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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k Davidson, Kelly Digges,
and Kimberly J. Kreines 원문
지난 이야기: 돌파구
힘을 추구하는 테제렛이 대 영사의 자리에 올라 기라푸르 도시 자체를 손아귀에 넣었다. 하지만 그의 폭거에 대항하기 위해 들고 일어난 자들이 있다. 혁명파 발명가들은 에테르 허브 공격을 계획했고, 이로 인한 승리는 그들 자신의 발명은 물론――반역에도 힘을 실어줄 것이다.
기라푸르는 한시도 쉬지 않고 스스로를 발전시켜왔다. 오래된 건축물은 철거되고, 더 강하고 높으며 질 좋은 재료와 뛰어난 기술로 재건축되었다. 거의 모든 지구의 광활한 광장이 요 몇 년간 수복과 재건축을 거듭해 왔고, 역사와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도시 전역을 건설과 노동의 냄새를 품은 먼지가 뒤덮었고, 오래된 나무는 물론, 녹슨 황동, 부식의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는 시대란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냄새는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림자가 짙은 좁은 뒷골목, 재건축 허가가 있을 리 만무하고 다수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바로 이 구역을, 후드로 머리를 가리고 걸어가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잊혀진 뒷골목을 걷는 찬드라 날라르의 모습이 있었다.
“여긴 몇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네.” 피아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한 에테르붙이 가족들이 여기 살고 있었지. 키란……옛날에 그이랑 함께 온 적이 있었어.”
찬드라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엄마, 여긴 왜 왔어요?”
“곤티는 이곳을 영사관의 감시망에서 계속해서 벗어나게 하고 있어. 우리 일에 공감해줄 사람들을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피아가 인적 없는 출입구를 올려다 보더니, 윤활유와 연기, 그리고 향신료의 냄새를 맡았다. 이어서 자물쇠가 미끄러지듯 움직이면서 문이 열리자, 소리와 빛의 홍수가 뒷골목으로 흘러 나왔다.
클럽 안으로 들어간 찬드라가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쿠션이 올려진 의자가 둥근 테이블 주변에 반원형으로 놓여져, 무릎 정도 높이 되는 소형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20개도 넘는 테이블 위를 장식한 램프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속삭이는 사람들의 대화를 장식했다.
무대 위에는 아련한 빛과 함께, 현악기 연주자가 주목을 받기 위함이 아닌,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조용한 연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피아가 연주자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보이자, 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잘 둘러봐, 찬드라.” 피아가 미소 지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기라푸르 최고의 발명가, 조종사, 사상가들이야. 박람회에서 일어난 일을 토로하면서, 움직일 계기를 부여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 그들 모두가 타고난 혁명가들이란다. 하지만 정작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가만히 듣고만 있던 찬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니까, 여기서 연설을 할 생각이라 이 말이야? 이 사람들의 머리에 피를 오르게 해서? 좋은 생각인데?”
“사실은 있지, 여기 와서 내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어. 혁명파에 관한 이야기들을. 그럼에도 결정을 못 내리더라. 그러니까 뭔가 다른 게 필요해. 찬드라, 그걸 네게 부탁하고 싶어.”
찬드라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말이 이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입을 열고, 닫고를 반복하다, 겨우 말을 이었다. “엄마, 있잖아……거짓말 안 보태고 ’감격의 연설’ 같은 건 도무지 나랑은 안 맞아. 애초에 무슨 소릴 하란 말이야? 아무도 날 모를 텐데.”
“그렇지가 않단다, 모두가 널 알고 있어. 네가 우리를 위해 뭘 해주었는지, 어디서 온 것인지 까지도.” 피아가 연주자에게 다시 손을 흔들자, 노래 소리가 멈추더니, 소소한 갈채를 받으며 무대 위에서 퇴장했다. “느낀 그대로를 전하기만 하면 돼. 그들에게 움직일 이유는 이미 충분하고도 남아. 남은 건 그저 그 불꽃을 지펴줄 존재가 필요할 뿐이지.”
“응, 하지만……”클럽 안의 수많은 얼굴들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찬드라가 움직임을 멈췄다. 희망, 낙담, 분노, 무표정의 얼굴들……하지만 이곳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희미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불꽃을 지피는 거야. 까짓 거 한번 해볼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무대 위로 올라가 입을 열었다.
“에, 안녕하세요. 전, 응……다들 알고는 있을 것 같지만 찬드라 날라르, 피아 날라르의 딸입니다. 아……키란의 딸도 되죠.” 거기서 말문이 막혔지만,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간신히 숨을 들이마셨다.
“우리 아빠 아는 사람 있어요?” 곳곳에서 고개가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이 안에는……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빠에 대해서 뭘 알죠? 전 아빠를 알고는 있지만, 틀려요. 다들 아빠랑 같이 일하고, 얘기하고, 웃었지만, 전 그러질 못했어요. 그 놈들이 저한테서, 그리고 엄마한테서 아빠를 빼앗아 갔으니까요. 엄마가 맞서 싸우겠다고 해도, 다들 그저 묵묵히 입 다물고……아무것도 안 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놈들은 우리 엄마한테서 아빠를 빼앗아 갔다구요, 그니까 엄마는 지금도 혼자서 싸우는 거고요. 그러는 사이에 다들 뭘 했죠? 아직 영사관 놈들에게 덜 뺏겨서 그런 건가요?”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찬드라의 말에 기분이 상한 자도 있었지만, 아무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지는 않았다. 그걸 본 찬드라가 계속했다. “맞아요, 놈들은 우리한테서 전부 빼앗아 갔어요. 모두의 작품을, 노력을, 도구를, 전부. 애초에 그런 놈들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다들 여기 주저 앉아서 죽어라 마시기만 하고, 불평만 늘어놓고 있잖아요. 빼앗긴 것을 한번 생각해봐요, 아직도 빼앗길 게 남아 있나요?”
거기서 찬드라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모두를 노려보았다――시선과 고글 렌즈의 조용한 바다에 분개와 무표정이 반사되었다. “……잊어버려요, 그럼.”
갑자기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뜨거운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찬드라가 피아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엄마. 내가 얘기하는 게 아니었어……”
하지만 얼굴에 미소가 만연한 피아가, 딸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쉿, 주위를 둘러보렴.”
한 분노를 폭발시킨 젊은 여성이 찬드라에게 다가왔다. “네 말이 맞아, 아버지 일은 미안했어. 하지만 우리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우린 놈들한테 배를 빼앗겼어, 그게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는데! 나한텐 그게 전부였어, 그런데도 싸우라고? 대체 어떻게?”
찬드라가 주먹을 꼬옥 쥐었다. “나, 난――!” 그 순간 피아가 등 위로 조용히 손을 올리자, 이빨을 부딪히며 입을 다물고는, 목덜미의 털이 거꾸로 서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사람들이 젊은 여성의 의견에 동의하며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난 도구를 전부 빼앗겼어, 이젠 일터도 텅텅 비었고!” 나이 든 드워프가 말했다.
“그 발성기에 3년이나 소비했는데! 그리고 설계도랑 시제품도! 이젠 아무것도 안 남았어!”
출자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불만을 털어놓자, 불꽃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폭주한 감정이 거리 밖으로 쏟아져 나가기 일보 직전까지 다다랐다. 이미 찬드라의 존재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그걸 본 찬드라가 당황하며 어머니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있잖아……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게……어머, 저길 좀 봐.”
엄청나게 화려한 장식을 한 에테르붙이가 무장한 호위병을 이끌고 대기실에서 나타나, 한 손을 흔들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성난 목소리를 죽임과 동시에, 분노의 뜨거운 감정이 두려움으로 차갑게 식었다.
에테르붙이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정숙하세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이곳은 평온과 성공이 약속된 장소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소란을 일으킨 사람을 내쫓는 것이 정상입니다만.” 그리고 피아를 향한 그의 눈이 순간, 어슴푸레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저도 여러분의 불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불만에도 가치가 있으니까요. 제가 여러분의 귀가 솔깃해질 만한 이야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그리고 피아와 찬드라, 출자자 몇 명을 안쪽에 있는 방까지 따라오도록 손짓했다. 그와 동시에, 호위병들이 출구 앞에 서서, 양 손으로 무기를 잡았다――뽑지는 않았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찬드라가 피아를 보면서 ‘극적으로’ 이곳을 떠날 것인지 말 없이 물었지만, 피아는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찬드라를 비롯한 사람들이, 양처럼 온순하게 에테르붙이를 따라 장소를 옮겼다. 호위병 한 사람이 집무실의 화려한 장식에 숨겨진 스위치를 조작하자, 폭 좁은 문이 힘차게 열리면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비밀 통로는 비좁았지만, 소형 에테르 램프가 주변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공기는 따뜻했고, 지하통로에서 연상되는 축축한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다양한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알고 나면 분명 후회할 것 같지만, 어디로 데리고 가고 있는 거야?” 한 조종사가 매듭 끈을 만지작거리면서, 의문을 품은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모르시겠습니까? 기라푸르에서 가장 철통 같은 곳에 계시는 분과의 회담 장소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더 깊어진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합의를 하기 위해서 말이죠.”
“곤티가 있는 곳이라 이 말이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찬드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뭐? 잠깐 기다려봐, 말도 안돼. 곤티는 전에 우릴 팔아 넘겼었잖아, 돌아가야 해.” 그리고 빛나는 주먹을 머리 위로 올렸다. “필요하다면 직접 출구를 만들겠어.”
앞서가던 에테르붙이가 의아하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 좁고 가연성이 충만한 통로에서 화염술을 쓰지 말아주셨으면 하는군요. 그렇게까지 비관하실 것 없습니다. 이제 곧 도착하니 불만이 있다면 곤티 님께 직접 말씀해주시지요.” 그리고 문을 밀어 젖히자, 호화찬란한 집무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전방에 한 에테르붙이가 긴 탁자 앞에 앉아, 얼굴 앞에 양 손가락을 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늦었군, 우리에게 있어서 시간은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다. 어서 자리에 앉아라.”
다른 이들이 움직이는 와중에도, 찬드라는 입구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를 영사관에 팔아 넘기고는 이제 와서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야?”
“에테르를 한번 보아라! 나는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 뛰어나지. 난 너희를 일부러 움직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세심하고 신중한 계획을 남몰래 준비해왔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직 모자라다. 거기서 너희의 행동이 필요로 해지지. 그만 앉아주지 않겠나?” 그리고 자리가 빈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피아가 바로 그 옆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내 이해가 확실하다면.” 곤티가 손가락을 교차시키면서 말을 이었다. “너희에겐 도구도, 배도, 에테르도 없다. 영사관에 대항할 만한 무기란 무기는 전부 빼앗겼지.”
그리고 뒤쪽을 향해 신호를 보내자, 한 호위병이 커다란 문을 열어, 빛나는 저장고 내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영사관의 마수에서 귀중품을 숨기는 것에 관해선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지.”
《숨겨진 비축물》 아트 : Darek Zabrocki
곤티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기라푸르 최고의 금지품 수집가로써, 너희가 폭동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것을 제공하겠다.” 그리고 피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부를 주겠다……공익사업의 정신으로 말이야.”
“폼 잡지 말아줄래?” 찬드라가 말했다. “그래서, 네 요구가 뭐야?”
곤티의 눈이 겨울의 별처럼 번뜩였다. “그건 우리가 서로에게 있어 얼마나 유용한지에 따라 좌우되겠지. 어떤가?”
《수석 건축가 스람》 아트 : Chris Rahn
스람이 에테르 허브 제어실에서 소형 펜치를 입에 문 채, 창 밖을 내다보자, 공장을 달리는 에테르관에 반사된 지지대와 작업용 통로가 밝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일전, 한 엘프가 그에게 에테르 허브는 기라푸르의 심장 그 자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멋들어진 표현이었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그만한 은유도 없었다.
에테르관을 관찰하던 중, 막대 하나가 어둡게 점멸되는 것이 보였다.
“12분기점에서 압력이 저하.” 부하 직원의 목소리.
기술자의 침착한 목소리에 반해, 제어실 안이 신경질적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에 ‘고장 난’ 네 번째 접합점, 스람 자신이 목격한 두 번째 접합부이기도 했다.
‘13과 9로 우회.” 스람이 입을 열었다. “현재로선 수리를 보류.”
기술팀이 처음 두 번째 접합부를 고치기 위해 파견되어, 흔히 있는 문제라는 사실이 판단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시간 전, 한 영사관 병사가 스람의 자택을 찾아와, 에테르 허브에 문제가 있으니 수석 기술자인 그가 당장 필요하다는 뜻을 전했다. 덕분에 심황 향기가 나는 따뜻한 우유를 손에 들고 침대 위에 누워있어야 할 시간에, 지금 이렇게 펜치를 물고 파손 상태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에테르 공급이란 일은 따분하기 그지없는 작업이다. 이곳 거점의 기술자들은 도시로 보내는 에테르를 관리하고, 필요한 지점으로 보내는 일을 한다. 최우선이 영사관 시설, 그리고 주민들의 필요에 따라 에테르가 공급된다. 본래 에테르는 공평하게 배급되어야 하는 것이 이상적이었지만, 발명 박람회를 위한 회장 건설이 시작되자, ‘우선도 낮은 주민’ 에 대한 분배는 적어졌고, 그로 인해 불만의 소리가――스람은 물론 시민의――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유사일 때의 대응 방책이라고 스스로의 의문을 불식시키려 했다. 틀림없이,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지만 계엄령이 발령되고 나서부터는, 그 ‘유사 대응’ 이라는 것이 일상화 되어버렸다. 아니, 더 최악인 것은 이것이 ‘공적 임무’ 라는 사실이다. 영사관 관할로 주민들의 에테르 배급이 정해졌고, 설령 배급을 받을 수 있어도 평소보다 훨씬 더 적은 양이었다. 그에 반해, 영사관 시설로는 공급량을 늘리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고위 건설관.” 조수 라지니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응?”
“캄발 영사께서 뵙길 원하십니다.”
고작 에테르관 문제로 영사가 이런 한밤중에 찾아올 리가 없는데? 분명 뭔가 다른 용무가 있어서겠지.
스람이 펜치를 입에서 떼고, 숙고한 뒤, 다시 입에 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캄발이 거기 있었다――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떠다니는 에테르 장치를 동반한 채.
장뇌와 백단향 냄새가 스람이 있는 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는 인간치고는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자신보다 작은 스람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배급의 영사 캄발》 아트 : Vincent Proce
“영사님.” 펜치를 입에 문 채, 스람이 입을 열었다.
어떤 생각을 할 때, 입에 물건을 물고 있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상관들에게 잔소리를 들어왔다. 비위생적, 야만스러운데다 동료와 도구 모두에게 예절이 되어 있지 않다는 등. 하지만 현재 스람은 고위 건설관이 되었고, 상관들 대부분이 은퇴했거나, 그 중 몇은 지금은 그에게 보고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캄발, 배급의 영사는 그러한 상관들 중에서도, 지금까지 스람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스람은 이 남자를 혐오했는데, 그와 동시에 캄발 또한 명백하게 스람을 경멸했다.
“고위 건설관, 요샌 야간 근무까지 하나?”
스람이 입에서 펜치를 뗐다.
“작은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저야말로 배급의 영사께서 야간근무 중인 감독관과 담소나 하러 여기까지 와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긴급상황이니까 말이지. 자네가 여기 있는 게 오히려 잘 되었네.”
그가 제어실 내벽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에테르 흐름도계가 도시 곳곳의 배급량을 표시하고 있었는데, 기라푸르 시민들에게 흐르는 그것이 아주 희미하거나, 점멸해 있는 것에 반해, 영사관 시설은 힘차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일찍 있었던 일이네. 에테르탑에서 배급명령이 있었는데, 어째서 무시했나?”
“무시라니요, 전 깊이 숙고한 뒤, 명령에 오류가 있다고 결론지었을 뿐입니다. 올바른 명령을 받으면 그 즉시――”
“고위 건설관, 오류가 아닐세. 대 영사께서 직접 명령서에 서명을 하셨단 말이네.”
스람이 코웃음 쳤다.
“죄송합니다만, 영사님. 명령서를 직접 읽어보셨습니까? 일주일 동안 도시 전체의 에테르 저장고를 고갈시킬 정도의 양을 무기한으로 공급하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고위 건설관. 이건 명령이다.”
캄발, 이 사람과는 마음에서부터 통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론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영사님, 그러기 위해선 도시 전역의 흐름을 차단시켜야 합니다. 다른 공적 시설도 마찬가지지요. 저에게 그럴만한 권한은――”
“필요한 조정에 필요한 지식은 자네에게 맡기고, 권한을 위임하겠네.”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는 지금 지위를 이용해 자신에게 법적으로 맞지 않는 명령을 따르도록 하려는 수작이다.
“캄발 영사, 그건 불가능합니다. 직무유기가 따로 없질 않습니까.”
“고위 건설관, 이건 자네에게 내려진 명령일세. 자네가 이행하느냐, 아니면 다른 이가 자네를 대신해 이행하느냐지.”
“서류를 주십시오. 영사님의 사인이 있는 서류 말입니다.”
캄발이 한동안 말 없이 스람을 노려보다, 콧수염을 일그러뜨렸다.
그 순간, 제어실에서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9분기점에서 폭발!” 기술자 한 명이 소리쳤다.
“뭐라고!” 스람이 창문 쪽 밖을 내다보았다. 눈부신 푸른 물보라가 밤하늘을 비추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보고!”
압력의 급강하, 우회안, 피해의 상태 등, 기술자들이 상황 보고를 일제히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스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지금 당장 도망치십시오.”
그 말을 들은 캄발이 눈을 크게 떴다.
“배급 건은 나중에, 지금은 이곳을 사수하는 게 선결입니다.”
영사가 발길을 돌려, 추종자들과 함께 계단 위로 몸을 감췄다――옥상에 비행선을 대기시켜 놓은 거겠지, 좋아.”
제어실이 다시 흔들리더니, 이번엔 폭발로 인한 푸른 섬광이 방 전체를 뒤덮었다. 가까워. 23인가?
“23접합점에서 폭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건가.
경보가 울리는 제어실 안이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기술자들이 수리팀을 보내, 에테르 흐름을 우회시킴과 동시에, 경비대가 다수의 침입을 보고했다.
스람이 펜치를 입에 물고, 귀를 기울여 이 공격의 전모를 파악하려 했다. 9, 23. 아직 치명상까진 아니야. 상당한 규모의 폭발이었지만, 수리는 가능해. 허브를 정지시키려는 것이 목적이라면, 혁명파는 잘못된 선택을 한……
잠깐.
허브 자체를 방해할 목적이라면, 9와 23을 노렸다는 것이 더 악랄하질 않은가. 중요한 설비엔 상처 하나 주지 않고, 벽에 큰 구멍을 내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아니던가?
“절단해라.” 펜치를 입에 물고 말했다. “완전 봉쇄!”
“완전 봉쇄.” 직원들의 복창이 이어졌다.
에테르를 빼가겠다는 수작인가? 폭발은 단순히 시설 경비병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양동이고, 그 사이에 가능한 많은 에테르를 빼내갈 작정이라면, 기술자들이 이곳 전체의 에테르를 얼마나 간단하게 차단시킬 수 있는지를 과소평가 했다는 거다.
스람이 경비 책임자인 드워프, 카일라시를 보고 말했다.
“경비대장, 방금 폭발로 경비대가 돌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네.”
“그리 보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기술자 중 한 명, 머리를 짧게 자른 베달켄이 자리에서 뒤돌아보며 말했다.
“절단명령에서 반응이 없습니다. 송수관은 지금도 열린 채입니다.”
“그럴 리가?” 훈련과정을 막 끝낸 젊은 인간 남성이 스람에게 물었다.
스람이 눈을 감고, 에테르 허브의 설계도를 머리 속에 그렸다. 때때로 꿈에서까지 나올 정도로 숙지하고 있는 그것을.
“가능하다. 누군가가 억지로 연다면.”
“어떻게 해서 말입니까? 격벽은 에테르관 내부에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젊은이는 훈련을 마친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도, 스람과 거의 맞먹을 정도로 설계도를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해선 무지한이었다.
“에테르붙이가 얼마나 숨을 쉬지 않고 있을 수 있지?” 스람이 물었다.
“그들은 숨을 쉬지 않――”
“그 말이 맞다.” 일년 전, 살아있는 에테르붙이를 에테르관 안에서 포박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완강함에는 크게 놀랐었다. “펌프를 끊어라, 당장!”
가능하면 이 수단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재 기동을 하는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단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수법 아니면 방법이 없어.
기술자들이 명령을 복창했다. 펌프에서 나는 미세한 진동이 약해지더니, 곧 사라졌다. 하지만 대신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로 들리는 진동음, 설마 전투소리인가?
“경비는 어찌 되었나?”
“침입이 확인되었습니다.” 카일라시가 대답했다. “그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통신용 비행기계를 탈취당했습니다. 이젠 직접 연락을 해야 합니다.”
카일라시가 보고를 마치자, 직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당장 펄스 무기를――”
“절단 확인, 우회――”
“――자동기계가 반역을――”
“방호문이 반응하질 않습니다!”
“――저런 기계는 본 적이――”
“――화염 방사기를 가지고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불이――”
“――에테르관에서 기어 나와서――”
“충차다! 문을 지켜라!”
스람이 창 밖을 내다보았다. 남쪽 엘리베이터에 어떤 장치를 설치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그리고 섬광이 치더니, 둔한 충격음이 연달아 이어졌다.
발리스타 화살 정도 되는 케이블 두 개가 제어실 창문을 깨고 들어왔다. 스람이 그걸 간신히 피하자, 기술자들이 몸을 숨겼다.
케이블이 끌리더니, 날카로운 발톱이 벽에 큰 소리를 내며 박혔고, 몇 피트 밖에서 두 번째 케이블이 움직였다.
스람이 가까이 있는 케이블을 붙잡아, 그것을 떼내기 위해 펜치를 움직였다. 하지만 갈고랑이에서 충격이 나와, 손가락을 마비시켰다.
큰 회전음이 들리자, 스람이 위험에도 불구하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케이블 두 개 사이에 걸린 소형 곤돌라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곤돌라 안에 혁명파 열명 정도가 있었는데, 처음 보는 무기와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제어실의 안전문이 파괴됨과 동시에, 혁명파가 개조시킨 영사관 자동기계를 이끌고 뛰쳐 들어오자, 카일라시가 그들을 맞아 전투를 시작했다.
이어서 곤돌라가 제어실 벽에 부딪히자, 그 안에 있던 혁명파들이 제어실 안으로 돌입해 들어와, 순식간에 스람 밑의 기술자들을 제압했다. 이곳의 혁명파 대다수가 스람을 알고 있었다. 시민들을 위한 에테르 흐름을 끊은 장본인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들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스람 또한 머리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곤돌라에서 나타난 혁명파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고글을 벗었다――위엄을 두른 중년 여성. 스람도 투기장에서 본 모습이었다.
《피아 날라르》 아트 : Tyler Jacobson
스람이 허리를 곧게 펴고 말했다.
“피아 날라르, 네가 이 계획을?”
그 소리를 들은 피아가 큰 목소리로 웃었지만, 거기에 악의는 없었다.
“누구든 아무렴 어때, 우린 그저 우리의 소유를 되찾으러 왔을 뿐이야.”
그리고 혁명파로 가득 찬, 제어실을 둘러보았다.
“날라르……” 스람이 방금 전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부하들은 병사가 아니야. 하지만 요 근래 있었던 배급으로 너희 중에……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잘 알아.”
“그래.” 피아가 말했다. “대우는 잘 해줄게, 내가 보장해.”
“그럼 항복하겠네. 에테르 허브는 너희 거야.”
지금은 말이지.
영사관군에게 힘으로 에테르 허브를 빼앗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혁명파 공격 부대가 출발한지 벌써 몇 시간이 지났지만, 그들이 승리했건 못했건, 라시미와 미털에게는 비행정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동굴 같은 창고 으슥한 곳, 비축된 에테르를 사용한 이 조명조차도 에테르 허브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얼마 가지 못해 꺼져버리겠지. 언제 영사관 항공 감시망의 주의를 끌게 될지도 걱정이야.
어둑한 공간 가운데에 있는, 창고 크기에도 맞먹을 정도의 비행정, 테제렛의 몰락.
《발명의 소음》 아트 : Christine Choi
이 비행선이야말로, 혁명파 계획의 첫 발걸음이자 상징이다. 허브의 에테르를 이용한 비행선으로 에테르 탑을 공격해서 극악무도한 테제렛을 쓰러뜨림과 동시에, 차원의 다리를 파괴할 계획이었다.
차원의 다리, 그들――플레인즈워커 사힐리가 라시미에게 소개한 자들은 물질 전송기를 그렇게 불렀다. 마치 그것을 어떤 저주의 이름마냥. 그 이름이 입을 따라 나올 때마다, 불안으로 가득한 잔물결이 퍼졌고, 테제렛이 라시미의 발명품을 손에 넣은 것으로 인해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거와 참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비유를 통해 거론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비행선 건조에 힘을 쓰는 것으로 차원의 다리를 파괴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가 만들어낸 창조물이 이 세계는 물론, 다른 세계에 끼칠 위협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나면, 발명을 그만 놓아주고 이 모든 것을 끝내자. 위험한 무언가를 만드는 건 이게 마지막이야.
엔진 창문 위로 미털의 손에 들린 등불이 부드럽게 빛을 비추는 사이, 라시미가 렌치를 비틀어 콘덴서를 고정시켰다. 그것을 한번 회전시킬 때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감각이 내장을 비트는 것 같았다. 앞으로 볼트 3개.
“……이쪽 분야에 더는 흥미가 없으시다면, 좀 더 이론적인 다른 계획이 있습니다.” 미털의 목소리가 라시미의 의식을 파헤치고 들어왔다. 그는 우리가 다음으로 탐구하고 싶은 연구에 관해, 작업 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플레인즈워커들의 이야기를 듣고, 물질 전송기 연구를 그만둘 것을 약속했다. 그 후, 미털은 새로운 연구 계획을 찾는 것에 푹 빠졌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에테르 점진이라는 개념은 거의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이쪽 분야에 큰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할 수 있을지도.” 라시미가 애매한 대답과 함께, 친구의 진지한 눈빛을 올려다 보았다. 그를 홀로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걱정스러웠지만, 다른 길을 찾고 싶었다. 파괴로 이어지지 않는 길을. 그를 위해선 이곳을 떠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미털, 렌치 일식 있어?”
“어떤 모양을 찾으십니까?” 그녀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미털이 가까운 작업대 쪽을 향했다. 항상 그래 왔듯이. “각도 있는 게 좋으신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 걸 가지고 있느냐는 뜻이야.”
“아.” 미털이 당황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신 것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헛기침. “잠시만요, 곧 끝납니다.”
“됐어.” 라시미가 빠른 어조로 대답했다. “그대로 계속 써도 돼.” 렌치는 너한테 줄게. 그 외에도 전부. 내가 없어지고 나면, 미털만큼 이 도구들을 맡길만한 사람이 또 없겠지.
앞으로 볼트 한 개.
라시미가 작업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진정시켜야 해.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하지만 그녀가 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동이 발 밑 바닥을 울렸는데, 마치 이주를 시작한 거인 집단이 창고 옆을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해졌다. 혁명파가 돌아온 것이다.
“허브를 탈환했다!” 그 목소리가 천장까지 닿음과 동시에, 거대한 문이 옆으로 열렸다.
“해냈군요!” 존경을 담은 미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고 보니 미털은 혁명파 사상을 내가 다 깜짝 놀랄 만큼 정열적으로 받아들였었지.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피아 날라르의 목소리가 비행선 반대편에서 울려 퍼졌다. “여러분,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먼저 가, 이것만 끝내면 나도 갈 테니까.” 라시미가 미털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피아의 외침에 더 큰 환성이 울려 퍼졌다.
라시미가 주저하는 미털의 눈에서 불꽃을 보았다. 얼른 저쪽에 합류하고 싶은 거겠지. “가 봐.” 그 말은 이별을 고하는 것보다도 훨씬 간단했다. 모두가 나를 부르기 전에, 조용히 없어져야 해. 사힐리가 완성식전에 나와달라고 했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완성의 시간은 즉, 사라질 시간이었다.
“좋은 자리를 잡아 놓을게요.” 미털이 미소를 짓고는, 뱃머리 쪽으로 서둘렀다. 그걸 본 라시미가 한 손을 들어, 말 없는 작별의 인사를 했다.
이어서 창고 건너편에 있는 피아가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과 싸웠고, 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승리의 함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죠. 에테르 허브를 기반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겁니다.”
“테제렛을 끌어내리자!”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치자, 많은 함성이 그것을 따랐다. 그걸 들은 라시미가 혼신을 다해 렌치를 마지막으로 돌리고는 작업을 마쳤다. 그래, 이제 이걸로 끝이야.
“테제렛은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존재입니다.” 피아가 말을 이었다. “그 남자는 교묘하게 권력을 손에 넣은 사기꾼이며, 지배자로써 있을 수 없는 폭군입니다. 그를 쓰러뜨리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듯한 함성이 이어졌다.
“너라면 할 수 있어.” 라시미가 비행선을 향해 속삭이고는, 엔진 창을 닫았다. 테제렛의 몰락이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스커트 끝에 있는 황금 줄세공에 있는 기름과 먼지를 털어냈다. “잘 있어.” 마지막으로 비행선을 포옹하고, 그곳을 떠나려 했지만, 갑판 위에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에 다가가 먼지를 털고, 눈을 실처럼 뜨고 자세히 살펴보자, 금속에 예술적으로 새겨진 문자 두 개가 보였다. ‘K.N.’
그걸 본 라시미는 숨이 막혔다. 키란 날라르, 그가 틀림없었다. 피아의 남편이었던 사람, 그리고 먼 옛날에 이 배를 설계한 발명가. 그의 창조물에게 닥쳐올 운명을 염려하듯, 그녀가 손가락으로 문자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남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문자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고 생각했다. 이런 일에 당신을 사용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자신이 만든 것이 타인을 상처 입히는 것에 사용된다는 기분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요.
에테르 에너지가 금줄에서 흐드러져 나와, 선명한 푸른 빛의 물결이 라시미의 시야를 덮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감각, 무엇보다도 멋진 이 감각은 전에도 딱 한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과거 발명 박물관에서 아바티 비아의 프로토타입 에테르 정제 장치를 감상할 때, 만지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었지만, 참지 못하고 금속 세공을 손가락으로 만졌는데, 그 순간, 몸 안에 있던 발명가 정신이 씻겨져 나간 적이 있었다.
그것과 비슷한, 마음속 투영이었다. 작품에 영혼을 담은 발명가는 창조물에도 그 파편을 남기는 법. 비행선의 기반을 만든 키란의 손이, 설계를 생각해낸 그의 정신이, 그리고 그 정수가 이 창조물에도 흐르고 있었다.
비행을 사랑하는 마음이 도시의 창공을 드높이 날아올랐다.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이제껏 그 누구도 만들지 못한 무언가를 창조해낸다는 것에 대한 정열. 그리고 한계점까지 달려 위험을 뒤돌아보지 않는 열의. 라시미로썬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창조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뜨거운 마음. 혁신을 억누르려는 자들에게 저항하는,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발명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숨은 물론, 심장까지 멈춘 뒤, 현실로의 감각으로 갑작스레 돌아온 라시미가 비틀거리면서 비행선에서 몸을 떼어냈다. 넘실거리는 푸른 잔상이 눈 앞에 남아 휘청거리는 그녀를 누군가가 지지했다. “모두가 당신을 부르고 있어요.” 미털이었다. “무대 위로 올라가시죠.”
라시미가 거절하기 위해 입을 떼려고 했지만, 방금 전의 감각이 마음을 흔들었다. 미털이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뱃머리를 돌아, 무대 위로 올라가게 했다.
피아가 환영의 손을 뻗었다. “그리고 여러분, 에테르 선견 과학자 라시미 씨가 비행선을 완성시켜주셨습니다.” 곳곳에서 환성이 오르자, 피아가 라시미의 어깨를 끌었다. “라시미 씨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테제렛에게 납치되었지만, 스스로 탈출을 시도했죠.” 격려하는 듯한 외침. “이 배가 그의 몰락을 가져올 것입니다. 라시미 씨에겐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빛나는 에테르 황동병을 라시미에게 건넸다. “저희와 함께 싸워주세요, 그 괴물을 끝장내는 겁니다!”
“끝장내자!” “폭군을 죽여라!” “테제렛에게 몰락을!” 이어지는 외침에 라시미의 눈이 군중을 향했다. 마치 바다처럼 끝없이 이어진 수많은 혁명파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발명가들이었다. 키란이 느낀 것과 같은 정신, 그 발명 정신을 믿고 있기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 지금도 그녀 안에서 요동치는 뜨겁고 선명한 정신.
비행선과 혁명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존재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파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칫하면 스스로의 공포에 눈을 돌리고,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할 뻔 했다.
“자.” 피아가 라시미를 불렀다.
라시미가 조심스레 앞으로 나와, 에테르병을 땀에 젖은 손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꼭 잡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갈라진 목소리가 차가운 공간 안에 작게 울렸다. “그러니까.” 좀 더 큰 목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고, 헛기침을 한번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비행선의 완성 선언을 피아 씨에게 부탁 받았는데요, 우선은 새 이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불편한 반응을 보이며 웅성거렸다. 하지만 피아는 라시미의 눈을 똑바로 보고는, 크게 미소를 지으며 눈으로 말했다. 해야 할 것을 계속 해주세요.
이것이야말로, 내가 해야만 할 일이었다.
“테제렛의 몰락, 이라는 이름은 확실히 좋은 이름입니다. 특히 저에게 있어선 말이죠. 진심입니다.” 약간의 웃음소리. “그리고 이치에도 들어맞죠. 그 괴물의 지배를 끝내는 것, 우리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곳곳에서 동조하는 외침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이자 마지막 목표는 테제렛의 몰락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건 싸우기 위해서도, 누군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도, 하물며 파괴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물론 지금은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행동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이 아닐까요? 우린 이 도시와 그 정신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발명의 정신과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린 발명가입니다. 창조하고, 건조하며, 그것을 세계에 바치기 위해 존재하죠. 빼앗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큰소리가 나자, 라시미가 말을 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본질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배를 설계한 사람을 기억합시다. 위대한 발명가 키란 날라르를.” 모든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라시미 옆에 있는 여성에게 집중되었다. 그 시선에 피아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키란 씨만큼 발명 정신을 대변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 분은 오직 창조를 위해 살았습니다. 자유를 표현하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배를 파괴를 위함이 아닌, 발견을 위해 건조했습니다. 그 괴물을 쓰러뜨리고 이 모든 일이 끝나면, 키란 씨의 배가 희망을 안고 하늘 저편을 나는 것이 저의 가장 큰 소원입니다. 이 배가 그 분의 영혼은 물론, 발명의 정신을 세계 구석구석까지 전파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전 이 비행선, 키란의 심장을 완성시켰습니다.” 라시미가 에테르병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렸다. “우리가 우리로 있기 위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뱃머리에서 병을 깨뜨리자, 신비스런 푸른 물질이 황금빛 금속 위에서 반짝였다.
폭발적인 함성이 임과 동시에, 라시미의 눈에 눈물이 맺히자, 피아가 그녀를 끌어 안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라시미의 손을 잡고 뜨거운 환성을 향해 드높이 치켜들었다.
“발명의 정신을 위하여!” 누군가가 군중 속에서 큰 소리를 질렀다. 이 목소리는 그녀가 잘 아는 목소리, 그녀의 친구 미털이 하늘 높이 주먹을 쳐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맞자, 라시미가 친구를 향해 상냥하게 웃고는, 이별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린 발명가, 시간적 에테르 추상작용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연구자야. 테제렛에게는 더 이상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겠어.
(Tr. Mayuko Wakatsuki / TSV Yohei Mori)
<새로운 등장인물>
수석 건축가 스람/Sram, Senior Edificer [드워프, 참모]
스람은 사람보다 기계에 대한 이해력이 더 높으며, 기라푸르의 구석구석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수석 건축가로서 그의 임무는 기라푸르의 복잡한 기반시설을 구성하는 수없이 많은 구동 장치의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어깨에 짊어진 책임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강박적으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배급의 영사 캄발/Kambal, Consul of Allocation [인간, 참모]
배급의 영사 캄발은 에테르 배급을 감독하지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암시장에서 자신의 인맥을 조종해 에테르 절도범들과 거래를 했으며, 심지어는 에테르붙이 범죄 군주 곤티와 거래하기도 했습니다. 캄발은 자신의 구역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합니다.
첫댓글 재밌게 잘 봤습니다.
마지막에 만화를 보니 도빈 반이 테제렛을 각하 라고 부르던데 테제렛이 영사관의 귀빈이긴 하지만 영사는 아니니 각하라고 부르긴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면 테제렛이 권력을 더 잡아서 드디어 영사들 머리 위로 올라선건가...
말씀하신 후자가 맞습니다. 저번편부터 테제렛을 '대 영사(Grand Consul)' 라는 칭호로 대신 부르기 시작했는데, 각하라는 표현은 다소 생소했던 걸까요? 만화 원문을 그대로 인용했는데 뭔가 더 좋은 표현이 있다면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