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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폭발적으로 높였다. 그에 비해 한국인이 지닌 ‘정신적 자산’은 아직까지 그만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국제사회의 인정과 존중을 받을 만한 풍부한 정신적 콘텐츠가 넘쳐나는 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해외에서도 점차 관심을 갖기 시작한 홍익인간, 화랑도, 선비정신 등 한국의 대표적 정신문화를 몇 가지 범주로 나눠 대안의 가능성을 짚어 본다.
한국 정신의 토양 홍익인간
몇 년 전 청계천에서 쓰레기를 줍던 한 외국인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양대 영어 강사로 ‘파란 눈의 청소부’로 불렸던 그는 “홍익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쓰레기를 줍는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에 오기 전 러시아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을 알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국을 찾은 그는 홍익인간이 인류에 공헌할 수 있는 한국만의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인 홍익인간은 ‘삼국유사’ 기이편에 실린 고조선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용어로,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건국이념이면서 동시에 교육이념이기도 하다.
1949년 발효된 교육법 제1조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具有)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 공영(共榮)의 이상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앞서 사례처럼 홍익인간 정신을 접해 본 외국인들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무게에 놀라워한다. 어느 민족이나 건국신화와 건국이념이 있지만, 단군신화의 홍익인간만큼 휴머니즘적 지향성을 지닌 독보적 건국이념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홍익인간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닌 인간이 처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개념이며, 대립 대신 조화와 평화를 중시하는 공생공존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겸 아시아 인스티튜트 소장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 역시 홍익인간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저서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홍익인간 정신을 든다.
종래에 없던 것을 새롭게 창조해 적용하는 데는 시행착오가 따를 수 있지만 “한국인에게 잠재돼 있는 홍익인간 정신을 다시 일깨운다면 다른 무엇보다 실효성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홍익인간이 비단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모범적인 교육 사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난 10월 영국 모든 정부 부처의 최고기술책임자(CTO)인 리암 맥스웰이 전자정부 표준 프레임워크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한국정보화진흥원(NIA)을 방문했다. 맥스웰 CTO의 방문은 지난 7월에 이어 두 번째로, 오픈소스를 활용해 구축된 전자정부 표준 프레임워크의 추진 전략 및 성공 사례를 비롯해 해외 확산과 협력 등에 관한 노하우를 습득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전자정부 표준 프레임워크는 2009년 6월 공개 이후 국내 407개 정보화 사업, 해외 7개국 11개 사업에 적용되는 성과를 거뒀다. 또한 다운로드 30만 건을 돌파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개 소프트웨어로 자리 잡았다. 맥스웰 CTO가 한국의 경쟁력 중 하나로 꼽은 오픈소스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정신과 맥락을 같이한다.
홍익인간은 외교 전략에서도 빛을 발한다. 우리나라는 정보 독점 대신 공개를 택함으로써 특히 아시아 개도국의 정보격차 해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이 역시 홍익인간의 정신에서 비롯된다.
NIA가 국제전기통신연합(ITU)과 벌이고 있는 협력 사업의 일환인 ‘NIA-ITU 협력 IT봉사단’은 해마다 국제 사회에서 정보화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 개도국은 비약적 발전으로 아시아의 강자로 급부상한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 사회 환원의 가치를 부각하고 지식을 공유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국제 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의 이미지 조사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게 ‘한류’와 더불어 ‘분단국가’다. 일각에서는 분단국가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할 수 있는 묘안을 홍익인간에서 찾기도 한다. 홍익인간이 우리 민족을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 구심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홍익인간 정신이 비폭력, 생명 존중, 평화 사상으로 자연스레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전 지구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지구온난화 및 인류의 지속가능성 문제 역시 홍익인간이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다. 공생공존은 인간과 인간뿐 아니라 인간과 지구의 운명공동체로도 확장이 가능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홍익인간을 21세기 현대 문명이 나아갈 길과 관련해 한국이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인류가 경쟁 중심 체제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이동해야 할 시점에서 홍익인간은 한민족의 건국이념을 넘어 보편적이며 본질적인 세계인의 철학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 고대 사상의 결실 화랑도
맵시 있게 단복을 차려 입은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는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1907년 영국에서 창설된 세계스카우트연맹은 청소년을 교육, 훈련해 민주시민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국제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됐다.
스카우트연맹이 20세기 들어 발족된 조직이라면, 우리는 이미 신라시대에 청소년 심신 교육 시스템을 갖춘 선진 국가였다. 화랑도가 바로 그것이다.
화랑도란 간단히 말해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청소년 수련단체를 말한다. 국선도, 풍월도, 원화도, 풍류도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 때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리더급인 화랑 아래 그를 따르는 낭도들이 있었으며, 총 책임은 국선이 맡았다. 원칙적으로 국선은 전국에 1명, 화랑은 적게는 3~4명, 많게는 7~8명에 이르렀으며 각 화랑이 거느린 낭도는 수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고대의 기록을 보면 화랑도는 보통 15~18세에 이르는 청소년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무예를 익히고 세속오계를 통해 도의(道義)를 연마했다.
세속오계는 진평왕 시절 원광법사가 만든 계율로 ▲사군이충(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 ▲사친이효(효도로 어버이를 섬긴다) ▲교우이신(믿음으로 벗을 사귄다) ▲임전무퇴(싸움에 임해 물러나지 않는다) ▲살생유택(생명을 죽임에도 가림이 있다)이 그 내용이다.
이 세속오계는 각각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는 유교의 실천 윤리와 매우 깊은 관계를 지닌다는 점이 흥미롭다.
세속오계 중에서도 특히 엄수됐던 계율은 충과 신이었다. 당시 화랑도는 화랑뿐 아니라 낭도를 비롯해 일반 병졸까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즉 대의명분과 애국애족을 중시했던 것이다.
일례로 김유신은 아들 원술이 석문 전투에서 당나라군과 싸워 패하고 돌아오자 왕과 가문을 욕되게 했다는 이유로 왕에게 원술을 죽여 달라 탄원하기도 했다. 화랑도의 이 같은 기풍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렇다고 화랑도가 군사 조직의 역할만 했던 건 아니다. 의협심이 강한 화랑 집단은 평시에는 취약계층을 시시때때로 돕는 선행을 했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정치적으로 볼 때 화랑도는 계층을 통합하고 민심을 통합하는 효과도 있었다. 당시 신라는 신분 제도인 골품제도로 인해 갈등이 불거졌는데 화랑도는 진골 귀족, 하급 귀족,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입단할 수 있어, 사회 갈등을 일정 정도 완화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앞서 세속오계가 유교의 교리와 밀접하다고 했지만, 화랑도가 유교만을 바탕으로 삼은 건 아니다. 신라의 학자였던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화랑도를 소개한 바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화랑도를 이끌었던 정신세계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 하며 풍류는 유교, 불교, 선교를 포함하고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화랑도 조직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의 가르침이며, 모든 일을 거리낌 없이 처리하고 말없이 일을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행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랑도의 정신과 성격을 간파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화랑도는 단군 이래 계승돼 온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여기에 유교, 불교, 도교의 덕목이 합쳐진 독특한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삼는다. 화랑들이 낭도와 함께 산수를 노닐며 도의를 연마하고 가무를 즐겼던 것도 신선사상과 연관이 있다.
유·불·선의 조화를 바탕으로 대의명분과 애국애족을 표방했던 화랑도는 종합적 성격을 지닌다. 화랑도는 심신을 기르는 수련단체이면서 신라 사회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권력 집단이었고, 또한 인재를 발탁해 등용하는 인재 양성 기관이었으며 유·불·선의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철학 집단이기도 했다.
화랑도 정신은 현재까지도 면면이 이어지고 있으며 외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지난 7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2013 화랑도 연수교육’이 성황리에 열렸다. 화랑도의 무예를 가르치는 지도자와 수련생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세속오계를 비롯해 화랑도의 역사와 화랑의 덕목 등을 심도 깊게 배우는 기회가 주어졌다.
특히 화랑도 무예는 인성 교육에 효과가 커 이를 접한 외국인이 선호하고 있는 추세다. 한국 정신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화랑도는 이질적인 것들의 융합이 새로운 창조성을 잉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學에 기반한 고유의 선비 정신
독일 보훔대와 함부르크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쳤던 베르너 사세 교수는 저서 ‘민낯이 예쁜 코리안’에서 한국의 선비를 보헤미안과 비교한다. 풍광이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자연을 즐기고, 정자에 모여 시를 읊거나 철학적 담론을 나누는 모습이 보헤미안과 유사하다는 의미에서다.
그런가 하면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교수는 일본의 사무라이를 대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선비를 주목한다. 사무라이가 서구에 일본의 정체성을 각인하고 문화 상품으로 향유되고 있는 것처럼 선비 역시 한국을 세계에 인식시킬 수 있는 좋은 매개체라는 것이다.
선비 혹은 선비정신이 정치 지도자와 경영인, 교육자 등 사회 각 계층의 롤 모델로 언급된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해외에서도 선비와 선비정신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있으며, 지역성과 시대성을 뛰어넘어 현대인이 본받고 따라야 할 ‘이상적 인간형’으로 제시되고 있다.
선비란 한마디로 지식과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말하며, 그 바탕에는 유교적 전통이 자리하고 있다. 선비가 유교를 바탕으로 형성된 인간형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와 이상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선비정신의 요체는 무엇일까.
선비정신에는 어느 사회, 어느 집단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이 있다. 선비는 기본적으로 학자, 즉 공부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선비의 배움은 지식 습득이 아니라 인격 도야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자기 성찰이 동반되는 배움인 것이다. 여기에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이 나온다. 선비는 자신을 꾸준히 연마해 완전한 인격체가 되어야 비로소 남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대하고 남에게는 후하게 대하는 박기후인(薄己厚人)도 같은 맥락의 개념이다.
흔히 선비를 방에 앉아 서책만 들여다보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부당한 것에 저항하는 강한 신념과 실천력 역시 선비정신의 큰 가지 중 하나였다.
선비에게는 지식인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임과 의무가 뒤따랐다. 따라서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 하는 선공후사가 생활신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던 조헌 역시 평소 숱한 개혁안을 내놓으며 정론을 펼쳤던 선비였다.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내적으로는 강인한 외유내강, 강자에게는 당당하고 약자 앞에서는 자애로운 억강부약(抑强扶弱) 역시 선비가 갖춰야 할 자질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비는 시서화를 연마하면서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완전한 인격체를 지향했다. 지고한 자기완성을 꿈꾸면서도 더불어 사는 세상을 염려하는 공생공존의 정신, 그것이 바로 선비정신의 실체다.
참다운 가치가 중심을 잃고 이기주의와 편법이 횡행하는 현대사회에서 선비정신을 자꾸 되돌아보게 되는 이유는 명약관화이다. 선비정신이야말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그리고 세계에 자랑할 만한 정신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최근 이러한 선비정신과 선비문화를 체득하려는 노력이 일고 있다. 이른바 ‘서원스테이’를 통해 선비정신과 전통문화를 일반인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대표적인 게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의 프로그램이다. 이곳은 2002년 개원한 이래 매년 연수생이 늘고 있으며 그동안 총 8만여 명이 교육을 받았다. 공직자들은 선비문화 체험을 통해 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깨우치며, 기업 임직원은 윤리경영의 해법을 찾기도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재목록으로 등록된 병산서원 역시 서원스테이를 통해 선비정신을 전파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외국인 참여가 늘고 있어, 선비정신이 더 이상 한국인만의 가치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선비들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연구가 심화되고 있는 것도 반가운 현상이다. 퇴계 이황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계승해 퇴계학파를 만든 주인공으로, 그의 학문은 일본의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 초반 도쿄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고, 대만에도 국립사범대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미국 워싱턴, 뉴욕, 하와이에도 이퇴계연구회가 창설됐으며 독일 함부르크와 본에도 연구소가 있다.
다산 정약용 역시 해외 학자들이 많이 연구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비다. 특히 지난해에는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그의 생일을 유네스코에서 ‘유네스코 관련 기념일(Anniversaries with which UNESCO is associated in 2012)’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유네스코는 홈페이지를 통해 정약용을 한국의 매우 중요한 철학자로도 소개했다.
다산의 저술은 2010년 미국 버클리대 출판부에서 펴낸 ‘목민심서’ 영역본을 비롯해 독일에서도 출간되었다. 이처럼 서구 학자들은 18~19세기 조선에서 진보적인 주장을 편 선비가 있었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선비정신은 개인과 사회, 기업, 국가가 필요로 하는 해답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준다. 흔히 서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 한국인에게는 선비정신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독보적 애민사상가 세종
세종대왕의 연대기와 업적은 여러 편의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모았으며 관련 서적도 봇물을 이루며 출간되고 있다. 한 인터넷 서점에서 ‘세종대왕’이라는 키워드로 도서를 찾아보면 수백 권이 검색된다.
또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정리한 관련 연구 자료 목록을 보면 다양한 분야와 방대한 양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종과 관련된 정치, 사회는 물론 교육, 음악, 무용, 건축, 과학기술, 의학, 역사, 지리 등 전 영역에 걸쳐 데이터가 축적돼 있다. 세종은 방대하고 심도 깊은 독서를 통해 다방면의 지식을 두루 섭렵했던 왕답게 전 영역에 걸쳐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업적을 쌓은 것이다.
세종이 지금까지도 숭앙받으며 사회 각 분야 리더들의 롤 모델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세종이 요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고 실천했던 리더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구에서 발전되고 체계화된 리더십 이론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세종은 독서경영의 대가였다. 어려서부터 엄청난 학구파였던 세종은 집현전이라는 기구를 통해 통합적 지식을 축적해 냈으며 뿐만 아니라 축적된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는 실천적 면모를 보였다.
또한 세종이 보여준 리더십의 핵심을 마음경영으로 요약하는 시각도 있다. 내면의 감정을 잘 다스려 상대방의 마음까지 이끄는 경영을 펼쳤다는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반대할 때도 세종은 자신과 의견을 달리한 최만리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으며 불이익을 주는 일도 없었다. 소위 안티 세력까지 포용하는 태도가 세종을 성군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마음경영은 인재경영과도 연결된다. 기업이든 국가든 뛰어난 인재를 얼마나 모으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에 능력을 이끌어 내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세종은 장영실의 경우처럼 신분보다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한 인재경영 전략을 펼친 선구적 인물이었다.
세종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서번트 리더십으로 귀결된다. 세종은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임무가 무엇인지 늘 숙고했다. 그러한 생각의 중심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백성을 위하는 위민, 백성이 세상의 근본이라는 민본 사상이 깔려 있다.
그래서 세종을 평가할 때 가장 많이 붙이는 수사가 ‘애민을 실천한 혁신가’이다. 전문가들은 세종의 애민사상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수직적 성격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를 직시하는 수평적 성격이라 말한다.
단적인 예로 세종은 인권을 옹호해 천민이라 할지라도 인간다운 권리를 누리게 했으며, 죄수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기본적인 인권이 지켜질 수 있도록 했다.
세종의 인간존중 사상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실사구시와 무실역행을 늘 실천했기에, 애민 역시 현실 속에 녹아드는 살아 있는 정치로 승화되었다. 그러한 세종의 애민사상을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례는 바로 한글 창제일 것이다.
한글은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 가운데 창제자와 창제년도가 명확히 밝혀진 몇 안 되는 문자이다. 또한 자주, 애민, 실용을 기치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창제 정신과 더불어 제자(制字) 원리의 과학성도 인정받고 있다.
이에 유네스코에서는 문맹 퇴치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해마다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수여하고 있기도 하다.
농업 기술을 발달시키고 세제를 개혁한 것도 민본사상의 발로다. ‘눈높이 정치’를 실행했던 세종은 기존의 조세 제도가 폐단이 많다고 판단해 ‘공법’이라는 새로운 조세 제도를 제정해 조정에 발표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지닌 관리들이 새로운 조세 개혁안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에 세종은 공법이 백성을 위한 개혁안이므로 백성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마침내 조선 최초로 대규모 여론조사를 실시한다. 기록에 의하면 관리에서부터 일반 농민에 이르기까지 17만 명이 여론 조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세종은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측우기 같은 기구도 발명하고 ‘농사직설’을 편찬해 새로운 농법과 농기구를 확산하기도 했다.
15세기에 이미 인권 평등, 인권 존중, 합리적 사유를 실천한 근대정신의 선구자. 당대를 함께 살았던 세계 어느 나라의 왕보다 탁월한 업적을 쌓았던 세종대왕. 그 성과는 애민사상과 인간존중의 철학에서 비롯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리더십의 전형으로 그가 숭앙되는 이유이며, 한국을 넘어 전 세계 정치가와 기업가들도 배울 만한 리더십의 표본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