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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戶田郁子)
●22. 하얼빈에 오다 — 중국에서 바라본 한국과 일본
1989년, 나는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시에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약 넉 달 동안 머물렀다. 처음 한국에 갔던 해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의 대학에 다니며, 그 후에는 언론을 통해 한국을 소개하는 작가로서, 혹은 한국어 통역으로 일해 온 나는, 마침 서울 올림픽이 끝나 그때까지의 정신없이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한국 한쪽에만 치우쳐 살아온 데 대해, 약간의 피로도 느끼고 있었다. 중국에는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다. 애초에 내가 한국에 처음 간 것도, 내가 좋아하던 중국의 이웃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유학지로 하얼빈을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일본인이 적을 것 같다는 점. 방언이 많은 중국에서도 하얼빈 사람들의 말이 표준어에 충실하다는 점. 소수민족인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한국에서 역사를 배운 사람으로서, 한국인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하얼빈에 대한 어떤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하얼빈이라고 하면 민족의 영웅 안중근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장소이기도 하다. 유학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기숙사 벽에 중국 전토 지도를 크게 붙였다. 그리고 그 지도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있는 하얼빈과 조선반도에 ‘한성’이라고 적힌 서울의 위치를 확인하곤 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은 아직 국교도 없었고, 두 도시는 실제 거리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비행기도 다니지 않았고, 개인 여행은 물론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상업이나 친척 방문, 공적인 목적 등으로 양국을 오가는 사람들은 홍콩이나 일본을 경유해야만 했다. 그렇다 해도 중국은 넓다. 하얼빈이 성도인 흑룡강성은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더 크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이렇게 작은 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조급해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작은 곳에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나 역시 하얼빈이라는 도시에서 열심히 살아보자 하는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흔히 일본, 중국, 한국은 같은 유교 전통을 가진 형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에 오래 살던 내가 중국에 와보니, 오히려 일본과 한국의 가까움이 더 눈에 띈다. 일상생활의 습관이나 음식, 사고방식 등에서 중국과는 이념의 차이 때문인지 다른 점이 많지만, 일본과 한국은 예를 들어 음식이라면 재료도 같고 맛도 비슷하다. 결국 고추와 마늘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 또 한국에 살 때는 일본과의 차이나 불편함이 꽤 신경 쓰였지만, 중국에 와보니 오히려 한국의 편리함이 몸에 사무치게 느껴졌다.
그때까지의 나는 한국에 오래 살면서도, 장차 정착할 곳은 역시 일본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하얼빈에 머물며 “나는 아마 어디에서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묘한 자신감도 생겼다. H대학교에 어학연수생으로 유학 온 나는, 일본어 자료실의 G 선생님에게 중국어 개인지도를 부탁했다. 그녀의 나이가 나보다 겨우 두 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서로 놀랐다.
세 살짜리 아이가 있는 G 선생님은 내 눈에는 완전히 ‘아줌마’였고, 그녀에게 나는 ‘젊은 일본인 유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리는 중국어 공부를 위해 만난다는 사실도 잊고, 서로의 신상 이야기나 시시한 잡담에 빠져들게 되었다. 늘 미소를 잃지 않는 G 선생님은 가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 생활은 부족한 게 없다고 생각해. 아이도 있고 월급도 안정적이니까.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어. 부러워해도 이 생활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말이야, 일은 단조롭고 매일이 변화가 없어. 앞으로 평생 이런 생활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너무 허무해져. 당신의 인생은 정말 멋져. 하고 싶은 걸 뭐든 할 수 있고 자유롭게 외국에도 갈 수 있잖아. 나는 평생 외국에 갈 기회 같은 건 없겠지.”
꿈이나 희망은 하나도 없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래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어느 날 나는 G 선생님의 집에 초대받았다. 가기 전부터 여러 번 좁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역시 놀라고 말았다. 약 6평 정도 되는 방 하나에 더블침대와 책상, 작은 찬장뿐이었다.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를 펴면 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한 사람이 겨우 설 수 있는 부엌은 옆집과 공동 사용이었다.
“이렇게 좁아서 아이를 키울 수가 없어서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있어. 여름과 겨울 방학 때만 아이를 만날 수 있어. 그래도 앞으로 2년만 참으면 방 두 개짜리 집을 배정받을 수 있어.” 식사 준비나 뒷정리도 옆집과 겹치지 않도록 매일 신경 써야 한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유학생 기숙사는 얼마나 좋은 환경인가!
어느 날 대학 일본어학과의 S 선생님이 태양도(太陽島)에 가자며 나를 초대했다. 하얼빈에는 웅대한 송화강이 흐르고 있으며, 강을 건너 있는 태양도는 볼거리가 별로 없는 하얼빈에서 거의 유일한 관광지다. 강변을 따라 길게 뻗은 스탈린 공원에서 배를 타고 건너갈 수 있다. G 선생님도 함께였다.
나와 G 선생님은 이미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 어디를 가든 손을 잡고 걷곤 했다. 한국에서도 친구끼리 손을 잡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나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토다 씨, 혼자서 태양도에 가면 안 돼요.” G 선생님이 언니처럼 말했다. “왜요?” “산적이 나와요.” 진지한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닌 듯했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G 선생님과 있으면 늘 이런 식이다.
S 선생님은 대학 시절 농구 선수였다는 장신의 스포츠맨. 지금은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문학 청년(아니, 중년?)이기도 하다. 일본 소설도 솔직히 나보다 훨씬 많이 읽었다. 5월의 태양도는 아직 수영 시즌이 아니어서 식당이나 매점도 어딘가 황량했다. 그래도 햇살은 따뜻했고, 우리는 전후 일본문학에 대해 논하면서(?) 느긋하게 공원으로 향했다. 거기서 통조림과 빵, 달콤한 포도주로 점심을 먹고 배를 타고 돌아왔다.
그때 S 선생님이 갑자기 물었다. “토다 씨는 목숨을 걸 정도로 사랑해 본 적이 있습니까?” “….” “나는 대학 시절에 진지하게 사랑한 적이 있습니다. 상대는 후배였죠. 우리는 자주 여기서 데이트를 했습니다.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부자였고 우리는 집안이 너무 달랐습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가 정해준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
“나는 여러 번 절망해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죽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지금은 행복하세요?”
“결혼 초에는 전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년 전에 아이가 태어난 뒤로 조금씩 마음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옛날 일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건 지금의 아내에게 꽤 실례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서 지금의 가정을 소중히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공원에 오면 갑자기 옛날이 떠오릅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에게 한 건 처음입니다.” S 선생님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스탈린 공원의 벤치에는 젊은 연인들이 행복하게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여기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저마다의 생각과 삶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그 사실이 나에게는 몹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여러 곳을 여행하며 그곳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만날 때마다 나는 “아, 오길 잘했다”라고 느낀다. 그리고 그 마음은 또다시 다음 여행으로 나를 이끈다.
하얼빈은 일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다.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된 것은 1909년이다. 당시 이미 많은 일본인이 이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하얼빈 교외 핑팡에는 일본군이 세균을 이용한 인체 실험을 했던 ‘731부대’가 있었다. 지금은 일본 기업의 공장 등도 들어서 있고,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도 많다. 나는 일본어학과 학생의 권유로 시내에 있는 ‘일본어 살롱’이라는 모임에 나가 보았다.
약 100명 정도의 회원이 주 1회 모여 일본어만 사용해 회화 연습을 한다고 한다.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살롱은 큰 소동이 일어났다. 진짜 일본인과 살아 있는 회화를 해보려는 듯, 모두가 앞다투어 몸을 내밀어 온다. 그 기세에 나는 사방에서 떠밀리듯 둘러싸였다. 마치 아이돌 스타라도 된 기분이었다. 살롱 회장이 나를 명예 회원으로 하자고 제안하자 모두 박수로 찬성했다.
“취미는 무엇입니까? 일본 어디에 사세요? 아버지 월급은 얼마입니까?” 쉴 새 없이 질문이 쏟아진다. 그 기세에 나는 웃는 얼굴이 굳어 버렸다.
“저도 여러분께 질문해도 될까요? 여러분은 왜 일본어를 공부합니까?” 몇 사람이 차례로 일어났다. “일본인은 우수한 민족입니다. 저는 일본어를 배워 일본의 뛰어난 기술을 익히고 싶습니다.”
“저는 일본이 아주 좋습니다. 일본은 매우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항상 TV로 일본 드라마를 보고 있습니다. 꼭 후지산에 올라보고 싶습니다.” 그만 좀 해! 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일본 찬양이 이어졌다. 한국의 대학에서 일제시대 역사를 배운 나로서는, 그 말들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참다 못해 나는 외쳤다. 전쟁 중 일본인이 얼마나 많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죽였는지 저는 배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음속에 일본인을 미워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여러분은 미운 일본인의 언어를 배우려고 합니까?” 그럼에도 모두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일본 국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전쟁의 피해자였습니다.” “지나간 일을 언제까지나 신경 써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일본과 중국은 우호 관계입니다.” “이 친일파들!”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간신히 참았다.
“제가 일본인이라고 해서 신경 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저는 진실이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같았다. 나는 깊은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아무도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많은 사람 앞이라서 속마음을 숨기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물어보면 진심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갔다.
유학생 동료 중에는, 중국인들이 일본을 칭찬하는 것은 속셈이 있어서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 친해지면 반드시 일본에 유학 가고 싶다며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니 조심하라는 충고도 들었다. 만약 중국인들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일본 비판을 삼가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연장 아닌가, 하고 나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1989년 6월,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들과 인민해방군의 충돌이 있었다. 그해 3월에 하얼빈에 온 나는, 5월 초부터 시내에서 벌어지는 학생 시위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학생 시위라고 하면 역시 한국이다. 나 역시 매일같이 최루탄 냄새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대학에 다녔고, 수업 중 운동장에 최루탄이 떨어져 눈물범벅이 된 채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런 나로서는 중국의 학생 시위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행진하다가 금세 해산해 버린다. 시위대가 학교 밖으로 나가려다 공안이 있으니 그 자리에서 해산했다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 혼잣말을 했다. “좀 더 진지하게 민주화 좀 해봐요.” “공안 있다고 해산이라니 너무 약한 거 아냐?” “맨날 ‘인터내셔널가’만 부르지 말고 좀 더 분위기 띄우는 노래는 없는 거야?”
그런데 톈안먼 사건을 계기로 상황은 급변했다. 느긋하던 하얼빈에도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학교 측의 통제 속에서 톈안먼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흐느낌과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유학생들에게 더 무서웠던 것은 바다 건너에서 들어오는 전파였다. NHK와 미국 ABC의 단파 방송은 중국 TV 뉴스에서는 절대 전해주지 않는 긴박한 상황을 계속해서 전달했다.
“일본 대사관을 향해 발포가 있었다.” “베이징 체류 일본인의 귀국이 잇따르고 있다.” “각지에서 학생들이 철도를 봉쇄하는 등 항의 행동을 시작했다.” 국제전화는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 일본에 전화를 신청해도 반나절이 지나도록 연결되지 않는다. 유학생들은 모두 초조해했다. NHK 단파 라디오에서 “중국에 체류 중인 일본인을 위해 1시간마다 중국 정세를 방송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솔직히 나도 초조해졌다.
하얼빈에는 일본 직항편이 없다.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베이징이나 다롄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야 한다. 하지만 국내선이 과연 안전할까? 철도가 끊기면 돌아갈 수 없는 건 아닐까… 미국인에게는 이미 대사관에서 철수 권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일본 대사관은 “귀국을 원하는 사람에게 교통 편의를 제공하겠다”고만 했다.
베이징에서는 임시 귀국자를 위한 전세기가 뜨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다. 막상 일이 닥치면 대사관은 믿을 수 없다. 내 목숨은 내가 지켜야 한다… 매일 밤 유학생들은 모여 먼 바다 건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전파에 귀를 기울였다. 긴장감 때문에 “엄마…” 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학생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유학 온 어린 학생들도 많았던 것이다.
일본에서 온 일본어 교사와 유학생들이 모여 긴급 회의를 열었다. 홋카이도 출신의 한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전 직후 북방 영토에서 귀환하는 사람들을 직접 봤습니다. 그 경험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노력해도 짐은 두 개까지밖에 못 가져갑니다. 철도가 끊기면 대륙을 걸어서 이동해야 합니다. 욕심내도 결국 버리게 됩니다. 현금과 여권, 식량만 있으면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믿을 건 자신의 체력뿐입니다.”
그 말은 오히려 긴장감을 더 키웠다. 반대로 하얼빈 시민들은 정보가 적은 만큼 오히려 침착했다.
“문화대혁명 때도 하얼빈은 큰 혼란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거예요.” “며칠 지나면 가라앉을 겁니다.” 나는 솔직히 무서웠다. 하얼빈에서 여러 잔류 고아와 잔류 부인들을 만났는데, 특히 잔류 부인 중에는 당시 다롄에서 귀환선이 출발한다는 정보를 놓쳐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혹시 나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유학생들이 몇 개 그룹으로 나뉘어 귀국 준비를 시작하는 것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어떡하지… 나도 지금 돌아가야 하나?” 생각이 깊어질수록 위가 아파왔다. 몇 시간이나 기다려 겨우 전화가 연결된 아버지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외쳤다. “베이징이 큰일 났다! 당장 돌아와!” 나는 한마디로 “아직 안 돌아가”라고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험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주변의 중국인 친구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 집에서 숨겨 줄게. 걱정하지 마”라고 말해 주었는데, 그것을 100%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대학은 폐쇄되었고 수업도 6월 말에 조기 종료되었다.
나는 점점 사람이 줄어드는 유학생 기숙사에 남았다. 오히려 하얼빈 시내는 예전처럼 평온함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어느새 소란은 가라앉은 듯했다. 그리고 나는 혼자 옛 만주 지역, 지금의 중국 동북 지방을 여행하기로 했다. 우선은 목단강을 거쳐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다.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戶田郁子)
●23. 조선족의 한국 취업 사정 – 연변의 조선족
내가 하얼빈을 유학지로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조선족이 많다는 점이었다. 북한 국경과 가까운 길림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도 가끔 듣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조선어가 통하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어 공부가 소홀해질까 봐 피하고 싶었다. 내가 다니던 하얼빈의 대학에도 조선족 학생이 매우 많았다.
특히 일본어과에 많았다. 조선어와 일본어의 문법이 같기 때문에, 한족보다 조선족이 일본어를 배우기에 유리한 것이다. 일본어과의 우등생은 대부분이 조선족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일본 교육을 받으셔서 일본인을 아주 그리워하세요. 한번 집에 와서 어머니를 만나 주시지 않겠어요?”
어느 조선족 학생의 초대를 나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녀와 둘이서 조선어로 수다를 떨며 시장에 들르자, 김치를 파는 조선족 아주머니들이 말을 걸어왔다. “남조선에서 왔니?” “네, 맞아요.” 가끔 나는 일본인이라고 밝히는 게 귀찮아서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1989년 당시에는 아직 한국과 중국의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한국을 ‘남조선’이라 불렀다.
“어머, 남조선 말은 참 곱구나.” “남조선은 아주 부자라면서?” “우리 동생은 지금 서울에 가 있어.” “남조선은 기독교인이 많다지?” 서울올림픽 이후, 중국의 조선족 사이에서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졌다. 한국의 국영방송 KBS에서는 매일 이산가족 찾기 라디오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북한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내륙에 사는 조선족 중에는 남쪽 출신도 많다(물론 당시에는 북도 남도 없었지만).
이들은 일제 시대에 강제로 이주당한 사람들과 그 후손이다. 그래서 하얼빈의 조선족 말은, 나에게는 북한 억양이 강한 연변의 말보다 훨씬 알아듣기 쉬웠다. 남조선 처녀는 예쁘다느니(?), 집에 놀러 오라느니, 이 김치 먹어 보라느니, 다음에 교회에 같이 가자느니 하며 아주머니들은 내 손을 붙잡을 듯이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되면 사실은 일본인이라고 도저히 밝힐 수 없게 된다.
나는 큰 비닐봉지에 귤을 가득 사서 시장을 나왔다. 그 학생의 집은 낡은 아파트 3층에 있었다. 한 평 남짓한 현관 겸 부엌 안쪽에 여덟 평 정도 되는 방 하나. 부엌이 공동이 아닌 점은 G 선생의 집보다 나았다. 그러나 방에는 큰 더블 침대와 책상, 옷장이 있어 움직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학생은 기숙사에 살고 있었고, 이 방에는 학생의 언니 부부와 두 살 된 딸,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 살고 있었다. 부엌에는 식사할 공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방에도 식탁을 펼 자리가 없다. 도대체 어디서 밥을 먹나 싶었더니, 어머니가 작은 둥근 밥상을 꺼내 침대 위에 올렸다.
한족은 의자와 테이블 생활이지만, 조선족은 한국처럼 바닥에 앉는 생활을 한다. 다만 바닥이 온돌이 아니기 때문에 침대 위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는다. 예순이라는 어머니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열세 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계속 일본어를 안 써서 많이 잊어버렸어요.” 어머니는 웃으며 옛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교과서에서 배웠다는 노기 장군 이야기, 아직도 외운다는 ‘황국신민의 서사’, 공기놀이와 고무줄 놀이 때 부르던 노래 등을 그리운 듯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기미가요 불러 주세요, 기미가요를.” 말없이 있는 나를 재촉하듯, 어머니가 먼저 기미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깊은 주름이 패인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울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조선족은 과거 일본의 중국 침략에 크게 이용되었다. 당시 일본인은 1등 국민, 조선인은 2등 국민, 중국인은 3등 국민이라는 등급이 매겨져 식량 배급과 노동 조건 등에 차별이 있었고, 민족 간 마찰이 증폭되었다.
그 마찰은 지금까지 이어져 한족과 조선족 사이에는 미묘한 간극이 생겨 있다. 내가 유학했던 H대학 일본어과에는 조선족과 한족 교수들이 있었는데, 내가 조선족 선생들과 조선어로 이야기하면 한족 교수는 절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족이 자리를 뜨면 갑자기 조선족 욕을 하기 시작하는 한족도 있었다. “도다 씨, 조선인과 어울리지 마세요.” “왜요?” “조선인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건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닌가요?” “아니요, 조선인은 열등민족입니다!”
같은 직장의 동료인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까 하고 나는 놀랐다. 그렇다고 그 한족과 조선족이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한편 조선족 노인들 중에는 일제 시대에 자신들이 한족보다 쌀 배급을 더 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젊은 조선족 중에는 내 곧은 머리를 보고 “그럼 한족처럼 보이니까 파마를 하는 게 좋겠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조선족도 아니고 파마도 싫다고 설명해도, 한족처럼 보이는 건 좋지 않다는 그녀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족은 흔히 자신들의 민족이 교육열이 높고 대학 진학률도 높다고 자랑한다. 그들에게는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룬 ‘조국’ 한국이 자랑거리다. 한편 한족 여성들은 조선족 남성들이 봉건적인 사고가 강해서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한족 남성과 조선족 여성 커플은 잘 되지만, 그 반대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실제로 그런 생활 습관 차이로 이혼했다는 사람도 만난 적이 있다. 1989년 여름,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가기 위해 목단강에서 연길로 가는 기차를 혼자 탔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조선족 여학생은 나를 한국인으로 착각하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한국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한국에 가고 싶어요. 거기서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할 거예요.” 스무 살 남짓한 그녀의 대담한 말에 나는 놀랐다. 한국에 가면 부모님도 쉽게 못 만난다고 말해도, 전혀 상관없고 중국으로 돌아올 생각도 없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 후 한 달 동안 연길에 머무는 동안 내 방에는 많은 조선족이 찾아왔다.
모두 어떻게든 한국에 갈 방법이 없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 여자라도 좋으니 결혼해서 한국으로 초청해 줄 사람은 없냐, 가짜 친척이 되어 줄 사람을 소개해 달라, 어머니 쪽 먼 친척이 한국에 있을 텐데 찾아줄 수 없겠냐는 식이었다. 한족도 찾아왔다. 연변대학에서 조선어를 배우고 있다는 학생이었다. “여기서 가르치는 조선어는 북한식 억양이라고 들었습니다.
꼭 당신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싶습니다. 매일 와도 될까요?” 내가 일본인이라고 말해도 “그건 상관없습니다”라고 한다. 내 서울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된다는 것이다. 굳이 조선어를 배울 필요 없지 않느냐, 조선족 통역이 많지 않느냐고 묻자, 국가의 중요한 이야기나 무역 협상은 조선족에게 맡길 수 없기 때문에 한족 엘리트가 선발되어 이렇게 교육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1992년 8월, 한국 정부는 그동안 우호국이었던 대만과 단교하고 전격적으로 한중 수교를 발표했다. 이것을 가장 기뻐한 것은 중국에 사는 200만 조선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북한과의 우호 관계가 있다. 국교는 수립되었지만 아직 일반 외국과 같은 자유로운 관계는 아니다.
서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는 없다.
중국에서 한국에 올 수 있는 것은 친척 방문 목적의 조선족뿐이며 기간은 3개월로 제한된다. 그러나 ‘황금의 나라’ 한국에 와서 3개월 만에 돌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루 일당이 중국의 한 달 월급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비자 기간이 지나도 불법 체류와 불법 취업을 계속하는 조선족이 매우 많다.
결혼해서 서울에 사는 내게도 중국에서 왔다는 사람들로부터 가끔 연락이 온다. 예전에 하얼빈에 유학했을 때 알게 된 조선족의 친척이라든가, 옆집에 살았었다는 사람들이다. 직접 면식이 있는 사람은 없다. 얼마 안 되는 인맥에 매달리듯 찾아온 사람들을 “모른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만나면 반드시 “좋은 일자리 없느냐”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들어보면 모두 한국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중국에서 개인 상점이나 무역 회사를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모은 돈으로 이번에는 일본에 유학하겠다는 당찬 계획을 말하기도 한다. 얼마 전 나를 찾아온 세 식구는 한국에 들어오기 위한 절차 비용으로 3만 위안(1993년 당시 이야기이며, 이후에는 7만 위안까지 올랐다)을 지불했다고 했다.
중국에는 가짜 친척을 알선하는 브로커가 꽤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3만 위안은 큰돈이다. 현재 환율로 계산해도 한국 대기업 부장급의 한 달 월급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게다가 불법 체류·취업이 적발되어 중국으로 송환될 때는 출입국관리국에 벌금까지 내야 하므로, 그 이상을 벌지 않으면 해외취업온 의미가 없다.
일자리라 해도 한국인이 꺼리는 이른바 3K(위험직종-한국에서는 3D라고 한다)이다. 하얼빈의 중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했다는 여성은 서울의 여관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라며 무시당하거나 차별을 받아 더는 참지 못하고 주인과 크게 다툰 사람 이야기도 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한국인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그 정도는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때로는 불법 취업이라는 약점을 이용당해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힘들게 모은 돈을 도둑맞은 사람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불법이라는 약점 때문에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다. 아무런 보장도 없다. 다치거나 경기가 나빠지면 바로 버려지는 신세다. 그럼에도 한국에 오려는 사람은 끊이지 않는다. 모두 일확천금을 꿈꾼다. 1~2년 고생해서 중국 돈으로 20만 위안 정도를 모아 돌아가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생쯤은 각오한 것이다. 얼마 전 만난 아저씨는 “요즘 중국에서는 누구나 ‘하해(下海)’야”라며 웃었다. 하해란 바다처럼 넓은 비즈니스 세계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인이 가게나 회사를 운영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 큰돈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해외로 나가 돈을 버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일단 큰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이다.
서울역 앞 광장이나 지하철 시청역 부근 지하도는 한때 ‘하해’한 조선족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더 좋은 일자리가 있는지, 고향에서 온 아는 사람이 없는지, 언제부터 단속이 강화되는지 등의 정보가 교환된다. 예전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한약을 길거리에서 파는 사람이 많았지만, 한약이 너무 많이 유입되자 한국 제약회사들이 “중국산에는 가짜가 많다”, “발암 물질이 검출됐다”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한 이후, 전혀 팔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는 조선족은 한국에 가면 한약이 비싸게 팔릴 것이라고 믿고 수만 위안어치를 빚내어 사 들고 온다. 그게 팔리지 않아 중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최종 목적은 돈이라 해도, 조국에 대한 어떤 애정은 있다. 말도 통하고 동포라는 안도감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한국에 와서 완전히 무너진다. 자본주의 사회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냉혹하다.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의 차이도 있다.
그리고 많은 조선족 노동자들은 굴욕감을 안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래도 중국에 돌아가 “한국에 친척이 있다”고 하면 한족에게 크게 부러움을 산다고, 한 조선족 청년은 웃으며 말했다. 한국 농촌으로 시집오는 조선족 여성도 급격히 늘고 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신부 부족에 시달리는 한국 농촌에서는 같은 민족인 중국의 조선족 여성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고, 중국 조선족 역시 한국의 경제력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최근에는 사설 결혼중개소를 통해 한 달에 약 200쌍의 부부가 탄생하고 있다고 한다. 중개소는 한 쌍당 200만~300만 원 정도의 사례금을 받는다. 하지만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위장결혼”, “잇따르는 이혼 소송” 같은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여성을 데려오기 위해 남성은 먼저 한국에서 혼인 신고를 한다.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은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입국 직후 도망가는 경우가 있다.
또는 잠시 결혼 생활을 하다가 남편의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가출하기도 한다. 또한 상대 여성이 중국에서 이혼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여성들은 도시로 나와 다방이나 식당에서 일한다. 한국의 일부 다방에서는 성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불법 체류나 불법 취업으로 추방될 걱정이 없고, 경찰도 체포할 수 없다.
중국에서 맞선을 보고 결혼 약속을 한 여성에게 수백만 원의 비용을 들였다가 돈을 떼인 사례도 있다. 보도에 따르면 한중 커플의 약 20%가 신혼 기간 중 파국을 맞는다고 한다. 주변에서 “도망가지 않게 조심해라”는 놀림을 받거나, 밤에 도망갈까 봐 잠도 못 자고 지키는 사람도 있어, 별문제 없는 부부조차 정신적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속은 농촌 청년에 동정하는 기사들이 많지만, 나는 돈으로 결혼을 사려는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거 일본 남성의 기생 관광이 비난받았지만, 한국 남성도 중국이나 동남아에 가면 돈으로 비슷한 행동을 한다. 성을 사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매우 희박하다. 게다가 중국을 보는 시각도 일본과 다르다. 이곳은 반공 국가이기 때문에 일본 일부 지식인처럼 문화대혁명이나 마오쩌둥에 대한 애착도 없다.
그보다는 한국전쟁의 기억이 더 강하다. 당시 북한을 지원한 중국군이 한국에 대거 파병되었고, 이를 본 한국인들은 “중국인은 목욕도 안 하고 더럽다”고 말하며 멸시했다. 지금도 중국을 자신들보다 문화 수준이 낮은 가난한 나라로 보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한국 남성들은 필리핀이나 태국에서 값싸게 여성을 사는 것과 같은 감각으로 중국에서도 가이드에게 “괜찮은 여자 없느냐”고 묻는다.
여행 중 해방감에 젖어 가이드에게 음담패설을 하는 경우도 있다. 내 지인 중에도 중국 여행사에서 가이드를 하는 사람이 있다. 조선족인 그녀는 일본어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부러움을 사는 가이드가 되었다. 폐쇄적인 중국 사회에서 가이드는 해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에 엘리트 직업이다. 일본인 관광객을 주로 맡던 그녀도 최근에는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안내하게 되었다.
“일본인은 예의 바르지만 팁을 안 줘요. 한국인은 돈은 잘 쓰지만 꼭 불쾌한 일을 겪게 돼요.” 단체 해외여행을 하면 흥청망청하려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100달러 지폐를 팁으로 주거나, 돈다발을 펼쳐 보이며 “마음껏 가져가라”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조선족에게는 믿기 힘든 이야기다. 조선족은 한편으로는 경제 성장한 조국을 자랑하면서도, 돈자랑을 하며 허세를 부리는 한국인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한국에 돈 벌러 간 사람들의 집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어린 자식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몇 년씩 한국에 나가는 젊은 어머니도 있다. 할머니는 손자를 불쌍히 여겨 “네 엄마는 나쁜 사람이다, 너를 버리고 돈 벌러 갔다”고 말하고, 그 결과 아이는 돌아온 엄마를 따르지 않게 된다. 가족을 위해 일했는데도 귀국 후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 또 중국으로 돌아가기 싫어 한국에 눌러앉는 경우도 있다.
남겨진 노인과 아이는 송금이 끊기면 극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아이들을 돕기 위해 심양의 한 조선족이 실태 조사를 하고 학비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취지에 공감한 우리도 요령성 시골에 사는 두 명의 중학생에게 고등학교 졸업까지 학비를 보내고 있다. 한국 때문에 무너진 가정의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이 되기를 바라면서.
서울은 오늘도 쾌청 (1998 토다 이쿠코)
●24.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자유 - 두 번째 하얼빈
결혼 전에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한 번 더 중국에 가고 싶어. 여행이 아니라, 한동안 살아보고 싶어. 나는 중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하지만 결혼을 하면 그런 자유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워.”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같이 가면 되잖아.” 그의 그 한마디는 나에게는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혼자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고, 결혼하면 자유는 사라진다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자유로워지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다니… 그렇다면 나에게 결혼을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한동안은 서로 일이 바빴고, 그러는 사이에 아이도 태어났다. 하지만 나는 중국에 가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 갈까 고민하다가, 아이가 여섯 달이 지나면 가기로 결정했다. 가족들은 물론 크게 반대했다. “왜 하필 중국이냐”고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말이 부족해 아무리 설명해도 내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했다.
예전에 중국에 머물면서 만났던 사람들은 나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중국에서 ‘쓰고 싶다’는 충동이 나를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고, 나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면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일제시대의 역사를 조사하는 것을 개인적인 취미로 삼고 있다. 당시 사람들의 삶과 생활을 떠올리면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기까지 한다.
만약 내가 그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아마 가장 먼저 ‘만주 개척단’에 지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개척의 땅, 새로운 인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일제와의 투쟁….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를 넘어, 그런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나를 뜨겁게 만든다. 니시 준조(西順蔵1914~ 1984 중국사상사가) 씨의 저서 『일본과 조선 사이』(영서방·1983년)를 읽고 매우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
“피해자인 조선인이 가해자인 일본인에게 가하는 탄핵을, 일본인 스스로가 모아 정리하여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는 것. 이것이 일본의 조선 연구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가해자의 죄악은 피해자에 의해서만 폭로되고 탄핵되는 것이다. 연구자이든 아니든, 일본인이 자기 뼛속까지 얽힌 죄악을 알고 자기 비판을 하려 한다면, 상대인 조선인에 의한 비판을 받는 것 외에는 제대로 된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니시 씨의 경력을 보면 1914년생으로, 1942년부터 3년간 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던 사람의 말이기에 설득력이 크다. 확실히 지금까지 많은 일본인들은 지나간 시대를 새기기보다 잊으려는 노력을 해왔다. 전쟁을 모르는 나는 그 시대를 거의 알지 못한 채 한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의 젊은 세대로부터 그 문제를 들이받았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부끄러웠고 동시에 왜 아무도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지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는 고인이 된 김소운 선생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나라의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는 말도 잊을 수 없다. 한국인에게 배우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일본인. 나 역시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한국에 막 왔을 무렵의 나는, 일제시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속죄할 수 있을까, 내가 일제시대를 겪은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사과해야 하는 걸까, 아니 내가 사과한다고 해서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이 되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하며 끝없는 제자리걸음 같은 생각만 반복하고 있었다.
나의 한국 유학 생활은 결코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알고 싶다는 욕구로 일제시대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일본의 정치가나 지식인들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나는 같은 가해자의 후손인 일본인으로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학우들로부터는 항상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내가 배우고 싶어서 여기에 온 것이지, 일본인을 대표해 죄를 속죄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일본인이기 때문에 죄의식을 가지고 그 시대를 돌아봐야 한다는 의견은 분명 옳지만, 나처럼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의무감만으로 그것을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결코 일본인을 대표해서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온 것이다. 중국 동북부(옛 만주)는 나에게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살아 있는 역사 증인들이 내가 몰랐던 이야기를 산더미처럼 들려준다. 나에게는 매일이 스릴 넘치는 자극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어떻게든 다시 한 번 가고 싶었다.
생활의 불편함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거나 정전이 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혼자 샤워를 하다가 물이 끊겨 버려, 온몸에 거품을 묻힌 채 멍하니 앉아 물이 나오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수도꼭지에서 제대로 물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정도였다. 물이나 온수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일본이나 한국에 있으면, 그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 그런 불편한 곳에 가려는 거냐.” 친정어머니도 시어머니도 하는 말은 똑같았다. “명수가 불쌍하잖아. 아무 죄도 없는 아이를 그런 불편한 곳에 데려가지 마라!” 가족들의 의견은 늘 이랬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아이를 낳고 키우며 매일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쯤 불편한 곳에서 사는 편이,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의미에서도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너희가 고생하는 건 상관없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명수까지 고생시키다니 말도 안 되는 부모다!” 물론 그런 점도 다 알고 있었다. 우리도 모든 것을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아이에 대해서는 나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혹시 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은 늘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할 때, 불안은 늘 따라붙는 법이다.
예를 들어 회사원(OL)이었던 시절, 한국에 유학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두려웠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 간다면, 아무런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을까, 학비는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회사를 다니고 있으면 한 달이 지나면 월급을 받고 저축도 할 수 있다. 회사에 가는 건 싫어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활이 편하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때까지는 혼자였기 때문에 몸이 가벼웠다. 혼자라는 긴장감은 나에게는 오히려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물론 힘든 일도 있다. 병이 나도 다쳐도 의지할 사람이 없다. 혼자 여행 중 고열로 쓰러졌을 때는, 혹시 여기서 죽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대체 누가 가족에게 연락을 해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힘이 없어 혼자 식당에 갈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사다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이대로 누워만 있다가는 몸이 쇠약해져 정말 움직일 수 없게 될 것 같아, 스스로를 다그치며 기어서라도 식당에 갔던 기억도 있다. 결혼을 하고 생활도 안정되었으며, 아이도 생겼다. 한국에서 살아간다면 집도 있고 수입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에 도전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경제적인 면도 그렇지만, 아이 문제도 걱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와 아이, 세 식구가 함께 떠나기로 했다.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우리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를 희생시키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는 세 식구가 언제나 함께 새로운 일에 도전해 나가자고, 나와 남편은 다짐했다.
남편의 가족들은 체념한 듯 이렇게 말했다. “너희 둘 다 ‘역마살'이 꼈다.” ‘역마’는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것을, ‘살이 꼈다’는 ‘마가 들었다’, ‘악령이 씌었다’는 뜻이다. 즉 어쩔 수 없는 방랑벽이 있다는 의미가 된다. 결코 좋은 뜻의 말은 아니다. 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남편은 결혼 전, 갑자기 사진을 찍으러 간다며 집을 나가 며칠씩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나 역시 아는 바와 같이, 부모가 반대해도 태연하게 한국이며 중국이며 떠나버리는 타입이다. 한곳에 오래 머물고 있으면 어쩐지 엉덩이가 들썩거려 또 다음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그야말로 ‘역마살이 낀’ 사람들이다.
시누이 부부는 초등학교 교사이고, 형은 실내 인테리어 가게를 운영하며 각자 아이를 키우면서 정착형 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는 늘 밖으로만 돌아다닌다. 취재 때문에 지방에 가기도 하고, 여행도 자주 간다. “너희는 아마 우리가 평생 타는 비행기를 1년에 다 타고 있겠네.” 형님은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힘들게 번 돈을 하늘이나 길바닥에 뿌려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야.” 시어머니는 투덜거리지만, 그래도 괜찮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이 생활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아기에게는 민폐일지도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이 “부럽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정말 부럽다면, 당신도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면 되잖아.”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남을 부러워해도,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실현해 나가는 삶을 살고 싶다. 물론 위험은 각오하고 있다. 간절히 바란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은 없다고 믿는다.
그것이 나의 신조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소소하게 지키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나에게는 남편과 아이라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가족과 함께 새로운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감사하다.
가끔 나에게 “열심히 해서 한일의 가교가 되어 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일본과 한국 사이의 희생물이 될 생각은 전혀 없다. 한국인 남편을 얻었다고 해서 한국 문제를 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인과 결혼했다고 해서 면죄부를 얻었다거나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생각도 전혀 없다. 단지 나에게 평생의 파트너가 한국인이었을 뿐이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분명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도 일본도 아닌, 서로에게 외국인 땅에서 사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스스로 가족을 지키고,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기본적인 것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중국에서의 새로운 만남도, 혼자였을 때와는 또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아이가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혼자여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둘이 되어도, 그리고 셋이 되어도 어떻게든 가능하다는 것을 지금 나는 실감하고 있다. 힘든 것은 이제부터일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될까. 남편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복의 신이 붙어 있어. 돈이 떨어질 것 같으면, 언제나 뜻밖의 곳에서 수입이 생겨. 나랑 같이 있으면 절대 굶을 걱정은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나 역시 꽤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복의 신까지 함께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게다가 ‘재물운이 따른다’는 이름을 가진 명수까지 곁에 있다. 셋이 함께라면, 세계 어디에 있어도 굶을 일은 없을 거라고 믿으며, 우리는 중국으로 떠났다.
서울은 오늘도 맑음 (1998 도다 이쿠코)
●25. 보모는 중국인 ― 명수의 세 개 언어 체험
생후 여섯 달 된 아이를 데리고 타국에서 사는 일. 처음에는 솔직히 말해 힘들었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는, 마치 아기 원숭이처럼 나에게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크게 울어댔다. 한밤중에 갑자기 격렬하게 울음을 터뜨린 적도 있어서, 이런 곳에 데려온 것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
또 하나 힘들었던 것은 낮 동안 아이를 봐줄 보모를 구하는 일이었다. 아는 조선족은 “역시 말이 통하는 편이 좋다”며 조선족 아주머니를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한국에서 불법 취업을 하다가 강제 추방된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솔직히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 돈 벌러 다녀왔다는 조선족은 하얼빈에도 꽤 많다. 고생해서 일하고 큰돈을 벌어 돌아왔다는 성공담도 자주 듣는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으로 돌아온 뒤다. 외국에 나가 한 번 큰돈을 손에 쥔 사람은 가치관이 변해버린다. 중국에서 일해 봐야 고작 이 정도밖에 벌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한국이라면 한 시간 일하면 얼마인데… 하고 계산을 시작하면 바보 같아서 일을 구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가져온 돈을 밑천으로 장사를 시작하려 해도 경험이 없고, 이런 사람을 노리고 덤벼드는 이들도 많아서 어느새 속아버리거나, 심심풀이로 시작한 도박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모은 돈의 대부분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는 이야기를 나는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 집에 오자마자 아이 얼굴도 보지 않고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다. 우리는 조금 많은가 싶으면서도 “300위안”이라고 답했다. 참고로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던 대학 강사의 당시 월급은 270위안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요즘 100위안으로는 신발 한 켤레도 못 산다.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니면 교통비만 한 달에 100위안은 든다.
조선족 중학교에서 일하는 남편 월급은 500위안이다. 나는 400위안은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신발은 꽤 좋은 것도 30위안이면 살 수 있고, 버스비는 한 달에 25위안 정도다. 조선족 중학교 급여도 아무리 많아도 250위안을 넘을 리 없다. 하지만 남편은 한 번 믿고 맡겨 보자고 했다. 그러나 사흘 뒤 아주머니는 아무 연락도 없이 결근했고, 우리는 그만두게 했다.
다음에 온 사람도 조선족이었다. 스물일곱 살의 아이를 좋아하는 아가씨였다. 그런데 다음 날 미안한 얼굴로 나타나 “일자리를 구했다”고 했다. 아무래도 취직할 때까지 용돈 벌이로 잠깐 일하려 했던 모양이다. 시골 출신 조선족 아주머니를 입주 형태로 고용하면 아이 돌봄뿐 아니라 집안일도 모두 맡기고 월 150위안이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조선족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잘 통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좋아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더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대학의 유치원 선생님에게 소개를 부탁하기로 했다. 며칠 뒤 소개받은 사람은 그 학교 탁아소에서 10년 정도 아이를 돌본 경험이 있는 한족 아주머니였다. 말 그대로 전문가였다. 한 살이 갓 된 아이의 기저귀를 재빨리 떼고 배변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중국어도 가르쳐 주고, 매일 밖에 데리고 나가 걸음마 연습도 시켰다.
이 아주머니의 월급은 250위안, 일본 돈으로 약 3천 엔이었다. 너무 싼 게 아닌가 싶었지만, 탁아소 급여가 170위안이었다고 해서 아주머니는 매우 만족해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돌봐준다. 하루 대부분을 중국인 보모와 보내다 보니, 아이는 한 살 여덟 달이 되자 중국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발음도 좋다. 성조까지 정확하다.
내가 아무리 일본어로 “안아줘”를 가르쳐도 아이는 “抱抱(빠오빠오)”라고 말하며 매달린다. 역시 초보 엄마는 베테랑 보모를 이길 수 없다. 언어를 가르치는 데에도 요령이 있는 모양이다. 텔레비전에 장쩌민 주석이 나오면 “예예(할아버지)”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직 하나의 언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유아기에 여러 언어를 동시에 넣으면 머리가 혼란스러워 말이 늦어지고, 나중에는 자폐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초등학교 교사인 시누이는 걱정한다. 실제로 그녀의 반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말을 전혀 하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초보 엄마인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걱정해서 뭐하겠는가. 있는 그대로 맡기자고 마음먹었다. 중국에 갈 때 남편과 한 가지 정한 것이 있다. 아이의 이름과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을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는 한국에서는 “명수”, 일본에서는 “아키히데”라고 불렸는데, 이러면 아이가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중국식 발음인 “밍슈”로 통일하기로 하고 일본과 한국의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부르도록 부탁했다.
시댁에서는 아이가 당연히 “아빠”,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나름의 고집이 있다. ‘엄마’, ‘어머니’라는 말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그 단어에 향수를 느끼는 정서는 나에게 없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는 ‘아빠’, ‘엄마’, 또는 ‘아버지’, ‘어머니’ 이외의 호칭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어떻게 불리고 싶은지에 대한 나의 바람은 시댁 식구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일본에는 부모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아이도 있고, 부모를 “너”, “당신”이라고 부르는 가족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댁 식구들은 모두 “일본인은 상놈이다!”라고 비난했다. 나와 남편은 아이가 우리를 어떻게 부를지 의논했다. 남편은 당연히 “아빠”를 원했다. 나는 아이에게 꼭 “오카아짱(엄마)”라고 불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아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좋지 않다.
결국 부모 호칭도 중국어로 통일하기로 했다. “파파”, “마마”. 참고로 영어의 papa, mama가 아니다. 나와 남편은 서로 한국어로 대화하고, 내가 아이에게는 일본어로, 남편은 한국어로, 보모는 중국어로 아이를 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세 가지 언어가 동시에 사용되자 아이도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내가 “사과”라고 가르친 것을 보모가 중국어로 “핑궈”라고 하자, 아이는 큰 소리로 “마마!” 를 부르며 “사과”라는 말을 듣고서야 안심하는 식이었다.
같은 물건인데 사람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면 어른이라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림책 속 군인을 가리키며 나는 “지에타이”, 남편은 “군인 아저씨”, 보모는 “인민해방군 아저씨”라고 부른다. 그러나 세 나라 사람이 하나의 사물을 하나의 말로 통일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일이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두기로 했다. 그러자 아이도 점점 하나의 사물에 여러 이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상대에 따라 부르는 말을 구분해서 쓰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자기만족이라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자기 아이, 손자가 다른 아이보다 더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기만족. 다른 아이보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자기만족. 더 빨리 걸었다, 몸집이 크다, 혹은 말을 잘한다 등등, 아이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이웃 아이나 책에서 보는 ‘평균치’와 자기 아이를 비교하면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고 있다. 그렇게 남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모르는 사이에 다른 집 아이와 내 아이의 체격을 비교해 보기도 한다.
말을 가르치는 것 역시 결국 자기만족이다. 겨우 서툰 말을 하기 시작한 아이를 붙잡고 이것저것 말을 걸다가, 우연히 비슷한 발음을 흉내 내기라도 하면, 드디어 말을 했다고 크게 떠들어댄다. 아이를 어르는 부모의 마음에는 국경이 없다. 미국인 친구가 막 한 살이 된 우리 아이를 안고 영어로 열심히 말을 걸다가, 아이가 영어를 했다며 크게 호들갑을 떨었다.
“이 아이 대단하다, 영어도 알아듣네!” 그럴 리가 없다. 같은 아기 옹알이라도 미국인이 들으면 영어로 들리고, 중국인이 들으면 중국어로 들린다. 결국 어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 아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때, 일본 할머니도 한국 할머니도 하는 말은 똑같다. “분명 중국어로 말하고 있는 거야.” “뭔가 말하고 싶은데, 불쌍하네. 할머니는 중국어를 몰라서 미안해.”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건 중국어가 아니라 그냥 의미 없는 아기 말인데…”라고. 만 두 살쯤이 되면 점점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단어를 이어서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래도 아이 자신은 아직 아주 간단한 단어의 의미밖에 모르고, 대부분은 어른의 말을 흉내 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에 있을 때는 보모를 따라 중국어를 술술 하던 아이가, 한국에 돌아오자 이번에는 한국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을 흉내 내기 시작해 그동안 쓰던 중국어는 거의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가면 이번에는 일본어를 말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완벽하게 익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잊는 것도 빠르다. 그래도 많이 사용했던 중국어 중 일부는 가끔 떠오르는지, 혼자 놀다가 갑자기 부모보다 더 정확한 발음으로 중국어를 말할 때가 있어 깜짝 놀라게 한다. 또 알고 있는 단어를 이어 붙이다 보면 세 개의 언어가 뒤섞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에 못테 오오야 카자”라고 말한다. ‘시에’는 중국어로 신발, ‘못테’는 일본어의 ‘가지고(=신고)’라는 뜻(‘신다’라는 단어를 몰랐던 모양이다), ‘오오야’는 한국어 유아어 ‘엄마’, ‘카자’도 한국어로 ‘가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뒤섞인 말은 중국인 보모에게도, 한국인 남편에게도 통하지 않았고, 나만이 겨우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래서는 이중언어는커녕 더 복잡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과연 다중 언어 환경에 있으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이중언어를 구사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특별한 훈련이 필요한 것일까.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아이가 몇 년 사이에 모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내가 만난 중국에 사는 일본인 잔류 여성들도 오랫동안 모국어를 쓰지 않으면 일본어를 잊게 된다고 한다. 그만큼 언어는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나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이중언어 사용자라고 자주 말해지지만, 한국어는 외국어로서 나름 고생하며 배운 언어이고, 이중언어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두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아이를 보며 느끼는 것은, 부모가 이중언어 사용자라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이는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쉽게 이중언어 사용자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아이의 경우도 중국을 떠나면 중국어는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중국어를 잊지 않게 하려면 부모가 먼저 중국어를 제대로 익혀 집에서도 자주 써야겠지만, 솔직히 그럴 자신은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부모 사정으로 변방으로 끌려온 우리 아이는, 시어머니 말로는 “검둥이가 흰둥이를 낳았다” 할 정도로 피부가 하얗고 매끈했는데, 하얼빈에서 살다 보니 여름에는 새까맣게 타고 겨울에는 사과 같은 볼을 가진 하얼빈 아이가 되어버렸다.
시골 아이들의 볼은 왜 그렇게 빨간 걸까, 예전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얼빈 거리에서 보는 아이들의 볼이 하나같이 빨간 것을 보면서도 남의 일처럼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아이의 볼이 거칠어지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금세 사과 같은 볼이 되어버려 깜짝 놀랐다. 제대로 목욕을 시키지 않으면 금방 이렇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두 번째 겨울을 맞으며 “올해야말로 보들보들한 볼을 유지하자”고 다짐했지만,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맞는 순간 작년과 똑같이 다시 거칠어져 버렸다. “불쌍하게도 엄마가 부족해서 예쁜 볼이 이렇게 됐네… 미안해, 엄마를 용서해 줘.”…라고 눈물로 껴안았다는 건 완전 거짓말이고, “야, 촌놈!” 하며 아이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놀리는 나였다.
이곳 생활은 쾌적하지만, 한 가지 곤란한 점은 욕조가 없다는 것이다. 가스 온수기는 있지만 겨울이 되면 수압이 약해져서 전혀 불이 붙지 않는다. 어른은 여러 번 물을 끓여 간단히 씻을 수 있지만, 아이는 감기라도 걸릴까 봐 대야 목욕을 시킬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얼굴과 손, 엉덩이를 따뜻한 물로 씻겨 주는 것이 고작이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어서 큰돈을 들여 호텔에 묵은 적도 있지만, 영하 20도, 30도가 되면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벌써 두 달이나 아이를 목욕시키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때투성이. 이 이야기를 보모에게 했더니 “동북에서는 이런 건 당연하다”고 했다.
아이는 매일 보모와 함께 학교 안을 산책하므로 우리보다 훨씬 얼굴이 알려져 있다(물론 아이 본인은 전혀 모르지만). 일요일에 내가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면 모르는 아주머니가 “당신이 명수 마마네요” 하고 웃으며 말을 걸고, 자전거를 탄 아저씨가 “명수, 니하오!” 하며 손을 흔들고 지나간다. 어른끼리라면 어색한 대화도 아이가 있으면 부드러워진다.
게다가 중국 사람들은 아이를 무척 귀여워한다. 한 자녀 정책의 영향일까. 모두 아이에게 매우 관대해서, 어디서 떠들든 실수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나도 버스 안에서 무릎에 앉혀 준 어느 아이에게 오줌을 맞은 적이 있는데(중국 아이들은 엉덩이가 트인 바지를 입고 겨울에도 기저귀를 하지 않는다), 아이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얼빈에 있을 때는 우리 아이가 꽤 세련됐다고 생각했다. 얼굴은 몰라도 옷은 말이다. 그런데 서울 김포공항에 마중 나온 시어머니는 아이를 보자마자 외쳤다. “어머나! 우리 명수가 촌놈이 되어버렸네!” 깜짝 놀랐다. 전날 베이징 호텔에서 가족 셋이 몇 시간이나 때를 밀었는데도 아직 때가 덜 벗겨진 건가…?
지금 중국에서 찍은 아이 사진을 보면, 과연 거기에는 틀림없이 머리를 빡빡 깎고 새까맣게 그을린 중국 시골 아이가 찍혀 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머리 스타일이었다!
●26. 말을 알게 되면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 — 하얼빈에서의 1년
하얼빈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계절이 바뀐다. 3월, 송화강에 두껍게 얼어붙어 있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앙상하던 나무들이 일제히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황사가 몰려온다. 만개한 복숭아꽃에 봄의 도래를 기뻐하는 것도 잠시, 석탄 찌꺼기와 모래, 쓰레기가 뒤섞인 강풍이 약 한 달 동안, 정말 집요하게 불어닥쳐 밖에 나가면 눈에도 코에도 입에도 가차 없이 파고든다.
길을 가는 사람들은 ‘사건(砂巾)’이라 불리는 얇은 스카프를 머리부터 뒤집어쓴다.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몸까지 통째로 싸버린다. 그러다가 어느새 버드나무에서 솜털 같은 씨앗이 둥실둥실 날아오기 시작한다. 점점 양이 많아지면 마치 눈이라도 내리는 듯하고, 귀나 코에 들어갈 것 같기도 하고, 땀이 밴 피부에 달라붙기도 해서 정말 성가시기 짝이 없다.
6월. 갑작스러운 폭우와 천둥. 어느새 황사는 많이 잦아든다. 그리고 장마를 건너뛰듯 단숨에 여름이 시작된다. 하지만 한여름이라고 부를 만한 시기는 보름 남짓. 어느 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어디서 왔는지 놀랄 만큼 많은 붉은 잠자리 떼가 날아다니고, 아침저녁 바람이 차가워졌다고 느낄 틈도 없이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된다. 이 도시에서는 연간 최고 기온과 최저 기온의 차이가 무려 60도나 된다.
옛날에는 더 추웠다고 한다. 난방 시설도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을 것이다. 영하 20도. 내 처지를 저주하며 시장에 장을 보러 나갈 때, 나는 문득 만주 개척단이나 항일 독립지사들의 고생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미 내 안경은 입김으로 얼어붙어 누가 눈물을 알아챌 걱정은 없지만, 눈물이 뺨에서 얼어붙는 것이 싫어서 나는 일부러 크게 소리를 지른다.
“돼지고기 두 근 주세요. 기름기 없는 부위로요!” 한국도 일본도 아닌, 서로에게도 외국인 중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가끔 사소한 일로 남편과 크게 다투기도 하지만(대개는 내가 먼저 시비를 건다), 기분 풀려고 밖에서 술을 마실 수도 없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저녁 7시면 끝나버리고, 혼자 취해서 택시라도 타면 “마음껏 바가지를 씌워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갈 데가 없으니 싸움도 오래 갈 수가 없다. 지금 서로에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눈앞의 상대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착한 곳은 동북농업대학이라는 학교였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부지가 넓고 녹지가 많으며, 시내 중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공기가 맑다.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기에는 최적이다. 교내를 마차가 오가고, 때로는 학교 뒤편 목장에서 젖소가 도망쳐 나오기도 하며, 돼지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 들려오는 날도 있는, 인구 300만 도시 하얼빈에 있으면서도 지극히 목가적인 환경이었다. 참고로 우리 아이가 처음 배운 동물 이름은 ‘말’이었다. 이전 학교와 비교하면 조건은 훨씬 좋았다.
우리 아파트는 약 15평 정도에 방이 두 개, 부엌과 샤워가 가능한 세면실, 그리고 서향 베란다가 있었다. 매일 밤 10시부터 아침 5시까지 물이 나오지 않는 것도 우리에게는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막 이사 왔을 무렵, 냄비나 식기, 대야 같은 필수품을 사러 나갈 때마다 마치 신혼부부 같다고 웃곤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으로 비효율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국 집에는 냄비며 식기며 다 갖춰져 있는데도 스스로 원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누구에게도 불평할 수 없다. 가지고 온 돈도 한정되어 있어 원하는 것을 마음껏 살 수도 없다. 우리는 충분히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이곳 사람들 눈에는 꽤 낭비로 보이는 물건도 많은 듯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양변기 변좌가 깨져 있어서 안에 스펀지가 들어 있는 푹신한 변좌로 교체했더니, 친구 집에 가 보니 아예 변좌를 떼어내고 쓰고 있었다. 나로서는 꽤 불편해 보였지만….
어느 날 청소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왜 이런 곳에서 변기를 닦고 있는 걸까.” 멀리 하얼빈까지 온 것은 하고 싶은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기나 닦고 있어도 되는 걸까 생각하니 마음속에 서서히 조급함이 스며든다. 점점 짜증이 나서 괜히 남편에게 화풀이를 하게 된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디에서 살든 쾌적하게 살기 위해서는 변기를 닦아야 하는 것이고, 하얼빈에서 변기를 닦을 수 있다는 건 오히려 행운이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냉장고 성에를 제거하던 남편이 중얼거린다.
“적어도 일본이나 한국에 있었으면, 성에 제거 같은 건 안 해도 되는데 말이야.” 구소련제 냉장고(원도어에 위쪽에 작은 냉동실이 달린 형태)는 한 달에 한 번 성에를 제거하지 않으면 냉동실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버린다. 한국에 있을 때는 거의 TV를 보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TV가 유일한 오락이 되어 연속극 등을 꽤 즐겨 보게 되었다. 마침 ‘애국주의 교육’의 필요성이 한창 강조되던 시기라, 매주 일요일 낮에는 반드시 애국주의 영화를 틀어주었다.
1960년대 흑백 영화부터 최근 작품까지, 내용은 국민당과 싸우는 공산군, 악덕 지주의 착취에 시달리던 젊은이가 마르크스주의에 눈뜨는 과정, 봉건사회에서 해방된 농민, 마오쩌둥의 어린 시절 등 다양하지만, 주인공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줄거리도 결말도 뻔하지만, 이게 또 꽤 재미있어서 매주 기대하며 보았다.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아온 남편에게는 이런 영화가 무척 신선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역시 중국은 공산화될 수밖에 없었구나.” “국민당은 나쁜 놈들이네.” 이렇게 감정이입을 하며 보다가, 마지막에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중국 공산당 만세!”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함께 따라 외치기까지 한다. “당신 말이야, 그렇게 떠들다가 한국 가면 안기부에 잡혀가서 고문당한다?” 내가 면박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는 중국인에게 우리가 일요일 애국 영화를 즐겨 본다고 말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요즘 중국 사람들은 그런 거 아무도 안 봐.”
5년 사이에 하얼빈은 많이 변했다. 오래된 러시아식 건물과 작은 민가들이 계속 헐리고, 큰 호텔과 쇼핑센터, 고층 아파트로 바뀌고 있다. 물자도 풍부해졌다. 시장에 나오는 채소 종류도 늘었고, 옷이나 생활용품도 훨씬 다양해졌다. 외국 제품도 많이 들어왔다. 일본이나 홍콩 제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슈퍼도 생겨 필요한 것은 대부분 구할 수 있다(가격은 비싸지만). 1989년에는 시내를 아무리 뒤져도 마요네즈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불과 5년 만에 격세지감이다.
대만이나 일본 과일까지 있다. 아오모리산 사과 ‘세카이이치(世界一)’에는 80위안이라는 가격이 붙어 있다. 일본 돈으로 약 1,000엔이다. 이런 걸 도대체 누가 살까 싶지만, 팔리지 않아서 썩혀 버리는 일은 없다. 수요가 있으니 수입된 것이 틀림없다. 그 사이 중국인들의 돈에 대한 집착은 매우 강해졌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돈벌이를 생각한다. 돈이 될 만한 곳에서는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확실히 받아낸다.
공공장소나 공공기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수하물 카트를 사용하려면 이용료를 내야 한다. 공안에서 재입국 수속을 할 때 쓰는 신청서도 한 장에 10위안을 주고 사야 한다. 호텔이나 백화점의 화장실을 이용할 때도 사용료를 내야 한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우편함(편지만 들어가는 것)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을 집까지 배달해 줄 때마다, 배달원에게 1위안씩 줘야 한다.
“이런 감각이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우편 배달원은 우편을 배달하는 것이 자기 일일 텐데, 왜 내가 일일이 배달료를 내야 하는 걸까.” 공항 카트 사용료에도 화가 나서,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을 무시하고 그냥 쓴 적도 있다. 중국어를 모르는 척하면 상대는 금방 포기했다. 결국 배달료나 카트 사용료는 정부의 지시로 반드시 징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들 마음대로 받는 것뿐이다.
이것이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외로 보내는 국제 특급우편(EMS)을 보낼 때도 보험료라며 1위안씩 받는다. 또 관광지에서 종유동에 들어가거나 산 전망대 같은 곳에 올라가려 하면, 입장료 외에 반드시 1위안의 보험료를 징수한다. 그렇다고 그렇게 위험한 곳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도대체 1위안을 내고 만일의 경우 얼마를 보상해 줄 생각인 걸까. 호텔에 묵을 때도 숙박료 외에 1위안의 보험료를 받는다.
국내선 비행기 표를 살 때는 30위안의 보험료를 내라고 했다. 그래도 이건 싫다고 거절하니 강요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이런 돈은 일본 돈으로 환산하면 아주 하찮은 금액이다. 10엔, 20엔 정도다. 그런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오늘도 서툰 중국어로 다른 사람과 고함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하면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만약 우리가 여행자라면 “쳇, 고작 30엔쯤, 너나 가져라!”라고 (일본어로) 내뱉고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면서 매일같이 이런 일을 겪다 보면 참을 수가 없게 된다. 외출할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방심하면 소형 합승버스 요금까지 더 비싸진다. 과일 무게나 가격을 속이는 건 일상다반사다. “어디서 왔어요?” 하고 싱글싱글 웃으며 묻는 상대에게 마음을 놓고 일본이다, 한국이다 하고 대답했다가는, 나중에 계산서를 보고 불쾌해지는 일이 틀림없다.
자주 가는 외국 제품을 취급하는 슈퍼에서 점원이 웃으며 인사를 해도 절대 방심할 수 없다. 아무렇지 않게 거스름돈을 속이기 때문이다. 택시 요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내에 나가면 몹시 피곤하다. 암산을 몹시 못하는 나는, 나중에야 거스름돈을 속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아들만큼은 꼭 주산을 배우게 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곤 했다.
아는 사람 말로는, 중국에서는 예전부터 외지인에게 값을 높게 부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속는 것이 외국인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래서 다른 도시로 출장 갈 때는 중국인조차 긴장한다고 한다. 나도 목격한 적이 있다. 길을 모르는 중국인이 소형 합승버스에서 차장에게 길을 묻자, 틀림없이 조금 더 비싼 요금을 요구받았다.
하얼빈역 앞 식당에서 우동을 먹고 있었는데, 막 시골에서 올라온 듯한 남자가 나와 같은 우동을 주문했다가 두 배 가격을 요구받고 있었다. “여기가, 여기가 공산주의 중국이 아닌가! 이 나라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고, 국민은 모두 평등한 것 아닌가!” 요즘 애국주의 영화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식당을 나왔다. 먹다 만 우동을 그대로 남긴 채로….
이럴 때 나는, 한국인의 오지랖과 애국심이 몹시 그리워진다. “외국인한테 바가지를 씌우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모르는 한국 청년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자리 잡은 지금의 중국에서는, 같은 나라 사람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해, 개인용 작은 저울을 들고 시장에 가서 고기나 채소의 무게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 나는 빈정거리며 중국인 친구에게 말했다.
“나 중국 와서 인생관이 바뀌었어. 사람을 믿으면 안 되는 거구나.”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너, 그렇게 자꾸 속았다고 말하고 다니면 바보 취급당해. 여기서는 외국인을 속일 수 없는 사람이 오히려 무능하다고 하니까.” 한국에서도 경험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 나라 언어가 귀에 쏙쏙 들어와 이해되기 시작하는 순간이 온다. 시내로 장을 보러 가는 버스 안에서, 바로 그 순간이 찾아왔다!
일부러 애써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물론 간단한 대화였기 때문이지만). 말하는 건 아직 서툴지만, 듣는 건 꽤 이해하게 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말하는 데도 자신이 붙게 된다. 아쉽게도 그 단계에 이르기 전에 귀국해버렸지만. 어쨌든 나는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에 맞장구를 치는 것이 즐거워졌다.
말을 이해하게 되면 다양한 인간관계도 보이기 시작한다. 어디 집 아내가 불륜을 하고 있다든가, 프로판가스 배달하는 청년이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다 돌아온 아줌마를 좋아하지만 아버지가 반대한다든가, 안경점 부부가 둘째를 임신했는데 같은 가게 직원이 밀고해서 낙태했다든가—사람 사는 곳에는 온갖 소문이 있다.
시내에 나가면 여전히 거스름돈을 속지만, 학교 주변에서는 이제 괜찮다. 오히려 과자 가게 아주머니가 “명수한테 줘”라며 공짜로 과자를 주기도 하고, 잔돈이 없어도 “다음에 줘도 돼”라며 만두 가게 아가씨도 친절하다. 낯선 사람에게는 차갑지만, 한 번 친해지면 끝까지 친절한 것도 중국 사람들이다.
넓은 중국에서도 하얼빈 사람들은 멋내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로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예전에는 한족이 파마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94년에는 완전히 유행이 되었다. 그것도 보통이 아니다. 곱슬곱슬한 머리를 세워 머리 크기가 두 배쯤 되는 사람도 있다. 머리를 노랗게나 빨갛게 염색한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옷차림도 화려하다. 허벅지까지 트인 반짝이 롱드레스를 입고 있기도 한다. 시장에서, 그것도 아침부터.
“야, 잠깐만…” 나는 혼잣말을 한다. 겨울의 두꺼운 옷에서 해방된 여름은 노출이 대단하다. 젊은 사람만이 아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아줌마들도 마찬가지다. 미니스커트는 기본이다. 천이 얇아 속옷 무늬가 비치는 치마, 팬티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타이트 스커트(물론 과감한 슬릿), 뱃살까지 비치는 레이스 원피스, 가슴이 지나치게 파인 티셔츠 등 대담하기 짝이 없다. 시내에 나갈 때마다 “오, 완전 노란색!” “딸기 무늬!” 하며 자꾸 사람들 엉덩이에 눈이 간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속옷이나 피부를 남에게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걸까. 어떤 엄마는 아이를 안아 올릴 때마다 속옷이 훤히 보인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버스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기도 하고, 그 차림으로 자전거도 탄다. 백화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스크림도 먹는다.
솔직히 눈 둘 곳이 없다. 남편은 “이대로 두면 성범죄가 늘어나지 않을까, 아니면 중국 남자들이 둔감한 걸까”라며 고민한다. 어느 날 치파오(양쪽 허벅지까지 트인 원피스)를 입은 아줌마가 버스에서 내 앞자리에 앉으려 했다. 휙. 갑자기 내 눈앞에 그 아줌마의 엉덩이가 나타났다. “흰 바탕에 꽃무늬!” 움찔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확인하고 마는 나. 아줌마는 원피스가 구겨지는 게 싫어서 뒤를 걷어 올리고 앉았던 것이다.
길가에서 갑자기 젊은 여성이 롱스커트를 허벅지까지 들어 올린 장면에도 깜짝 놀랐다. 사실은 안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그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려던 것이었다. 시장을 보면 가터 스타킹에 돈을 끼워 넣는 사람도 많아서, 모두 치마를 들어 올려 돈을 꺼낸다. 참고로 스타킹을 신지 않는 우리 집 보모는 돈을 손수건에 싸서 슬립 어깨끈에 묶어 두었다.
그래도 다행히 여름은 짧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거리에서 치마 입은 여성을 거의 볼 수 없게 된다. 이제 반년 동안 긴 겨울이 이어진다. 기온이 0도가 되면 동북 사람들은 내복 위에 모직 내복을 입는다. 영하 20도가 되면 그 위에 솜이 든 바지를 더 입고, 맨 위에 외출용 바지를 입는다. 물론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긴 코트와 장갑, 모자, 스카프는 필수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털실보다 가죽이나 모피가 훨씬 따뜻하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러시아 영화에 나오는 사냥꾼이 쓰는 듯한 모피 모자를 우리도 샀다. 여우털 같은 멋진 것은 1000위안이나 한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쓸 일도 없을 테니, 싼 것으로 좋다며 27위안짜리 회색 토끼털 모자를 남편과 커플로 사서 겨울 내내 애용했다.
머리만 따뜻하면 영하 20도쯤은 견딜 만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모자를 벗으면… 냄새가!
“추위가 무섭다”고 하얼빈 사람들은 말한다. 추위 자체보다 나이가 들면서 관절이나 허리가 아플까 봐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 전부터 단단히 껴입는다. 그런데 한겨울에도 하얼빈에 온 러시아 여성들은 치마에 스타킹 차림이다. 그 모습을 보고 하얼빈 사람들은 어이없어한다.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끌린다. 어느 날 혼자 기차를 타고 하얼빈에서 장춘으로 향했다. 가도 가도 산 하나 없는 끝없는 대지. “아… 저 너머로 새빨간 태양이 지겠지…” 4시간의 기차 여행이 끝나자 장춘역에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대륙에 시집온 신부 기분이었다(좀 나이가 많긴 하지만…).
“만약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개척단에 지원해서 만주에 왔을 거야.” 남편이 대답했다. “나는 가난한 농민이었겠지. 일본군에 끌려가면 도망칠 용기도 없이 그냥 징집됐을 거야.” “야! 당신이 조선인이면 항일 독립운동 해서 일본이랑 싸워야지!” “그건 무서워서 못 해…” 남편은 덩치는 크지만, 의외로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울은 오늘도 맑음 (1998, 도다 이쿠코)
●27. 후기
「서울 사랑해」라는 제목으로 이 책의 원본이 나온 것이 1994년 가을이었다. 하얼빈에서의 생활도 1년이 되어 완전히 궤도에 오른 시기였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허둥지둥 마무리한 원고가 드디어 책으로 나와 소포로 도착했을 때, 왠지 아주 옛날 이야기가 쓰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결혼 초기에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나 육아 습관의 차이 등으로 쌓이기만 하던 스트레스를 터뜨리듯 써 모은 원고였다. 이런 책을 썼다는 게 들키면 시댁 식구들이 분명 싫은 표정을 지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어차피 일본에서만 나오는 거니까”라며 모른 척해버렸다.
그 사이, 부모와 아이 셋이 함께한 중국 생활을 통해 나는 한국과 일본에 있는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내 책을 다시 읽으며 “그때는 그저 억울하다고만 생각했지만, 시어머니도 결코 악의로 그런 말을 했던 건 아니었구나. 앞으로는 시부모님과도 제대로 잘 지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국 출판사에서 한국어판 출간 제안이 들어왔다. “이건 곤란한데…” 나는 당황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기울어버린 건, 솔직히 말해 “돈”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사실상 저축을 까먹으며 사는 형편이었기에, 조금이라도 인세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고마웠다. “단, 그대로 번역되면 곤란한 부분은 삭제해 주세요.”
그 조건으로 나는 한국어판 출판 계약에 응했지만, 결국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수정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한 이불 속의 두 나라」라는 묘하게 자극적인 제목으로 출판되고 말았다.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나는 중국에 있으니까, 그동안 다들 잊어버리겠지.”
그런데 발매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어판이 아직 내 손에 도착하기도 전에 출판사에서 반가운 전화가 왔다. 언론에서 반응이 상당히 좋아 홍보를 위해 서울로 돌아와 달라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했지만, 오랜만에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서 일주일 일정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그날 밤, 동네 서점에서 처음으로 내 책의 한국어판을 보았다.
표지에는 우리 세 가족 얼굴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책 날개에 작게 쓰겠다고 해서 건네준 사진이었는데…. “설마 이런 일이…” 서점에서 멍하니 서 있는데 주변에서 “어머, 저 사람이야”라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어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듯 돌아왔다.
다음 날부터 내 옆에는 서류 가방을 든 출판사 영업사원이 붙어 다녔다. “오늘 일정은 오전 ○시 ○○신문사, 오후 ○시 ○○방송국 라디오 생방송, 그 다음은 잡지 인터뷰입니다.”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잡지…. 아무 사전 준비도 없이 생방송 라디오 스튜디오에 던져져 인기 DJ와 30분이나 수다를 떤 적도 있었다. 우리 집에는 TV 촬영이라며 인기 코미디언까지 찾아왔다.
길거리에서 교복 입은 여고생이 “꺄악, 사인해 주세요!”라며 달려들었을 때는,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어 한 걸음 물러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지하철역 벤치에 남편과 앉아 한숨을 쉬고 있는데, 눈앞에 빵집 앞치마를 두른 아가씨가 서서 상기된 얼굴로 “사인해 주세요”라며 내 책을 내밀었다.
정말 무서운 것은 한국 언론의 힘이다. 그 후 한동안 베이징이나 연변에 갈 때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달려왔다. 하지만 광란의 일주일이 지나 하얼빈으로 돌아오니 더 이상 한국인 관광객과 마주칠 일도 없고, 평온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은 잊는다.
반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가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있어 시장에서 “아, 저번에 TV에 나온 사람이다”라고 손가락질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나 말고 남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내 얼굴은 평범하다고요!” 게다가 사람은 종종 착각도 한다. 신호등 근처 붕어빵 가게 청년이 우리가 지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길래 이유를 몰랐는데, 어느 날 맞은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TV에 나오셨다면서요. 붕어빵집에서 들었어요.” 아, 그 청년이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제 은퇴하셨죠? 요즘 안 보이던데요.” “네?” “아, 남편분이 선수 생활에서 은퇴하셨다고…” 내 옆에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남편은 굳은 표정이었다. 씨름 선수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그에 비하면 “저 집 부부는 국제결혼으로 TV에 나왔대”라고 기억하는 사람은 대단한 것이다. 나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몇 번이나 “남편분, 한국말 정말 잘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걱정했던 시댁의 반응이지만, 언론 열풍 때 함께 TV에도 출연하고(“우리 집안 최초의 쾌거!”라고 가족은 말했다), 시부모님도 잡지 인터뷰에 여러 번 나가게 되면서 오히려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너는 솔직해서 좋다.” 시아버지의 이 한마디에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없었다. 내용이 어떻든 간에, 어쨌든 책이 잘 팔렸고(무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것이 기정사실이 되면서 나는 누구에게도 꾸중을 듣지 않았다. 2년간의 중국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95년 9월이었다. 그 혹독한 겨울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며, 가을바람에 떠밀리듯 짐을 정리하고, 매일 손꼽아 기다리며 귀국했다.
마지막 무렵에는 해설을 써주신 세키카와 나쓰오 씨와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았다. 같은 아파트 5층에는 우리 부부가, 3층에는 세키카와 씨가 살았고, 식사 시간이 되면 계단을 올라 “똑똑” 하고 등장하셨다. 대선배인 그분께 밥그릇까지 설거지하게 하고, 때로는 술기운에 “맥주가 부족해요”라고 불평까지 했던 나 자신을 지금 깊이 반성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일본어를 거의 못하는 내 남편과 세키카와 씨가 “남북통일은 과연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격론을 벌이는 모습을 본 일이었다. ‘서울의 연습문제’에서는 거의 한글 초보처럼 보이게 해놓고는…. 그뿐만 아니라 하얼빈 외문서점에서 산 영어 페이퍼백을 읽고 계시기도 했고, 중국을 떠나기 전 대학에서 마련해준 오찬 자리에서는 유창한 중국어로 감사 인사를 하시기도 했다.
나중에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소양까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대체 이분은 언제 그렇게 많은 것을 공부할 시간과 체력과 의욕이 있는 걸까 고민했다. 혹시 밤마다 ‘도봉’(카드놀이) 대결을 벌인 뒤 늦게까지 공부하시는 걸까. 아니면 “요즘 일찍 일어나게 됐다”고 하셨으니 새벽 공부인가.
아무튼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감탄하면서도, 나는 한정된 중국 생활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그저 열심히 잠이나 잤다. 세키카와 씨와의 즐거운 추억은 셀 수 없지만, 여기서 하나 고백할 일이 있다. 우리 때문에 베이징발 하얼빈행 쓰촨항공 비행기를 크게 지연시키고, 막대한 경제적 손실까지 끼치고 말았던 것이다.
“안심하고 제가 있는 학교로 오세요”라고 큰소리쳤던 이상, 나는 세키카와 씨의 중국 체류가 안전하고 즐거운 것이 되도록 만전을 기하려고 했다. 그 첫걸음은 베이징 공항에서 만나 무사히 하얼빈까지 도착하는 것이었다. 약속보다 하루 먼저, 나와 남편은 서울에서 베이징에 도착했다. 하얼빈행 항공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베이징~하얼빈 구간은 하루에 열 편 이상이나 비행기가 뜨니, 원하는 시간대 표쯤은 언제든 살 수 있으리라 낙관하고 있던 우리는 국내선 카운터에서 “일주일 뒤까지 만석입니다”라는 냉정한 통보를 받았다. “말도 안 돼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부탁입니다. 저희는 하루라도 빨리 하얼빈에 가야 합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화를 내고 매달려도, 상대는 무표정하게 “없습니다”만 반복할 뿐이었다. 망연자실한 채 공항 안을 헤매다가 “한국 손님을 환영합니다”라는 조선어 간판이 붙은 카운터가 눈에 띄었다. 조선족 직원에게 물어보니, 내일 표는 구할 수 있다며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신을 믿어보죠.”
그의 안내로 그날 밤은 공항 근처 호텔에서 묵고, 다음 날 아침 짐을 들고 다시 공항으로 갔다.
표 수배는 조선족 청년에게 맡기고, 세키카와 씨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러나 저녁까지 기다렸지만 결국 그날 표는 구하지 못했다며 청년이 돌아왔다. 다만 항공사 직원에게 뇌물을 주면 다음 날 표는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다.
세키카와 씨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날 밤도 베이징에서 묵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여행사 마이크로버스에 타니 낯선 한국인이 한 명 있었다. 무역 일을 하러 하얼빈에 간다고 했다. 명함에는 사장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지만 전혀 거드름 피우지 않는 사람이었고, 우리와 동행하게 되었다. 공항에서 한참 기다리자 여행사 청년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드디어 표가 마련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 사람을 따라가세요. 곧 출발합니다!” 쓰촨항공 제복을 입은 남성이 우리를 재촉했다. 안내를 받으며 수속 줄에 서 있던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고, 뛰어가며 표를 건네받아 비행기에 올라탔다. 해냈다! 이제 안심이다. 우리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출발할 기미가 없다.
“중국 비행기는 원래 이렇게 늦는다니까.” 툴툴거리면서도, 드디어 하얼빈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라고 느낀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수다에 정신이 팔려 놓쳤지만, 네 명의 승객이 중복 예약 때문에 탑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내가 계속 나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탑승한 사람이 지금 당장 승무원에게 말하라고 소리쳤다. 그때까지도 그것이 우리 이야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윽고 직원이 승객 한 명 한 명의 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앞에서 딱 멈췄다. “이 표는 어디서 샀습니까?” 순간 나는 중국어를 모르는 척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내려질 수는 없었다.
우리는 뇌물뿐 아니라 중국인보다 두 배 비싼 외국인 요금까지 지불했다. 이 비행기는 우리를 태우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무슨 말을 듣든 좌석 팔걸이를 꽉 잡고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만 반복했다. “부디 중국어도 못하는 외국인이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고, 빨리 이 비행기를 띄워 주세요…” 속으로 그렇게 빌면서.
그러나 비행기는 우리를 태운 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공항 한가운데에서 쓸쓸히 계단을 내려야 했다. “부친 짐을 여기서 돌려주지 않으면 안 내립니다!” 세키카와 씨도 버텼지만, 그 요구는 너무도 쉽게 받아들여졌고, 우리가 멍하니 서 있는 그 자리로 화물칸에서 네 사람의 트렁크가 질질 끌려 내려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비행기는 두 시간 이상 늦게 하얼빈에 도착했고, 다시 베이징을 거쳐 청두로 돌아갔다고 한다. 하얼빈 공항에서 기다리던 승객들에게는 지연 때문에 식사가 제공되었다고 하니, 베이징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버티고 있는 동안, 꽤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쳤던 셈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전혀 없었다. 우리에게서 뇌물을 받고 표를 발행한 직원과 이후의 일을 협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몇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겨우 다음 날 비행기에 반드시 태워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쓰촨항공 숙소에 묵게 되었을 때는 우리도 담당 직원도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착하자마자 세키카와 씨에게 폐를 끼친 것이 미안해 직원에게 계속 화를 냈다.
“숙소까지 택시비는 어떻게 할 건데요?” “오늘 저녁이랑 내일 아침 식사비까지 청구할 거예요!”
마치 자라처럼 물고 늘어지는 나를 세키카와 씨가 말렸다. “됐어요, 도다 씨. 오늘 밥값은 내가 낼게요!” 지금은 중국과 한국이 훨씬 가까워졌다. 서울~하얼빈 사이에도 직항편이 있다. 그 외에도 다롄, 선양, 창춘 등 동북 지방은 물론 중국 전역으로 서울에서 직항편이 운항된다.
동북 지방까지는 비행 시간도 겨우 두 시간. 도쿄보다 가깝다.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 감동한 것은, 한밤중에도 뜨거운 물이 풍부하게 수도에서 쏟아져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그 물의 맑음에 넋을 잃고, 전기의 밝음에 “아, 고맙다” 하고 손을 모으며, 전자동 세탁기의 편리함에 눈물까지 흘렸지만, 사람이라는 게 참으로 간사한 법이다. 그 고마움과 소중함도 어느새 당연하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당분간은 중국 생활은 질색”이라며 귀국했는데, 요즘은 문득 “다시 중국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귀국 직후, 아파트 계단을 “이, 얼, 산, 쓰”라고 세며 오르던 우리 아이는 이제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 하지만 틈만 나면 너는 중국에서 자란 아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지금 아이는 일본어와 한국어를 같은 수준으로 이해한다. 엄마에게는 일본어로, 아빠에게는 한국어로 말한다. 상대가 쓰는 언어에 따라 아무런 위화감 없이 두 언어를 바꿔 쓴다. 잠꼬대도 두 언어로 한다. 사람들은 그를 “바이링구얼 꼬마”라고 부른다.
「서울 사랑해」는 참 신기한 책이다. 내가 써놓고 방치해 둔 것을 많은 분들이 움직여 주었다. 일본에서 출판되었을 때는 고(故) 사토 구니오 선생을 비롯한 몇몇 분들이 TV 드라마화를 위해 애써 주셨고,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자 이번에는 한국 영화사에서 계약 제안이 들어왔다. 둘 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매우 감사한 이야기였다.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 후보에도 올랐다.
실력 부족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후보에 오른 것은 큰 영광이었고 격려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고단샤 문고의 호리야마 가즈코 씨로부터 문고판 제안을 받아, 이미 ‘과거형’이 되어버린 이 책을 ‘현재진행형’으로 바꾸기 위해 대폭 가필할 수 있었다. 뒤의 네 개 장이 그것이다.
그 때문에 문고판으로서는 꽤 두꺼운 책이 되었지만, 나는 매우 만족하고 있다. 표지에 사용된 ‘보자기’는 한국 전통 자수 작가이자 보자기 작가인 김현희 씨의 작품이다. 하루 스무 시간이나 바늘을 잡고 몰입해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보자기들에 나는 한눈에 매료되었다. 그녀의 손은 신의 손이라고 나는 믿는다.
본문에 등장하는 일본 엔화, 한국 원화, 중국 위안화의 환율은 집필 당시 기준으로 일부러 통일하지 않았음을 양해 바란다. 서울은 도쿄에 비해 훨씬 맑은 날이 많다. 습도가 낮아 바람이 없어도 빨래가 마른다. 서울 사람들은 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나갈 때 우산을 가져갈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때 비가 오지 않으면 아무도 우산을 들지 않는다.
서울에 오래 살면서 나는 가끔 다음 날 날씨가 궁금해 어쩔 줄 모를 때가 있었다. 열심히 뉴스를 보던 남편에게 물어본다. “내일 날씨는 어때?” 대개 돌아오는 대답은 “못 봤어”뿐이다. 뉴스만 보고나면 TV를 꺼버리는 것이 그의 습관이다. 신혼 때는 그런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곤 했었다… 지금은 나도 내일 날씨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면, 봐라, 오늘도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으니까. 1998년 6월. 도다 이쿠코
서울은 오늘도 맑음 (1998, 도다 이쿠코)
●28. 해설 ― 그들과 함께 보낸 여름 ― 세키카와 나쓰오
도다 이쿠코라는 이름을 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그녀의 첫 작품 『평상복의 서울 안내』(1988년)였다. 그 책에는 1980년대 중반, 이미 선진국형 경제를 전개해 나가고 있던 서울의 도시 문화가 절묘하게 포착되어 있었다. 나는 그 착안의 훌륭함은 물론, 그것을 표현해낸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다 담아낸 일본어의 품격에 깊이 감탄했다.
모국어란 어려운 것이다. 일상적인 용무를 처리할 정도의 일본어라면 누구나 쓰겠지만, 말이든 글이든 자신의 생각을 일본어로 남에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어제 TV 뉴스 앵커에게서 들은 것을 오늘 그대로 말하는 부류는, 생각을 전달한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정밀도가 낮은 녹음기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면서도 읽히는 글을 쓰는 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엇의 문제냐고 묻는다면 조금 망설여지지만, 그 본래 이름 붙이기 어려운 요소를 나는 ‘성장 배경’이나 ‘재능’, 혹은 ‘교양’이라고 임시로 부르고 있다.
나는 그때 도다 이쿠코라는 이름을 ‘교양인’이라는 말과 함께 기억했고, 언젠가 이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뜻밖의 장소에서 대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중국 지린성 동쪽 끝에 있는 연길시, 연변대학 숙소에서였다. 1988년 나는 연변 지방에서 한여름을 보냈는데, 이듬해 1989년 여름에도 다시 그곳을 찾았다.
다만 그때는 연변이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였고, 북한 국경까지 갔다가 돌아와 목단강, 하얼빈 등 더 북쪽 지역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창춘까지는 비행기로, 그 후에는 야간열차로 연길에 갔다. 녹초가 되어 연변대학에 도착해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도다 씨라는 사람이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 그 도다 씨인가 싶어 아직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바깥으로 나가 보니, 과연 그 도다 씨였다. 그녀는 막 개설된 공항으로 택시를 타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또 만납시다, 나는 반쯤 졸린 상태로 그렇게 말했다. 물론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훗날 그렇게까지 친해지고 신세를 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다 씨는 1970년대 후반 일본에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무엇이든 ‘조선’을 공부한다는 것에 어딘가 이데올로기적인 분위기가 따라붙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이 이데올로기적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적어도 이데올로기와 조선은 관계가 없었다.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도다 씨는 이후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 잡지에 글을 썼지만, 점차 한국 체류가 많아지면서 활동 기반도 그쪽으로 옮겨갔다.
한국의 잡지 저널리즘은 1980년대 들어 급속히 발전했다. 그것은 한국이 선진국화되고 동시에 대중화되어 가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러나 활기가 넘치는 한편, 상당히 허술한 면도 있었던 초기 대중 저널리즘이었기에, 기본적인 규칙을 지키느냐 마느냐를 둘러싸고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원래 프리랜서라는 입장이 성립하기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같은 문제를 겪고 고민하면서도,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니 결국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함께 잊어버릴 수 있었던 동료 중 한 사람이 사진작가 유은규 씨였다. 두 사람 모두 사람이 좋은 편이다. 정확히 말하면, 성장 배경이 좋고 성격이 곧은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마음이 잘 맞았던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고, 결국 결혼했다.
도다 씨보다 조금 어린 유 씨는, 일본의 코미디언 ‘그레이트 기타유’를 좀 더 지적으로 만든 듯한 인상의 인물로, 본문에도 나오듯 부부가 함께 걸으면 그가 일본인으로 보인다. 도다 씨가 한국인으로 보인다는 것이라기보다, 그녀는 동아시아 어디를 가도 현지인으로 보이는 범아시아적인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다.
그녀가 하얼빈의 흑룡강대학에 유학한 것은 결혼 전이었다. 나는 늘 한국이나 일본을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려면 중국을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깊은 구덩이는 팔 수 있어도 넓은 구덩이는 팔 수 없다.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넓은 시야를 갖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도다 씨가 하얼빈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역시”라고 감탄했었다. 유학 중에 우연히 ‘6·4 사건’이 일어나 학교가 휴교되자, 그녀는 연변대학의 조선족 교수들에게 배우기 위해 그곳에 왔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1995년 여름, 나는 하얼빈으로 갔다. 일본·중국·조선이라는 삼각적 시야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하면 멋지게 들리겠지만, 사실은 오랜 글쓰기 생활에 지쳐 환경을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창춘에 갈 생각이었다. 1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의지하고 있던 길림대 교수의 말이 자꾸 바뀌어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때 하얼빈의 도다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도쿄, 서울, 제주도, 그리고 하얼빈에서 만난 사이였다. 도다 씨는 그 교수와도 내 소개로 알고 있었지만, 신뢰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유 씨도 마찬가지였다. 난감해진 나는 고민했다. 그때 도다 씨가 말했다.
“세키카와 씨, 차라리 하얼빈으로 오시지 않겠어요?” 1995년 7월, 서울에 잠시 돌아와 있던 도다·유 부부와 나는 베이징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날 안에 하얼빈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암표, 오버부킹 등 중국에서 흔한 일이 역시 벌어져 우리는 사흘이나 베이징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묵었던 단체 관광객용 호텔은 값도 싸지 않으면서 한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당시 한국은 버블 경제의 절정기로 해외여행 붐이 과열되어 있었고, 모두 연변과 백두산 관광을 가는 사람들이었다. 도다 씨와 유 씨는 금세 그들에게 알아보였다. “당신 알아요!” “TV에 나왔죠?” “이 남자가 일본인이죠?” “사인 좀 해주세요!”
마침 이 책이 한국에서 『한 이불 속의 두 나라』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언론에 크게 소개되던 시기였다. 두 사람은 이미 유명인이었다. 나는 그 소동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얼빈 시내도 당시 혼란스러웠다. 소매치기, 난폭한 택시기사, 음식점 소동, 교통사고 등 위험한 일이 많아 신경이 피곤해졌다.
그러나 교외의 대학 캠퍼스는 조용했다. 나는 오전에는 중국어 선생과 씨름하고, 오후에는 산책과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도다 부부의 집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시며 카드놀이를 했다. 내가 규칙을 가르쳤지만 유 씨가 가장 강했다. 가끔 시내에서 사치스러운 식사를 했는데, 그 비용은 모두 내가 부담했다.
하얼빈의 가을은 짧다. 8월 중순이 지나면 금세 가을이 오고, 9월이면 이미 숨결이 하얗다. 열흘이면 나무 잎이 모두 떨어진다. 그 후에는 긴 겨울이다. 내가 떠나기 전, 우리는 함께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허름한 벽돌집 사진관, 배경은 어설픈 파리 풍경. 우리는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 후 나는 남쪽으로 이동했고, 도다 부부도 결국 하얼빈을 떠났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도다 이쿠코는 여전히 서울에서 작가로 살고 있고, 유 씨는 대학원에 다니며 사진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하얼빈은 조금 안정되었고, 한국의 버블도 꺼졌다. 하지만 나는 변함없이 도쿄에서 살아가며, 때때로 그 여름을 떠올린다. 그 기억은 점점 멀어지면서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는, 그런 이상한 영상과 함께 남아 있다.
● 저자 토다 이쿠코 아이치현 도요하시시 출신. 가쿠슈인 여자 단기 대학 졸업 후 회사 근무를 거쳐 1983년부터 서울의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공부했다. 그 후, 한국 사회, 문화 소개자로 활약 중. 91년에 한국인 사진작가 류은규와 결혼. 93-95년, 가족과 함께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 거주하며, 구 만주에서의 조선인 항일 독립 운동가에 대해 연구했다. 저서로는 『평상복의 서울 안내』(쇼분샤), 『젊은이』(하야카와 쇼보), 『사랑해 서울』(아키쇼보), 만화 번역서로는 『활』(이현세 작, 쇼분샤), 『집지』(박흥용 작, 아키쇼보), 『대혈하』(이재학 작, 고단샤) 등이 있다. 현재, '주간 모닝'에 연재 중인 황미나 작 '이 씨네 이야기'의 번역 및 코디네이트를 맡고, '평상복의 한국어'를 집필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