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도 대립도 잠시 멈췄다. 8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식전행사로 메인 스타디움 냐오차오(鳥巢)에 올려진 중국 내 28개 민족 전통문화 공연에는 그동안 갈등과 대립을 빚던 지역에서도 화려한 색채로 차려 입은 공연단이 나와 화합의 노래를 불렀다. 지난 3월 유혈사태를 빚은 시짱(西藏ㆍ티베트)에서도, 지난 4일 무장경찰 16명이 목숨을 잃은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에서도, 대만 홍콩 마카오 양안삼지(兩岸三地)에서도,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에서도 가무단이 나와 흥겨운 노래와 춤으로 화합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시짱의 전통가무단은 1200년 전부터 불러오던 대표적인 가무곡 '선녀'를 '길하고 상서로운 올림픽(吉祥奧運)'이라는 이름으로 노래하고 춤췄다. 지난 4일 끔찍한 테러가 빚어졌던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콧날이 오뚝한 서양인의 얼굴을 한 요정 같은 무녀들이 이민족 간의 화합을 노래하는 '다오랑마이시라이푸'라는 무곡을 연출했다. 분단 상태인 대만에서 온 남성 안무자들은 "우리는 모두 한 집안 사람"이라고 몇 번이고 외쳤다. 개막식을 참관한 한국인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 것은 지린(吉林)지역 대표로 나온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서 온 옌볜 가무단이 공연한 '옌볜의 봄'이었다. 눈에 익은 치마저고리 차림의 옌볜 조선족 무희들은 "장백산이… 두만강이…"라는 가사로 된 노래를 부르며 장구춤을 췄고, "얼씨구나… 절씨구나…"라는 후렴을 넣기도 했다.
개막식은 이어 '아름다운 올림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개막공연으로 이어졌다. 총연출을 맡은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이 제1부 '화려한 문명' 제2부 '장엄한 시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세계의 언어로 중국을 이야기하다"라는 개념이었다. 중화민족의 유구한 역사, 찬란한 문화를 당대 중국의 발랄한 생기로 연결시켜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이라는 베이징 올림픽 이념을 눈앞에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장이머우는 중국신화의 고사 가운데 '하늘로 날아오르다(飛天)'라는 개념을 냐오차오로 가지고 왔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항아(嫦娥)의 비천, 돈황의 벽화 속에 나오는 비천, 바로 항아가 달로 날아오른다는 분월(奔月)을 연출했다.
냐오차오에는 곧이어 그림 두루마리가 펼쳐졌다. 장이머우는 중국이 자랑하는 고대 4대발명품 인쇄술, 제지술, 지남침, 화약 네 가지를 냐오차오에 펼쳐 보여주었다. 알고 보니 성화봉인 '상운(祥雲)'이 종이를 만 모습으로 제지술을 나타낸 것이었다.
개막공연 시작을 알린 2008명의 청년들이 전자북 조명을 통해 보여준 공연의 주제는 논어에 나오는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有朋 自遠芳來 不亦悅好)'였다. 베이징올림픽문화예술고문 지센린(季羨林) 교수가 장이머우에게 "공자가 중국 전통 문화의 대표이므로 개막식에 공자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더니 장이머우는 지 교수의 말을 충실히 들은 셈이다. 회남색 두루마기를 입은 선비들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스승 삼을 사람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를 보여주기도 했다. 공자의 가르침들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정치이념인 ‘허셰(和諧)사회’의 개념과 연결되는 것이고, 허셰는‘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의 주제를 구현한다는 것이 중국 중앙TV 해설자들의 해설이었다. 음악은 중국 전통악기인 고금 고쟁 비파 얼후 피리 등이 동원됐다. 개막식을 통해 모두 1만6000발의 폭죽이 발사됐고, "사용된 폭죽숫자는 역대 올림픽 중 최고"라는 것이 또다른 자랑이었다.
8일 베이징올림픽 개막 공연에서 장이머우(張藝謨)가 세계인들 앞에 내놓은 것은 길이 70m짜리 전자 스크린 두루마리였다.
컴퓨터 자판이 튀어오르 듯 입체로 변환된 한자(漢字)들이 춤을 춘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의 하나인 활자 인쇄술을 표현한 것이다.
춤을 추던 한자들 가운데 '어울릴 화(和)'자가 떠오른다. 공자(孔子)가 늘 강조하던 '화위귀(和爲貴·어울릴 줄 아는 것을 귀히 여겨야 한다)'를 가리키기도 하고,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정치 이념인 '화해(和諧·조화롭다는 뜻)'를 의미하기도 하고,'평화'를 의미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전자 두루마리 위에서 바람에 휘날리듯 부드러운 비단천이 흔들리며 전자 두루마리가 실크로드로 변했음을 알게 해준다. 실크로드 위에서 춤추는 미녀는 항아(嫦娥)다. 실크로드를 타고 가다가 만나는 곳이 둔황(敦煌)이고, 항아는 둔황의 벽화 속에 그려져 있던 전설의 선녀다. 선녀는 달로 올라갔다. '항아비천(飛天)'이요, '항아분월(奔月)'이다.
실크로드 옆에 돌연 수많은 노들이 나타나 젓기 시작한다. 전자 두루마리는 이제 배가 된다.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전 세계에 비단과 차, 도자기를 수출하던 중국의 황금시대를 연출한다.
▲ 8일 베이징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서 열린 개막식 공연에서 유학의 효시 공자(孔子)의 3000제자가 죽간(竹簡)을 들고 입장하고 있다. 공자 제자들은 논어(論語)의 구절 중“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형제(四海之內, 皆兄弟也)”를 소리 높여 음송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눈을 들어 냐오차오(鳥巢·메인스타디움)의 위쪽을 보니 은은한 백색 형광판에 산수화들이 나타난다. '유춘도' '청명상하도'를 비롯한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의 명화들이다. 곤곡(昆曲) '춘강화월야'가 배경 음악으로 흐른다. "봄 강물에 수련이 뜨니 바다는 멀지 않고, 바다 위의 밝은 달은 물결 따라 출렁이네."
어느새 산수화를 그리고 있던 은은한 백색의 형광판에 폭포가 세차게 내려 꽂힌다. 당대 최고의 시인 이백(李白)이 노래한 "흐르는 물이 삼천 척을 내려 꽂히니, 은하수가 땅으로 내려온 듯하네" 그대로다.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냐오차오 한가운데 순백색 피아노 한 대가 나타난다. 사각형 두루마리 위에서 피아노와 일체를 이룬 사람은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출신의 중국이 자랑하는 피아니스트 랑랑(郞朗·26)이다. 물 흐르듯 유려한 동작의 태극권(太極拳)을 보여주는 2008명 백의(白衣) 도사들은 두루마리를 둘러싸 거대한 원을 만든다. 커다란 원이 사각형을 품은 모습, 중국의 전통 사상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를 형상화 한 것이다.
다시 어두워 진 냐오차오 안에는 형광으로 빛나는 새 둥지가 생겨났다. 온 몸에 반딧불이를 붙인 듯 반짝이는 형광옷을 입은 1000명이 몸으로 쌓아 올려 만든 새 둥지. '인간 탑' 냐오차오 위로 떠오른 봉황연에 소녀가 매달려 하늘을 걷는다. 소녀는 선양군구 서커스단 소속의 아홉 살배기 주차오옌(朱巧姸). 새둥지로 돌아온다던 전설의 새 봉황(鳳凰)은 '중국의 미래'인 어린이였다.
성화 최종주자 리닝(李寧·45)은 냐오차오 꼭대기에 펼쳐진 상서로운 구름 속에서 달 위를 걸었다. 항아분월이요, 이날 아침 베이징 원인(猿人)의 발상지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달리기 시작한 성화가 결국 도착한 곳은 달이었다. 우주로 가려는 중국인들의 꿈을 표현한 것이다. 이날 하루종일 베이징 하늘로 올라간 폭죽은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2만 9000발이었다. 화약을 발명한 중국의 자존심이었다.
▲ 인류 최대의 축제 제29회 하계올림픽이 8일 저녁 8시(현지 시간) 올림픽 그린의 심장부 궈자티위창에서 화려하게 개막했다. 식전행사에서 중국내 소수민족 공연단의 일원으로 옌벤 가무단이 한국의 전통의상인 한복을 입고 장구 공연을 선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 정경열 기자
▲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One World, One Dream)'을 모토에 내걸은 중국의 '100년의 꿈' 베이징올림픽 개회식이 8일 오후 8시(현지시간)에 올림픽 주경기장인 국가체육장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이번 베이징올림픽 개회식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전통과 첨단, 과거와 현재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세계에 차이나 파워를 과시하는 13억의 파노라마'였다. / 정경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