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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淸凉山 870m)
도립공원 청량산은 바위산으로 그 바위틈 속에서 시원함이 풍겨 나오고 산 아래는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물이 흘려내려 청량함을 느끼게 한다. 산과 강으로 산수가 함께 어우러진 산은 그리 흔하지 않다. 때문에 청량산이 된다. 일월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어 산은 멈칫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낙동강 가에 섰다. 멀리서보면 여느 산과 다를 바 없지만 품속에 파고들면 12봉 (丈人峰,仙鶴峰,紫鸞峰,香爐峰,蓮花峰,硯滴峰,卓筆峰,紫宵峰,擎日峰,卓立峰,金塔峰,祝融峰) 11대(御風臺,致遠臺,般若臺,風穴臺,瑤草臺,景遊臺,華巖臺,彩霞臺,密城臺,鶴巢臺,金剛臺) 5굴(金生窟,金剛窟,邯生窟,方丈窟,元曉窟) 3수(聰明水,甘露水,金生水)를 갖추었다.
이 산 전경은 남쪽에서 바라보면 어가행열도 (御駕行列圖)로 보이고 낙동강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 서쪽에서 바라보면 정상을 비롯한 3개의 봉우리가 마치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보이는데, 한편 천하에 둘도 없는 뫼 산(山)자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정상에 서면 멀리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장엄하게 뻗어있고 가까이는 낙동강 건너편 서쪽에는 백두대간 태백산 옥돌봉에서 뻗어 내린 문수산, 만리산. 박달산, 학가산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이 건너다보인다. 동쪽으로 일월산이 멀지 않게 보이며 남서쪽으로 우뚝 솟은 학가산이 보인다.
퇴계 이황을 비롯 농암 이현보 필체가 청량산의 산수를 빼 닮았다는 신라의 명필 김생, 신라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 백담 구봉령, 신재 주세붕, 성재 금난수, 송암 권호문, 오봉 신지제, 구봉 김중청, 백운거사 이규보등 수다한 인물들이 찾아 들었고, 청량산에서 도산서원에 이르는 도산12곡의 무대는 도산구곡의 빼어난 산수미로 하여 금강산, 지리산, 삼각산에 이어 산수문학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멀지 않는 온혜리에서 출생한 퇴계 이황선생의 청량산가와 도산12곡, 이웃 분천리에서 출생한 농암 이현보선생의 농암가와 어부가의 무대가 비단처럼 펼쳐지고 그 끝자락에 안동호가 내려다보인다. 예부터 소금강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왔으며 수다한 인물들이 청량산의 산수를 노래하였으며, 산 아래 낙동강과 청량산의 험준한 산악지형은 천연의 요새를 이루어 숨어 지내기 좋아 고려 공민왕이 축융봉 골짝에 몽진하였던 명산이다.
청량산은 가을 단풍명산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단풍 절정기인 10월25일을 전후한 내 청량의 단풍과, 신록이 푸르러지는 5월10일을 전후한 청량산 외곽 종주산행으로, 산과 강이 어우러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산하를 감상하노라면 세상사에 찌든 사람들에게는 분명 청량감을 맛보게 할 것이고, 무릇 청량산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陶山十二曲의 舞臺 陶山書院에서 淸凉山까지
<옛 분강촌의 지금 모습>
나는 5년 전 오늘과 비슷하게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걸어 본적이 있다. 그때 청량산행 산악회 차편을 이용했기로 단체 시간표에 맞추려다 보니 구름에 달 가듯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슬쩍슬쩍 지나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기회가 주어지면 언젠가 다시 한 번 이 길을 걸어 보리라 마음에 담아 두었던 것을 오늘에야 풀어 제쳤다. 어제 비가 내리고 오늘은 맑게 개어 상괘한 날씨다. 거기다 5월의 신록이 푸르러 더할 수 없이 좋았다.
안동에서 태백으로 통하는 35번국도 변 도산서원 입구다. 08시50분 도산서원입구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서원까지 2km 거리이고 청량산까지 14km 거리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거리도 약18,5km나 되는 먼 길을 돌고 돌아 6시간을 걸어서 청량산까지 갈참이다. 도산서원으로 바로가지 않고 농암 이현보 (聾巖 李賢輔1467~1555)선생이 출생한 도산면 분천리 옛 분강촌을 먼저 찾기로 했다. 1974년 안동댐 수몰로 마을이 없어진 옛 분강촌에는 농암종택과 분강서원(汾江書院), 애일당(愛日堂)이 있었던 곳, 안동댐 수몰로 현재 가송리 농암종택에 이건 되어져있다.
분천리 윗마을에서 계곡을 타고 내려가니 안동댐 수몰이전에 것으로 보이는 비포장 도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더 내려가니 도로는 끊기고 강변에 널은 들판이 펼쳐졌다. 옛적 분강촌은 비교적 넓은 들판을 가져 한눈에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풍요를 구가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우기에는 물에 잠기는 곳이라 지금은 마을도 없고 경작도 할 수가 없다. 넓은 들판에는 수십 년 동안 자란 버드나무가 주인 노릇하고 있었고 잡초만이 무성한 무인지경으로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을 보였다. 질퍽질퍽하게 늪지대로 변한 들판을 가로질러 가느라 신발은 늪에 빠지고 가랑이는 이슬에 젖어 내가 나를 보아도 영락없이 미친 사람 같다. 이런 곳에 내가아니면 누가 오겠나? 나는 평소에도 미친 사람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도 산에 간다고 집을 나서는 나를 두고 한집 식구도 미친 사람 취급을 했으니 모르는 사람들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다. 미친 사람이란 말을 듣고서도 미친 사람처럼 그래도 허, 허 웃기만 했으니 누가 보아도 미친 사람이 아닌가? 세상에 무슨 일을 이루려면 당연히 들어야할 소리다. 이것이 현재 나의 모습이다. 강변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오르다가 바위절벽을 만나 다시금 숲을 헤치고 서원 진입도로로 올라섰다.
내가 그림으로 보았던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보물제1202호)는 1526년 농암 이현보 (聾巖 李賢輔1467~1555)선생이 60세 때 부모님을 뵙기 위해 휴가를 내어 왔을 적에 경상도관찰사 김희수(金希壽)가 수연(壽宴)을 주관하고 눌재 박상(訥齋 朴祥1474~1530)선생이 기록하고 그림까지 남겼다.(농암집) 이 그림은 분강촌(汾江村) 풍경을 배경으로 농암종택과 애일당이 보이고 수연을 베푸는 장면과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배를 타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면까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있다.
분강 마을 앞 낙동강변의 풍치는 진달래와 벚꽃이 어우러지는 봄과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면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이곳에서 태어난 농암선생은 퇴계선생의 명성에 가려져 있으나 이웃마을에 농암선생 같은 어른이 있어 퇴계는 자신의 인격도야에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재 넘어 이웃마을 온혜리에 살던 자식보다 나이어린 퇴계선생이 인사차 찾아왔을 적에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당시 관습과 법도에 따라 앉아서 절을 받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는데도 일어나 정중히 맞이했다는 일화도 있다. 영천군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그동안 못 다한 부모님의 효도를 위해 원근각지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부모님 생신잔치를 베풀 적에 마땅한 장소가 없어 마련한 것이 애일당이다. 애일당(愛日堂)은 부모님의 생신 일을 기억하고 살아계실 동안 언제나 이날처럼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농암(聾巖)선생은 부모님 앞에 잔치 상을 차리고 남의 부모도 내 부모처럼 함께 자리를 마련하여 절을 올렸다. 남녀 노유가 지켜보는 가운데 관직에 있었던 이전의 체면도 헌신짝처럼 벗어 던졌다. 자신도 일흔이 다된 나이에도 색동옷을 차려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자식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부모의 눈에는 어린아이로 보일 수밖에 없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안동댐 수몰 이전까지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있었기로 속칭 분강 촌이다. 분강촌은 농암선생의 고향마을이다. 그의 관향인 영천에서 군수를 했기로 권력주변에는 아부꾼들이 경쟁적으로 몰려들어 말썽을 일으켰을 게다. 숱한 유혹을 물리치고 선정을 베풀어 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올 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더 있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길을 가로 막았다한다. 농암(聾巖)은 분강 마을 앞 강변에 있는 바위로 강물이 스치는 소리에 귀를 멀게 할 정도로 물살이 센 곳에 있었던 바위다. 물살이 스칠 때 마다 인간세상 아귀다툼하는 그 소리 멀게 하는 바위가 바로 농암선생의 호가 되었다.
聾巖歌 (농암가)
농암(聾巖)에 올라보니 노안(老顔)이 유명(猶明)이로다.
인사(人事)이 변(變)한들 산천(山川)이야 가실까
암전(巖前)의 모수모구(某水某丘)이 어제 본 듯하여라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陶山書院; 사적 제170호)이다. 영지산(靈芝山) 동남쪽 낙동강 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 동편에 천연대(天煙臺), 서편에 운영대(雲影臺)가 감싸고 있다.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鳶飛戾天漁躍于淵 (연비려천어약우연; 솔개는 하늘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 노네)에서 따온 것이고, 운영대는 주자의 觀書有感 (관서유감; 빛과 구름과 그림자는 함께 돌고 돈다.)에서 인용한 것이라 한다. 도산서원에서 정면 시사단 쪽 을 바라보면 들판가장자리에 산이 원형으로 빙 둘러있어 들판은 마치 질그릇에 물을 담아 놓은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이곳을 도산(陶山)이라 칭한다. 1557년 2월 퇴계 이황 (退溪 李滉1501~1570) 선생이 나이 쉰일곱에 계상서당(溪上書堂) 등 다섯 차례 옮겨 다닌 끝에 온혜리 생가로부터 약 3km 떨어진 강변언덕 이곳에 1561년에 처음 도산서당을 세웠다. 퇴계 사후 1574년에 문인과 유림이 도산서원을 세웠으며 선조 임금이 한석봉이 쓴 현판을 사액하였다. 서원 마당에는 역경의 정괘(井卦), 식수로 사용했던 정열한천식(井洌寒泉食)에서 의미를 취했다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열정(洌井)이 있고, 수백 년 묵은 두 그루의 왕 버드나무가 눈길을 끈다. 1970년 도산서원 성역화 작업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서원 앞마당에 있는 열정과 왕 버들나무>
도산서원의 배치는 퇴계선생이 4년에 걸쳐 지은 도산서당(陶山書堂)을 비롯, 제자들의 기숙사 용도인 농운정사(隴雲精舍), 책을 보관하던 서고인 광명실(光明室), 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서로 마주보고 지어진 건물 동서재(東西齋), 서원의 중심 건물로 대강당 역할을 하던 곳으로 도산서원 사액 현판이 걸려있는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 서원에서 찍어낸 문집 등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판각(藏板閣), 퇴계선생의 위패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상덕사(尙德祠 보물 제211호), 상덕사에서 향사를 지낼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 전사청(典祀廳), 서원 관리인의 살림집 고직사(庫直舍), 퇴계선생이 도산서당에서 강론할 때 지헌 정사성(芝軒 鄭士誠 1545~1607))의 아버지 정두(鄭枓)등과 뜻있는 제자들이 세운 건물 역락서재(亦樂書齋), 조선 정조임금이 1792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선비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어명으로 도산별과를 보던 장소로 총 응시자 7,228명이 응시하여 11명을 뽑아 임금이 직접 시상하였던 장소 시사단(試士壇; 지방유형문화재 제33호), 퇴계선생이 제자 구암 이정(龜巖 李楨)과 송별을 아쉬워하며 4편의 시를 써 보냈는데, 석별의 아쉬움과 간절한 재회를 바라는 가장 잘 표현한 당나라 시인 유상(劉商)의 시를 후세 사람들이 이곳 바위에 새긴 석간대(石澗臺) 등이 있다.
相逢 (상봉)
君去春山誰共遊 (군거춘산수공유) 그대 가니 이 봄을 누구와 노닐고
鳥啼花落水空流 (조제화락수공유) 새 울고 꽃 떨어져 물만 홀로 흐르네
今朝送別臨流水 (금조송별임유수) 이아침 물가에서 그대를 보내노니
他日相思來水頭 (타일상사래수두) 이다음 그리워 만나려면 물가로 다시나오리
도산서원은 고대광실 궁궐 같은 절집과는 사뭇 다르다. 여러 채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선비정신이 엿 보이는 간소하게 지어진 건물들이다. 퇴계선생은 도산서당을 지어 흡족했을 터, 누가 봐도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뒤로는 산이요 앞에는 강이라 추워도 땔감 걱정 없고 생선이 귀한 내륙지방에서 물고기 맛을 보고 싶으면 텃밭에 채소를 뽑아오듯 강에 나가면 수반 어반(水半 漁半)이다. 여기를 왜 도산이라 했을까? 인근에는 도산이란 산 이름도 없는데 말이다. 서원 마당에서 강 건너 시사단(試士壇 지방 유형문화재 제33호)이 있는 앞을 내다보면 답이 나온다. 서원 앞은 산이 빙 둘러있고 그 안에 들판이 담겨져 마치 질그릇에 물을 담아 놓은 듯하다. 도산서당 터를 잡기 이전에는 어디에도 도산이란 이름이 없었으니 그래서 도산(陶山)인가보다. 참으로 명당이다. 퇴계 이황선생은 서당 터를 찾아 많이도 헤맸던 모양이다. 이곳에 도산서당 터를 마련한 감회를 이렇게 시로 남겼다. “계상서당에 비바람부니 침상조차 가려주지 못하여/거처를 옮기려고 빼어난 곳 찾아 숲과 언덕을 누볐네/ 어찌 알았으리, 백년토록 마음 두고 학문 닦을 땅이/바로 평소 나무하고 고기 낚던 곳, 곁에 있을 줄이야!”
매란국죽 (梅蘭菊竹) 사군자 중에 첫째로 매화를 사랑했던 선생은 말년에 제자들에게 “매화에 물을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陶山月夜詠梅 (도산월야영매)
獨倚山窓夜色寒 (독의산창야색한) 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기운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초월상정단단) 매화나무가지 끝엔 둥근달이 떠 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 (불수갱환미풍지)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 불어오니
白有淸香滿院間 (백유청향만원간) 달빛아래 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하네
<도산서원에서 건너다 본 시사단>
오늘 계획은 서원 앞 강 건너 시사단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현지에 와서 보니 안동호 수위가 높아져 시사단에 건너다니는 잠수교가 물에 잠겨 오늘도 꿈을 이루지 못했다. 모란꽃이 만발한 경내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하면서도 서원을 나오기 전 시사단을 건너다보면서 나룻배라도 운행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시사단(試士壇: 지방유형문화재 제33호)은 도산서원 앞 낙동강 건너편 강변 송림에서 조선 정조의 어명으로 규장각 각신(奎章閣 閣臣) 이만수(李晩秀)에 의해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치루었던 곳이다. 이때 총 응시자 7,228명 이었고 임금이 직접11명을 뽑아 시상했다 한다. 시사단 비문 말미에 번암 채제공 (樊岩 蔡濟恭1720~1799)선생의 시가 있다.
試士壇(시사단)
陶水洋洋其上也壇 (도수양양기상야단) 도산(陶山)에 물 양양(洋洋)히 흘러 그 위에 단(壇) 이로다
壇有階級水有淵源 (단유계급수유연원) 단(壇)에는 계급(階級)이 있고 물에는 연원(淵源)이 있나니
登壇臨水觸類而伸 (등단임수촉류이신) 단(壇)에 오르고 물에 임(臨)함에 류(類)를 따라 뜻을 펴노니
先正之化聖主之恩 (선정지화성주지은) 선생(先生)의 덕화(德化)요 임금님의 은혜(恩惠)로다!
<퇴계종택 전경>
서원주차장에서 퇴계 명상 길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가서 토계천변에 있는 동향의 퇴계 종택(退溪宗宅: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이다. 퇴계종택은 퇴계 13세손 하정 이충호(霞汀 李忠鎬)가 1926년~1929년에 지은 것이다. 건물과 정원은 고풍스런 분위기가 절로 난다. 여느 집 보다는 규모가 큰 집이다. 유명종가이다 보니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고 행사도 많아 규모가 커졌겠다.
용두산에서 발원하여 온혜리 퇴계태실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토계천을 따라 상계와 하계마을이 있었다. 하계는 안동댐수몰로 없어지고 토계천 남쪽 계남마을과 퇴계 종택이 있는 상계가 남아있다. 계상서당(溪上書堂)은 종택 앞 동편에 있었다. 토계천은 퇴계선생의 호가되기도 하는데 고향마을 토계천과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자리 잡아 계상서당을 열고 후학들을 양성하며 노후을 보낸 것에 연유한다. 그는 여기서 이런 시를 남겼다.
退溪(퇴계)
身退安愚分 (신퇴안우분) 몸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 편안한데
學退憂暮境 (학퇴우모경) 학문 퇴보하니 늘그막이 걱정스럽네
溪上始定居 (계상시정거) 퇴계의 가(家)에 비로써 거처 정하고
臨流日有省 (임류일유성) 시냇물 굽어보며 날마다 반성해 보네
<퇴계묘소>
여기서부터 백운로를 따라 이육사의 고향마을 원천리로 통하는 광야길이다. 한적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토계리 당집이 있는 당산나무 숲을 지나고 산모퉁이를 지날 즈음 퇴계선생묘소 안내판이 보였다. 걷기 힘들어하는 사람은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도로에서 능선을 따라 100m를 계단을 타고 오르니 퇴계선생묘소이다. 본시 앞이 탁 트이는 곳이었겠으나 지금은 오랜 세월 나무가자라 시야를 가린다. 묘비명은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다. 즉 관직에서 물러나 도산에서 말년에 은거한 진성(지금의 청송眞寶의 옛 이름)이씨의 묘다. 굳이 퇴계 이황이라 아니해도 금방 알 수가 있다. 명성에 비하여 크지도 작지도 않는 묘이다.
<이육사문학관>
묘소입구에서 도로를 따라 다시 고개를 넘으니 이육사 문학관이 있는 원천리 이육사 고향마을이다. 이육사 문학관은 도산서원과 함께 학생들의 학습견학이 많다. 이육사(李陸史1904~1944)선생의 본명은 이원록이고 일제하 항일저항 시인으로 광야, 청포도 등 많은 시를 남겼는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수형번호가 264번이라서 수형번호를 따서 이육사가 되었다. 그의 시 광야(曠野)와 청포도(靑葡萄)는 누구나 달달 외우고 다니던 시다.
曠野(광야)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에도/차마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끝없는 광음(光陰)을/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가득하니/내 여기 가난(家難)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원호정사 앞 들판>
문학관을 떠나 또 하나의 고갯길이 시작되는 곳,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 조그마한 건물이 보인다. 얼핏 쳐다보니 원호정사(遠湖精舍)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나는 무심코 지나치려는데 오른쪽을 보니 분명 낙동강이 있어야하는데 강도 보이질 않고 호수도 웅덩이도 하나 보이질 않는데 원호정사라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문득 방금 보았던 원호정사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사로 스쳐 지날 일인데도 나는 기어코 발품을 팔았다. 원호정사에 올라 내려다보니 벌판가운데로 낙동강이 보일 듯 말듯 흐른다. 호수는 보이지 않으나 얼핏 스치는 느낌만으로도 지형적으로 넓은 벌판은 하나의 호수 같은 느낌이다. 기행문은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로 쓰는 게 아니고 역시 두발로 써야 소재도 풍부해지고 감동을 주는 글이 될 것이다. 목적이 분명할 진대 두 다리 아픈 줄 알면서도 걷기를 고집했다. 차도를 따라 걷는 다는 것은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차량통행이 많지 않는 한적한 시골길 이어서 걸을 만하다. 도산서원에서 이곳까지 5km를 걸어오는 동안 자동차라고는 관광버스 한 대를 만났고 승용차 2대를 보았을 뿐이다. 여기서 나는 집을 나설 때 미리 메모해 온 백운거사 이규보(白雲居士 李奎報1168~1241)선생의 시 과 낙동강상류(過 洛東江上流)를 읽어보며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감상했다.
過 洛東江上流 (과 낙동강상류)
百轉靑山裏 (백전청산리) 푸른 산을 구비 구비 돌아서
閑行過洛東 (한행과낙동) 한가로이 지나가는 낙동강
初深猶有露 (초심유유로) 숲에는 아직도 이슬이 맺혀있고
松靜白無風 (송정백무풍) 소나무는 바람 없어 조용하고 밝은데
秋水鴨頭綠 (추수압두록) 오리노니는 가을호수는 한껏 푸르고
曉霞猩血紅 (효하성혈홍) 새벽안개 햇빛 받아 핏 빛 이로다
誰知倦遊客 (수지권유객) 이 나그네가 누구인 줄 어찌 알리요
四海一詩翁 (사해일시옹) 온 세상 떠도는 한 늙은 시인인 줄을
오늘 내가 걷는 길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사행천(蛇行川)인 낙동강 상류 강변길이다. 싱그러운 오월의 풍광을 마음껏 감상하며, 두 다리 아픈 줄 모르고 구름에 달 가듯이, 스치는 바람처럼 이렇게 걷고 또 저렇게 걸었다. 낙동강 물굽이가 휘돌아 흐르며 모래톱을 만들어낸 천사협(川砂峽)도 지나고 단사협(丹砂峽)도 지나왔다. 이윽고 도로가 끝나는 지점 단천리 강변 언덕에 위치한 백운지 건너편 퇴계 예뎐 길 청량산전망대다. 청량산 축융봉이 사자가 먹이를 쫒아 내리 달리듯 하는 모습이 쳐다보이고 강 건너로 백운지가 건너다보이는 곳, 여기전망대에서부터 도산서원까지 8km이고, 농암 종택까지 사유지를 우회하는 지정된 오솔길은 5,3km이다. 도로가 연결되면 3km의 거리밖에 안 된다. 산비탈 100여 미터 거리를 지주가 승낙을 안 해줘서 수년째 도로 연결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청량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량산>
나는 청량산전망대에서 저 푸른 하늘과 오늘 내가 가야할 신록으로 물든 청량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지는 풍광을 감상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은 청량정사(淸凉精舍)에서 눈을 들어 청량산을 그림처럼 바라보며 이렇게 노래했다지 않는가?
望山(망산)
何處無雲山 (하처무운산) 어느 곳인들 구름 낀 산이 없겠냐만
淸凉更淸絶 (청량갱청절) 청량산이 더 더욱 청량함이 비길 데 없으니
亭中日連望 (정중일련망) 정자에서 매일 먼 곳을 바라보면
淸氣透人骨 (청기투인골) 맑은 기운이 사람의 뼈 속까지 스며든다네.
나는 지주가 차량통행은 불허해도 사람동행은 묵인한다고 들은바 있어 사유지를 통과 4km의 강변 오솔길을 택하기로 했다. 중장비나 사륜구동 차량은 통행이 가능한 사유지에는 길 가운데 바위로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고 구덩이를 파서 차량진입을 못하게 해놓았다. 이곳을 통과하니 집이 한 채 보인다. 얼핏 경치 좋은 곳이라 별장 같기도 하고 주말농장 같기도 했다. 가까이가자 정원에 제초작업을 하던 주인이 초면의 나를 보고서는 손을 흔들어 반가이 맞이했다. 좀 쉬어가자 했더니 그늘 밑 의자에 앉히고는 술과 약초 된장찌개와 두릅나물을 갖고 나와 맛을 보라고 권했다. 건설사 임원을 하다가 퇴직했다는 주인은 산나물과 약초로 직접반찬을 마련하고 고기가 먹고 싶으면 저 아래 강에 내려가 먹을 만큼 물고기도 잡아와 요리도 한다면서 나뭇가지에 걸어둔 그물을 가리켰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욕심 부리지 말고 건강 잘 챙기는 것이 돈 버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그는 내게 자신의 생활 방식을 설명 했다. 약초된장 찌게는 여지껏 먹어 본 된장찌개 중에서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잡아둔 물고기가 있다. 불을 피우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맞을 보고 가겠느냐며 뜻을 물었다. 하지만 가야할 길도 멀고 점심때가 된지라 꾸역꾸역 혼자서 많이도 먹었기로 정중히 사양했다. 뜻밖에 환대를 받고 농암종택을 향해 길을 나섰다.
<미천장담에서 바라본 학소대>
발길을 옮긴지 얼마 안 되어 지은 지가 오래되어 도무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는 폐 가옥같은 허름한 집이 보였다. 집주변에 매실나무가 심겨진 텃밭이 있고 빨랫줄에 옷이 널려있는 걸로 봐서 분명 사람이 사는 모양이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집 앞에서 희미한 길을 따라 집 뒤로 가보니 텃밭으로 드나드는 길이고 밭가엔 산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처 놓았다. 사람이 있으면 길이라도 물어볼 걸 이 길이 아니다 싶어 그냥 되돌아 나왔다. 이 일대에는 주인은 달라도 사유지가 많아 퇴계 예뎐 길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건지산 우회 길을 이용하는 것 보다 가까울 것 같아 선택한 강변길은 갈수록 험난하다. 이제 기왕에 이 길로 들어섰으니 강변을 따라가기로 하고 숲을 헤쳐 나갔다. 곳곳에 물웅덩이를 만나고 인기척에 놀란 수달이 달아났다. 놀라기는 마찬가지 그놈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강변에 두 채의 폐 가옥을 만났다. 옛적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았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강변길을 따라 가다가 학소대 전경이 들어오는 곳에 서서 학소대를 감상했다. 학소대(鶴巢臺)는 국내 유일하게 먹황새(烏鶴;천연기념물 제702호)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의 무대 중심에 서서 하늘도 푸르고 산도 푸르고 강도 푸른 신록으로 물든 오월의 산수를 마음껏 감상했다. 녹색은 생명을 살리는 색이다. 눈이 피곤하면 온몸이 피곤하다. 온통 푸르름이 펼쳐지는 오늘 여기서 시들하던 몸도 원기를 되찾았다. 퇴계선생이 도산서원과 청량산을 왕래하며 남긴 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전 6곡 후 6곡 중에 후 6곡 제5수 하나를 감상해본다.
陶山十二曲 (도산십이곡)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그치지 아니하는 고
우리도 그치지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이곳을 지나 좀 더 가니 길이 보이고 쉼터가 마련된 곳에 “여기서부터 사유지이므로 되돌아가십시오.” 라는 안동시장 명의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문득 농암종택에 가까이 왔다는 뜻이리라. 조금 더 나아가니 10분이면 갈수 있는 농암종택이 보였다.
<농암종택 전경>
마침내 농암 종택(聾巖宗宅)이다. 제일먼저 만난 애일당(愛日堂)부터 분강서원(汾江書院), 농암종택 순으로 둘러봤다. 1974년 안동댐수몰로 분천리 분강 마을에서 이곳 가송리 올미재 마을로 이건 되었다.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농암종택은 농암선생 종손 이성원(李性源)선생이 조성하고 관리를 하고 있는데, 산과 강이 어우러지는 주변풍광이 좋아 가히 명당이라 할만하다. 종택을 비롯 분강서원, 애일당 긍구당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다. 종택 사랑채 건물 벽에는 선생의 학행에 감동하여 선조임금이 내린 친필 “積善”이 걸려 있다. 이 글이 내게 유난히 눈길을 끈 이유는 무얼까? 인간은 본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 없으니 이 세상 떠날 때 무엇을 가지고 가겠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탐욕 때문에 번뇌, 망상, 고통이 더해지는 것, 그러므로 내가 가진 것 시간, 건강, 재물 등을 남을 위해 나누는 것이 역설적이지만 선을 쌓는 방법이다. 모두가 고대광실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한다면 세상은 험악해 진다. 선생은 이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것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선조임금으로부터 친필편액을 하사 받은 것이다. 농암 종택은 산과 강이 어우러지는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지는 곳에 있고, 옛것의 멋과 현대의 편리함까지 가미된 시설로 민박도 하는데 고향집을 찾은 듯한 편안함 때문에 인기를 누리고 있다. 때문에 여름철에 민박을 하려면 수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고택과 종택을 혼동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고택은 주인공의 생가를 후손이 지키고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종택은 주인공의 사후에 후손들이 지어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집이다. 농암종택을 둘러보면서 느낀 점은 하마터면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문화재가 종손의 노력으로 보존되어질 수 있었다는데 개인적으로 깊은 감사를 느꼈다.
<가송교에서 바라본 가송협의 풍경>
농암종택을 나와 강변도로를 따라 고산정으로 향했다. 가송교(佳松橋)다. 이 다리는 가사리(佳砂里)와 송우리(松牛里)를 연결하는 다리로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건설되었다. 이때까지 해빙기에는 나룻배로 건너다녔고 결빙기엔 나무다리를 놓아 건너다니던 곳이다.
가송리 고산정 주변 일대를 가송협이라 한다. 태백산 남쪽에서 제일로 산수미가 빼어나 풍치가 좋은 곳으로 이름나있다. 가송이란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의 가사리(佳砂里) 마을과 서쪽의 송우리(松牛里) 두 마을 이름의 앞 글자 하나씩을 따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통합하여 가송리(佳松里)라 하게 되었다. 지금도 소 이마만큼 비교적 넓은 들이 있는 송우리 마을을 속칭 쏘(牛)두(頭)들 마을이라 칭한다. 통합명칭으로도 본래 풍치는 변함이 없다. 한때 무분별한 벌채로 소나무가 많이 훼손 되었지만 노송들이 우거졌을 옛적에는 가히 학이 즐겨 찾아 깃들만 했겠다. 태백에서 흘러내린 낙동강 강물에 청량산 축융봉의 산 그림자가 웅장한 몸을 담근다. 거기 축융봉 기슭 취벽(翠壁)아래에 고산정(孤山亭)이 깃들어있다. 고산정에서 해 뜰 무렵과 해질 녘 강 건너 고산에 노송이 어우러진 풍광과 고산(孤山)을 감싸고 돌아가는 쏘두들 마을과 들판, 강물위에 부평초처럼 떠있는 고기잡이 배, 이때의 고즈넉한 풍광은 계절이 변해도 변하지 않고 늘 푸른 아름다운 소나무였다. 때문에 가송은 요즘도 풍경사진 작가들이나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기도하다. 일찍이 퇴계 이황선생은 그가 아끼던 제자 금문원의 고산시 운에 따라서 이렇게 노래했다.
次琴聞遠孤山韻 (차금문원고산운)
君非出仕故無歸 (군비출사고무귀) 자네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돌아올 필요도 없겠네
占斷煙霞自不遠 (점단연하자불원) 안개와 저녁노을 산수경치를 혼자 차지한 것과 다를 바 없으니
境絶更饒田墾闢 (경절경요전간벽) 빼어난 경치에 거기다 넉넉한 밭을 개간하였고
山孤唯稱鶴棲飛 (산고유칭학서비) 산은 외로우나 학이 깃들고 날아든다 할 만하네
四時來往雙芒屩 (사시래왕쌍망교) 사계절 오갈 때 신는 단 한 짝 짚신조차도
萬事榮枯一薜衣 (만사영고일벽의) 만사 일어나고 어지러 짐이 한낱 풀 옷에 지나지 않지만
日月佳名吾所愛 (일월가명오소애) 일동과 월담 그리고 가송이름은 내가 좋아하는 바이니
尋君時復翫餘輝 (심군시복완여휘) 다시 자네를 찾아올 때는 나머지 경치를 즐겨나 보세
聞遠有田在孤山 (문원유전재고산) 문원 자네는 고산에 밭을 갖고 있으니
日洞月潭皆勝也 (일동월담개승야) 일동과 월담은 모두가 경치가 좋은 곳 아니 더냐?
<고산 아래서 강 건너로 바라본 고산정>
이 시는 64세의 퇴계이황(退溪李滉)선생이 지극히 아끼던 제자인 35세의 성재 금난수(惺齋 琴蘭秀1530~1604)와 가송의 풍광을 생각하며 제자의 사랑을 표현한 시로 편액이 고산정에 걸려있다. 청량산 축융봉(祝融峰) 아래 가사리 마을이 해 뜨는 동쪽에 있어 일동(日洞)이라하고, 하늘에 달이 뜨면 물에도 달이 뜨는 곳, 흐르던 강물도 이곳을 그냥 지나치기 싫어 머물다 가는 곳, 그래서 고산아래 머물다가 가는 강물을 월담(月潭)이 이라했다. 이는 하늘(天)과 땅(地), 해(日)와 달(月), 물(水)과 불(火), 남(男)과 여(女), 이렇게 음양(陰陽)의 조화(調和)를 생각해서 붙여진 이름이 일동(日洞)과 월담(月潭)이겠다. 축융봉 취벽(翠壁)아래 낙동강 변에 성재 금난수 선생이 1564년(명종19년)에 고산정(孤山亭; 유형문화재 제274호)을 건립했다. 고산정(孤山亭)앞 낙동강 건너편 고산(孤山210m)주변에 학이 날아들어 깃들어 살만한 노송의 풍광이 좋아 가송(佳松)이라 한다.
성재 금난수 선생은 인근 예안면 부포리 출신으로 자는 문원(聞遠)이다. 또, 퇴계 집(退溪集)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선생이 청량산 가는 길에 고산 정 건너편에 서서 일동마을에서 밭갈이하는 주민에게 제자 문원 (聞遠)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퇴계 선생이 제자 문원을 찾다.
日洞主人琴氏子 (일동주인금씨자) 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문원)란 이가
隔水呼問今在否 (격수호문금재부) 지금 있나 없나 강 건너로 물어 보았더니
耕夫揮手語不問 (경부휘수어불문)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말 못 알아들은 듯
愴望雲山獨巫久 (창망운산독무구) 구름 걸린 산만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가송교를 건너 고산정(孤山亭; 유형문화재 제274호)이다. 일명 일동정사(日洞精舍)라 불려 지기도 했던 고산정은 퇴계 사후에 도산서원과 청량산을 찾는 수다한 선비 시인 묵객들이 고산정을 거쳐 지나갔다. 강 건너 고산정 맞은편 고산과 강물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이다. 아무도 없는 고산정에서 보물찾기를 하듯 혼자서 서성거리며 옛적 고기잡이배가 강심에 떠있는 그런 상상도 해봤다. 처음 이곳에 왔을 적에 주변에 난초가 무더기로 만개했던 기억이 새롭고 오늘 보니 수백 년 묵었을 탱자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고산정에서 바라본 고산의 풍광>
고산정(孤山亭)에서 다시 강을 건너와 고산정 정면 강 건너편에 있는 고산(孤山)에 올랐다. 정상에는 여럿이 앉아 놀만한 평평한 바위로 되었었고 그 아래로 조대가 될 만한 바위를 확인했지만 수운대라는 바위 글과 바위에 새겨졌다는 퇴계선생의 시는 찾지 못했다. 퇴계선생이 도산서당에서 오산(吾山;청량산)에 왕래하던 쏘두들 마을 강변 오솔길 옆에 있다. 도산서원과 청량산을 찾아 시문을 남긴 인물은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 1579년 갈봉 김득연(葛峯 金得硏1555~1673)선생이 8월30일부터 5일간 도산구곡을 거슬러 청량산까지 도산기행을 했다한다. 그는 고산정상에 올라보니 바위 층은 평평하고 축을 쌓아 단을 만들었는데 10여명이 앉을 만하고 여기를 “수운대(水雲臺)”라 바위에 쓰여 져 있었다한다. 고산의 층 벽 바위가 툭 튀어나온 곳에 낚시 대를 드리울 수 있는 조대(釣臺)가 있고 퇴계선생의 시가 바위에 새겨져있다 했다. 퇴계선생은 고산을 이렇게 노래했다.
孤山(고산)
何年神斧破堅頑 (하년신부파견완) 어느 핸가 신이 도끼로 굳은 암석 찍어내어
壁立千尋跨玉灣 (벽립천심과옥만) 벽이 천 길이나 우뚝하게 물굽이에 걸 터 앉았구나.
不有幽人來作主 (불유유인래작주) 지은 주인이 오지 않는다면 숨어사는 이가 있지 않을까
孤山孤絶更誰攀 (고산고절갱수반) 외로운 산 끊어진 절벽에 누가 다시 붙잡고 올라올까?
<명호면 관창리 양삼마을과 청량산>
고산에서 내려와 35번 국도와 만나는 가송삼거리 농암 이현보선생의 어부가 시비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35번 국도를 따라 청량산으로 향했다. 양삼마을 앞이다. 봉화군 명호면 관창(觀漲) 2리 일명 배사무 라고도 하는 양삼마을은 행정구역과는 상관없이 생활권이 안동으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쏘두들 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관창리는 청량산서쪽 낙동강건너 만리산 능선 기슭에 있어 큰 비가 내리면 낙동강물이 넘치도록 불어난 것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관창리에서 유일하게 반대편 낙동강건너 축융봉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청량산을 바라보며 35번국도 강변길을 따라 15시40분 오늘 최종목적지 청량산 나분들(廣石)마을에 도착했다. 오늘 행로는 도산서원 입구~옛 분강촌~도산서원~퇴계종택~퇴계묘소~이육사문학관~퇴계 예뎐길 청량산전망대~농암종택~고산정~고산~가송삼거리~청량산 나분들 마을, 거리18km 6시간30분이다.
2013년 5월11일 토요일 맑음
첫댓글 陶山書院에서 淸凉山까지의 길을 단숨에 답사하신 "산이 좋아님"
走馬看山으로 도산서원 따로 청량산 따로는 다녀왔습니다 만
이렇게 먼길은 생각도 못해 보았는데 감동입니다. 詩書畵(사진)
감명깊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는 걷는 것이 일상화된 옛 사람들도 4시간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산서원,퇴계종택, 퇴계묘소, 이육사 문학관.청량산전망대, 농암종택.고산정을
차량을 이용해서라도 한번 쯤 가족과 함께 탐방을 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문경새재 길과 함께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은 곳입니다.
이곳 근처를 다녀가셨군요.
청량산 예던길을 걸어가거니 말타고 걸어갔다고합니다.
저도 아직 못 걸어본길입니다.사진 글 시 대단하십니다.
안동과 봉화는 이웃이지요.
60년대 까지만 해도 봉화 명호면과 재산면 주민들은 안동 예안장을 보았다지요?
옛적에는 말을 타고 다니거나 그럴 형편이 안되는 사람은 걸어다녔으리라 생각됩니다.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제가 걸은 구간에 상당량의 자료를 갖고 있으나
내용이 길어질까 해서 언급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