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톨릭, 어떻게 가르칠까?(6)
로마교회는 옳은 성경을 갖고 있는가?
개혁주의 기독교가 1200여년의 중세기 로마가톨릭교회의 어두움에서 갈라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른 성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는 성경보다 의식과 전통을 중시했다. 그들은 천 몇 백 년 동안 성경을 각 나라 말로 번역시키는 일을 금지시켰고,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지도 못하도록 했다. 성경을 읽으려던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 당했고, 고문을 당했으며, 교회의 이름으로 살해되기도 했다. 이런 정황을 그린 작품이 김성한의 <바비도>이다.
교황청, 성경을 금서로 정하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참다운 그리스도교였다면 그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번역했을 것이며, 성경읽기를 권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평신도들에게 성경읽기를 금지시킨 것은 그들 주장대로 성경 해석권이 남발되므로 인한 성경 권위의 훼손을 우려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 혼합종교에서 따온 수많은 교리와 풍습들-교화제도, 마리아공경, 고해성사, 사제들의 복장과 치장물, 성자(聖者) 숭배… 등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평신도들이 알게 되고, 교황청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에서 1229년 톨로사회의에서 평신도가 성경을 갖는 것을 금지시켰다. 당시 로마교회의 금서(禁書) 목록에 성경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의 성경관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성경의 권위와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말로 성경을 번역하였고, 일반 신자들이 읽도록 책을 발간하였다. 교황청의 비성경적 가르침이 성경읽기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경이 읽혀지는 심령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나타났고, 개혁운동은 마른들에 산불이 번져나가듯 순식간에 전 유럽 국가에 파급되어 갔다.
이에 놀란 로마교회는 1897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황청에서 만들고 인정하는 성경 이외에는 모든 성경을 금했고, 더군다나 성서공회에서 발행되는 성경은 일체 읽지 못하도록, 소유할 수도 없도록 엄금하였다.
한국의 천주교는 1784년 전래된 이래 1866년까지 무려 82년 동안 성경의 어느 것도 번역되지 않았고, 1910년 비로소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를 번역하였는데, 이는 로마교회가 들어온 지 126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1922년 사도행전을, 1941년에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였으며, 1977년에야 우리말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도 기독교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성경이라니 성경에 대한 자세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는 “성경, 개신교는 66권… 가톨릭은 왜 73권일까?”라는 기사에서, 이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문서 번역본 입장 차이”라고 말한다. 전문을 읽어보자.
⟪가톨릭과 개신교의 성경을 펴 놓고 목차를 비교해 보면 가톨릭 성경에는 있고, 개신교 성경에 없는 책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은 똑같이 27권이지만 구약은 가톨릭이 46권, 개신교가 39권이다. 그래서 가톨릭 성경은 73권, 개신교는 66권으로 권수가 다르다.
그리스도교 구약 성경의 모체인 히브리어 문서의 번역본 중에 '70인 경(經)'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3~기원후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스라엘 민족 12지파(支派) 대표 72인이 당시 널리 통용되던 그리스어로 번역하며 집성되기 시작했다.
히브리어에서 직접 옮긴 그리스어본 39권에다 히브리어본이 없지만 널리 읽혔던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2005년 천주교중앙협 새 번역 성경 기준)… 등 다른 여러 권도 포함돼 총 46권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히브리어본이 없는 문서들은 대부분 유대 민족 수난기인 기원전 200년~기원후 100년 사이 쓰였다.
그러나 기원후 4세기쯤 정립되는 유대교 정전(正典) '타나크(Tanakh·히브리어 24권)'는 히브리어본이 없는 문서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그리스도교 세력이 확장되며 정경(正經) 범위 논란도 커지던 시기에 성 제롬(예로니모 혹은 히에로니무스·348~420)이 완성한 라틴어 번역본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정본인 '불가타(Vulgata)본'이다. 그가 애초에 '70인 경'을 저본으로 했으므로 불가타본 구약도 총 46권이 됐다.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도 '70인 경'에 따라 구약 목록을 46권으로 확정했지만 논란이 끝난 건 아니었다.
16세기 이후 종교개혁기, 루터 등 종교개혁자들은 히브리어 사본이 있는 39권만을 구약 정경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봤다. 이에 반해 로마 가톨릭은 16세기 중반 트렌트 공의회에서 불가타본 구약 46권 전체를 정경으로 재확인했다. 히브리어본이 없던 7권을 '제2경전'으로 구별하면서도 똑같이 신의 영감을 받아 쓰인 성경으로 본 것이다.
현재 그리스도교에서는 로마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 루터교회 등이 이 7권을 '제2경전' 등으로 분류하며 존중한다. 대부분 개신교는 이 7권에서 보편적 사랑과 긍휼보다 유대 민족주의와 인과응보식 정의의 강조가 지나치다고 보며 정경 외의 책, 즉 '외경(外經)'으로 분류한다. 지역별 정교회에 따라서도 이 분류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성경신학자의 글은 아니지만 위의 글에서 보는 것처럼, 로마가톨릭과 개혁주의교회가 성경권수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구약이다. 구약이 39권이냐, 47권이냐? 그 차이이다. 신약의 27권은 누구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약의 권수는 다르다. 이태훈 기자의 한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도 '70인 경'에 따라 구약 목록을 46권으로 확정했지만 논란이 끝난 건 아니었다.⟫
논란이 끝나지 않았다…. 숫자로 힘으로 밀어붙였지만 완고하게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다음 문장이 해답이다.
⟪…기원후 4세기쯤 정립되는 유대교 정전(正典) '타나크(Tanakh·히브리어 24권)'는 히브리어본이 없는 문서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답이다. 히브리본이 없는 문서들은 히브리인들이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교 정전(正典) 타나크(Tanakh)는 히브리어본이 없는 문서들을 왜 인정하지 않았을까?
첫째, 말씀을 맡은 유대인들이 구약 39권은 정경으로 인정하면서도 구약시대를 배경으로 집필된 15권의 외경-가경은 성경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유대인들은 정경의 권위를 규정할 때 정경을 기록한 예언적시대(성경시대)를 정하였다. 예언적 시대는 모세로부터 아닥사스다 왕 때까지였다.
로마교회의 가경은 아닥사스다 때보다 훨씬 후에 기록된 것이므로 정경으로 받아들일 하등의 근거가 없다.
둘째, 신약성경에서도 가경을 인용한 적이 없다. 예수님과 사도들,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 39권에서는 즐겨 인용하였으나 15권의 외경-가경에서는 단 한 줄도 인용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에도 이미 가경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했다는 사실은 가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외경-가경의 내용에 오류(誤謬)가 많다는 점이다. 역사적 지리적 오류는 물론이고 신학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오류들이 있다. <토비트>에는 죽은 자를 구제 사업으로 구원이 가능하다 가르치며(12:9, 4:10) <바룩>은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의 기도도 들어주신다는 내용이 있다.
벌써 세 번째의 이유에서, 로마가톨릭이 왜 외경-가경을 성경으로 편입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 드러난다. 교황청이 서둘러 외경-가경을 정경으로 편입시킨 것은 그들의 교리-이를테면 고해성사, 교황직, 사제 독신, 마리아 부활 승천… 내용 등이 정경에게는 없기에 자기들의 교리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억지로 편입시켰을 뿐이다.
종교개혁,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을 들고 나왔다. “성경으로 돌아가자”-이런 주장은 결국 성경에 없는 제도들은 과감히 버리자는 것이다. 개혁가들이 처음부터 교황제도를 반대하거나 독신제도의 부당함을 들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결론이 어디로 갈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루터에 의해 성경은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그 전까지 세계교회는 라틴어 외에 또 다른 말로 번역되어서는 안 되고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교황청의 엄명이 있었다. 교황청은 이런 금지명령을 성경의 권위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내세웠지만 사실은 바벨론 종교에서 따온 저들의 교리를 감추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1500여 년이란 긴 세월동안 성경에도 없는 교리를 만들어내어 온갖 권력과 횡포를 일삼아왔다. 이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성경이 각국어로 번역되어 나가고,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그 성경을 읽게 되면 교황청의 무수한 교리들이 성경에서 나오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어 많은 이탈자들이 속출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교황청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며 존립마저 보장할 수 없는 위기의식이 교황청 교권자들 사이에 팽배하게 되었다. 이에 저들이 머리를 짜낸 것이 자신들의 교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가경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정경으로 편입시키는 일이었다.
그들은 수백 가지의 가경 작품들을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했다. 행위가 구원의 공로가 되며 구제 사업이 죽은 자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쳐온 그들의 교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내용이 ‘토비트’라는 신앙작품에 들어있었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내용은 ‘바룩’이라는 작품에서 발견되었다.
이런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정경으로 편입시켰고, 이런 가경에 근거하여 교황청의 교리들을 정당화시켜 나갔다. 가경을 정당화-재확인시킨 회의가 바로 로마교황청 당국자들에 의해 소집된 1546년 트렌트회의이다.
트렌트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참석한 감독들은 전 세계에서 30여 명 정도였다. 그들 중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를 해독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고, 구약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헬라어를 아는 사람들만이 몇 명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모든 가경이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다는 신조를 통과시켰고, 이것이 교황청에 의해 무수정 통과되므로 오늘날 66권이 아닌 73권 혹은 그 이상의 성경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의 글에서도 보았듯이,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말씀의 가감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그것은 구원과 형벌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짓임을 말씀하셨다.
이런 경고가 있음에도 로마교회가 한두 구절도 아닌 여러 권의 가경들을 정경에 포함시키면서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교회(교황)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논리 때문이다.
로마교회는 교회 권위는 성경을 73권으로 만들 수도 있고, 100권으로 만들어도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로마교회는 그런 가능성이 충분하다. 언제라도 필요하면 역대 교황의 어록이나 자서전이 성경을 방불하는 책이라고 우기고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천주교, 성경말씀보다는 미사에 주력
로마가톨릭은 성경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종교이다. 혹자는 요즈음 로마교회 신자들 가운데는 열심히 성경공부하며, 로마교회에서도 성경을 열심히 가르친다고 한다. 그 말은 옳지 않다.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가르치며,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비해 갈수록 의식에 치중하고 있다. 설령 그들이 성경을 가르친다고 해도, 가경을 과감히 버리지 않는 한,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아래 두는 한, 성경 해석권을 교황의 손에 내맡겨 두는 한 결코 바른 성경을 공부할 수 없고, 바른 성경으로 돌아올 수 없다.
가경을 포함한 성경공부의 열심은 마치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몰몬교, 통일교 신자들의 자기네 경전을 열심과 배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 사제였던 아베르토 리베라 박사는 “하나님께서는 로마교회에 성경을 주신 일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의식종교이며 교리종교이다. 그들의 의식과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바벨론 혼합종교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인정하면서 물밀 듯이 자기의 종교를 지닌 채 들어온 이방 종교인들과의 혼합에 의해 자연스레 그리스도교+바벨론 종교+기타 여러 종교=로마가톨릭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이 없어도 의식과 교리만을 가지고 얼마든지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만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사제들 중에는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자들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사제의 신분을 계속 유지해 왔다. 로마가톨릭은 성경이 없어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종교임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겠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 스스로 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누려야 한다. 교회의 권위는 이런 일에 쓰여야지 성경을 얽매는 일에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어떤 권위도 말씀을 얽맬 수 있는 권리가 없다. 신자들에게서 성경을 빼앗아갈 권리가 없다. 교회는 신자들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까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성경을 대신하는 교리책이나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하는 일이나 이방종교에서 빌려온 묵주를 돌리는 일이나 성수(聖水)를 뿌리는 등의 이교적이고도 미신적인 일을 버려야 한다. 신자들이 이런 의식 때문에 성경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신자들이 미신적인 의식에서가 아니라 살아 역사하고 운동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말씀의 능력 앞에서 통회하고 자복하며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일들이 로마가톨릭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로마가톨릭은 그리스도교로 돌아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이단시하는 시선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