어가서도 바로 문리가 났으니,
아마도 필시 생이지지(生而知之)한 분이었을 것입니다.
일가족 마흔한 명이 모두 출가할 만큼 불심이 깊은 집안으로,
아마도 우리 불교사에 그런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스님처럼 자애로운 분은 드물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수행자로서 빈틈 없이 검약하고
아랫사람들에게도 따스하게 대하셨는지,
나는 지금도 더도 덜도 말고 우리 스님처럼만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다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스님은 스승이기 이전에
나에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다 가면 되는가를 보여준 분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모질게 말씀하는 법이 없었고
남이 가슴 아파하는 것은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행동과 마음과 말씀이 언제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자애로웠습니다.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였습니다.
스님께서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는 옷을 입고 계셔서
“어디에 두셨다가 이렇게 곰팡이가 슬은 옷을 입으셨습니까?” 했더니,
그때 스님 말씀이 “수좌들이 입다가 수각에 버린 옷이
장마에 썩어버리게 된 것을 빨아 입었습니다” 는 것입니다.
스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속옷도 당신은 언제나 낡은 것을 입었고 새 것은 상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내가 출가해 살아보니 그게 쉬운 것 같아도
그리 자연스럽게 되기 어려운 일인데, 스님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해인사 지족암에 문안드리러 가서도 저녁에 얘기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 때면 이불을 손수 내려 주셨고,
용돈을 조금 드리면 그냥 받지 않았습니다.
붓글씨 쓴 것 하나라도 내놓으며
“일하다 보면 필요한 거야” 하고 주었지,
상좌들 용돈도 그냥 받는 법이 없었습니다.
스님은 열다섯 살 어린 상좌가 스님과 레슬링 한다며 급소를 걷어차 정신을 잠깐 잃어도,
팔씨름을 하다가 진 것이 부아가 난다며 당신의 팔뚝을 깨물어버려도,
예의 그 자애로운 웃음으로 한결같이 따뜻한 모습이었습니다.
세속적으론 무례하다고 나무랄 수도 있으나,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의 스승처럼 그렇게 천진스럽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내 결론입니다.
한번은 상좌 하나가 장가를 갔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그가 처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을 해서
산지 두세 해가 지났는데도, 스님께선 승적을 정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개가 애기 낳고 잘 살고 있는데 아직 승적이 정리 안 되었습니다”
하고 좀 언짢은 소리를 하니,
“그렇지만 말이야, 집안 좋고 많이 배운 그 아이 처가 내 상좌와 얼마나 살런지 걱정이 된다.
한두 해 더 두고 봐서 잘 살면 정리하고, 만약 돌아오면 받아줘야 하지 않겠니.
불쌍한 그 애가 혹 버림받으면 오갈 데 없이 불쌍하지 않느냐?”
하시지 않겠습니까.
제방에서 대 율사로 존경받고 있는 스님에게 때로 누가 될 수 있는 일이 발생해도
스님은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상좌들의 장래를 염려하고 기다려 주었던 것입니다.
나로선 상상할 수도 없던 스승다운 거룩한 모습이었습니다.
또 한번은 태백산에서 스님을 모시고 살 때의 일입니다.
문세광이 사형을 당하던 날,
스님께선 그를 위해 영가천도 축원을 해주시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스님, 한 국가의 국모를 죽인 사람을 천도하십니까?” 했더니,
“그래도 오늘 사형당하는 날인데 불쌍하지 않나.
사상에 얽매이고, 사람 죽이면 큰 혜택을 준다고 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텐데,
피어보지도 못한 한 젊은 청년의 인생이 불쌍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오른손 손가락 네 개가 없지만 붓글씨나 노트에 쓴 글을 보면
그 필체가 그리 좋을 수가 없습니다. 타고난 명석함도 있지만,
스님은 촌음도 그냥 보내지 않고 매사 노력한 분입니다.
필체만 봐도 한두 해 연습해서 된 그런 실력이 아닙니다.
스님은 스물여섯에 손가락 네 개를 연비해서
불법에 사무치고 사무친 마음을 부처님께 바쳤습니다.
그때 이미 과거의 모든 업장을 다 태워버리고,
‘몸을 다 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불법에 추호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신심을 평생 잃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출가후 머리를 깎을 때
이미 세상에서 추구하는 부귀영화의 오욕락을 버린 분입니다.
성불 이외에는 출세나 오욕락은 흐는 강물과 같은 것,
해서 머물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송광사의 구산 스님의 조계총림의 방장으로 스님을 추대하고자 했을 때,
스님은 “내, 이미 연비할 때 모든 벼슬과 지위를 떠났는데,
방장 자리에 앉아 양심을 속이는 법문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살다가겠다” 며 사양하셨습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자애로웠으나 결정적일 때
스님은 연비했던 정신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간혹, 어떤 이들이 나를 보고 스님과 음성이 닮고 언행도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입니다.
내가 어찌 어느 누구에게나 한없이 자애로운 언행으로,
그리고 연비정신으로 일관했던 나의 스승을 백분의 일이나마 쫓아갈 수 있겠습니까.
대인관계에 있어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자비로웠던 스승을 떠올리며 닮으려고 애쓸 뿐입니다.
“행자님, 아무리 힘들어도 그만두면 안돼요”
스승님과 함께 관음성 보살님은
내가 수행자의 길을 놓아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분입니다.
자비를 행하는 위대한 마음은 유ㆍ무식에 있는 것이 아닌, 수행에서 나온다는 것,
그래서 그 수행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그분을 내가 만난 것은 힘들게 행자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착하고 모범적이던 누나가 출가를 해서 잠깐 집에 다니러 왔을 때,
삭발한 누나의 모습을 보고 울었던 내가 ‘언젠가는 누나 곁에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마도 그러한 생각이 출가로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연이 깊었는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나는 불교학생회를 조직해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금강경』․『초발심』․『천수경』을 배우면서 출가에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수계를 받으면서 ‘스님이 된다’는 생각을 늘 가졌으므로
고기를 일체 먹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고기기름으로 튀긴 도너츠를 먹고는
백일기도 회향 날에 밤새도록 울면서 참회기도를 했으니,
3학년에 올라가자 미련 없이 교복을 벗어던지고
절로 들어온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렵사리 어머니의 승낙 도장을 받아 윗옷 양쪽 주머니에
공처럼 둥글게 만 양말 한 켤레씩을 넣은 채 집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양말 두 켤레만을 가지고 집을 나서
이순의 나이를 훌쩍 넘겼으니 출가의 세월이 어언 쉰 해를 넘겼습니다.
중학시절에 가르침을 주었던 혜철 스님에게 갔다가
고향인 제주도 시내에 있는 한 포교당에서 채공(반찬 담당)을 하며 행자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던 나보다 두세 살 위인 공양주 행자가 심심하면 꿀밤을 먹이고,
미처 찬이 준비도 되기 전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을 쳐버리고 하는 등
어찌나 애를 먹이는지 어린 마음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일어나곤 했습니다.
하루는 같이 국수를 먹다가 또 심정을 상하게 해서 울면서
그에게 국수를 뿌려 버린 적도 있습니다.
좌우지간 그와 맞지 않아 고통을 당하고 있던 어느 날,
‘중노릇을 때려 치우더러라도 저놈을 한번 손보고 말리라’
다짐을 했고 그를 골탕 먹일 궁리를 사흘 동안 한 끝에,
엉성한 판대기로 만든 문 위쪽에 옹이진 장작을 놓았습니다.
문만 열면 장작이 떨어질 터였습니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에 하나, 부엌에서 찬간으로 올라가는 문에 하나,
찬간에서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에 하나,
이렇게 무려 세 개의 문에 장작을 끼워 놓고
나무 위에 올라가 공양주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공양주 행자는 나타나지 않고
노보살님인 관음성 보살님이 나타나 부엌문을 여는 것이 아닙니까.
문을 살짝 건드리자 큰 장작이 떨어졌고, 곧 “아이고!” 하면서
노 보살님이 쓰러졌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오는게 아닙니까.
그런데 웬일인지 노 보살님이 일어나 다시 찬간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등허리에 장작이 살짝 내리쳤습니다.
부엌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보니 벌써 피가 많이 흘러 있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사죄를 하니,
노 보살님은 “나무 아미타불”만을 부르면서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내고
계속 솟아나오는 피를 누르면서 하는 말씀이,
“행자님, 절대 이런 장난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세요.
오늘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겁니다. 빨리 바닥의 피를 닦아버리세요
저는 집에 가면 됩니다.”
하면서 욕 한 마디는커녕 눈 한번 흘기지 않고 집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도 거름 없이 조석 예불을 드리러 오던 노 보살님은 그 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 가슴이 얼마나 탔겠습니까.
그런데 한 스무 날쯤 지나서 노 보살님이 나타났습니다.
반가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에 내가 “보살님 치료비 많이 드셨지요?
제가 저희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부담을 좀 하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그 보살님이 “저는 다 나았으니까 괜찮아요. 잊어버리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부담이 되어서 안 된다고 치료비를 드리겠다”고 우겼더니,
노 보살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주시겠어요? 그럼 제가 치료비를 말할 테니 잘 들으세요.
행자님, 행자생활 하는 게 힘들죠?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괴로워도 그만두면 안됩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큰스님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부처님 법음을 전하며 존경받고 인정받는 좋은 스님 되세요.
이것이 행자님이 제게 주어야할 치료비입니다.”
나는 그때 부처님 법이 정말 위대한 것을 알았습니다.
한 촌로에 불과한 할머니에게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며
그리 생각지 않을 수 없었고,
어떤 고난이 와도 결코 그만두지 않으리라 새로이 발심했습니다.
그후 출가의 길에서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노 보살님과의 약속을 상기하곤 했고,
노 보살님의 당부처럼 지금 국ㆍ내외를 막론하고 제방을 누비고 다니며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으니, 내게 그분은 분명 선지식이었습니다.
그때 공양주 행자가 다쳤더라면 나는 아마 세속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노 보살님은 예순을 넘긴 나이였는데 구십이 넘어 돌아가는 날까지
낮에 방바닥에 등을 대는 적이 없었습니다.
앉아서 졸지언정 결코 누운 적이 없을 만큼 수행을 잘 하셨던
그분은 내게 출가의 길에서 만난 인로왕보살임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혜인 스님 법문 중에서-
구도역정 카페 => http://cafe.daum.net/kudoyuk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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求道歷程(구도역정) | 글쓴이 : 푸른바다 원글보기 ![]() |
첫댓글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많이 배우지 못한 그가 처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을 해서
산지 두세 해가 지났는데도, 스님께선 승적을 정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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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돌아오면 받아줘야 하지 않겠니.
불쌍한 그 애가 혹 버림받으면 오갈 데 없이 불쌍하지 않느냐?”
이럴 경우 보통 체면을 생각해서 단칼에 정리할 것 같은데 참 자애로우신 큰 스님....()()()나무아미타불
수년 만에 친견 드리려 가도 맨발로 달려 나오시며 이름을 잊지 않고 부르시며 다정하게 대하셨다던...(저희집 거사 얘기ㅎ)
일타 큰 스님께서도 지금쯤 십 대 소년이 되셨을 테고 몇 년 후면 출가하시려고 다시 해인사를 찾으실...^^
큰 스님들 수행담 참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스님, ()()()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내내 가슴이 뭉클합니다......나무아미타불...()()().....길바른 스승님은 삶의 크느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다시 오소서...()....
부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은 언제나 정도입니다. 다만 저희 어리석은 중생들이 볼 때는 그 길이 돌아가는 길이고 가시밭길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는데 말입니다. 스님~ 오늘도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_()_
감사합니다. 마음깊이새기고 언제나
착한마음 간직하도록노력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일타 큰 스님의 일가.친척들이 스님이 되신것은 전대미문의 일입니다. 전생에 불연이 없고서야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일타 큰 스님은 비록 가셨으도 이 땅에 다시 원력환생을 하시어 미혹한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해주시는 등불이 되실것으로 확신 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