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원의 시카고에서 부는 바람
"나는 더 이상
독일산 셰퍼드가 필요하지 않다"
파울린 퀸 수녀이야기
마가렛 성녀를 모델로
거리에서 산다는 게 카스텔로의 성녀 마가렛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3세기의 이 성스러운 여인은 맹인에다가 불구로 태어났다. 이탈리아 출신의 부유한 부모는 장애아를 낳은 게 수치스러워 치료 노력을 하다가 아이를 버리고 말았다. 시타 드 카스텔로의 시민들이 마가렛의 친구가 되었고, 훗날 그녀는 도미니크 제3수도회의 일원이 되었다.
마가렛은 남은 인생을 그녀의 불운을 딛고 남을 돕는 일에 바쳤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거나 도전에 부닥칠 때 성인들은 우리의 역할 모델이 되어 준다. 위스컨신 주 그린 베이에 사는 파울린 퀸은 마가렛의 영감을 따른 젊은 여성이었다. 파울린 자매는 사회의 변두리에서 놀라운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홈리스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었고, 장애인들에게는 팔과 다리를, 죄수들에게는 삶의 의미를 찾아 주었다.
그녀 자신이 사회에서 잊혀지고 밀려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았기에, 그녀의 활동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학대당한 어린시절
캘리포니아의 남부에서 태어난 캐시 퀸의 인생은 늘 고달팠다. 부모는 아주 어렸을 적에 이혼했다. 엄마는 재혼한 뒤로 알코올 중독에 빠져서 그 가정은 흔들리고 파괴되었다. 수줍음을 잘 타는 여자아이는 가족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이웃들이나 힘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학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통 말이 없어서 아무도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그녀의 삶은 가출과 보호시설에 감금되는 일의 연속이었다. “나는 36번이나 14개의 시설에서 살아야 했다. 1950년대의 시설에서 가장 심한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퀸은 회상한다. 그녀는 침대나 마당에 있는 기둥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 그녀를 학대하고 상처를 입혔다. 결국 그녀는 도망쳤다.
이제 길에서 살고 빈 집에서 자면서 전국을 떠돌다가 부랑자 단속법에 걸려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공포로 마비되어 말을 하지 못했다. 거리에서 떠도는 그녀를 발견한 경찰관에 의해 강간을 당했을 때에도 그녀는 방어를 할 수 없었다. 이후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크게 아파서 가톨릭 병원으로 보내졌는데, 그녀의 병명은 임신이었다.
희망은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낙담한 그녀는 좌절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캐시 삶의 전환기였다. 몰몬교의 배경을 가진 소녀가 처음으로 가톨릭 수녀를 만난 것이다. 조셉 수녀와의 우정과 사랑은 곧 캐시를 가톨릭교회로 가게 만들었다. 물론 안정적이고 성숙한 신앙을 얻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다.
캐시는 딸아이를 돌보려고 애를 썼으나, 상처와 학대의 시간이 너무 길어 스스로 극복할 힘이 없었다. “1963년 아기를 낳은 다음날 나와 아기가 함께 영세를 받자마자 아기는 내 곁을 떠났다. 내 유일한 피붙이면서 소중한 아기였기에 매우 슬펐다. 그러나 나는 아기가 진짜 가족을 만나기를 바랐다. 사랑을 주기에 나는 상처가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아무도 없었고 한 낱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주에서 저 주로 떠도는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걷거나 기차에 무임승차를 하거나 히치하이킹으로 자동차를 얻어 타면서 살 곳을 찾아 헤매었다. 남캘리포니아로 되돌아온 그녀는 사회복지사를 만났으며 친구가 되었다.
충성스러운 조니
또 하나 독일산 셰퍼드 조니를 만났다. “조니는 나를 지켜 주었으며 내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충성스러운 조니는 누구도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해주었다. 내게 홀로 일어설 힘을 주었다.” 힘은 상처 치유에 도움을 준다. 해를 입지 않고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위험이 늘어나도 이웃에게 마음을 열 수 있다.
조니는 캐시 퀸이 대인공포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전에는 경험해 본 적 없는 내적인 힘을 가지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치프와 덴마라는 독일산 셰퍼드를 두 마리 더 식구로 받아들였다.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자동차문을 잠그곤 했다.”
캐시는 잠시 워싱턴 디시에 머물면서 사진을 공부했다. 지금 그녀는 숙련된 사진작가이며 사진집 <꽃의 정원>을 출간했다. 퀸은 학대받은 상처로 인해 대화하거나 자신을 표현하는 일을 어려워했다. “말을 할 수 없어서 느낌을 표현키 위해 사진을 찍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개 훈련을 공부했으며, 수의사인 레오 버스타드를 만났다. 그녀는 죄수들로 하여금 개를 훈련시키게 하고, 그 개가 장애인들을 돌보게 한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버스타드 박사의 도움을 얻어 지그 하버에 있는 주립여성교도소에서 이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부르심, 수녀가 되다
캐시 퀸의 삶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학대와 정신적 상처와 거리에서의 고독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잔디를 키우면서 이웃이라는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내게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정상적인 환경에서 산다는 것이 무언지 알지 못했다. 아무도 내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후 영적인 이끌림을 받았던 것 같다. 하느님의 종이 되겠다는 그녀의 소명은 종교적인 돌봄을 받아 그녀를 로마로 가게 하였다. 이 영원의 도시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아마 수세기 동안 성자들이 거리를 성스럽게 만들었고, 대기 속에서 속삭이는 기도 소리가 들려오며, 궁극에는 교회의 중심에 성령이 계시는 덕분일 것이다.
베타니의 도미니크 수도회 자매들과 마이클 스톡 신부의 영향을 받은 캐시는 드디어 그녀의 쉼터를 찾았다. 프란치스코 수녀회와 도미니크 수녀회 자매들과 생활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운 그녀는 Third Order Dominican이 되겠다는 서원을 공표하고 사도 바오로의 여성형인 시스터 파울린을 세례명으로 택했다.
이웃을 돌보면 돌볼수록 고통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졌다
로마에서 만난 멕시코 치아파스의 협동주교인 라울 베라 로페즈 신부는 그녀의 친구가 되었으며, 훗날 그녀는 라울 주교의 책임하에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다. 그의 가르침과 후원으로 그녀의 소명은 보다 확실해지고 깊이를 더해갔다. “이웃을 더 많이 돌보면 돌볼수록, 내 고통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졌다. 12년간 나는 내전 중인 아프리카에서 도망쳐서 로마 거리를 배회하는 아프리카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에게 새 인생과 행복을 찾아주었다. 150명 이상에게 캐나다와 미국 영주권을 얻어 주었다.”
파울린 수녀는 변두리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을 어디서나 발견했다. 그녀도 두 번이나 전쟁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슬픔을 겪었다. 페르시아 걸프전 중에는 이스라엘의 정신지체아들을 돌보았고, 1993년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홈리스들이나 부상당한 무슬림,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들과 함께 있었다. “싸움의 현장에 있었다. 내 고유한 아픔들은 위험 지역에서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줄어들었다.”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수입 없이 할 수 있을까?
파울린 자매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여러 그룹들에게 강연을 했다. 그녀는 장애아들에게 사랑의 가족을 찾아주는 일을 했다. 또한 1998년 위스컨신의 교도소에서 개 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수입 없이 할 수 있을까? “내겐 매달 200달러가 있다. 이것으로 전화를 걸고 우표를 산다. 나는 주택 지하실에서 살고 있으며, 나 자신을 위한 의료보험이 없지만 건강을 잃은 일도 없다.”
보스니아 출신의 부상자 두스코와 스렉코는 위스컨신으로 파울린 자매가 데려온 이후 네 번의 수술을 받았다. 멕시코에서 온 파블로는 작업 도중 사고를 당해 팔을 절단한 후에 의수를 최근 기증받았다. 팔을 잃은 판필로는 멕시코의 치아파스로부터 의수를 기증받았다.
많은 이들이 파울린 자매의 자선을 알고 있으나, 그녀 자신의 비극적인 과거를 알지 못한다. “나는 경험의 고통을 완전하게 극복할 수 없었다.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나를 거부하고 반대하고 모욕하는 이들을 만나거나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고통스런 기억이 떠오른다. 나를 모르면서 판단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게 가장 고통스럽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건 나는 사회에 무언가를 기여해 왔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희망과 삶의 의미를 주고 싶다.”
내 힘은 믿음에서 나오며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
“나는 더 이상 독일산 셰퍼드가 필요하지 않다. 내 힘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오며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삶의 성장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고통은 축복이 될 수 있으며 우리를 좀 더 강하게 만든다. 고통이 없었거나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지 않았다면 나는 가톨릭신자도 되지 않았을 것이고, 파울린 수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이 망가지면, 그 부서진 파편을 모아서 과거로 되돌려 놓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강한 신앙을 지니는 데 완전해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 하느님은 절대로 포기하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파울린 퀸 수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The pet projects of Sister Pauline>이라는 <시애틀 타임즈>에 실렸던
글을 번역소개한다
도미니크 수녀회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수녀인 파울린 퀸은 자신을 “별난 수녀”라 부른다. 티브이 스크린에 비친 그녀의 수녀복에는 개털이 덮여 있고, 손과 팔목에는 과거의 상흔이 남아 있다.
파울린 자매는 “지독히 문제 많은 가족”의 일원으로 그녀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참을 수 없는 정신적 중압감에 치여 그녀는 13세에 가출했다. 1950년대에 비행청소년이 아니면서 습관적으로 달아나는 아이들을 수용할 곳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을 어른들과 함께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다.”고 엘에이에서 캐시 퀸의 사회복지사였던 루스 올슨은 말한다. “정신병에 걸리지 않은 조그만 소녀가 어른들과 함께 정신병원에 있었다.” 어른들은 충격 요법과 전두엽 절제 수술을 받았다. 퀸은 이 두 가지의 위협을 받았다. 의사와 병원 보조사들에게 성희롱을 당했으며 “자아를 상실”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면도날이나 칼, 불 등으로 자해를 시작했다. “이 무서운 학대”를 조절하는 데 25년이 걸렸다.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하여 그런 증세를 “참을 수 없는 정서적 고통을 처리 가능한 육체적 고통으로 치환”하는 것이라 그녀는 설명한다. 자신감의 결여로 20세에 그녀는 얼굴을 맞대고 말을 할 수 없었다고 올슨은 회상한다. 캐시 퀸은 커튼 뒤나 사람의 등 뒤에서 말을 했다. 삶은 시설의 밖에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항상 집으로 보내졌다. 나중에는 버려진 건물이나 거리에서 살았다. 경찰은 부랑자단속법에 의거해 그녀를 구속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결국 아무도 그녀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없는 마을 끝으로 끌고간 누군가에 의해 임신을 했다. “그녀가 그런 끔찍한 일들을 겪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올슨은 말한다. 퀸은 엘에이의 수녀들의 도움을 받아 6개월만에 아기를 낳았고, 바로 그 다음날 둘 다 세례를 받았다.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은 지독한 수치였다고 그녀는 말한다.
1966년 퀸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으나 사람을 접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애완견 잡지의 뒷면에 있는 개 주소로 편지를 썼다. 마침내 소포비만 낸다면 독일산 셰퍼드를 주겠노라는 텍사스의 한 곳을 찾아냈다.
“조니는 내가 힘을 얻기 위해 처음 인연을 맺은 대상이었다.” 경찰도 길거리에 개를 데리고다니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조니는 말을 걸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석이 되었다. 그들의 눈이 개를 보고 있을 때 그녀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조금씩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다”고 올슨은 말한다. “그녀가 사회에 적응하는 길”이었다
개는 두 마리에서 세 마리로 불어났다. 그녀는 길에서 친구를 만났고 개를 발견했다. 그들은 부랑자보다는 여행자가 되기로 했다. 1967년 24세에 퀸과 친구와 네 마리 개들은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들은 화물차로 혹은 동승을 부탁하면서 여행했다. 밤에는 개를 손에 묶고 보호를 받았다. 캔사스 시티에선 조니까지 포함한 개들에게 집을 찾아 주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행을 계속하여 “그녀의 인생을 바꾼” 수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브리티시 아이슬까지 갔다가 켈리포니아의 집으로 돌아왔으며 알래스카로 가서 다시 홈리스가 되었다.
마침내 그녀는 에버렛에서 여행을 멈추었다. 그곳에서 사진가 훈련을 받기 위해 조수 노릇을 했다. 동물을 교도소에 넣으면 동물과의 유대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당시에 그녀는 정부의 생계 보조를 받고 있었다. “고의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상처 받은 이들이 저 밖에 너무나 많이 있다. 그들은 이해를 받아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 그녀에겐 후원자들이 있었으나, 수녀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오랜 전쟁을 치러야 했다. 퀸을 이해해 준 사람은 그녀의 영적인 지도자였던 심리학자 마이클 스톡 신부였다. 마침내 이탈리아에서 그녀가 하는 일을 보았던 치아파스의 협력 주교인 라울 베라 로페즈 주교가 그녀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녀의 서원을 받아들였다. 퀸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가지지 못해 그녀는 해마다 서원을 갱신해야 했으나 주교는 그녀의 소명에 대해 증거했다. “치아파스에서 주교님은 무지 바쁘지만 늘 나를 후원해 주셨다”고 파울린 수녀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사랑과 친절, 이해를 필요로 한다. 판단하지 않고 사랑을 퍼부어 사람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일, “이것이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이다.”
이탈리아에 머물 때 파울린 수녀는 수녀원 안에서 생활하고 일하지만, 미국에선 어느 공동체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가난을 대가로 치르고 있다. 그녀가 한 가족의 개들을 돌보면서 공짜로 얻은 그린 베이의 어두운 지하실에서 매달 200달러로 생활한다. 이런 식의 생활이 그녀에게 독립을 보장해 주어, 그녀를 필요로 하는 곳 어디에나 갈 수 있다. 걸프전 기간 동안 정신지체아들이 가스 마스크를 쓰고 고통을 겪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이스라엘로 날아갔다. 그녀가 늘 지니고 있는 공책에는 그곳에서 그녀의 선행을 증명해 주는 감사편지가 들어 있다.
그녀는 항상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한다. 팔 다리 없는 크로아티아 소년에게 미국의 따스한 가정을 마련해 주었다. 사라예보의 지하 터널을 통해 마비된 청년의 탈출을 도왔다. 그녀는 재정적인 후원도 없이 권리들과 싸워 미국으로 가는 운송편을 마련했으며, 그를 후원할 가족을 찾아내었다. “누구도 나의 소명을 깨뜨리지 못한다. 도미니크 수녀가 되는 일로 나는 목적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나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내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파울린 수녀는 말한다.
오랜 갈등의 세월을 지나 이제 그녀는 자신의 체험들을 선한 용도로 바꾸었다. “그 누구도 완벽한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선의 연쇄반응 중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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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원
미국 시카고에서 발행하는 주간기독교신문
<코리언 크리스천 저널>에서 일하며,
<그대보다 한 계단 아래>라는 불로그를 운영한다.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http://cafe.daum.net/cchereandnow 황혜원 200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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