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은적암 이야기
표영삼 서울교구·선도사
* 신인간 634호(2004년 6월호)
머리말
필자는 포덕 128년(1977년) 12월 16일에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 백제후기에 쌓은 성)에 들어가 백설이 뒤덮인 복덕봉(福德峰)에 올라가 본적이 있다. 엄청나게 높고 큰 지리산 줄기가 동쪽 일대에 하늘과 맞닿은 듯이 펼쳐져 있었다. 날씨가 청명하여 저 멀리 하얀 노고단(老姑壇, 1,507m) 봉우리도 눈에 들어 왔다. 평지에서 바라보면 그저 높다는 느낌뿐인 지리산을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니 너무나 넓고 높았다. 대신사도 은적암이나 이 산상에서 이런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은적암에서 지은 <권학가>와 <검가>에 “호호망망 넓은 천지”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호호(浩浩)란 광대한 모양이고 망망(茫茫)이란 넓고도 아득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적절한 표현이며 실감나는 표현이다. 대신사는 포덕 2년 12월 그믐날에 이 남원 교룡산성 안 은적암(隱蹟庵, 원명 德密庵)에 올라와 7개월간이나 있었다. 은적암을 찾게된 동기와 남긴 행적들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포덕과 관의 탄압
대신사는 <통유(通諭)>에서 이 곳에 오게 된 동기를 밝혔다. “지난 해 중동(11월) 때 떠난 것은 본시 강산 청풍을 노닐어 보기 위한 것도 아니오, 산간 명월이나 감상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빗나가는 세상 도리를 살피는 것과 한편 관의 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대신사가 포덕을 시작하자 엄청난 수의 선비들이 용담으로 찾아왔다. 이들을 상대로 순조롭게 포덕하였다. 그런데 8월에 이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대신사의 포덕에 대해 관이나 유생들이 이단 행위로 몰아갔다. “알도 못한 흉언괴설 남보다가 배나하며 육친이 무삼 일고 원수같이 대접하며 살부지수 있었던가”라는 글귀에서 보듯이 문중에서까지 비난하고 나왔다. 두 달 후인 10월에는 관장(官長)까지 나서서 포덕을 금지하라며 탄압하였다. 다른 종교가는 민중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였으므로 찾아다니는 일을 중지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신사는 용담으로 찾아오는 선비들을 상대로 하여 포덕하였기 때문에 대신사가 용담을 떠나야 중지할 수 있었다. <교훈가>에 “아서라 이내신명 운수도 믿지마는 감당도 어려우되 남의 이목 살펴두고 이같이 아니말면 세상을 능멸한듯 관장(官長)을 능멸한듯 무가내라 할길없네. 행장을 차려내어 수천리를 경영하니 …”라고 하였다. 결국 대신사는 하는 수 없이 용담을 떠나야 했다.
정처 없이 발정
11월(양, 12월 초) 초순에 장기에 사는 제자 최중희(崔仲羲, 후에 접주가 되다)를 대동하고 길을 나섰다. 무조건 발길 닫는 대로 향하였다. <권학가>에 보면 “어진친구 좋은벗을 일로(조)이별 하단말가. 산수풍경 다 던지고 동지섣달 설한풍에 촌촌전진 하다가서”라고 하였다. 『도수사』에서는 “광대한 이 천지에 정처 없이 발정하니 울울한 이내 회포 부칠 곳 바이없어 청려(靑藜杖)를 벗을 삼아” 길을 나섰다고 하였다. 처음 찾은 곳은 울산이었다. 서군효(徐群孝, 후에 접주가 됨) 등 가까운 도인들을 만났다. 며칠 후에는 누이동생(남편, 金振九)이 사는 부산으로 갔다. 부산 대신동 뒷산에는 누이동생이 순도한 수운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산당(山堂)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한다. 『대선생주문집』에는 남원으로 가다 성주(星州)에 들려 충무묘(忠武廟)를 참배하였다고 하였다. 두 차례나 성주에 가 보았으나 충무공 묘당은 없었다. 혹시 승주(昇州)를 성주(星州)로 잘못 기록한 것은 아닐지? 며칠 후 대신사는 부산에서 배편으로 웅천(熊川, 鎭海市)으로 갔다. 『천도교창건사』에는 “낙동강 좌편 웅천이라는 촌중에서 유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전하기를 웅천에는 서씨 어머니 오빠(외삼촌)가 살고 있었다 한다.
다음은 고성으로 가서 성한서(成漢瑞, 나중에 접주가 됨)의 집에 머물다가 역시 배편으로 여수로 간 것 같다. 여기서 이순신 장군의 고적들을 살펴보고 승주(昇州)로 올라와 구례를 거쳐 남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남원에 당도한 것은 약 2개월 만인 1861년 12월 15일경이다. 광한루 오작교 밑에 사는 서형칠(徐亨七)의 집에 10여 일간 머물러 있었다. 『남원군동학사』에 의하면 서형칠은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한다. 하필 한약방을 찾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대신사가 경주를 떠날 때 남문 밖에서 약종상을 경영하는 수제자격인 최자원(崔子元)이 노자로 쓰라고 귀한 약재를 주었던 모양이다. 돈으로 바꾸려면 약방을 찾아가야 했다. 서형칠은 대신사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신사와 사제의 의를 맺었다. 약방은 손님 출입이 잦아 번거로우므로 그의 생질인 공윤창(孔允昌)의 집으로 옮겨 모셨다.
『남원군종리원』에 의하면 서형칠과 공윤창이 먼저 입도하였다 한다. 뒤이어 양형숙(梁亨淑), 양국삼(梁局三), 서공서(徐公瑞), 이경구(李敬九), 양득삼(梁得三) 등이 차례로 입도하였다. 이 때 전주에 사는 신모(申某)도 찾아와 입도하였다 한다. 이들은 대신사가 “은적암으로부터 환향하신 후에도 서형칠, 양형숙, 공윤창 등이 용담정에 내왕하며 도맥(道脈)을 통하였다”고 한다. 전라도에는 이때부터 대신사의 포덕으로 동학이 발을 부친 것이다.
은적암에 은신
10여 일 후인 12월 그믐께 서형칠은 대신사를 다시 교룡산성 덕밀암(德密庵)으로 옮겨 모셨다. 『대선생주문집』에는 “때는 섣달 그믐이라, 한 해는 이미 저물고 절에서 때마침 종을 치자 여러 중들이 모두 모여서 법경을 외우고 소원을 축원하며 새벽 불공을 드렸다. 송구영신의 회포와 감회를 금치 못하면서 외로운 등잔불 아래서 한밤을 지샜다”고 하였다. 이 두 칸 짜리 덕밀암(德密庵)에서 최중희와 같이 6개월간 머물러 있었다. 대신사는 얼마 후 이 덕밀암을 은적암(隱蹟庵)이라 고쳐 불렀다.
현파(玄坡 朴來弘)는 『천도교회월보』에 ‘전라행’이란 기행문을 실었다. “은적암(隱蹟庵: 蹟字는 그 때 모시고 있던 梁國三 씨의 증언에 의함)은 읍의 서방 10리허의 지(地)에 교룡산성이 유하고, 성의 북우에 밀덕(密德)·복덕(福德) 양봉이 돌올탱천(突兀撑天)하고 봉덕봉의 동록 돌기한 소봉이 유하며 층암첩석(層岩疊石)이 향양(向陽)한 간에 좌우석면에는 ‘산신지위 경인(山神之位 庚寅) 쫛쫛쫛’ 등 무엇무엇의 각자가 유하고 여기저기에 산재한 고색창연의 석조석구(石槽石臼), 부러진 주초, 깨어진 와편은 누가 보던지 고사(古寺) 유허가 분명하니 이곳이 덕밀암(德密庵) 고지이라. 대신사께서 차암 일실을 청소하시고 은적암이라 하셨나니 암은 갑오 동란시 접주 심노환(沈魯煥)의 도소였던 죄로 후일 관병에게 분소(焚燒)를 당하고 그 유허만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근거하여 필자는 포덕 126년(1977년) 12월부터 포덕 132년(1981년) 12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현지를 답사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선국사(善國寺) 주지를 만났으나 모른다 하여 그냥 돌아왔고, 두 번째는 절간 밑에 사는 이윤기(李允基: 1887년생, 당시 94세)를 만났으나 뒤로 올라가면 된다고 하여 헤매다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세 번째는 이윤기를 다시 만나 뒤로 올라가면 된다는 말만 듣고 다시 올라갔었다. 지난번에는 절간 뒤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곧바로 올라갔으나 이번에는 절간 뒷길을 가다가 희미하게 나 있는 바른 쪽 길을 따라 올라갔다. 능선까지 이르자 바로 왼쪽 아래에 70평 정도의 절터가 나왔다. 기와장도 보였고 절터 왼쪽에는 대나무와 습기찬 샘터도 있었다. 여기서 다시 좌측 5m 지점에는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음각된 큰 암벽이 있었다. 지금은 주변을 잘 다듬어놓아 누구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 절터 자리는 잡목을 쳐내어 시원하게 가꾸었고 큰 장승과 큰 돌탑(채화대)도 세워놓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포덕 131년(1990년)에 일본 도예가 심수관이 이 곳에서 채화해 갈 때 이처럼 잘 정리하였다 한다.
은적암서 논학문 지어
이 은적암에서 대신사는 많은 글을 지었다. 포덕 3년(1862년) 1월초에는 <권학가>를 지었다. 첫머리에 “전라도 은적암에 환세차로 소일하니 … 말로하며 글을지어 송구영신 하여보세”라고 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논학문>을 지어 반포하였다. 보통 경신 4월 5일에 동학을 창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동학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세상에 반포된 것이다. <논학문>에 의하면 도(道)와 학(學)을 구분하여 “도는 천도라 하지만 학인즉 동학이다(道雖天道 學則東學)”고 하였다. 언뜻 보면 도와 학은 같은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도와 학은 다르다. 도는 신념체계를 이르는 것이고 학은 수행체계를 이르는 것이다.
대신사는 은적암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전주와 심지어 진산 및 금산까지 왕래하며 포덕에 힘썼다. 『전주종리원연혁』에는 “포덕 2년 신유(辛酉, 1861년)에 대신사께서 포덕 차로 최중희 씨를 솔하시고 자(自) 남원으로 본군(全州郡)에 오시어(駕) 물태풍속(物態風俗)을 주람(周覽)하신 후 포교를 위시하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최제우(崔濟愚)는 … 지례(知禮)와 김산(金山=金陵)과 호남의 진산(珍山)과 금산(錦山) 산골짜기를 오가면서 양민을 속여 하늘에 제사 지내고 계를 받게 하였다”고 했다. 6월에는 <수덕문>과 <몽중노소문답가>를 지었다. <수덕문>은 학의 체계 즉 수행의 틀을 설명한 글이다. 주목되는 것은 선신후성(先信後誠)의 수행체계에 대한 설명이다. <좌잠>에서 언급된 신경성(信敬誠)의 본뜻을 이 <수덕문>에서 정확히 풀이하였다. 대개 신자(信字)는 믿을 신자라고 한다. 그러나 대신사는 참을 가리는 신자라고 하였다. 이 길이 옳은가, 저 길이 옳은가를 가려내는 신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誠)자 역시 정성 드리는 성자가 아니라 거짓됨이 없이 마음을 다하여 실행하는 이것이 성이라고 하였다. 경(敬)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문맥 속에 그 뜻이 들어 있다. 공경 경자로 해석하지 않고 옳은 길이라 판단하면 곧 그것을 내 것으로 몸에 배게 하는 것이 경이라 하였다. 먼저 바른 길을 판단하고 그것을 내 몸에 배도록 닦고 단련하여 실생활에 옮기는 것이 신경성이라 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학의 수행체제라고 하였다.
뒤이어 지은 <몽중노소문답가>는 참위설을 원용하여 역사의 대전환기를 일깨워주는데 주력한 글이다. “십이 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 호시절에 만고 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너도 또한 연천해서 억조창생 많은 백성 태평곡 격양가를 불구에 볼 것이니 이 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런가” 하여 대신사가 펼치는 무극대도가 바로 새 역사를 만드는 도(道, 길)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대신사가 지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모두 12가지 제목을 가진 글로 되어있다. 그 중 여섯 가지의 글을 여기서 지었다. <검가>까지 합치면 일곱 가지의 글을 지은 셈이다.
7월에 경주로 귀환
대신사가 남원에서 경주로 돌아온 시기는 포덕 3년 3월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신사의 글을 보면 7월에 돌아온 것이 분명하다. 포덕 3(1862)년 6월(양 7월) 상순께 발표된 <통유(通諭)>는 남원에서 지은 글이다. “이제 막 장마 비가 내리는 계절이라 바람이 일고 비가 뿌려 길게 자란 풀이 옷을 적시니 족히 애처롭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장마비가 내리는 계절과 길게 자란 풀이 옷을 적시는 계절은 바로 6월 중순경이다. 따라서 대신사는 6월 중순까지 이 은적암에 머물러 있었음이 확실하다.
6월(음)에 지었다는 <수덕문>도 은적암에서 지은 것이다. “멀리 떨어져서 소식을 주고받으니 역시 서로간에 그리운 회포를 견디기 어렵구나. 가까이 만나 서로 정을 들어내고자 하나 필시 혐의를 두고 지목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고로 이 글을 지어 펴 보이니 … ”라고 하였다.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었다면 어디서 지었을까? 6월에 <통유>를 지은 것으로 보아 <수덕문>도 은적암에서 지은 것이 분명하다. 결국 6월까지 대신사는 남원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대신사는 경주로 돌아와 박대여의 집에 있다가 7월 어느 날 처음으로 용담 집에 갔다고 하였다. 즉 “7월에 집으로 가던 날 말을 타고 오다가 회곡(回谷)에 이르렀다 … ”고 하였다. 대신사가 3월에 경주로 왔다면 무엇 때문에 4개월씩이나 미루다가 7월에야 집으로 갔을까? 공백이 너무 길어 3월 귀환설은 설득력이 없으니 잘못된 기록이다. 대신사는 7월에 경주로 와서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며칠간 머물었다가 7월 어느 날 용담 집으로 간 것이다.
결론
은적암은 초기 동학 창도과정에서 대신사가 중요한 행적을 남긴 곳이다. 오던 도중 구례쯤에서 <교훈가>를 지었고 남원에 와서 <도수사>를 지었다. 그리고 암자에 들어가 새해를 맞으면서 <권학가>와 <논학문>을 지었다. 그리고 6월 중순에는 <통유>를, 하순부터는 <몽중노소문답가>와 <수덕문>을 지었다. 여기서 경전의 반을 지었는데 더욱이 <교훈가>, <논학문>, <수덕문> 등 중요한 글을 지었다. 어찌 보면 경상도에서 득도한 대신사는 전라도 은적암에 와서 무극대도를 다듬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도인들은 이 은적암을 무심히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쯤 은적암을 찾아가 대신사가 남긴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동학 서적과 개벽의 실천 http://www.donghakbook.com
*수운 선생 연보
1824년 경주군 현곡면에서 출생
1833년(10세) 모친 별세
1840년(17세) 부친 별세
1842년(19세) 울산 밀양박씨와 결혼
1844년(21세) 장삿길에 나서 이후 10년간 전국을 주유
1854년(31세)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경주 용담집에 들어앉아 구도의 사색 시작. 10월 부인의 고향인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로 이사
1856년(33세) 양산 천성산 내원암으로 가 49일간의 입산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별세로 47일만에 중단.
1857년(34세) 다시 천성산 적멸굴로 가 49일 입산기도. 기도를 마친 후 생업으로 용광업을 경영.
1858년(35세) 용광업 그만 둠.
1859년(36세) 울산을 떠나 경주 용담으로 귀향.
1860년(37세) 음력 4월 5일 한울님을 만나는 종교체험.
1861년(38세) 4월경 주문과 심고법을 만들어 수행하는 방법을 정하고 교리체계를 세움.
1861년 6월부터 용담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포덕(布德) 시작. 7월에 <포덕문> 지음.
1861년 8월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이 수운이 가르치는 도를 서학으로 몰기 시작. <안심가> 지음.
1861년 11월 경주관아에서 수운의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짐. 수운은 용담을 떠나 울산, 부산을 거쳐 전라도 남원으로 감.12월에 남원에 당도. 이후 남원의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6개월간 체류.
1862년(39세) 7월 경주로 돌아가 박대여 집에 은신.8월 측근들에게 포덕에 나서라고 권유.
1862년 9월 29일 경주진영에서 수운 체포. 수운은 10월 5일 석방되어 용담으로 돌아옴. 11월 9일 흥해 매산리로 피신. 12월에 최초로 접주들을 임명.
1863년(40세) 3월 다시 용담으로 돌아옴. 5월 하순부터 적극적으로 교화활동. 7월에 최경상(해월)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
1863년 12월 10일 조선왕조에 의해 체포됨.
1864년(41세) 3월 10일 대구에서 참형(斬刑)당함.
첫댓글 사진, 감사합니다. 보고보고 또 보아도 그날의 아련함이~~
어링불님 덕분에 깊이 있는 역사공부 엄청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