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텔라의 마음공부 >
삶을 사랑하라 인도에서
글 | 스텔라 박
삶과 죽음
참 오랜 기간을 나는 이런 믿음으로 살았다. 오직 바로 지금, 바로 여기뿐이라고. 죽음 후면 모두 끝이라고. 그래서 바로 지금, 이곳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고 살았다.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그렇게도 기다렸던 그 순간이요, 지금 이곳이 내가 그렇게도 가고자 했던 바로 그곳이며,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그렇게도 함께 있고자, 만나고자 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있을 때 잘 해.”를 체화했다. 줄 때 팍팍 줬다. 아낌 없이. 그 좋은 사람, 지금 만나고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지를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그래서 후회가 적었다. 함께 있을 때, 많이 사랑했고, 함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씀드렸고,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최대한을 드렸기 때문이다.
시절인연이 맞아 내게 허락된, 가장 좋은 것도 지금 즐기자는 주의였다. 향기로운 커피도 지금 아니면 식어서 맛이 없게 되니 뜨거울 때 마셨다.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그릇에 담아 최대한 즐겼다. 내 어머니 시대의 여인들이 아끼는 그릇을 장롱속에 고이 모셔두기만 하고 자신을 위해선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세상 떠나는 미련스러움을 익히 봐와서였다.
우리들이 무언가를 강렬하게 소망할 때, 우주는 아주 작
은 것에서부터 이를 들어주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다.
" - 파울로 코엘료 ''
그런 면에서 나는 철저한 에피큐리언이었다. 기독교 식의 믿음, 즉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 현재 이 순간을 저당잡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비춰졌다. 어디 기독교뿐일까. 국적 없는 한국식 불교적 세계관, 즉 “내생을 위해 이곳에서의 삶을 참고 견딘다.”는 것 역시 겉모습만 다를 뿐, 마찬가지로 보였다.
마음챙김 수행을 시작하며 “나, 참 잘 살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현재 여기에서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주의를 기울이며 즐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 감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선택적으로 현재의 경험을 대해 왔는지를.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에 대해 철저히 깨어 있기는 그닥 어렵지 않다. 아니, 어쩜 이것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이 지나가도 우리는 그 추억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으니까.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힘을 여행지에서 가졌던 며칠 간의 추억에 의존한다면 이는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다. 좋다고 내가 분별한 것에 대해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하는 것, 그것이 집착이다.
아름답지 않고 즐겁지 않은 현재의 순간에 설 때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마음으로 이를 견뎌왔다. 하지만 이 역시 현재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자성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기억한다는 것은 중요하다만, 나는 그 순간 내가 일으키는, 너무 미묘해서 간과하기 쉬운 나의 저항을 액면 그대로 보았다.
인도의 화장실에서, 화장지도 없고, 변기 커버에는 누군가가 신발을 신고 올라갔었는지 흙발 자국이 찍혀 있고, 지린 내가 진동하는, 그런 순간에 섰을 때, 그 순간의 경험에 대해 ‘좋다 나쁘다’, ‘즐겁다 괴롭다’는 분별심을 내지 않고, 고요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음을 고백한다. 나는 저항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면 돼.”라고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인도 요가 유학을 위해 리시케시에 머물던 시절, 클래스메이트들이 자주 가던 샴발라 카페의 화장실에서 확 풍겨오는 지린내에 얼굴을 찌푸리며 나는 깨달았다. “뭐가 그렇게 싫어? 뭘 그렇게 저항하니?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일어나고 있어.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봐.”
그렇게 스스로를 알아차리고, 그런 나를 보듬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 몸 안의 가래와 콧물, 창자에 쌓여 있는 배설물들을 관했다. 내가 그렇고 있구나. 몸 안에 있을 때에는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몸 밖에 나가니까 얼굴을 찌푸리고 있구나…
매순간, 삶은 내가 가장 필요한 경험만을 내게 가져다준다.
내 삶의 매순간은 나의 초상이다. 삶은 그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무심하게… 그 움직임에 딱 붙어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 파도를 타던지, 아니면 아예 멀찌감치 떨어져서 강건너 불구경 하듯 이를 바라보던지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경험을 붙잡되 그것과 하나가 되질 못한다. “나는 네가 아니다. 그런데 너는 왜 이렇니?” 한다.
클래스메이트들이 샴발라 카페에서 북을 두드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갠지스 강을 바라보고 앉아 눈을 감고 나를 들여다봤다. 아이들은 내게 말을 건네려다가 자기들끼리 한 마디씩 했다. “스텔라는 이미 삼매야. (Stella is already in Samadhi)” 나는 그 말을 듣고 여린 미소로 답할 뿐, 계속 눈을 감고 나를 만난다. 그날의 깨달음은 깊었다.
나는 어느덧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다음이 그날의 깨달음이다.
삶의 모든 순간을 분별심을 내려놓고 친절한 마음으로 깨어서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삶의 덧없음, 무상함을 체득 증득하게 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다 보면 그 덧없는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을 모르지만 어머니는 사랑을 안다. 사랑은 어머니 마음이다. 자라나는 태아
를 위해 내가 좋아하던 것을 포기하고 매 순간 깨어 있는 것이 사랑이다. 마음챙김 수행을 하다 보면 삶의 매순간에 대해 자연스레 어머니의 마음을 갖게 된다. 이것이 무조건적 사랑(Unconditional Love)이다.
무조건적 사랑은 무조건적 수용과 다르지 않다. 삶이 내게 가져오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의지를 완전히 내려놓고 삶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된다.
내가 어디에 있던지, 무얼 하던지, 그 순간의 삶은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고스란히 투영한다. 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던 순간도 사랑하게 되고 내가 싫어하고 거부하던 순간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랑하게 된다. 현재 이 순간의 삶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 역시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된다. 지린내 나는 인도의 화장실도, 옆에서 쉴새 없이 남의 얘기 해대는 사람들까지도… 나는 삶과 하나가 된다.
비판 없이, 저항 없이, 열린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쳐들어온 군대의 창칼에 억지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삶의 주도권을 사랑하는 님에게, 사랑하는 삶에게 내어주게 된다. 항복(Surrender)하게 된다. 내가 내 의지로 계획하고 사는 것보다, 내가 사랑하는 삶이 이끄는대로 사는 것이 편함을, 그것이 내게 가장 좋은 것임을, 완벽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삶의 입장을 헤아리게 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내가 삶을 사랑하면 삶도 나를 사랑한다. 삶 역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나’라는 존재가 어여쁘다. 이 작은 존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 싶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니 바라는 것도 별로 없는 이 존재가 혹여라도
바라는 그 작은 바램의 진동을 삶은 알아차린다. 파울로 코엘료가 말한 “우리들이 무언가를 강렬하게 소망할 때, 우주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이를 들어주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다.”는 말은 바로 이 뜻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삶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당신에게 있어서 삶이 당신의 소망을 가져오든, 그렇지 않든, 이는 그닥 큰 문제가 아니다. 삶의 경험이 무엇이 됐든, 우리들은 이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머무는 바 없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나의 사랑…. 나는 삶이라는 연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궁극적 여성이다. 그리고 삶은 완전히 비어 있는 내 존재를 그대로 통과하며 자신의 법을, 디자인을 펼치는 궁극적 남성이다. 그렇다. 나는 샥티요, 삶은 시바이다. 시바와 샥티의 만남, 결합, 하나됨, 환희…
인도 힌두 성전 안의 대형 시바 링감과 요니를 보며 미개한 신을 믿는 나라는 못살고 고등종교인 유일신을 믿는 이들은 잘산다는 것을 무슨 깨달음이라고 되는 양, 얘기하지 말자.
그보다는 당신이 당신의 유일신과 하나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보길 바란다. 그 유일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신이 당신에게 허락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얼마만큼 있는 그대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물어보라. 혹여 있는 그대로의 삶이 분통터져 “주여, 이 고통을 거두어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라. 진정한 기도는 “주여, 제 잔이 넘치나이다.”밖에 없다. 정말 그렇다.
모든 것이 사랑이고, 모든 것이 붓다이며 모든 것이 예수다.
세상에 사랑 아닌 것은 없고, 마찬가지로 붓다 아닌 것도 예수 아닌 것도 없다. 만물에서 붓다를 보고 존중하고 예를 갖출 때, 우리들의 삶은 빛을 발하고 완성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의 신앙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장독대 신, 부엌 신, 뒷간 신 등 생활 공간 곳곳에 모두 신을 모셨던 조상들은 그 공간을 존중하고 예를 갖춘, 마음챙김의 달인들이었다. 내 나이 정도의 한국인이라면 어린 시절, 무슨 행동을 하든, 조신하게 하라는 가르침을 부모님들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조상님들의 마음챙김 수행과 그 열매인 예절법도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매순간 삶이 내게 가져다주는 경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시간을 정해 놓고 눈감고 앉아 가만히 삶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삶의 손짓에 주의를 기울일 일이다. 삶의 목소리와 손짓은 내가 고요하고, 비어있을 때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사랑의 목소리와 손짓을 느끼면 나를 모두 내어주며 항복하게 된다. 내가 나를 비울 때 삶은 일어나야 하는 방식으로 일어났다, 사라질 것이다. 당신이 그 머무를 바 없는 사랑을 알아차리고 삶과 함께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기를.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