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화를 걷다] 중세의 고도(古都), 테살로니키 -천 년의 부침과 굴곡이 빚어낸 도시
현재 그리스의 수도는 아테네인데, 중요성에서 그에 버금가는 도시는 테살로니키이다. 그리스 동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의 연안에 위치한 테살로니키는 그리스 제2의 도시이지만 항구로서는 단연 제1위이다.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아스가 있지만, 물류 유통의 규모에서 테살로니키를 따를 수가 없다. 테살로니키는 동유럽의 물류집산지로 매년 9월 국제산업전시회가 개최된다. 뿐만 아니라 과거 로마 제국 시대에 이탈리아와 동부 속주를 잇는 육로의 중심에 이곳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은 유럽과 터키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놓여 있다.
테살로니키가 수도의 외항인 피레아스와 갖는 관계는 국제항으로서 부산과 서울의 외항인 인천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2006년에는 테살로니키 시장이 부산을 방문하여 양 도시간 유대를 다지기도 했다.
테살로니키는 지금도 그리스 제2의 도시이지만, 중세 비잔티움 제국(330-1453) 시대에도 두 번째 위상을 가진 도시였다. 그런데 첫 번째 도시는 아테네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15세기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터키 땅에 속하므로 지금은 터키에서 ‘이스탄불’로 부른다.
테살로니키는 예로부터 수많은 민족과 종교 집단의 고향이며, 강국들의 협상의 대상이 됐던 곳이다. 아테네가 기원전 5세기 중심으로 길어야 1-2세기간 역사의 주요 무대가 됐다면, 테살로니키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세 시대 근 1천 년 이상 동부 지중해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가졌으며, 그 역사적 유적도 아테네에 비해 훨씬 풍부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본향(本鄕)
테살로니키는 마케도니아와 발칸 반도의 중심지로서, 찬란한 과거와 함께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밝은 미래를 기약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유럽에서 터키로 통하는 간선도로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과거 로마 제국 시대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스 서부 해안의 항구 두라키오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이어기는 ‘에그나티아’길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전통은 지금도 여전하다. ‘에그나티아’ 고속도로가 그리스의 서해안 이구메니차에서 터키와의 접경 에브로스 강이 있는 곳까지 연결돼 있고, 중심 간선도로가 ‘에그나티아’ 가(街)이며, 중심 광장 이름도 ‘에그나티아’ 광장이다.
테살로니키는 테르마이코스 만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고 산과 바다 사이에서 해변으로 길쪽하게 들어선 도시이다. 테르마이코스(어원인 ‘테르모스’는 ‘열(熱)’이란 뜻이다)만은 그 수심이 깊어서 큰 배가 바로 육지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테살로니키는 ‘테르마이코스의 신부(新婦, nymph)’로 불리기도 한다.
테살로니키의 또 다른 이름은 중세 기독교(정교)의 전통을 이은 ‘성 디미트리오스의 도시’이다. 테살로니키는 성경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성경에는 흔히들 ‘데살로니가’로 발음된다.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는 바울 등이 테살로니키인들에게 기독교의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쓴 서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305년 순교했던 디미트리오스(데메트리오스)는 이 도시의 수호 성자다. 그는 3세기 말 로마의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 군대의 천인장으로 복무했다. 그는 기독교를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즉위할 때 기독교도가 되었다가 303년 투옥되었으며 그 후 처형되었다. 황제가 이곳을 지배하며 기독교를 박해할 때 순교했다. 그 후 그는 도시의 수호성인이 됐고, 이민족이 이곳을 쳐들어올 때 성문 앞에 환영으로 모습을 드러내 이민족들을 격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한 예가 527-688년 테살로니키로 슬라브, 아바르 등 이민족이 수십 회 파상적으로 공격해 들어왔을 때이다.
테살로니키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특히 863년 수도승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슬라브인 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여정에 올랐던 곳이 이곳이다. 두 형제는 오늘날 슬라브어의 모태가 되는 문자 ‘키릴 문자’를 만들어 전파했다. 또 904년에는 ‘사라키니(사라케노이:서부 지중해에서 온 아랍인)’인들에 의해 테살로니키가 함락되어 그 거주민 다수가 학살된 적도 있엇다.
오늘날 테살로니키는 마케도니아 주의 수도이다. 마케도니아는 고대 왕국의 이름으로 동방원정 당시 페르시아를 멸망시켰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본향이 있는 곳이다.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 중심지는 베르기나였으나, 테살로니키가 위치한 테르마이코스 만 해안까지 그 영역을 확대한 것이 기원전 약 6세기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년시절 스승이었던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전통을 기려서 테살로니키 최대 국립대학교를 ‘아리스토텔레스 대학’이라고 부른다.
테살로니키가 중심지로 등장한 것은 로마제국부터다.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2년 그 길목인 테살로니키에 항구 시설을 확대 구축했고 그것은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할 때(1453)까지 사용됐다. 로마법전을 편찬한 비잔티움(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서부 지중해의 옛 로마제국의 영토를 수복하면서, 테살로니키를 일리리쿰(발칸 반도)의 수도로 격상시켰다.
4차 십자군(1202-1204)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라틴제국(1204-1261)을 수립했을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유민들은 수도를 빼앗기고 그 주변, 즉 남쪽의 니케아 제국, 흑해 남부 연안의 트라페준다, 서부의 일리리쿰 등으로 흩어졌다. 십자군 보니파키우스 몸페라티쿠스는 테살로니키를 20년 동안 장악했다. 1224년에 이피로스(그리스 북서부 지역)의 지배자였던 테오도로스 두카스가 어렵사리 이곳을 탈환했고, 1227년에 그는 테살로니키에서 ‘로마인들의 황제’로서 등극했다. 이렇게 해서 테살로니키는 당시 콘스탄티노플 다음 가는 ‘제2(비잔티움제국의) 수도’가 됐다. 1387년에는 터키인들에게 종속됐고 한때 반란을 기도했으나 1395년에 다시 터키인에게 굴복했다.
1423년 비잔티움제국 황제 마누일 2세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팔래오로고스는 테살로니키를 베네치아인의 손에 넘겨줬으나 이들도 터키인들의 공세를 견디지 못했고, 1430년 테살로니키는 다시 터키인들에게로 넘어갔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학살됐으며 터키인들인 이곳을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의 교두보로 삼았다.
수도 아테네에 대항하는 항거의 거점
20세기에도 테살로니키는 수도 아테네에 대항하는 중요한 항거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1912년부터 10년간은 테살로니키의 현대사의 정수로 간주된다. 1912년 10월 26일은 테살로니키가 약 450여 년 전 오토만 터키에 의해 함락되던 당시처럼 의미 있는 시점이다. 제1차 발칸 전쟁의 결과로 이날 테살로니키는 오토만 터키로부터 독립돼 그리스로 편입됐다.
이어서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벌어졌을 때 테살로니키는 아테네의 그리스 국왕에게 항거하는 기지가 됐다. 당시 그리스 수상이었던 베니젤로스는 1915년 가을 연합국을 테살로니키 항구로 받아들였다. 베니젤로스의 목적은 추축국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던 러시아를 도우려는 것이었다.
1916년 가을 베니젤로스는 당시 그리스 국왕이었던 콘스탄티노스의 중립정책에 정면으로 반발해, 테살로니키로 와서 반정부적 혁명정부를 구성하고 영국과 프랑스 측에 가담하게 됐다. 당시 그리스 국왕은 독일 출신으로 내심 독일을 후원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에 동상이몽의 상황이 연출됐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1916년 12월 아테네로 들어와 무기, 군수물자, 철도 등을 장악했다. 이런 사태는 보호국이 그리스 내정을 간섭한 최악의 예로 간주된다.
그리스 내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부군과 베니젤로스 지지자 간에 갈등과 분열이 연출됐다. 그리스 정부군 장악 지역에서 베니젤로스 지지자들이 대거 희생을 당한 반면, 1917년 6월 콘스탄티노스 왕은 폐위 추방되고 그 둘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게 됐을 때는 반 베니젤로스 인사들이 친독 혐의하에 코르시카로 추방됐다.
1923년에 비준된 로잔느 조약에 의해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는 기독교-무슬림 교도 간 교환 협약이 비준됨으로써 쌍방 간 민족 대이동이 시작됐다. 이때 무슬림 교도가 대거 테살로니키를 떠났고, 그 대신 소아시아, 흑해 연안의 터키 영토로부터 정교도들이 그리스 영토로 쇄도해 들어왔는데, 이때도 테살로니키는 그 왕래의 길목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