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성체성사의 역사적 과정과 신학적 의미
제3장 7세기~16세기 (중세기)
7. 16세기
제5차 라테란 공의회 Concilium Lateranense가 1512~1517년에 열렸으나, 이 공의회도 교회 전체의 개혁을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교회의 신앙생활과 ‘성찬례’를 엄숙히 거행하는 전례예식 등도 여전히 정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회 전체의 개혁을 내세워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가 일어났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그들은 교회의 신앙생활과 ‘성찬례’를 왜곡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 핵심을 부정하고 말았다. 이들 프로테스탄트들의 대부분은 ‘성찬례’가 주님의 제사 Sacrificium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거칠게 반대하였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는 ‘성찬례’가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인간들의 연회(宴會)에 불과하며, 그리스도께서 그 연회를 제정한 것은 믿는 자들의 신앙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역설하고 있다. 루터는 새로운 전례문을 만들고 그 가운데 교회가 옛날부터 사용해온 기도문 등의 대부분을 그대로 남겼으나, ‘성찬례’에서 주님의 제사가 행하여질 때 쓰는 주님의 축성의 말씀을 삭제하고 말았다. 루터의 친구이며 제자였던 멜란히톤(P. Melanchton, 1497~1560)은 ‘성찬례’가 ‘화해의 제사’라는 것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화해하는 제사는 골고타의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죽음뿐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츠빙글리(U. Zwingli, 1484~1531년), 칼빈(J. Calvin, 1509~1564년) 등도 ‘성찬례’가 ‘화해의 제사’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특히 그들은 ‘화해의 제사’의 경우에는 희생제물의 피를 흘리는 것이 필요하며, ‘성찬례’의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피를 흘리지 않으시므로 그것은 ‘화해의 제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주님의 성찬’은 구원에 대한 감사를 표할 뿐이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기시키는 기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프로테스탄트들은 ‘성찬례’가 주님의 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로 다음 몇 가지를 든다.
첫 번째는 그 당시 중세 말기 교회의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성찬례’에 대한 부족한 신심을 들고 있다. 당시의 교회는 ‘성찬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의 재현이며 ‘화해의 제사’, ‘감사의 제사’임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는 ‘성찬례’가 너무 외형적이고 형식적이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성찬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여 다만 수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영성체를 자주 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자들은 ‘성체’가 어떻게 해서 구원의 양식이 되는지 또 ‘성찬례’가 신앙의 중심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불확실한 상황 아래서 프로테스탄트는 ‘성찬례’가 주님의 제사Sacrificium라는 참의미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성찬례’가 주님의 제사라는 것을 부정한 더 근본적인 두 번째 이유가 있었다. 즉 그들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애(慈愛)를 믿을 때, 그 믿음의 신앙에 의해서만 의화(義化)되어 구원된다는 것을 근본 교의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용서되어 구원된다는 복음만을 강조하면서, 어떠한 사제도 인간도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공헌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사제가 행하는 ‘성찬례’에서 신자들에게 분배된다는 진리를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와 같은 생각에서 그들은 사제들이 행하는 ‘성찬례’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이 신자들에게 분배된다는 참된 교의를 배척한 것이었다. 그들이 ‘성찬례’가 주님의 제사라는 것을 배척하는 또 다른 세 번째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상 그리스도의 희생을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해서 받은 벌이라는 의미로만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루터의 반박은 종교개혁보다는 오히려 종교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 후 성서를 자기 멋대로 해석한 결과, 한국에서만도 수백 개의 종파가 난립하고 있다. 이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라는 성서 구절만을 인용하여 ‘믿음으로만 구원된다’고 주장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루터는 파문당한 후에도 교황을 배척하면서 7성사 중에서 왜곡한 성체성사와 세례성사를 제외하고 다른 5개 성사를 폐기하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성찬레’가 주님의 제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치해 있었으나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해서는 그들 사이에서도 격심한 의견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루터는 복음서의 말씀에 근거하여 성체성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이 참으로 실체적으로 현존하고 있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루터에 의하면 성서의 말씀은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에 그것을 곡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정하면서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만은 부인하였다. 그는 성체에는 빵의 실체도 남아 있고, 빵의 실체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도 실체적으로 함께 현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프로테스탄트들은 루터의 이러한 그리스도 현존에 관한 주장을 부정하고 그와 같은 현존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변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은 이미 장소에 제한되지 않고 어느 곳에서도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에 축성된 빵 안에 빵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신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와 같은 루터의 주장은 불명료했지만 그 자신은 빵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현존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루터의 소위 종교개혁)
루터의 견해와 정반대의 견해를 취한 것은 츠빙글리와 그의 제자 칼슈타트karlstadt, 오에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였다. 그들에 의하면 성체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즉 츠빙글리는 ‘성찬례’에서의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 해석하여 ‘상징론’을 주장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이 문제에 관하여 저작으로써 서로 논쟁하였다. 루터도 츠빙글리도 각기 자기 주장을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이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제삼의 프로테스탄트인 칼빈이 그 중간 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성교회의 신학자들이 믿고 있는 참된 ‘실체변화’도, 그리스도의 몸이 빵과 더불어 현존하고 있다는 루터의 주장도 인정하지 않았다. 칼빈은 성체를 영할 때 신자들은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영적 실체’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칼빈의 ‘그리스도의 몸의 영적 실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후에 우리와 멀리 떨어진 천국에 계시는 것을 강조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몸, 그 자체가 동시에 우리와 함께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가 성체를 영할 때 받고 있는 것은 ‘영적 실체’이며 그것에 의해 신비적인 방법으로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인간이 연결된다는 주장하였다. 그와 같은 ‘영적 실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이미 신앙으로 성립되어 있으나 주님의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더욱 강화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즉 칼빈은 축성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는 ‘영적 실체’만을 신자들에게 매개(媒介)한다고 주장했다. 칼빈의 설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설을 타협시키기 위한 것이어서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며 그 때문에 각기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루터, 츠빙글리, 칼빈의 제자 사이에 성체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하여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논쟁이 계속되었지만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은 ‘성찬례’가 끝난 다음 남은 성체가 성합 안에 모셔지는 경우에도, 성체를 모시고 행렬할 때에도, 성체가 신자들에게 현시되고 있는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몸은 현존하지 안는 다는 것에서는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들 프로테스탄트들의 잘못된 주장에 대하여 성교회의 전통적인 성체론을 보호하기 위하여 당시 성 요한 피셔 St. Joannes Fisher 추기경과 성 토마스 모어 St. Thomas More,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St. Teresia Avila 등의 성인들이 많은 노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