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의 소개:
1. 명칭과 연혁
인왕산의 이름은 광해군일기 8년(1613) 3월 24일조에 "인왕은 부처님 중에서도 아름다운 부처님이다. 이 산에 옛날 인왕사(仁王寺)가 있었기에 인왕산이라 불리었다"라고 하였듯이, 그 산에 인왕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인왕산은 백악의 서쪽에 있어 조선초 태조·세종년간에는 서봉(西峰)·서산(西山)이라 부르던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仁王山'과 '仁王寺'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어, 성종 12년(1481)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기 이전에 인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왕은 불법의 수호신으로 사문(寺門) 또는 수미단 전면의 좌우에 안치하는 한 쌍의 금강역사로서, 둘 다 용맹하고 험악한 얼굴을 가지며 일명 이왕(二王) 또는 금강신(金剛神)이라 한다. 이렇듯 인왕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산으로 세종의 내불당(內佛堂)이 이곳에 있었고, 인왕사 서쪽에는 금강굴이 있었으며, 또 세조 때에는 복세암(福世庵)을 짓기도 하였다.
세종 때 기록을 보면 인왕사가 있던 골짜기는 '인왕동'이라 불렀는데, 이는 인왕사동에서 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왕산 아래 골짜기 물 흐르는 곳을 일컫는 옥류동(王流洞)과 합쳐져 후에 옥인동(玉仁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이렇게 인왕산과 인왕동 이름의 유래가 된 인왕사는 태조와 성종 때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하며, 연산군 때는 인왕사 복세암과 금강굴이 경복궁을 내려 누르고 있으므로 근방의 민가와 함께 철거토록 했다는 기사로 보아 적어도 연산군 때까지는 존속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인왕산은 일명 '필운산(弼雲山)'이라 하는데 필운은 서산(西山)을 뜻하는 이름이다. 조선 중종 32년(1537) 명나라 사신 공용경( 用卿)이 왔을 때, 중종이 사신 일행을 경회루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면서 손님을 최선으로 접대하는 풍습에 따라 공용경에게 주산인 백악과 서쪽 인왕산의 이름을 붙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용경은 북쪽의 백악을 '공극(拱極)', 서쪽의 인왕을 '필운'이라 하였는데, 이는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따온 것이다. 운룡이란 임금을 상징하므로 임금을 보필할 때 오른쪽에서 한다는 뜻인데,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서 남쪽을 향해 보면 인왕산이 오른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필운산이라는 명칭은 명나라 사신에게 예의상 요청한 것이므로 이름으로 정착되지 못하고, 산기슭에 필운동과 필운대의 지명만이 남아 전한다.
인왕산은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주산인 북악의 서쪽에 있어 우백호에 해당함으로써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따라서 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수축할 당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서쪽 성곽이 축조되었다. 그런데 한양 정도 당시 북악 주산론에 대응하여 인왕산 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되었다.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태조께서 임금이 된 뒤 (중략) 도읍을 어디에 정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무학이 점을 쳐서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삼으라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이르기를 옛적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으로 향하였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무학은 '지금 내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한편 『한경지략』에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무학이 200년 뒤라 한 것은 곧 임진년(1592)을 가리킨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무너지고 깨지고 불탔으니 참으로 용케 맞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왕산 주산론은 『태조실록』에는 보이지 않아 그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으나, 인왕산 서편 선바위 전설과 더불어 국초에 불교 세력과 성리학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도읍을 건설할 때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인왕산 기슭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사직단을 건설하니 나라의 상징이 인왕산의 품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은 인왕산 동북 기슭에 무계정사를 마련하여 풍류를 즐기며 조정의 일을 살피기도 하였다.
또 지리도참설에 따른 이야기로 명종 때 학자 남사고(南師古)가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왕의 기운이 있다 하더니, 과연 선조가 사직골에서 났다. 이후 광해군 때에는 인왕산 아래 새문동(塞門洞)에 왕의 기운이 어리어 있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그 남쪽 기슭에 경덕궁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새문동 정원군(定遠君)의 집에서 태어난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 당시에 경덕궁 말고도 인왕산 기슭에 인경궁과 자수궁도 세워져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인조 2년(1624) 2월 안주병사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을 점령하자, 뒤쫓아온 도원수 장만(張晩)이 무악에 진을 치고 이괄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때 이괄은 도성 주민들에게 "장만을 단번에 무찌를 터이니 나와 싸움구경을 하라" 하므로, 도성 주민들이 인왕산의 곡성(曲城) 부근에 올라 구경하는데 흰옷 입은 사람들로 덮여 인왕산은 백로처럼 되었다고 한다.
인왕동은 도성 안에 경치 좋기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조선 후기의 화가인 정선(鄭敾)은 비 온 뒤의 인왕산 경치를 지금의 효자동 방면에서 보고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국보 제216호)」로, 강희언(姜熙彦)은 자하문 근처인 도화동에서 보고 느낀 「인왕산도(仁王山圖)」로 각각 그 아름다운 경치를 실감나게 표현하여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표작으로 남기도 하였다.
따라서 인왕동 뿐 아니라 이 산 기슭 곳곳에는 이름난 인물들과 깊은 인연이 얽힌 곳이 적지 않게 흩어져 있다. 지금 청운초등학교 뒷골목 안쪽의 깊은 골짜기는 백운동(白雲洞)으로 이름있던 곳이었다. 그 아래는 김상용의 집이 있던 청풍계(淸風溪)였으며, 그 근방에 세심대(洗心臺)가 있어 임금도 찾아 구경하던 곳이었다. 청풍계 청하동(淸霞洞)에서 고개 너머 남쪽은 김수항의 별장이 있었고, 그의 아들 김창업이 살던 옥류동(玉流洞)이 있었다.
그 울 안은 송석원(松石園)이라고도 했는데 평민 시인 천수경(千壽慶)이 거닐며 독서하던 곳이다. 송석원에서 서남쪽 지금의 누상동에는 북촌 제1의 활터 백호정(白虎亭)이 있었고, 고개 너머 지금의 배화여자고등학교 경내 일부는 이항복의 옛 집터 필운대(弼雲臺)이다. 또 사직단 남쪽(사직동 262번지)에는 선조가 태어나 자란 도정궁(都正宮)이 자리하였다.
한편 도성의 유적은 일제의 의도적인 파괴와 광복 후의 정치적 혼란과 행정의 공백기를 틈타서 성곽 파손이 계속되어 그 일부가 잔존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1968년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을 계기로 안보상 인왕산의 방위체제가 문제되어, 인왕산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정부에서는 가능한 범위내에서 도성을 원형대로 복원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문화유산의 복원과 아울러 국가안보의 정신적인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1975년부터 도성복원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 때 인왕산 지역은 청운지구로 정해져 공사가 진행되었다.
1993년에 이르러 20여년간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던 인왕산이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자유로운 등산과 암벽 등반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루 2천여명의 등산객이 이용하는 시민공원이 되었다. 그리고 1994년 4월 16일에는 종로구청 주관으로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제1회 인왕산예술제가 인왕산과 그 주변에서 진행되었다.
2. 자연생태
인왕산은 높이 338.2m이며,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암반이 유난히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인왕산은 서울 내사산(內四山)의 서쪽 호랑이산에 해당된다. 경복궁의 주산 북악이 뾰족하고, 그 안산(案山)인 남산은 능선이 매우 부드럽고, 좌청룡인 동쪽의 낙산은 밋밋하고 얕은 지세인데 비해, 우백호인 서쪽의 인왕산은 높고 우람하다. 인왕산의 주봉은 둥글넓적하면서도 남산같이 부드럽거나 단조롭지 않다. 또한 뾰족한 북악처럼 유달리 뛰어나지는 않으나 늠름한 남성적인 산세이다. 인왕산을 가리켜 일찍이 유득공은 『춘성유기(春城遊記)』에서 "마치 사람이 팔짱끼었던 양 팔을 풀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양 어깨에 날개가 돋힌 듯하다" 하였다. 또 『한경지략』에 "인왕산은 (중략) 도성이 그 산마루를 타고 쌓아져 있는데 험준한 곳을 곡성이라 한다" 하였다. 이렇듯 인왕산은 곳에 따라 매우 험준하지만 멀리서 바라다 보면 매우 평범한 듯 하다. 그러나 계속 올라가다 보면 결코 단조롭지 않음을 곧 알 수 있으며, 다채로운 풍치와 함께 어딘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인왕산의 자연모습을 최숙정(1433∼1480)은 "한 굽이 숲과 샘이 좋은데(一曲林泉勝), 천그루 나무들 맑네(千章樹木淸)" 라고 읊었다. 작가 박완서는 『내가 잃어버린 동산』에서 1930년대 인왕산 서남쪽 기슭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거의 암벽으로 되어 있었고 흰 바위로 된 깊은 계곡이 있었으나 장마철이나 비가 온 직후를 빼고는 물이 흐르지 않았다. 메마른 계곡을 연해 국사당을 비롯한 굿당 무당집들이 들어서 있었고, 떡이나 북어 따위가 늘 그 앞에 널려있는 신령한 바위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 나무그늘 하나 없이 발랑 드러나 있는게 나에겐 도무지 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화강암으로 된 주봉이 동쪽으로 슬그머니 낮아지면서 잡목이 듬성듬성한 동산을 이룬 곳이 있긴 있었지만 그곳 또한 원래는 화강암이었던 곳이 물러져 흙이 된 듯 메마른 바닥에 아무 것도 자라는 게 없었다. (중략)
그 산자락은 인왕산 줄기 중에서는 그래도 나무가 가장 많은 데였다. 그러나 아까시나무가 주종이었던 숲은 역시 바닥이 메마른 푸석바위여서 나물이나 버섯은 커녕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여기서 인왕산의 식생은 최숙정의 인왕산시와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강희언의 인왕산도에서 보이던 소나무 숲과 육중한 바위로 덮여 있던 모습에서 일제 때를 거치면서 아까시가 많은 모습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인왕산 중턱 아래는 소나무 보다는 아카시가 많고 정상 부근에 오르면 바위와 바위 사이에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왕산에는 선바위를 비롯하여 바위의 형상이 실제의 사물과 유사한 기암괴석들로 가득하여 어느 때 올라 보아도 그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는 명산이다. 그 유명한 바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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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바위 : 남릉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왕산의 바위 중 으뜸으로 꼽히는 바위이다.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다 하여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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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바위 : 남릉 하단부에서 볼 때 바라보이는 바위로서 둥근 모자 모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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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바위 : 남릉 중간쯤 오르다 보면 좌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돼지가 코를 들고 있는 듯 한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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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안장바위 : 돼지바위 위에 있는 바위로서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말안장을 벗어 놓은 것 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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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바위 : 남릉으로 오르다 보면 범바위 밑 우측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로서 두꺼비가 먹이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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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바위 : 동면 계곡 자라바위 위에 위치한 바위로서 코끼리의 긴 코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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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바위(일명 손가락바위) : 남릉 정상에 이르는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인왕산의 대표적인 바위 중 하나로서 형상이 달팽이가 기어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두 손가락을 펼친 모습으로도 보여 손가락바위라고도 불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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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바위 : 인왕산 정상 밑 동면 구릉에 자리한 바위로서 꼭 자라가 목을 내놓고 앉아 있는 듯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위에서 보면 머리 쪽으로 보이는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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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바위(虎岩) : 호랑이굴이 있는 남릉 정상에 봉긋 솟아 있는 바위로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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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부리바위 : 범바위를 지나 정상 못미처 동면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로 하늘로 쭉 뻗은 매의 머리 모습을 하고 있으며 상단의 소나무가 매의 부리를 연상케 한다.
·쉼바위 : 범바위에서 정상 쪽 동면에 평평하게 이루어진 바위로서 이곳에서 쉬며 시 한 수라도 읊조리고 싶은 바위이다. 툭 튀어 나온 부분이 울부짖는 호랑이의 머리 같기도 하다.
·삿갓바위 : 인왕산 정상 한가운데 있으며 바위 이름 그대로 삿갓을 벗어 놓은 듯 하다. 이 바위를 기점으로 남릉과 북릉, 동면과 서면 등으로 나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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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바위 : 정상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위 이름 그대로 기관차가 객차를 이끌고 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바위는 홍제동 환희사 쪽에서 보면 제대로 볼 수 있다.
·펭귄바위 : 남릉을 오르다 보면 중간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로서 펭귄과 흡사하게 생겼다.
·해골바위 : 동면 인왕천약수터를 지나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좌측에 위치한 바위로서 생김새가 사람의 두개골과 흡사하게 생겼으며 인왕산의 대표적인 바위 중 하나이다.
·장승바위 : 동면 치마바위 좌측에 위치한 매우 큰 바위 사면으로 3개의 장승이 나란히 누워 있는 듯 한 형상을 하고 있다.
·치마바위 : 정상 바로 밑 동면에 매우 넓게 펼쳐진 바위로서 여인의 주름치마를 펼쳐 널어 놓은 듯한 바위 사면이다. 중종과 폐비 단경왕후 신씨의 애틋한 전설이 있는 바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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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바위(아슬바위) : 남릉을 오르다 정상 부근 좌측으로 높게 솟아 있는 바위로서 앉아 있는 부처와 같아 부처님바위라 불리운다. 머리부분이 곧 떨어질 것같이 아슬아슬하다.
·책바위 : 정상에서 북릉을 향해 내려가다 보면 좌측 능선에 있는 바위로서 책을 펼쳐 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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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바위 : 매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름없는 수많은 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옥인동에는 모양이 소반처럼 생긴 소반바위와 세 물줄기가 만나는 한 가운데 있어 그 밑에 지초(芝草)가 많이 자라 지초바위·지치바위라 부르던 바위도 있었다. 주택 건설에 따라 그 원형을 찾아내기 매우 어렵다
3. 경승과 명소
1) 청풍계(淸風溪)
인왕산 동쪽 기슭은 현재 백운동과 청하동이 합쳐서 청운동이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백운동 아래 곧 청운초등학교 뒷길 일대를 청하동이라 했고, 그 중에서도 지금의 청운동 52번지 일대를 청풍계라 하였다.
지금은 길이 되어 있지만 청풍계란 이름이 말하듯이 복개 전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었다. 청풍계는 인조 때 재상 김상용의 집터(청운동 52-58호)로 그 집 이름을 늠연당(凜然堂)이라 하고 와유암(臥遊庵)은 그가 순국하기 이전 취미로 그림과 서적을 좌우에 펴놓고 즐기던 서재였다. 이 곳 시냇물 위 바위에 '大明日月 百世淸風'이라는 암각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현재는 '百世淸風' 4자만 남아있다. 이 암각글자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며, 그 자리가 바로 회심대(會心臺)의 위가 되는 일명 천유대(天遊臺) 혹은 청풍대(淸風臺)였다. 이 청풍계는 서울 성안의 5대 경승의 하나인 백운동 계곡으로, 그 골 안이 깊고 그윽하며 수석이 아늑하고 아름다워서 놀며 즐길만 하였다.
김상용의 후손들이 근처에 대를 이어 살아서 이들을 장동 김씨(壯洞金氏) 혹은 창의동 김씨(彰義洞金氏)라 하였으며, 이들이 조선후기 60년 외척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다. 따라서 순조와 익종이 봄날에 이 곳 청풍계에 들르기도 하였다.
2) 송석원(松石園) 인왕산 동쪽 기슭 지금의 옥인동 47번지 일대는 서울 장안의 5대 경승 가운데 하나인 인왕동 부근으로, 광복 이후로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앉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일찍이 옥류동이라 하였다. 순조 이후에는 송석원으로 더 알려졌던 경치 좋은 골짜기였다. 송석원은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고 바위에 김정희의 글씨로 '松石園'과 송시열 글씨로 '玉流洞'이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자취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 일대는 세도가의 별장지로 일찍이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의 별장 청휘각이 있었고, 민태호의 사조정과 옥정실이 있었다. 또 송석원 도인 천수경과 같은 청빈한 평민도 옥류천 위에 초가집을 짓고 독서를 즐기고 시문으로 교유하면서 살았기에 오히려 송석원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더 알려졌다.
한편 송석원은 조선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의 숙부로 조선왕조 옥새를 강탈하여 일제에게 넘긴 윤덕영의 별장으로도 유명하였다.
3
) 필운대(弼雲臺) 『필운대는 인왕산 남쪽 기슭 배화여고가 있는 곳으로 선조 때 정승인 이항복의 집터이다. 『한경지략』명승조에, 필운대는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이오성(李鰲城)이 젊은 시절에 필운대 아래에 있는 권도원수(權都元帥) 집에 붙어서 살았기에 스스로 호를 필운이라 하였다. 지금 바위 벽에 '弼雲臺' 석 자가 새겨져 있는데 오성의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 옆의 여염집에서 여러 가지 꽃나무를 가꾸어 서울 사람들이 봄철에 꽃구경을 나설라치면 먼저 이 곳을 손꼽았다. 사람들이 술을 차고 매일같이 모여들어 시를 읊었는데 그 시를 속칭 '필운대 풍월'이라 하였다. 또 대 옆에 육각현(六角峴)이 있다. 바로 인왕산 기슭이어서 필운대와 더불어 유명하다.』고 하였듯이 필운대는 19세기까지 손꼽히던 명소였다.
건물들이 들어서기 전 필운대 암각글씨가 있는 바로 앞의 평평한 바위에 오르면 인왕산을 등지고 왼편으로 눈앞 가까이 우뚝한 북악이 보이고, 그 두 산 사이로 저 멀리 북한산의 비봉·문수봉·보현봉과 백운대까지 바라다 보였다. 몸을 돌리면 서울 시내 남산이 발 아래이고 다시 남으로는 동서로 굽이쳐 흐르는 한강이 전망되었다. 방호자의 『필운대』 산수화를 보면 선비 셋이서 인근 풍경을 완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배화여고 교사 아래 벼랑바위 벽에 '弼雲臺'라 새긴 암각글자가 뚜렷하게 남아 있고, 오른편 암벽에는 이항복의 9세손 이유원이 1873년에 조상을 그리며 읊은 한시(漢詩)가 새겨져 있다.
4) 백호정약수(白虎亭藥水) 터
인왕산 남동쪽 기슭 누상동의 백호정은 누각골의 막바지에 있었던 서촌 5사정(射亭)의 한 곳이다. 이곳에 있는 '白虎亭'이라는 각자는 숙종 때 명필가 엄한명이 바위에 새긴 글씨다. 백호정약수터는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던 시절에 병든 흰 호랑이가 수풀 속에서 물을 마신 후 곧 병이 나아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주민들이 그 자리에 가보니 조그마한 샘이 있어 이 곳을 약수터로 이용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는 '白虎亭'이라 새겨진 돌기둥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4. 등산로
인왕산에 오르는 등산길로는 크게 8개의 들머리가 있다. 먼저 남릉지역의
사직동 들머리로 사직공원에서 황학정을 오른쪽으로 돌아 인왕산길을 거쳐 무악동으로 넘어가는 도로 중간에서 인왕산 능선을 타고 가는 길로, 돼지바위·달팽이바위·범바위를 거쳐 정상에 이른다. 그리고 동쪽의 누상동·옥인동·청운동 들머리는 모두 인왕산길에서 왼쪽으로 나있는 등산길을 이용하게 되는데 석문-쉼바위-인왕천약수-해골바위를 거쳐 능선으로 오르는 길과, 만수천약수와 버드나무약수터에서 성곽쪽으로 오르는 길, 청운약수터에서 자하문 근처 성곽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무악동 들머리로 국사당-선바위약수터-돼지바위를 거쳐 능선에 오르는 길과 홍제4동 인왕궁아파트 뒤에서 옥룡천약수터를 거쳐 능선에 오르는 길, 북릉의 홍제3동 문화촌아파트 뒤에서 홍심약수터와 성덕사를 거쳐 기차바위를 지나 책바위 위에서 성곽과 만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있으며, 부암동사무소 뒤에서 부암약수터를 지나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길이 있다. 그 이외에 홍제3동 배수지 뒤로 용천수를 지나 오르는 길과 자하문고개에서 오르는 길, 옛 서울여상 뒤에서 오르는 길 등 모두 13개 들머리가 있으나 다른 길들과 곧 만나게 된다.
인왕산 등산길은 청와대 앞길과 더불어 1968년에 통행제한 조치 이후 1993년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25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인왕산 등산로를 앞의 13개 들머리를 총괄하여 크게 두개의 종주코스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홍은동 홍지문에서 무악동에 이르는 총 3km 등산로이고, 또 하나는
자하문터널 끝에서 인왕산 정상까지 연결되는 총 2.5km 코스로 도보로 정상까지 50분 정도 소요된다.
한편 인왕산 동쪽 모든 등산로의 들머리가 되는 산중턱 위 인왕산길은 종로구 사직동에서 누상동·옥인동을 거쳐 청운동의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인왕산 중턱길을 말한다. 폭 12∼15m, 연장 2,300m의 이 길은 북악로 또는 속칭 인왕스카이웨이, 북악스카이웨이(10km)로 불리다가 1984년 11월에 자하문을 중심으로 '북악산길'과 '인왕산길'로 나누어 이름을 붙였다. 이 길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 침입 이후 수도권 경비와 산책로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다.
5. 실태와 관리
인왕산은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휴양시설로 벤치 89개가 있으며, 성인 운동시설 4종 21개, 5개의 옹달샘과 간이화장실 16개가 설치되어 있다. 연 이용자수는 54,000명에 이른다.
인왕산 남쪽 기슭의 사직공원은 2개의 도로와 200m의 산책로가 있으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휴양시설로 정자와 노인정, 그리고 104개의 벤치가 있다. 놀이기구 2종이 있으며, 운동시설로 궁도장 2개소와 교양시설로 자연보호헌장탑이 있다. 편익시설로 매점 2개소와 화장실·공중전화·음수대·옹달샘이 있다. 그리고 연 이용자수는 35만명으로 공원관리인 2명이 있다. 종로구청에서 주관하는 인왕산예술제를 비롯하여 '구민의 날' 행사 등 많은 행사가 이곳에서 열리며 인근에 시립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 등이 있어 시민들에게 휴식 및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6. 사적과 문화재
1) 사직단(社稷壇)
인왕산 남동 기슭에 있는 종로구 사직동 사직공원에 가면 먼저 고색 창연한 정면 3칸의 사직단 정문을 만나고, 이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3칸의 북문을 들어서면 2기의 단을 볼 수 있다. 그 왼쪽 단(동쪽)이 나라의 국토신을 모시는 사단(社壇)이고, 오른쪽(서쪽)의 단이 오곡신을 모시는 직단(稷壇)인데, 이를 통틀어 사직단이라 한다.
나라의 제사로 사직이 모셔진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조선시대 사직제도는 고려 성종 때 정비된 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조선 태조는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고대 동양의 옛 도읍지 건설의 정형을 제시한 주례(周禮)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에 의해 남쪽을 향한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의 배치로, 좌측 동부 연화방(蓮花坊)에 종묘를, 우측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천도 이듬해인 1395년 1월 29일에 사직단 축조공사를 시작하여 2월 27일에 완성을 보았다.
그후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가 광해군 원년(1608)에 복구되었다. 광무 1년(1897)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에 오르면서 사단과 직단은 태사단(太社壇), 태직단(太稷壇)으로 높여졌다. 그러나 일제강점으로 1922년 사직단을 중심으로 약 66,619평이 사직공원으로 탈바꿈되어, 1940년 3월 조선총독부고시 제208호 '경성시가지계획공원 제35호'에 따라 정식으로 도시공원이 되었다. 또한 1960년대 도시계획으로 신문(神門)이 뒤로 14m 들어가 그 면적이 더욱 축소되는 등 황폐된 것을 1988년에 고증 발굴하여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공원의 현재 면적은 16만 8,000㎡이며, 현존하는 사직단은 18.4평만이 사적 제12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고, 사직공원 입구의 사직단 정문은 보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원 안 북쪽에는 단군성전이 있으며, 그 뒷쪽으로 궁술연마장인 황학정(黃鶴亭)이 있다. 황학정(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5호)은 서촌 5사정 중의 하나인 필운동 등과정(登科亭)의 터이다. 원래 이 황학정은 고종 광무 2년(1898) 어명에 의하여 경희궁 내 왕비가 거처하던 회상전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 일제에 의해 경희궁이 헐리고 궁내 건물들이 일반에게 불하될 때 사직공원 북쪽인 등과정 옛터에 옮겨졌다.
2) 도 성(都城)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도성은 1396년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두 차례 농한기를 이용하여 197,400명에 달하는 각 지방 백성들을 동원하여 축성하였다. 이 때 축성공사는 600척을 1구로 정하여 백악 동쪽에서 천자문의 천(天)자에서 시작하여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백악 서쪽에 이르러 조(弔)자로 마쳤다. 따라서 인왕산 지역에 해당하는 도성 서북지역은 사師)자에서 조(弔)자에 이르는 24구간으로 돈의문에서 창의문을 거쳐 백악 정상까지의 구간에 해당되었다.
그후 세종년간에 토성 부분을 모두 석성으로 개축할 때 남산 잠두봉에서 인왕산 사이를 석축으로 고쳐 쌓았다. 아울러 인왕산 상봉 못미쳐 사직공원 쪽에 있는 성을 곡성(曲城) 혹은 굽은성이라 부르는데 세종 4년(1422)에 축성된 것이다. 지형에 따라 쌓아 세번이나 굽어 있으므로 굽은성이라 불렸다. 현재 군부대가 주둔해 있어 일반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반면,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그후 숙종년간에 서울 도성이 다시 수축되었고, 1961년에 창의문 좌측의 성곽을 보수하고, 1972년에 인왕산 북쪽 방면 석축을 보수하는 등 부분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1975년에 도성복원계획 아래 인왕산 지역은 청운지구(돈의문 북쪽∼창의문)로 구획되어 복원공사가 진행되었다.
인왕산 지역과 북악을 잇는 고개에는 도성 4소문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이 있는데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 초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그 문화재적가치가 더욱 높다. 창의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북문 역할을 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진입한 문이기도 하다.
3) 무계정사(武溪精舍)
인왕산 북쪽 기슭 창의문 밖 부암동 329-4번지는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 안평대군의 정자였던 무계정사 터(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암벽에 횡으로 '武溪洞'이란 암각이 있다. 안평대군이 '몽유도원도'로 그려진 도원에서 노니는 꿈을 꾼 뒤 그 곳과 같은 자리를 찾았다.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무계정사라 이름 붙이고 글을 읊으며 활을 쏘았던 장소로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무계정사를 짓기 전에는 효령대군의 집터였으며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解堂)이라고도 불렀다.
4) 석파정(石坡亭)
인왕산 북쪽 기슭 창의문 밖 부암동고개 종로구 부암동 316-1번지에 위치한 석파정(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별장이다. 당초에 철종 때 영의정 김흥근의 별장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그의 소유가 되었다.
건물의 뒷바위 앞면에 '三溪洞'이란 각자가 있어 '삼계동정자'라 하다가, 흥선대원군의 별장이 된 후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대원군이 자신의 아호를 '석파'라 하고 정자 이름을 석파정이라 하였다.
6·25전쟁 직후 한때 천주교 경영의 콜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석파정 경내에는 수백년된 노송이 차일을 친 듯 서 있고, 그 밑에 연자방아 등으로 조경하여 운치를 더하고 있다. 또한 부근의 계곡에는 못을 꾸미고 장대석으로 누대를 만들어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석파정 여러 집채 중 사랑채도 있었으나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이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에 고가옥을 옮겨 지을 때 뒷뜰 바위 위로 옮겼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 '대원군별장'으로 별도 지정되었다.
5) 선바위
선바위(서울특별시 중요민속자료 제4호)는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 개의 거석이다. 형상이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서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또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전설, 또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도 있다.
자식 없는 사람이 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크다고 하여 정성을 드린다. 작은 돌을 붙이면 효험이 더욱 크다고 하여 작은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붙임'이라 하며, 이러한 바위를 '붙임바위(付巖)'라고도 한다. 일제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선바위 곁으로 옮기게 한 뒤로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되었다. 국사당은 무신당으로서 굿을 행하는 곳이니 바로 옆에 있는 선바위와 복합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6) 국사당(國師堂)
국사당(서울특별시 중요민속자료 제28호)은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현재 종로구 무악동 인왕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원래는 남산 정상에 목멱신사로 있었다. 태조 5년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여 호국의 신으로 삼아, 개인적인 제사를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냈으며 매년 봄·가을로 초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이미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었고, 다만 별궁의 나인들이 치성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먼저 이 당을 거쳐 가고는 하였다고 한다. 고종 때 명성왕후가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국사당은 1925년 남산에서 현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사인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국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사당 안에는 서울특별시 중요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된 무신도(巫神圖) 21점과 명두 7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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