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사람은 제대로 믿어야 한다 2
믿을 사람은 제대로 믿자’그리 말하고 보니 말은 맞는 것 같은 데 영 개운 하지가 않다. ‘이 세상 누굴 믿는단 말인가 ’대뜸 삿대질이라도 나올 벌건 표정이 연상되고 만다. 그러고 보니 또 그러하다. ‘적당히 믿어 보자’로 바꾸는 것이 나을 것도 같다. 세상이 어찌해서 이 꼴이 자꾸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민중의 지팡이란 분들이 그 모양이고 민의를 대변한다는 나리님들이 또 그 정도이고 검사님은 말할 것도 없고 판사님에 목회자에 선생님들까지 간간이 들리는 답지 않게 나오는 원망스런 뉴스다.
결국 ‘믿어 손해난 사람 열이면 열 다’ 란 것이 지배적인 현실인지라 감히 ‘난 안 그런데요’라고 말하기가 좀 뭐한데 난 그 덕을 제대로 크게 본 적이 있다. 그러기에 나는 믿을 사람은 제대로 믿어야한다고 여전히 말하고 싶다. 내가 아는 이병주란 사람은 나보다 여덟 살 정도 어린데 처음 그를 본 것은 당시 00하이테크라 하여 당시의 한겨레신문사가 위치했던 영등포 공장 동네에서다. 결혼도 안 한 젊은 사람이 머리가 다 벗겨져 큰일이다 싶었는데 꽤나 성실한 사람으로 당시 그곳에 대리였다.
그 회사는 당시 진공박막 처리기술을 도입한 신생 중소업체이면서 첨단 업체이기도 했다. 그곳 사장과 당시 내가 모시고 있던 분과는 같은 대학 동기로 개발관련 일 때문에서도 다른 분야의 일에 대해서도 서로 협조를 많이 하고 지내던 터인데 개발 쪽은 제품의 신뢰성 때문에 개발이 되어도 판매가 쉽지는 않으니 진척이 느리기만 해서 그것만으론 회사운영이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당시 원자력 실험시설 쪽에선 필수품으로서 거의 제작해 본 경험이 없는 아이템을 하나 소개하여 그들이 제작을 시도하였었다. 소개해준 아이템은 제관 품으로 용접에 일가견이 있는 그들로서는 구조 특성만 잘 파악한다면 잘 만들어 낼 그런 물건이었다.
연구소에 원자력 선진국이라 할 불란서 친구들이 처음 들여 논 장비를 이모저모 살펴 모작을 한 것인데 처음치고는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었다. 이후 이 품목은 국산으로 모두 대체가 가능했는데 우리연구소의 경우 꼭 필요한 제품이기는 한데 우리 말고는 쓰일 곳이 별로 없어 부가 성이 높은 제품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런 일로 그와 나는 여러 차례 만날 기회가 생겼다. 이후 92년도 연구용 원자로를 지을 때 그 회사가 이 제품을 제작을 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는 그 회사도 규모가 커져 천안으로 공장을 이전하였었다.
물건을 제작하여 제관 물은 연구소 설치위치에 입고 완료하였는데 문제는 그 제관 물에 들어가는 HEPA 필터 보관에 있었다. 덩치가 크고 수량이 많아 당시 창고가 없는 우리로서는 보관 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더더욱 그 필터는 반도체분야 의료분야든 청정을 요하는 곳에 쓰이는 아주 민감한 성질의 제품으로 보관상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제품 다 만들어 납품한 물건을 안 받아 줄 수도 없어서 생각 끝에 일부 장착될 물건들은 들여다 놓고 나머지는 받은 것처럼 하여 그 회사 천안공장에 놔두었다.
설마하니 떼어먹을까 하는 느긋함이 우선했다. 그런데 일은 꼭 그런데서 엉뚱하게 터진다.그 회사가 그만 부도가 난 것이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늦가을 토요일로 기억된다. "워낙 상황이 험악해서 우선 차부터 가지고 와 보세요." 그의 급한 전갈을 받고 4.5톤 트럭을 한 대 수배하여 급히 그곳에 갔었다. 그는 안보이고 이미 공장은 바리케이트를 친 상태로 진입이 불가했다. 몇 달 째 임금을 못 받았다는 데 내 물건을 내어줄 리 없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회사 뒤쪽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밤 새 물건들을 비닐하우스로 실어 날랐던 것이다. 못다 빼낸 것을 마저 꺼내고 있는 친구들 몇이 보였다. 너무도 고맙고 나로서는 아름다운 풍경이라 할 것이나 마음 한 편 애처롭기도 하였다."나는 고마운데 저것으로 이 과장은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겠어." "어제 얘기가 다 된 겁니다. 조 감독님이 물심양면으로 우릴 도와주고 키워줬다는 것 노조도 잘 알아요. 앞에서 물건을 빼 가면 남들 눈도 있고 해서 곤란하다고 해서 뒤로 넘긴 겁니다."순간 나도 모른 새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밥 굶고 떠나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은 사람들이라니.
필터 한 개 값이 18만원이었으니 당시로서도 2천 만 원도 넘는 금액이다. 그밖에도 그 회사는 원자로 현장에서 건축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해야 할 장비설치 작업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잔여공사를 마무리 지어야 할 처지였기에 돈 3백 만 원을 들여 소모성 자재를 사고 일할 사람들을 우리 집에 재워가며 일을 끝냈다. 그가 아니었으면 마무리 안 될 일들이었다. 내가 직장을 잃었는데 남을 봐줄 마음의 여력이 생길까.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는 물음이다. 이후 나는 나를 끝까지 도와준 친구 몇(병역 특례자)을 바로 회사근처 방진재를 만드는 유니슨산업이란 데 취직을 알선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본가가 있는 부천에 있는 호이스트 전문 업체 공장에 소개를 하였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왔다." 이것 아버지가 저에게 준 작품인데 감독님 가지세요."그가 불쑥 건네준 것은 불자가 새겨진 아버지의 서예 글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늦게 출가하여 지금 화성의 보명사에 주지스님이다. 필체가 수려해서 조계종에선 꽤나 유명한 스님으로 하루는 금분을 사 달라 해서 가족들에게 하나씩 선사하나 싶었다는데 작품을 만들어 받은 성금을 교도소에 모두 기증하였다고 한다. 어제는 문득 그가 떠올라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이번에 스님 만나러 가겠네 하였더니 가봐야지요 한다.
스님을 만나려면 천배를 하여야 만나준다고 했다. 세 시간 정도는 꼬박 절을 해야 아버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면 뭐라 하느냐고 물어 본 적이 있는데 빙그레 웃고는 아무 말 없이 본당을 떠난다 했다. 남는 여운이 길었다. 그 착한 심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지금도 그를 믿는다. 밤 세워 필터를 나른 애틋한 그 마음을 내가 어찌 잊을까. 그 여운이 또한 내게 깊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 돈 6천만원 쯤 돈을 챙기다가 세상을 원망하였을지 모른다. 사람의 만남에 믿음처럼 소중하고 귀한 것이 있을까. 믿음으로서 사랑과 자비도 얻어진다. 내일은 베풀고 나누는 자비를 다시 생각해 볼 석가탄신일이다.
*지금 그는 반도기계에 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