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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탐라십경(耽羅十景), 한반도에 제주를 알리다
제주목사 이익태(李益泰)
17세기 후반 「지영록」 하멜 표착 지점 등 담아
첫 제주 안내서 개념 ‘탐라십경’…‘영주십경’ 원조
冶溪 李益泰
▲ 이익태 목사의 영정, 비단에 채색, 198×120.5cm
李益泰(1633~1704)는 숙종 때 제주목사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유(大裕), 호는 야계(冶溪)다. 헌종 9년(1668년) 문과 별시에서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주로 삼사(三司), 공주목사를 역임하고 홍주목사로 재임 중 1694년 5월 26일 제주목사 이기하(李基夏)가 총융사(摠戎使)로 승진하여 떠나게 되자 그 후임으로 제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재임 중 유감(乳柑) 진상이 모두 썩어버리면서 조정은 그 책임을 물어 1696년 5월 그를 파직했다. 그러나 신임 목사와의 인수인계가 늦어진데다 순풍을 만나지 못해 1697년 3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주를 떠날 수 있었다. 그는 2년 남짓한 제주목사 임기 중에 17세기 제주 역사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저서인 「지영록(智瀛錄)」을 남겼다. 그는 제주목사로 도임하자마자 1636년에 전 제주목사 신경호(申景琥)가 창건한 연무정(演武亭)을 중수했다.
▲ 이익태가 제주 목사로 부임을 받은 교지
“내가 지주(知州·제주목사)가 된지 다섯 달이 되었기에 연무정(演武亭)을 옛터에 중수하고 삼학관(三學官)을 새 청사에 두기로 하여 새로 지었다”
중수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연무정은 남문 밖 5리 광양에 있다. 몇 년 전부터 너무 헐었지만 촌에 있는 기와가 고쳐 지을 만큼은 못되어서 지금까지 삭고 훼손된 채 있었다. 마침내 여러 장사(將士)들과 의논하여, 도그내(都近川)에 있는 폐사(廢寺)의 재료를 실어다가 윤번군(輪番軍)을 보충하여 목수가 하는 일을 돕게 하고, 명월면(明月面)의 옛 가마터에서 기와를 굽는데 그 근처의 각 반(班) 하인들에게 번(番)을 면제하여 일을 시켰다. 동짓달 초에 일을 시작하였다’
이익태가 연무정(演武亭)을 다시 지은 뜻은 문교(文敎)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무비(武備)도 있어야 함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특히 변방 제주는 왜적의 침입이 잦아서 이를 방비하고자 함이었다.
제주목사에서 파직된 후 숙종 24년(1698) 전라도 능주목사, 숙종 26년(1700) 12월 예조참의, 숙종 28년(1702) 3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됐다. 같은 해 9월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였다. 숙종 30년(1704) 11월 20일에 충청도 한산(韓山)에서 향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누운산에 있다.
하멜의 표착지가 기록된 「지영록(智瀛錄)」
(◀ 지영록의 표지)
「지영록(智瀛錄)」은 17세기 후반 제주의 역사, 문화, 풍물을 잘 보여주는 저서다. 이 책에는 관덕정(觀德亭), 운주당(運籌堂), 향교(鄕校), 장수당(藏修堂) 등의 중창기와 송시열이 마지막 지은 제문(祭文)도 실려 있다. 그는 송시열을 귤림서원에 배향했고 직접 제문을 지어 올렸다. 이익태 목사가 재임 때 증감을 시킨 ‘열 가지 일’(增減十事)은 당시 제주의 실정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슬진 군제의 조정, 방호소의 군기 확립, 선격(船格)과 포작(鮑作)의 이중 고역을 감했고, 뱃사람들에게 지웠던 관가의 사용 물품을 혁파했다. 테우리(牧子)의 폐단을 개혁했고, 지방 노비 제도를 고쳤다. 육지를 오가는 선박세를 감해 주었고, 소학(小學)·상례(喪禮)에 관한 책판(冊版)을 만들어 인쇄하여 삼읍의 향교에 나눠줬다. 또 전복 따는 잠녀(潛女)들의 고충을 덜어 주었고, 기적(妓籍)을 바로잡아 노비의 역할을 조정했다.
또한 「지영록」에는 표류에 관한 기록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표한인기(漂漢人記)」·「서양국표인기(西洋國漂人記)」·「중국인표류기(中國人漂流記)」·「김대황표해일록(金大璜漂海日錄)」 등에도 제주에 표착한 표류인들이나 제주인의 표류한 기록이 실려 있다.
여기서 「서양국표인기」는 ‘하멜표류기’를 말한다. 하멜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효종 4년(1653년) 7월 24일 64명의 선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대정현 차귀진(遮歸鎭) 관할의 대야수(大也水) 연변에 표착했다. 배가 산산조각 나면서 26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밖에도 병으로 2명이 죽고 36명이 생존했다. 이들과는 네덜란드(南蠻) 출신인 박연(朴延)을 한양에서 불러와서야 소통할 수 있었다. 박연은 인조 6년(1628)에 표류하여 조선에 귀화한 후 훈련도감에서 대포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공교롭게도 표착자 중 13세 소년이 있었는데 박연의 고향 근처 사람이었다. 박연은 그 소년에게서 고향 소식을 들었고 서로가 눈물을 흘렸다.
박연의 심문(問情)이 끝나고 하멜 일행은 그의 인솔 하에 육지로 나갔고, 호남의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에 분산 배속됐다. 그로부터 13년 후 전라좌수영에 배속됐던 하멜 일행 8명은 어선으로 탈출하여 나가사키에 이르렀고, 하멜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66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그동안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일종의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가 출판되면서 비로소 조선은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제주도는 무서운 해적의 섬으로 소문이 났다.
▲ '지영록'은 하멜 일행의 표착지점을 '대야수'라고 밝히고 있다.(빨간색 테두리)
하멜 표류와 관련하여 「지영록」에서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성과는 하멜의 표착지점이다. 「지영록」의 기록이 알려지면서 추측만 무성했던 하멜 표착지점이 명확해졌다. 하멜의 표착 지점은 가파도, 화순, 산방산 밑 용머리 해변 등으로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지영록」의 기록이 알려지면서 현재 스페르베르호가 재현돼 있는 용머리 해변은 하멜의 표착지점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멜의 표착지점은 대야수(大也水) 연변, 제주의 옛 지도에는 대야수포(大也水浦)로 명기된 지금의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해변이다.
조선후기 유행한 탐라십경도
▲ 탐라도총 중 산방, 61.×40.6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영주십경(瀛州十景)의 원조는 탐라십경(耽羅十景)이다. 이익태 목사는 「탐라십경도서」(耽羅十景圖序)에서 왜 탐라십경을 지정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육지에 있는 사람들은 제주에 대해 들어 아는 게 없어 애석해 하였다. 내가 몇 년 동안 2번 순력(巡歷)을 하면서 풍속을 물어보고 틈을 내어 옛 사람들의 족적(足跡)이 닿지 않았던 볼만한 곳을 자세하게 조사하고 두루 밟아 그 가운데 뛰어난 10경(十景)을 ‘청룡면수모형화(靑龍眠手摹形畵·용이 잠자는 사이에 손바닥 모양을 그림이란 뜻. 단숨에 그린 그림을 말함)’로 한 개의 작은 병풍을 만들고 그 윗면에 내용(事跡)을 적어 보기에 편리하도록 했다”
이익태가 지정한 탐라십경(耽羅十景)은 조천관(朝天館)·별방소(別防所)·성산(城山)·서귀포(西歸浦)·백록담(白鹿潭)·영곡(靈谷)·천지연(天池淵)·산방(山房)·명월소(明月所)·취병담(翠屛潭) 등이다. 오늘날로 치면 제주를 찾는 타 지역 사람들을 위해 경치가 아름다운 관광지 10곳을 지정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방호소(防護所)’를 십경에 넣은 것이다. 조천관은 육지를 오가는 관문이고, 별방진과 명월소는 군 주둔지라는 점에서 숙박의 편리함도 염두에 둔 것 같다.
▲ 탐라도총도 중 산방, 63.5×36.0cm, 일본 고려미술관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탐라도총’(耽羅都總)과 일본 고려미술관 소장의‘탐라대총지도’(耽羅大總地圖)는 이익태의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 체제를 따르고 있다. 두 그림의 서문은 같으나 이익태 목사의 서문과는 거리가 있다. 그림 상단에 적어 넣은 내용은 이익태 목사의 탐라십경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에 탐라십경이 그림으로 제작되어 빠르게 유행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금의 영주십경(瀛州十景)은 매계(梅溪) 이한진(李漢震), 난곡(蘭谷) 김양수(金亮洙), 포규(蒲葵) 김희정(金羲正), 율하(栗下) 이용식(李容植) 등이 제주의 산수를 즐겨 찾으며 공론화한 것을 지정한 것이다.
전은자 : 2009년 10월 05일 <제민일보>
註) 영주십경(瀛州十景)
조선 말 제주도의 대표적인 지식인 이한우(李漢雨)는 제주에서 경관이 특히 뛰어난 열 곳을 선정하여 영주십경이라 하고 시적인 향취가 풍기는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지었다.
그 뒤에도 내외의 대가들이 그 시에 차운하여 많은 시를 남겨 현재까지도 제주의 대표적인 명승지로 꼽히게 되었다.
선현들의 명승지 선정
숙종 때에 제주목사로 왔던 야계(冶溪) 이익태(李益泰, 1694년 도임)는 조천관(朝天館)·별방소(別防所)·성산(城山)·서귀소(西歸所)·백록담(白鹿潭)·영곡(靈谷)·천지연(天池淵)·산방(山房)·명월소(明月所)·취병담(翠屛潭)을 ‘제주십경(濟州十景)’으로 꼽은 바 있다.
그보다 조금 뒤에 제주목사로 왔던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702년 도임)은 한라채운(漢拏彩雲)·화북재경(禾北霽景)·김녕촌수(金寧村樹)·평대저연(坪垈渚烟)·어등만범(魚燈晩帆)·우도서애(牛島曙靄)·조천춘랑(朝天春浪)·세화상월(細花霜月)을 제주의 팔경(八景)으로 꼽았다.
이형상의 팔경 선정은 한라채운(漢拏彩雲)과 어등만범(魚燈晩帆)의 2경을 제외하고는 제주도의 동북쪽에 치우쳐 있다. 그러나 이익태가 단순히 열 곳의 지명만을 열거한 것에 비하여 이형상은 지명 뒤에 구체적인 볼거리를 밝히고 있다는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후에 그대로 답습된다.
또 순조 철종 연간에 영평리에 살았던 소림(小林) 오태직(吳泰稷, 1807~1851)은 나산관해(拏山觀海)·영구만춘(瀛邱晩春)·사봉낙조(紗峯落照)·용연야범(龍淵夜帆)·산포어범(山浦漁帆)·성산출일(城山出日)·정방사폭(正房瀉瀑)의 8곳을 선정하였다. 오태직은 이렇게 선정을 하였으면서도 특별히 제주팔경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방사폭(正房瀉瀑)과 나산관해(拏山觀海) 이외에는 제주에서 성산까지, 즉 동북면에 치우쳐 있고 특히 제주시 지역에서만 3개를 뽑아 섬 전체를 두루 아우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조선 헌종 때 제주목사로 왔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도 역시 열 곳을 선정하였는데, 영구상화(瀛邱賞花)·정방관폭(正房觀瀑)·귤림상과(橘林霜顆)·녹담설경(鹿潭雪景)·성산출일(城山出日)·사봉낙조(紗峯落照)·대수목마(大藪牧馬)·산포조어(山浦釣魚)·산방굴사(山房窟寺)·영실기암(靈室奇巖)이 그것이다.
이한우의 영주십경
현재까지도 제주의 명승지·관광지와 일치하고 있고 제주도 전역을 대상으로 경승지를 영주십경으로 선정한 인물은 매계(梅溪) 이한우(李漢雨, 1818~1881)이다. 이한우가 선정한 영주십경은 다음과 같다.
城山日出 : 성산의 해돋이
紗峯落照 : 사라봉의 저녁 노을
瀛邱春花 : 영구(속칭 들렁귀, 방선문)의 봄꽃
正房夏瀑 : 정방폭포의 여름
橘林秋色 : 귤밭의 가을 빛
鹿潭晩雪 : 백록담의 늦은 겨울눈
靈室奇巖 : 영실의 기이한 바위들
山房窟寺 : 산방산의 굴 절
山浦釣魚 : 산지포구의 고기잡이
古藪牧馬 : 풀밭에 기르는 말
이한우가 선정한 영주십경은 이원조 제주목사의 선정 품제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지어진 연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원조의 품제를 이한우가 바꾸었는지 반대로 이한우의 품제를 이원조가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 차례와 명칭에서도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주목할 것은 이한우가 영주십경을 배열해 놓은 순서이다. 이한우는 먼저 ‘성산출일’ 다음에 ‘사봉낙조’를 놓아 하루를 말하고, 다음으로 춘하추동을 두어 한 해를 이야기하였다. ‘영구춘화’ ‘정방하폭’ ‘귤림추색’ ‘녹담만설’이 그것이다. 이렇게 길어지는 시간의 뒤에 변함이 없는 모습의 바위인 ‘영실기암’ 또는 속세와는 절연을 하고 영원의 진리를 추구하는 절인 ‘산방굴사’를 주목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고기 잡는 모습과 풀밭에서 기르는 말을 보는 것으로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영원한 시간의 흐름과 변함없는 자연과 그 속에 사는 인간의 삶을 제주의 열 곳 명승지에 빗대어 놓은 것이다. 이후 이한우는 영주십경에 서진노성(西鎭老星: 서진에서 보는 노인성)과 용연야범(龍淵夜帆: 용연의 밤 뱃놀이)을 더하여 영주십이경(瀛洲十二景)을 만들기도 하였다.
성산일출
제주의 동쪽 끝 성산포 해안에 돌출한 우아한 자태의 산이 있다. 동틀 무렵 일출봉 정상에 오르면 바다에서 이글거리며 솟아 오르는 일출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이한우의 시 제목은 성산출일(城山出日)로 되어 있다.
山立東頭不夜城
扶桑曉色乍陰晴
雲紅海上三竿動
煙翠人間九點生
龍忽天門開燭眼
鷄先桃峀送金聲
一輪宛轉升黃道
萬國乾坤仰大明
동쪽 머리에 서있는 산이 불야성 같더니
해 뜨는 곳 새벽빛 잠깐에 어둠이 걷히네
바다 위 붉은 구름 해를 따라 걷히니
사람 하는 마을에 푸른 연기 솟는다
하늘 문에는 문득 용이 눈을 부릅뜨고
복사꽃 골짜기에서 닭 우는 소리 들리네
둥근 해가 높이 솟아오르니
온 세상 나라들이 밝음을 우러른다.
사봉낙조
제주시에 위치한 사봉은 서북쪽으로는 바다에 임하고 동남으로는 한라산을 향하여 우뚝 솟은 오름이다. 석양에 사라봉에 오르면 붉은 태양이 한순간 붉게 퍼지며 바닷물 속으로 장엄하게 빠지는 낙조가 절경이다.
誰把紅紗繞碧峰
斜陽頃刻幻形容
蜃樓變態飜黃鶴
鯨窟浮光戱赤龍
歷歷孤村煙外樹
依依遠寺月邊鐘
暫停日馭同寅餞
期我扶桑曉露逢
누가 붉은 비단을 푸른 봉우리에 둘렀는고
잠깐 해지는 사이에 모습이 바뀌었네
신기루는 변하여 황학이 되고
고래굴에 뜬 빛 적룡을 희롱한다
외진 마을 나무 연기 너머에 뚜렷하고
아득히 먼 절 종소리가 달가에서 들린다
잠깐 해 수레 멈추고 송별 자리 함께 하여
부상의 새벽길에 다시 만날 기약한다
영구춘화
제주시 오등동 방선문은 용담동으로 흐르는 한내 상류에 있다. 하천 가운데 거대한 기암이 마치 문처럼 서 있다. 맑은 시냇물, 그리고 봄철이 되면 계곡 양쪽과 언덕에 무리를 지어 피어난 진달래 등이 장관을 이룬다. 조선시대에 제주에 부임한 제주목사와 육방 관속이 봄이면 행차하여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兩岸春風挾百花
花間一徑線如斜
天晴四月飛紅雪
地近三淸影紫霞
影入溪聲通活畫
香生仙語隔煙紗
請君須向上頭去
應有碧桃王母家
양쪽 언덕에 봄바람이 온갖 꽃들 껴안고
꽃무더기 사이로 한 가닥 오솔길 비껴 있다
맑은 사월에 붉은 꽃잎이 눈처럼 날리고
선계 가까운 땅에는 붉은 이내 비친다
그림자 잠긴 시내는 살아 있는 그림이고
신선의 말소리만 들려 모습은 비단연기에 가렸다
그대에게 청하노니 위쪽으로 올라가 보시오
푸른 복숭아 열린 서왕모가 있을 터이니.
정방하폭
이 폭포는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로 낙하 높이는 23m이다. 낙하수의 물보라에 의한 무지개와 인근 바다의 파도 소리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急瀑雷聲破正房
炎雲倒瀉紫煙光
雪飛三伏靑山冷
虹掛半空白日長
直倒連天歸大海
橫流落地作方塘
乃知普澤終成雨
進入神龍造化藏
거센 폭포 소리 정방폭포를 뚫으니
한여름 구름이 거꾸로 자주 빛 연기를 쏟아 부었다
삼복에도 눈이 날려 청산이 서늘하고
긴긴 여름날 무지개가 허공에 걸렸네
거꾸로 떨어진 물은 하늘에 이어진 채 바다로 돌아가고
땅에 떨어져서는 옆으로 흘러 연못을 만들었네
마침내 비를 내려 널리 적셔주려고
깊숙한 곳 신룡이 조화 부리는 것을 알겠네
귤림추색
10월 중순 이후 절정을 이루는 노란 감귤과 가을바람이 빚어내는 정취는 단풍 일색인 다른 고장의 가을과는 사뭇 다르다. 특히 서귀포, 남원, 중문 쪽의 남제주군 지역에 감귤 농원이 밀집해 있어 귤림추색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黃橘家家自作林
楊州秋色洞庭心
千頭掛月層層玉
萬顆含霜箇箇金
畵裏仙人乘鶴意
酒中遊客聽鶯心
世間欲致封侯富
底事朱門桃李尋
누런 귤 집집마다 저절로 숲을 이루니
동정호 가에 있는 양주인 듯 가을빛이 깊었네
가지 끝마다 걸린 달은 층층이 옥이요
서리 머금은 열매는 알알이 금이로다
그림 속에 선인이 학을 탄 듯
술 취한 나그네가 꾀꼬리 소리 듣는 듯
세상에 부귀영화 이루려 하는 사람들
무엇하러 권세가를 찾아다니는고
녹담만설
해안 지대는 노란 유채꽃, 산등성이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한 봄이 찾아와도 한라산의 정상은 아직도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다. 이처럼 산 밑 해변은 꽃과 신록이 무르익어 가는데도 여전히 백설을 이고 사는 한라산을 녹담만설이라 하였다.
天藏晩雪護澄潭
白玉崢嶸碧玉涵
出洞朝雲無影吐
穿林曉月有情含
寒呵鏡面微糊粉
春透屛間半畵藍
何處吹簫仙指冷
騎來雙鹿飮淸甘
하늘이 만설을 가두어 맑은 못을 지키니
백옥이 우뚝 솟았고 푸른 옥이 잠겼다
골짜기 내려오는 아침구름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고
숲을 뚫고 나온 새벽달은 정을 머금었다
물 위에 찬 기운 부니 분을 바른 듯하고
병풍 바위에 봄이 스미니 절반은 쪽빛이라
어디에서 피리 부느라 손이 시린 신선
뿔달린 사슴 타고 와 맑은 물을 마시는가
영실기암
한라산 정상 서남쪽 허리께에 숨어 있는 깎아 세운 듯한 천연의 기암 절벽이다. 전설을 간직한 채 우뚝우뚝 솟아 있는 오백장군들이 마치 조물주의 호령에 부동 자세를 취한 듯하다. 영실기암의 사계절은 특히 장관으로 알려져 있다.
一室煙霞五百巖
奇形怪態總非凡
僧依寶塔看雲杖
仙揖瑤臺舞月衫
漢客窮河徒犯斗
秦童望海莫停帆
將軍或恐神氣漏
墨守靈區口自緘
구름 덮힌 골짜기 오백 개의 바위
기묘한 모습이 예사롭지 않네
스님이 탑에 기대어 구름을 보는 듯하고
요대에서 신선이 달빛 소매로 춤을 추는 듯
한나라 나그네 황하 물줄기를 찾다가 북두를 범하고
진나라 아이들 바다를 바라보며 배를 멈추지 못했네
장군들은 하늘의 기밀 샐까 두려워
신령한 곳 굳게 지켜 입을 다물었다
산방굴사
안덕면 사계리 동쪽에는 거대한 준산이 하늘로 솟아 있다. 산세가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산방산이다. 고려의 승려 혜일이 마음을 닦았다는 산 중턱의 동굴이 바로 산방굴사이다. 이 동굴에서 바라보는 해안선과 경치는 매우 빼어나다.
化工多巧斲靑山
洞設僧門雲掩關
鍊石乾坤包上下
孔針世界穿中間
倒懸樹色千年戱
點滴泉聲萬古閑
寒榻香消雙佛坐
幾時甁鉢鶴飛還
조물주가 재주 많아 푸른 산을 깎아내어
굴속에 절을 짓고 구름으로 빗장 걸었고
돌을 다듬어 천정과 바닥을 감싸 놓았네
침으로 뚫어 세상은 그 중간에 만들었네
거꾸로 매달린 나무는 천년을 희롱하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만고에 한가롭다
향이 다한 차가운 자리에는 부처 두 분 앉혔는데
어느 때나 큰 스님이 학을 타고 돌아 오실런지
산포조어
제주의 관문인 산지포는 옛날 강태공들이 한가로이 낚시대를 드리우던 곳이다. 지금은 제주항이 들어서서 흔적조차 없지만 지금의 측후소로 올라가는 길 밑에 아름다운 모양의 홍예교가 있었고 홍예교 밑 깊은 물에는 은어가 뛰어 놀았다고 한다. 그 옆에는 푸른 빛의 맑은 샘이 흘렀다 한다.
兩兩輕槎出釣魚
海天一色鏡中虛
落花飛絮春和後
綠水靑山雨歇初
何意煙雲隨往返
多情鷗鷺忘親疎
如今此景輸高手
應作人間未見書
짝지어 고기잡이 나가는 테우 배들
하늘과 바다 일색으로 거울 속 허공이라
꽃 지고 버들 솜 날리는 따스한 봄날
푸른 물 푸른 산 비가 막 개었다
어찌하여 안개구름은 가고 오는고
갈매기는 다정하여 친소를 잊었구나
지금 이 경치를 솜씨 좋은 시인이 본다면
세상에서 못 보던 글을 지을 터인데
고수목마
제주도는 예부터 말의 방목과 서울 진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한라산 중턱의 탁트인 초원 지대 곳곳에서 수백 마리의 조랑말이 떼 지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은 제주만의 매력이다.
雲錦裁來各色駒
靑虯紫燕又晨鳧
桃花細雨行行蝶
芳草斜陽渴渴烏
霧濕班毛皆變虎
風飛黃鬣各疑狐
投鞭欲掃東西穢
誰有經綸滿腹蛛
비단구름을 마름질한 듯 각색의 망아지들
청개구리 자색제비 붉우스런 오리 색일세
복사꽃 가랑비에 날아드는 나비같고
우거진 들풀 지는 해에 목마른 검은 말이라
안개 젖은 무늬 털은 모두 호랑이 같고
바람에 날리는 누런 갈기는 여우 같구나
채찍 휘둘러 세상 온갖 더러움 쓸어버리고 싶으나
그 누가 거미 뱃속처럼 가득 찬 경륜을 지녔는가?
첫댓글 영주 10경 중 고수목마의 '고수'는 '곶자왈'을 의미한다는 풀이도 있던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차귀진하대야수연변은 놀랍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