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다. 나는 아내다. 나는 할머니이며 종갓집 둘째 며느리다.
나는 아직도 꿈 많은 16세 소녀이고, 영원한 공주다.
나는 날마다 옷을 갈아입고 쉼 없이 거울을 괴롭히는 마녀다.
나는 매일매일 벼락부자를 꿈꾸는 유목민이다.
나는 결코 현모양처가 될 수 없는 우아한 왕비다.
나는 지루한 가사 일을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시지포스의 형벌을 즐겨서 신을 화나게 하는 죄수다.
나는 때론 집 안팎을 주무르는 만능의 가위손이다.
나는 식구를 위해 하루에 세 번 ‘밥꽃‘을 피우는 요정이다.
그러나 나는, 꿈꾸는 이 모든 것을 미룬 아내고, 며느리이고, 오직 엄마가 되는 여자다.
엄마는 이야기다. 서사의 안과 밖을 오고 가는 바람, 허무다.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듯 나는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안과 밖을 벗어나기 위해 안팎으로 동시에 뛰어든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언제나 삶보다 먼저라서 질문의 구성요건을 영원히 갖출 수 없다. 그러므로 해답 역시 없다. 질문이나 해답보다 먼저 <거기> <이미> 존재하는 시간 혹은 이미지에서 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해답보다 먼저 다가와 있는 <세계> 또는 <이미지>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 엄마’ 프로젝트는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다.
‘우리엄마’ 작업은 기억의 잔상이나 회상이 아니다. 더구나 잃어버린 시간 속에 묻힌 사적 유물이나 유적이 아니다. 엄마 삶은 사진 이미지와 언어로 되돌아오고 있는 <지금>이다. 기억은 앞과 뒤를 이어 놓는다.
엄마는 연금술사다. ‘살림(살려내는 일)’의 달인이다. 그런 엄마는 의미도 설명도 기발한 아이디어나 편집 디자인도 아니다. 매일 무대가 열리고 커튼콜이 반복된다. 엄마만한 배우는 없다. 연출자도 조명도 없이 날마다 일인다역을 소화하는 엄마의 연극은 불안한 천사의 꿈이자 육체를 가진 것들의 허영이다. 카멜레온처럼 때마다 역할에 맞는 보호색으로 변신해야만 살아 낼 수 있는 속 빈 무대.
거울을 들고 여자로 태어난 숙명을 거슬러 스스로의 불안을 찾아가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자아상 작업을 하였다. ‘우리엄마 2’ 이야기는 이렇게 조심스레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