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으뜸여행 정선 한밭대학교 김 명 녕 굳은 껍질을 밀치고 올라오는 새 생명의 외침이 산천에 가득한 초봄이다. 탄생의 기쁨을 노래하는 자연의 잔치에서 봄기운을 얻으려고 아내와 함께 정선으로 나들이를 나선다. 정선은 우리나라에서 자연풍경이 으뜸으로 아름다운 지역 중에 하나요, 숫진 인심이 그대로 살아있는 두메산골이다. 나는 1960년대 후반기에 제천에서 공무원으로 일할 때 정선을 서너 번 놀러간 적이 있다. 그 때 본,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마을’과 깨끗한 ‘물’이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정선의 모습이다. 그 당시 정선에는 사람이 적게 살고, 헤엄치는 물고기와 바닥에 깔린 돌을 셀 수 있을 만큼 냇물과 강물이 매우 맑았다.
먼저 양반전에 등장하는 인물을 형상화해 놓았고 정선지역의 옛날 주거문화를 볼 수 있는 ‘아라리촌’을 찾는다. 영․정조 시대에 박지원이 쓴 정선의 몰락한 양반과 양반신분을 사들인 부자상인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세태를 풍자한 단편소설에 나오는 인형인물들이 길손을 맞이한다. ‘양반전’을 모르는 사람도 줄거리를 알 수 있도록 그럴싸하게 잘도 꾸며놓았다.
나는 산골에서 자랐지만, 이곳에 재현해 놓은 참나무껍질로 지붕을 덮은 굴피집, 소나무판 지붕의 너와집, 청석맥 돌로 지붕삼은 돌집, 대마껍질을 벗긴 줄기로 이엉을 이은 저릅집, 통나무를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벽을 만든 귀틀집을 본 적이 없다. 집마다 지붕이 독특해서 하룻밤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데다 한여름에 저릅집, 귀틀집, 굴피집에서 전통가옥체험 민박을 운영한다는 안내판을 읽고 아내와 이용해보자고 뜻을 모은다.
각종 농기구를 제조․수리하는 농기구공방, 서낭당, 통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 등을 둘러보면서 이곳 사람들의 삶도 짐작하고 추억에도 잠긴다. 농기구공방에 진열해 놓은 대부분의 물건은 자라면서 익히 보던 것이라 조금도 낯설지 않다.
연자방아를 보니 소고삐 잡고 빙빙 돌면서 곡식을 찧던 일이 생각난다. 사람도 소도 제자리만 거듭 맴도는 따분한 일이다. 물레방앗간에서는 지난 일이 떠오른다. 나는 6․25전쟁이 휴전되던 해에 충주시 국망산 골짜기에서 물레방아를 처음 보았다. 금가루가 박힌 돌멩이를 확1)에 넣고 잘게 부순 뒤, 흐르는 물에 모래는 걸러내고 금가루만 채취하는 방앗간이었다. 내 또래 아빠가 방앗간 주인이고 산에 따 먹을 나무열매가 많아서, 여름방학 내내 그 골짜기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그런데 통방아는 처음 본다. 호기심에서 자세히 보니, 물레방아의 나무바퀴 대신 통나무에 여물통처럼 홈2)을 팠다. 홈에 고이는 물의 무게에 의해 공이3)가 위로 올라가면 홈에 고인 물이 쏟아지면서 확에 “쿵”하고 부딪치는 원리로 작동하는 방아다. 호젓한 골짜기에서 한가롭게 “쿵더쿵 쿵더쿵” 장단을 치던 물레방아와 통방아의 정취에 흠뻑 젖도록 그럴듯하게 잘 꾸며 놓았다.
‘아라리촌’을 거니는 내내 ‘정선아리랑’이 들려온다. 두메산골의 삶이 고달파서 청승맞게 신세타령하던 노래라서 들을수록 마음이 젖어든다. 절망과 비탄을 넋두리하던 민요가 ‘으뜸여행 정선’의 길라잡이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점심때가 되어 ‘아라리촌’을 나와서 조양강을 건너 유명한 정선 5일 장터로 간다. ‘정선 5일장’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잘 띄어서 아는 길 가듯 쉽게 찾는다. 규모가 아담하고 골목이 좁은 것은 옛 장터와 비슷하지만, 흙바닥과 구불구불하던 골목은 간데없고 포장된 바닥과 곧게 뻗은 골목뿐이다. 음식점 골목으로 들어가서 메밀국수, 메밀부침개, 부꾸미4)를 주문한다. 겉보기보다 맛이 구뜰해서5) 배불리 먹는다. 장바닥에 전을 벌인 많은 가게에 봄나물이 수북하다. 산골에서 자란 나물이라 냄새가 진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여행선물이라서 더덕, 씀바귀, 달래, 삶아서 말린 취나물을 비롯해 여러 종류를 푸짐하게 산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사는 나도, 덤을 듬뿍 얹어주며 파는 아주머니도, 넉넉한 마음과 흐뭇한 마음으로 금세 부자가 된다.
‘정선 아리랑’의 발원지요, 뗏목을 엮어 조양강에 띄운 터로 널리 알려진 아우라지로 간다.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서 있는 정자가 가장 먼저 반긴다. 동글납작한 자갈투성이의 벌판 너머 강 건너 쪽 모래밭에 배 한척이 보인다. 강물 위를 지나는 줄은 팽팽하게 달아매져 있는데, 뭍으로 올라간 빈 배는 비닐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깊은 겨울잠에서 깰 줄 모른다. 나는 소년시절에 중앙탑과 목계 사이에 있는 충주시 금가면 하소(菏沼)에서 살았다. 하소는 강원도와 제천을 여울져 흐르던 남한강물이 쉬어가느라고 느릿느릿 흐르는 마을이다. 동산에 세운 정자에서 내려다보면 한자(漢字)가 뜻하는 마을이름대로 강이 늪처럼 넓다. 이곳 아우라지와 하소의 풍경이 비슷해서 그 때 일이 떠오른다. 하소도 강가에 모래밭과 자갈밭이 마주 보고 있어서 어린이 놀이터로는 그만이었다. 강변에서 놀다보면 초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이따금 뗏목이 지나갔다. 서울 쪽으로 흘러가던 그 뗏목이 이곳에서 첫출발했다니! 남달리 감회가 깊다.
송천과 골지천에 각각 놓인 섶다리6)는 어려서 흔히 보던 다리다. 많은 사람이 안전하게 건너도록 모래를 많이 깐 것만 다르다. 여름장마에 다리가 떠내려가면 초가을에 마을어른들이 소나무를 베어다가 다시 놓곤 하던 모습이 눈에 삼삼하다. 그 시절에는 냇물에 깔린 징검돌을 건너뛰면 놀라서 도망가는 물고기가 많았는데 지금 송천에 깔린 징검다리7)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환경이 바뀌어 물고기의 개체수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자갈밭에 아무렇게나 놓인 바위에 뱃줄 잡은 사공에게 당부하는 말을 새긴 글이 매우 인상적이다. 누군가 쌓아올린 돌탑이 여기저기 많은 것으로 보아, 두멧구석8)이지만 관광지와 여름휴양지로 각광 받는 곳이라고 짐작된다.
산골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정선아리랑. 두메산골의 삶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정선. 구석구석 숫진 산골사람의 얼이 살아 숨 쉬고 있어서 오래 머물러도 성에 차지 않는 정선. 빼어난 자연풍경과 광산․임업․산골농업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고유문화를 잘 보존해서,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으뜸여행 정선’으로 길이 남기를 바라면서 정선을 떠난다. 1) 확 : 절구의 아가리로부터 밑바닥까지 팬 곳. 2) 홈 : 오목하고 길게 패어진 자리. 3) 공이 : 방아 찧는 기구. 4) 부꾸미 : 찹쌀가루․밀가루․수수가루 따위를 반죽하여 번철에 지진 떡. 5) 구뜰하다 : 변변찮은 음식의 맛이 제법 구수하여 먹을 만하다. 6) 섶다리 : 개울 같은 데에 통나무로 다릿발을 세우고 그 위에 잎나무․풋나무․물거리 따위의 섶을 깔아 건널 수 있게 만든 다리. 7) 징검다리 : 개울 같은 데에 돌더미나 흙더미 따위를 드문드문 띄어놓아 그것을 디디고 건널 수 있게 만든 다리. 8) 두멧구석 :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진 산골의 외진 곳.
|
첫댓글 글도 좋지만, 돌탑이 멋스럽습니다.
어느 누구의 정성이 깃든 돌탑이련가.... 즐감......좋은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