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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의 이야기를 읽고
오래전에 로마인의 이야기 중 몇 권을 사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한니발과 카이사르를 읽고 나니 더 이상 재미가 없을 것 같아 그대로 접어 두었다. 카이사르의 종군기 ‘갈리아 전쟁’만 사놓고 읽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어릴 적 읽었던 “플르타쿠스 영웅전”의 주역들의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내 기억에서 로마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었다.
성장기에 접할 수 있었던 성경을 주제로 엮어서 만들었던 여러 영화들. 벤허, 쿠오바디스, 엘시드, 왕중 왕, 로마제국의 멸망 등에서 로마제국의 위엄있고, 강압적이었던 장병들이나 총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로마하면 떠오르는 건축물이 콜롯세움이 있고, 로마의 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서양속담은 너무도 귀에 익었다.
젊은 시절 요르단에 2년 정도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라시라는 도시에 있던 로마시절의 유물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반원형의 극장과 로마신전의 기둥이 남아 있었다. 이 모두 2천년이 넘은 건축물과 토목구조물이었다. 막연히 거대한 제국이었을 것이라는 느낌만 가지고 있었다.
2년전 여름,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여행지가 이태리였다. 로마에서 피렌체, 밀라노에서 베로나를 거쳐서 베네치아를 둘러보고 다시 로마에 와서 남부 지방 폼페이. 나폴리와 소렌토를 돌아보고 왔다. 이태리 남쪽 북쪽 지방을 돌아다녔지만, 눈도장만 찍은 여행이었다. 로마나 이태리에 대한 갈증만 더 해버린 여행이 되었다. 다시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고, 로마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로마인의 이야기 열다섯 권 을 구입해 놓고 조금씩 읽어가던 중, 겨울 방학 시즌이 돌아왔다. 드디어 전권을 읽어 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하루에 한권 읽기가 쉽지 않았다. 보통 400쪽이 넘었고, 500쪽 넘는 책도 대여섯 권이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이야기 풀어내는 솜씨에 빠져서 지루하지 않게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중에 수시로 지도가 등장했다. 수많은 전쟁터의 병력 운용이나 작전을 실감나게 보여주었고, 제국의 영토 범위를 지금의 느낌으로 그려 볼 수 있었다. 각종 통계자료를 보여주어 그 당시의 정책이나 경제 지표를 현세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했다. 책의 곳곳에 밑줄을 긋고, 스크랩을 하여 별도의 저장소에 저장을 해놓고 나니 이제야 로마를 좀 알듯했다.
카이사르
로마인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주인공은 카이사르였다. 그는 전쟁터에 있어서나, 정권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천년사에 어느 누구도 그와 비교할 만한 지도자는 없었다. 전쟁에서는 백전백승이었고, 정치에서는 천년 로마의 기틀을 마련했다. 수많은 야만족과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국경을 안정시켜 제국을 평화롭게 만들었고, 수많은 법을 만들어 로마시민들을 법아래서 편안하게 살게끔 했다. 길을 뚫고 수도를 만들고 대중목욕탕을 만들어 로마시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이 율리우스 력이라는 것을.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태양력을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이다.
이민족과의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면책되었다. 어떤 포로에게도 보복이나 가혹행위가 허락되지 않았고, 그들에게 유인책을 실시하여 로마병사로 근무하게끔 했다. 20여년의 복무기간을 마치면 로마시민권을 주는 정책을 펼쳤다. 이런 포용정책이 로마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거대한 제국 운용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토를 지금의 지도로 보면, 서쪽으로는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포루투갈, 남쪽으로는 이집트, 알제리, 리비아. 동쪽으로는 그리스, 터키, 요르단, 이스라엘 그리고 이라크의 북부까지. 지중해를 둘러싼 육지가 모두 로마의 영토였다. 그리고 시민권을 갖게 되면 이태리 본토사람이나 멀리 떨어진 속주출신의 시민이나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고.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졌다.
로마제정 후기에는 이렇게 속주출신 황제가 나오기 시작하여 번갈아 가면서 황제를 했다. 갈리아 지금의 프랑스, 게르마니아 지금의 독일. 히스파니아 지금의 스페인,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출신의 황제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의 특징은 출신지역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들의 고향에 입상하나 세우지 않았다. 왜냐면 그들은 특정지역을 위한 황제가 아니었고, 로마제국을 위한 황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갈리아 국경에서 전쟁을 수행하면서 매년마다 독재관으로 원로원에서 재임명을 받아야하는 절차가 너무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공화정을 뒤엎고 황제가 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래서 로마정권을 쥐고 있는 원로원들에 대한 쿠테타를 시도한 것이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전방의 군 지휘자들이 로마국내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이동할 수 있는 한계선이 북쪽은 루비콘 강이었고 동쪽에서는 브린디시 항이었다. 중요한 경계였다. 원로원에서 군인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 그어 놓은 한계선이었다. 카이사르는 이 경계를 넘어서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한 것이다.
그 뒤로 정권 탈취를 위한 내전이 일어났다. 그의 친구이자 한때 딸의 남편이었던 폼페이우스와 그리스에서 건곤일척의 대결을 하여 물리쳤고,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에 가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게 되었다. 세기의 로맨스였다.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여담으로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 여인이었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생각했다. 피부색은 까무잡잡하고 머리는 라면처럼 뽀글뽀글하고. 클레오파트라는 본토박이 이집트태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알렉산더 대왕 통치시절 마케도니아에서 건너온 통치계급의 왕녀였다.
그렇게 황제가 되는 데 장애를 다 제거한 뒤였다. 그는 다시 임명을 받을 필요가 없는 종신 독재관이 되어 동방원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원로원 회의 참석을 하기위해 회의장에 나타났던 그에게 암살의 참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화파 원로원 수십 명이 몸에 칼을 품고 들어와 무자비하게 난자를 했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기가 막혔던 사실은 카이사르가 아들처럼 여겼던 부루투스가 주모자중의 한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서양에서 배신의 아이콘이 되었던 부루투스는 카이사르의 평생 애인이었던 사르빌리아의 아들이었다. 카이사르와는 정치적 이념이 다른 공화주의자였다. 폼페이우스 아래서 싸우다 포로로 잡힌 것을 카이사르가 풀어주었고, 북 이탈리아 총독이라는 자리까지 주어 원로원으로서 재기를 하게 해주었다.
그날 로마시민들은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카이사르를 따랐던 로마의 거물 정객들도 공황상태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사이 폭도들은 카이사르의 시신을 불태워 강에다 버려버렸다. 카이사르는 흔적조차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시민들은 정신을 차렸고, 이 암살의 배후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카이사르를 따라 평생 전선을 누볐던 군인들이 복수를 다짐하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암살자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일년이 되지 않아 암살에 가담한 자들은 주살되었거나, 도피하다 몰려서 자살을 했다. 여기 암살의 배후에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정치가 였던 키케로가 포함되었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 그에게서 유산과 유지를 물려받았던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는 발전 번창하였고, 아우구스투스는 결국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죽어서 시신도 찾지 못했지만 그의 뜻은 후계자에게 이어져 천년 로마의 기틀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카이사르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수많은 개혁군주들이 죽고 나면 개혁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을 수 없이 역사에서 봐왔다. 그는 본인이 없어도 중단되지 않을 개혁의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죽은 것이다.
로마의 황제들
우리가 아는 로마의 황제 네로는 아우구스투스 이후 다섯 번째 황제였다. 네로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혈통에서 내려온 마지막 황제였다. 네로가 자살함으로써 카이사르의 혈통이 끊어졌다. 어머니를 죽이고 아내를 죽인 패륜아였지만, 청사에 길이 남을 만한 폭군은 아니었다고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그리고 로마의 대화재는 결코 네로의 짓이 아니었다. 화재가 발생했는데 거기에 바람이 불어 큰 재앙이 된 것이었다. 네로가 천하의 폭군이 된 것은 기독교도를 처형한 것 때문에 악명을 갖게 된 것이다. 로마시절 이후 서양사는 기독교도 관점에서 써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도가 되었고, 기독교 포교에 앞장선 황제들은 서양의 역사에서 대제라는 칭호를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나 테오도시우스 대제 등은 로마 역사상 대단한 위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라는 칭호를 주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했고,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황제다.
로마의 역사상 네로보다 포악한 황제는 많았다. 독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권력 장악을 확실히 했어야 했는데, 네로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로마의 황제들 중에 제명에 살다간 황제는 3분의 1도 안되었다. 황제 재임 중에 암살을 당했거나, 궁지에 몰려 자살을 택한 황제가 태반이었다. 그렇게 황제는 수 없이 바뀌었어도 제국은 흔들리지 않고 천년을 버티어 왔다. 이것이 법치국가의 견실함이었다. 이런 서양속담이 있다. ‘인간의 행동원칙을 유대인은 종교에 맡겼고, 그리스인은 철학에 맡겼고, 로마인은 법률에 맡겼다.’
로마는 황제정이 된 뒤에도 형식적이었지만, 원로원의 추인을 받아서 황제자리에 올랐다. 이런 정치구조 안에 ‘능력이 안 되는 황제는 민의에 의해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는 의식이 로마인들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설사 황제를 살해했더라도 대역죄인이 되어 ‘9족을 멸한다’든지, 시민들 앞에서 극형에 처해지지는 않았다. 황제 살해에 가담한 사람들만 처벌을 받았고, 잽싸게 도망간 암살자들도 몇 있었는데 그대로 두어 묻히게 했다. 끝까지 찾아가 죄를 묻지 않았다.
누구든지 황제가 되면 제 핏줄로 대대손손 이어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황제자리를 물려주었지만 대개 몇 대 가지 않아서 대가 끊어졌다. 그래서 정권 주위의 유능한 젊은이를 찾아 양자를 삼고 보위를 물려주곤 했다. 이렇게 손이 쉽게 끊어졌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근친혼의 폐해에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했는데, 사촌끼리 결혼하는 일은 흔했고, 형제끼리 맞 사돈이 되기도 했다.
로마의 멸망과 기독교
로마는 다신교였다. 로마의 신들은 그리스와 거의 같았다. 유피테르(쥬피터)는 제우스 였고, 비너스는 아프로디데 였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넵투누스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수많은 신들이 있었다. 그 신들은 현세에 살았던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기와 질투가 있었고, 때로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리스 로마 신들은 인간이 하고자 하는 일을 도와주는 착한 신이었다. 인간의 삶에 개입하여 미주알, 고주알 간섭하고 시비하는 신이 아니었다. 로마는 타민족의 신앙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았다. 그 민족의 고유한 종교를 인정해주었다.
여기에 중동에서 생겨난 유일신을 믿는 일신교가 로마에 들어오면서 많은 문제가 생겼다. 기독교인 들이 믿는 유일신은 엄격했다. 자기 외에 어떤 신도 있을 수 없었고, 단호히 배격했다. 그 유일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고 시시콜콜 간섭하고 주재했다. 여기에 문화적인 충돌이 생겼다. 전에 없었던 종교탄압이 있었고, 순교자가 나왔다. 유일신 종교는 확고한 배타성에 전파력은 빨랐지만, 가는 곳마다 불협화음을 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유일신을 믿는 무슬림이나 기독교는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제정말기 로마시민의 생활은 많이 피폐해져있었다. 국경이 허술해져 편안 한 삶을 살 수가 없었다. 야만족이 로마시내까지 들어와 진을 친 적도 있었다. 수도는 끊겨져 물 부족에 시달려야 했고, 매달 시민들에게 한 포대씩 무상으로 주었던 밀은 사라진 지가 오래 되었다. 군인들은 20년 복무하고 제대하면 주었던 연금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니 어떻게든 군대에 붙어 있고자 했고, 일찍 제대하면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그들은 산적이나 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살기 힘들어진 로마의 하층민에게 기독교는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기독교를 믿는 자에게는 귀천이 없었다. 누구든지 믿음만 있다면 받아들여졌고, 같은 신자들끼리는 바로 한 형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과부나 어려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주었다. 기독교의 훌륭한 점이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것은 로마의 황제 콘스타티누스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를 낳았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국경선의 장군이었을 때 만났던 선술집 딸이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를 낳고서 황후의 자격이 없다고 이혼을 당했다.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그 여인이 기독교에 귀의를 했고, 그 아들이 황제에 오르니 복위하게 되었다.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 그 뒤에 그녀는 성지순례까지 다녀왔다. 이런 어머니를 둔 아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를 공인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진흥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몰수 되었던 교회재산을 돌려주었고, 교회재산이나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로마의 상류층 지식인들이 성직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쉽게 터 주었다.
그리고 그는 주교들을 소집해서 새로이 교리를 확립했다. 그것이 니케아 공회였다. 그때까지는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만신의 왕, 왕중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아들로는 힘에 부쳤다. 그래서 신격화가 필요했다. 여기 니케아공회에서 그 유명한 삼위일체설이 확립되었다.
여담 한마디. 그 뒤로 천년도 지난 후에 기독교에서 파생된 개신교도들은 이 대목을 훨씬 수월케 넘어버렸다. 최근 설교를 했던 어떤 목사의 예수 수태론이었다. “하느님이 말썽을 부리지 않을 착한 요셉을 골라 그 부인에게 수태를 시켰다”고 했다. 참! 말도 안 되는 황당한 헛소리였다. 예수의 아버지어머니를 쉽게 부정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성경말씀이라 해도 너무 황당하다면 설교의 주제를 삼지 않았으면 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와서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다. 그렇게 되면 그 동안 로마인들이 믿어왔던 종교는 이교가 되었고, 신들은 잡신이 되어버렸다. 로마의 신전에 있던 입상들은 끌어내려졌고, 대로변에 서있던 황제상들은 부셔졌다. 모든 건축물들은 뜯겨져 교회 세우는데 사용되었다. 천년로마 역사의유물들이 이렇게 무참하게 짓밟혀져버렸다. 그 때쯤 로마제국은 허망하게 망했고, 유럽은 중세 암흑기 천년을 보내야만 했다.
첫댓글 바우님이 한동안 잠잠하더니 로마인 이야기 독서에 몰입했군요.
요약된 로마사! 독후감 잘 보았습니다.
2/10일날 과천에서 막걸리 한 잔 나눌 기회가 있기를 기다립니다.
오호! 우리의 영명하신 회장님 재미있게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ㅎㅎ 응궈이도 재밋게 읽었네, 이대목이 머리에 남네, 인간의 행동원칙을, 유대인은 종교에, 그리스인은 철학에, ㄹᆢ마인은 법율에 ~~🍒
오호! 응권이 선수 재미있게 읽었다니 참 다행이구만. 여기에 쓴것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은 데
언제 우리 단체로 이태리여행이나 가보세.
여행할 때 그 지역 역사에 박식한 동기가 있다면 금상첨화지. 추진한다면 기꺼이 함께 하고 싶네.
독후감 잘 봤네 이바우.
제가 책몇권 읽고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친구들하고 같이하는 여행이라 뜻이 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