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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5강
제Ⅱ부 새로운 순종
제1장 새로운 순종의 개괄적 이해
I. 서술형과 명령형(Indikativ und Imperativ: 직설법과 명령법)
II. 하나님 중심적 관점 – 성화
III. 총체적 관점-완전함
IV. 통일성과 다양성 – 권면(훈계)의 구체성
V. 율법의 제3사용(Tertius usus legis)
VI. 양심과 자유
제2장 새로운 순종의 내용
VII. 사랑(아가페)
VIII. 세상에서의 삶
IX. 결혼
X. 사회적인 관계들
XI. 세상 권세에 대한 복종
앞 단원(“새 생명”)에서 리덜보스는 때가 차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새 창조가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은 세례(믿음)를 통해 이에 참여함으로써 그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과, 이제부터 그는 믿음으로 성령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피력했다. 믿음이란 새 생명의 실존 방식이며,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순종의 삶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본질은 순종이다.
이제 본 단원에서 리덜보스는 “새로운 순종”이라는 제목으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한다. 바울 서신에는 수많은 권면, 훈계, 명령이 나오는데, 리덜보스는 먼저 이것을 개괄적으로 그 성격을 설명한 후에 내용에 들어가지만, 각 권면이 무슨 내용인지는 해설하지 않는다. 사도는 이곳에서 권면의 원리와 권면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므로, 우리는 각자 신앙 양심과 중생으로 일깨워진 지각을 통해 각 권면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세울 수 있다.
먼저 리덜보스는 새로운 순종을 요구하는 방식이 직설법과 명령법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사용한다는 것을 언급한다.
제1장 새로운 순종의 개괄적 이해
I. 서술형과 명령형(Indikativ und Imperativ: 직설법과 명령법)
1. 용어 설명[1]
바울서신에 나오는 많은 윤리적 명령문의 내용이 흥미롭게도 앞에서 바울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 서술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너희는 거룩하라”라는 명령이 “너희는 이미 거룩하다”라는 선포(서술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바울의 윤리적 권면은, 그 권면 내용이 이미 이들에게서 성취되어 있다는 서술문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 이러한 용례를 들어본다:
o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o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갈 3:27에서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고 롬 13:14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명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이며 또한 계속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하는 자이다. 이 현상을 앞에서 나온 “이미와 아직”의 의미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예를 본다:
o 롬 6: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o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앞에서는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하고, 바로 뒤에서는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한다. 즉 우리가 죄에 대해 이미 죽었다면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지만, 바울은 다시 죄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경고한다. 이것은 얼핏 들으면 모순적으로 들린다. 그런데 심지어 한 문장에서 같은 내용이 서술형과 명령형으로 나오는 예도 있다. 바울은 고린도 신도는 누룩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이어서 이들에게 누룩을 내버리라고 말한다.
o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o 갈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 리덜보스의 설명을 통해 이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지금까지 „새 생명“이라는 큰 단원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것을 역설했다: 새 생명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역사이다. 이 생명의 출발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고, 성령님에 의해 생겨나서 그분에 의해 유지되며, 이 생명이 각 개인에게서 실현된 것이 새 창조며 중생이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의 열매이다. 루터는 이것을 전능하신 (삼위) 하나님이 홀로 사역하신 결과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기원은 인간 자신의 능력을 토대로 하여 설명할 수 없다. 즉, 인간 속에 잠들어 있던 어떤 능력이 깨어나는 것도 아니고 급작스러운 윤리의식의 변화로도 설명할 수 없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울이 이러한 인간적 변화를 설명하고자 죽음과 부활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도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인간이 변화된 것은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의 결과로 그가 중생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사역이다.
바울은 이 새로운 삶을 매우 다양한 말로 표현한다: 새로운 인간성, 지각(누스)이 빛을 받는다, 마음이 새로워진다, 육신과 지체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다. 즉 중생된 사람, 새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 생명이 성령님의 은혜로 자동으로 실현되고 펼쳐지는가? 조직신학적으로 말하면, 중생된 사람은 자동으로 성화되는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열광주의자이다. 이 문제는 바울의 인간론에서 상세히 논의 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새로운 삶이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는 인간의 책임과 결단[2]이 중요하며 그리스도인은 영적 싸움과 투쟁을 통해 옛 사람(육신과 지체들의 욕구)의 영향을 벗고자 애써야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순종이 그리스도의 삶의 특징을 이룬다. 전에는 육신의 정욕에 순종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내 안에 있는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울의 선포가 담고 있는 도덕적인 내용이 된다.
그런데 새로운 생명이 묘사되는 방식이 바울에게는 매우 특이하다. 그는 보답의 윤리로 설명하지 않는다. 즉,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에 마땅이 보답해야 하므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의 윤리가 아니며, 이러한 오해가 기독교를 도덕종교로 만들며 타락시킨다. 학자들은 바울의 방식을 이해하고자 근래부터 관행적으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명을 묘사할 때에, 어떨 때에는 직설법으로, 즉 성령님을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열매로 묘사한다. 즉,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여 새 사람을 입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을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었다. 죄는 그를 더는 지배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영생의 소망과 거룩함에 대한 갈망과 진정한 사랑이 있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므로 직설법으로 설명되는 구속의 인디카티브이다. 바울 서신은 구속에 관련된 이러한 밝은 묘사로 넘친다.
그런데 어떨 때에는 이러한 것이 놀랍게도 명령형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필자가 바로 앞에서 이러한 용례를 들었다: 갈 3:27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직설법)고 하고, 다시 롬 13:14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명령법)라고 명한다. 즉, 같은 내용이 한 번은 서술형으로, 한 번은 명령형으로 나온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죄에 대해 죽었다“와 „너희는 죄에 대해 죽어라“가, „너희는 거룩하다“와 „너희는 거룩하라“가, „너희는 자유하다“와 „너희는 자유하라“가 바울의 메시지에 모두 들어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직설법과 명령형이 동시에 나오는 몇 가지 구절을 선정하여 각 경우에 직설문과 명령문 사이에 의미적으로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1) 죄에 대항하여 싸우라는 말씀
o 롬 6: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o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이곳에서도 바울은 먼저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다”고 한 다음에, “죄에 대항한 싸움에서 이겨라”고 명한다.
그런데 롬 6:2 말씀을 잘 보면, 사도가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죄 가운데서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사실 6장 전체가 우리가 죄에 대항하여 싸우라는 명령이며 이것은 6:12에서 매우 명백하게 드러난다. 즉, 우리가 죄에 대해서 싸워야 하는 이유가 2절의 구속의 직설법(“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이며, 또한 싸움에서 승리를 약속하는 근거가 된다. 더 나가서는 이 명령의 성취가 구속의 직설법의 하나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즉, 우리가 죄에 대항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설법과 명령형은 서로 떨어질 수 없게 밀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2) 육의 소욕을 죽이라는 말씀
o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o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여기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 이미 죽었다“고 말하면서도 „지체, 즉 죄의 소욕을 죽이라“고 명한다. 또한 바울이 우리가 „정욕에 대항하여 싸우라“는 윤리적 명령의 근거로서 구속의 직설법인 „너희가 죽었고“라는 사실을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므로, 내 육신이 나를 자극하여 다시 일으키는 모든 욕망, 즉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 탐심 등을 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 안에 새 생명이 있지만, 옛 사람도 함께 살아서 역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는 반드시 옛 사람에 대해 반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내가 옛 사람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다면, 내 안에 새 생명이 움직이지 않는 것, 즉 없는 것이다. 윤리의 명령형은 구원의 서술형과 분리되지 않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즉, 중생된 자는 새 생명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갈망하므로 죄악된 옛 삶의 태도와 욕망에 대항할 수밖에 없다. 후자가 없으면, 즉 정욕에 대한 싸움이 없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령은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엄격한 정언명령(Kategorische Forderung)이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성령님 안에서의 삶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4-5장
이와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4,5장에서 나오는 선언들에서도, 먼저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4:6 이하), 성령을 따라 낳다는 것(4:28 이하), 성령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5:25)을 확고하게 인식시킨다. 그리고 그다음에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권면(5:16,25)과 하나님은 우롱당하시는 분이 아니고, 사람은 심는 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에,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잘못된 길로 가지 말라는 경고를 덧붙인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문은, 성령을 받았고, 성령을 따라 낳고, 성령으로 살고 있다는 서술문에 근거를 둔다.
4) 새 사람/새 생명에 대한 선언들에서
o 골 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o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o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울이 어떤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옛 사람을 벗어 버렸고, 새 사람을 입었다(서술문)고 말하는데(골 3:9-10), 다른 곳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명령문: 롬 13:14; 엡 4:24)고 말함으로써 이것이 교회가 날마다 행해야 할 책임이라고 말한다.
5) 결론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바울의 모든 명령법은 구속의 직설법에 근거하고 있다. 이 구속은 존재의 변화를 수반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부활한 사람으로써 이미 죄에 대해 죽었고, 옛 사람을 벗고 그리스도라는 새 옷을 입은 사람이며, 그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윤리적 명령은 새로운 존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심성과 행동과 관계하고 있다. 이러한 명령이 절실한 이유는 새 생명은 끊임없이 육신의 유혹과 도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다.
갈등과 싸움의 진지함
여기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싸움이 얼마나 진지한지는 다음 구절에 나타난다:
o 롬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o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육신에게 진다“, „육신대로 산다“는 말은 육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계속 그렇게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능력을 빌어서 육신의 행위를 죽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생된 삶이 얼마나 긴장된 삶인지를 알 수 있다.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우리는 싸움터에서 산다.
그러므로 진지한 그리스도인은 영웅과 같다. 매일 새로운 피조물로 살고자,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거룩하고 사랑의 교제를 하고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고자, 말씀의 능력이 내 죄의 소욕을 이기게 하도록 말씀을 꼭 붙든다. 이러한 투쟁은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붙잡힌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분께서 늘 나를 위로하시고, 나에게 주신 큰 은사와 사랑을 기억시키시며, 나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또한 나는 그분이 내 죄를 사해주시는 것과, 나를 끝까지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도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을 수 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잠시라도 이러한 삶을 살 수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늘 깨닫는 것은,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얼마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빚지고 사는지 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없이 겸손해진다. 그리고 나를 죄에서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매일 경탄하면서 살며, 하루의 어려움에 불평하지 않고, 그분의 구속사역이 전파되도록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한다.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은혜는, 죄인이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때 묻지 않은 정결한 음성으로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 명령의 중요성
지금까지 직설법과 명령형의 관계 규명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은, 명령형은 직설법을 그 근거와 이유로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이 앞으로 살아야 할 방향(임페라티브)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인디카티브)에 근거를 둔다. 간단히 말해 존재의 변화에 상응한 삶을 말한다.
그런데 빌 2:12-13에서 또 다른 차원의 근거를 볼 수 있다. 그 근거는 존재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흠 없는 자녀로 만드셔서 우리가 흠 없이 살기를 원하시므로, 우리 안에서 항상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시고 또한 그 능력도 주시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2:12-13 이해
Ὥστε, ἀγαπητοί μου, καθὼς πάντοτε ὑπηκούσατε, μὴ ὡς ἐν τῇ παρουσίᾳ μου μόνον ἀλλὰ νῦν πολλῷ μᾶλλον ἐν τῇ ἀπουσίᾳ μου, μετὰ φόβου καὶ τρόμου τὴν ἑαυτῶν σωτηρίαν κατεργάζεσθε·
θεὸς γάρ ἐστιν ὁ ἐνεργῶν ἐν ὑμῖν καὶ τὸ θέλειν καὶ τὸ ἐνεργεῖν ὑπὲρ τῆς εὐδοκίας.
개역개정: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필자 사역:
12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훨씬 더 많이,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라(일해서 얻으라).
1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뜻(작정)을 이루시고자 원함뿐만 아니라 행함도 일으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앞 구절(1-11)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 사도는 빌립보 교인에게 겸손으로 서로를 섬기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순종하신 예를 들었다. 이제 빌립보 교인은 그리스도의 예를 따라야 한다. 이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 즉,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길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누가 이러한 길을 갈 수 있으며, 또한 끝까지 가겠는가? 또한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오고 나의 즐거움이 된 나의 모든 죄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즉시 주저않을 수밖에 없다.
13절이 여기에 답하며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두신 자기 뜻을 이루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분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선한 소원을 불러 일으키시며 선한 일을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만들고자 하시기 때문이다(„이는 …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2:15).
이 길이 너무나 어렵고 또한 험하므로 우리는 매일 두렵고 떨림으로 이 길을 갈 수밖에 없고, 우리를 자신의 흠 없는 자녀로 삼으셨으므로(직설법) 하나님의 모든 윤리적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명령형). 여기에서 제자의 길이 결코 순탄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정언적 명령).
그럼에도 우리가 이 길을 두려움 없이 갈 수 있는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모든 은사를 가져다 주셨고, 성령님을 통해 매일 우리와 함께 하셔서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부활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선한 소원을 일으키시고 또한 행할 능력까지 주신다.
정리
1) 명령형은 서술형에 토대를 둔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존재의 변화가 없이는 서술형에 이어서 나오는 명령형을 수행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을 이해할 수도 없다. 이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신 구속에 대한 마땅하고 적절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 명령형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당위이며, 또한 하나님의 진지한 사랑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을 이기고 기쁨으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 이 명령형에 부담감만 느낀다면, 그에게 아직 서술형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리덜보스의 말을 들어본다:
„새 생명은 새로운 순종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새로운 순종이 없이는 새 생명은 존재할 수 없다. 직설법으로 설명되고 있는 이 모든 현실(„너희는 죽었다,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다, 새로운 피조물이다…“)은 비록 하나님의 선물이자 새로운 창조로 인식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역으로 명령법의 실행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직설법에서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문제라는 사실이 이 관계를 설명해 준다. 사람은 믿음으로 직설법을 받아서 믿음으로 명령법을 행한다는 점에서, 직설법과 명령법은 둘 다 믿음의 대상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둘 간의 연결 관계는 아주 긴밀하고 분리될 수 없다. 이 둘은 서로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동일한 것의 양면을 나타낸다.“
2) 서술형은 새 생명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므로, 실제적으로 믿음으로 결단할 때만 존재한다는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옳지 않다. 새 생명이 삶 속에서 결단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옳지만, 이것은 믿는 자의 생명의 표현이므로 늘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명령의 내용도 단지 결단과 행동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성을 세워나가기 위해 새 생명을 지속시키고 전진시키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새로운 율법주의인가?
바울이 가르친 정언적 명령은 죄인에게 상당한 부담을 준다. 정언적 명령이란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의무를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에 나오는 수많은 명령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이것을 율법인가, 율법이 아닌가? 이것을 지켜야 구원받는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우리가 이렇게 양자택일이 귀결되도록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이미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서 많은 것이 양자택일의 질문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명령법은 직설법을 근거로 한다. 우리는 명령법이 늘 직설법의 결론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롬 6:12-13(„그러므로 너희는 …하고“)의 명령은 앞에서 나온 직설법(„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6:11)의 귀결이며, 롬 12:1 이하의 모든 윤리적 권면은(„그러므로 형제들이 …드리라“) 앞에 나온 모든 가르침의 귀결이다.
이 문제는 빌 2:12-13 해설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하나님은 십자가 구속 사역을 통해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창조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있는 능력만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서 원함도 주셨다. 즉 우리 마음에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주신다. 더 나가서는 행함까지 불러일으키신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속에서 이루신 선한 일을 끝까지 이루신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의 명령형은 새로운 율법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 은혜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새 생명을 받은 자로서 노예로서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와 기쁨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날로 새로워지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기쁨으로 우리는 명령을 행한다.
3)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명령법은 믿음 안에서 단번에(한 번 일어나면 영원까지 효과가 유지되는 단번: ein für allemal, once for all) 받아들여야 하면서도, 매번 새롭게 붙들어야 하는 직설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단번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해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에 유비된다. 한 번 온 하나님 나라는 계속 역사하고 있듯이 나에게 단 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계속 효과를 유지한다. 즉,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주님으로 한 번 영접한 사람은 그 효과가 영원히 미친다. 바로 이 단번이 또한 „매일 새롭게“ 결심하고 정욕을 죽여나가는 결단의 토대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롬 6:6), 즉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몸과 지체를 „의“에 드리고 의를 섬겨야 한다(롬 6:19). 이를 통해 그의 삶에서 의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 이것을 위해 많은 명령(윤리적 요구)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육신을 이용하여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적하는 죄에 대항하라는 명령이다. 그렇지 않으면 새 생명은 살아갈 수 없다. 이러한 삶이 투쟁하는 믿음의 삶이다. 믿음이 느슨해지는 곳에서는 롬 7장의 상황이 재현된다.
믿음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는 가운데 싸우고 있을 때에만 명령법은 성취된다(고전 16:13; 살전 5:6; 8 이하; 엡 6:1 이하). 각각의 명령법이 직설법을 어느 정도 실현하느냐 하는 것은 믿음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명령법은 직설법 속에서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화 속에서 믿음과 성령의 열매를 추구하며(롬 6:21-22; 갈 5:22), 새 생명이 자라고 진전되어서 점점 더 커지고 풍성해지는 것을 지향한다(롬 5:3; 고후 8:7; 9:8 이하; 딤전 4:15).
이렇게 서술형과 명령형이 결합된 것은 바울서신에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나온다[3]. 리덜보스는 그의 저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서 공관복음에서도 이러한 표현이 자주 나온다는 것을 밝혔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자주 이러한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신약 전체에서도, 구약에서도 이러한 형태가 나온다.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 성경 가르침이므로, 이것이 성경 전체 메시지의 기본 선률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다룬다. 우리가 바울서신에서 이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이곳에서 유난히 많이 등장하여 이것이 바울서신의 하나의 특징을 이루기 때문이다.
[1] “서술형과 명령형”이라는 말이 생소한 사람을 위해, 리덜보스의 책에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서 필자가 먼저 개략적은 설명을 한다.
[2] “menschliche Verantwortlichkeit und Entscheidung”.
[3] 리덜보스 465.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5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