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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피다(1)
살구꽃이 피기 위해 성령과 가정이 필수적이다. 살구꽃이 피면 그 마을에 귀신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 썩어짐에 종노릇 하던 만물이 환호할 것이다. 만물은 살구나무가 꽃피기를 고대하고 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인 교회! 또 하늘 보좌에 올라가 하나님의 대적을 몰아내고 시대를 끝내는 사내 아이가 교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교회 아닌 교회가 판을 치는 이 땅에 살구나무로 살구꽃을 피우는 교회가 되기 위해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회고해 보고자 한다.
부산 대연동에 있는 성서침례교회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듣고 3년 동안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용호동 입구에서 부산교회라는 이름으로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생활을 1여년 했다. 부산교회라는 이름은 W.N의 영향을 받은 담임목사의 생각이었다. 교회 이름을 선정할 때, 담임목사는 성도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나는 충만교회를 추천했다. 결국 담임목사는 어떤 성도들의 추천도 채택하지 않고 부산교회라고 명명하여 간판을 달았다. 당시에 교회 이름이 참 밋밋하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남천동에 W.L의 사역 하에 있던 부산교회가 우리 교회에 와서 간판을 떼라고 강요하는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은 우리 교회 담임목사가 그곳 성도들과 매우 잘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W.N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자연스레 그곳과 교통이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남천동의 부산교회에서 특별집회 초청장을 보내왔다. 1977년에 대만에서 세계집회가 열렸는데, 대주제는 ‘한 새사람’이었다. 그 집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하는 사역자들 중 일부가 한국을 들러 특별집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 성도들 7명이 그 곳으로 가게 되었다. 마치 가나안으로 12명의 정탐꾼이 그곳의 실정을 파악하러 간 것처럼, 우리들도 그 교단의 실체를 파악하러 간 것이다. 1977년 11월 11일 서울반도유스호스텔에서 국제집회가 열렸다.
그 집회에서 우리 모두는 사로잡히게 되었다. 폭포수 같은 찬송과 한 영, 한 몸, 한 새사람에 대한 놀라운 말씀, 그리고 미국 성도들과의 개인 교제를 통해 한 새사람의 실제 안에 있다는 느낌 등이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우리에게 넓고 큰 바다로 인도한 것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목소리가 우렁차고 배우처럼 잘 생긴 형제가 주먹을 쥔 손을 내저으면서 “One Spirit, One Body, One Newman!”을 외치던 장면이었다. 오랫동안 그 잔상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7배의 강한 영을 소유한 듯한 그 형제는 그 교단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 후 우리 교회는 모두 남천동의 부산교회로 합쳐졌다. 가나안의 열두 정탐꾼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 같이 그 집회에 참석한 모두가 적극적이고 선한 간증을 쏟아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던 중 매우 가깝게 지내던 임 자매가 왕중생 형제와 함께 집회를 위해 부산에 오게 되었다. 며칠 간의 집회를 마치고 부산역으로 배웅을 가게 되었다. 잠시 시간이 남아서 부산역 그릴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교제를 하였다. 교제 중 갑자기 임자매가 무슨 큰 비밀을 말하듯, 나직이 속삭였다. “이 형제, 이건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하지 마세요. 맥스 형제가 교회를 대적하고 떠났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맥스 형제는 7배의 강한 영을 가진 듯한 바로 그 형제였다!
그 비밀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밝히지만, 당시 나의 충격은 매우 컸다. 방황의 종착역이라고 믿었던 그 교단에서 상징처럼 여겨졌던 맥스 형제가 떠났다니! 그 이후로도 쟌 잉걸서(John Ingalls), 죠셉 펑(Joseph Fung), 쟌 소(John So)등이 떠났고, 유진 그룰러(Eugene Gruhler)는 동역자 그룹에서 내쳐졌고, 타이터스 추(Titus Chu)와 당유란(Dong Yuran)은 배제되었다.
주님이 세우신 사역과 교회는 결코 나뉨이 없고 분쟁이 없다. 다투는 소리가 나고, 분쟁과 분열로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은 하늘의 식양과 비전을 보지 못한 결과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때는 솔로몬 즉위 4년째이며, 출애굽한지 48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성전의 외부 공사는 시끄럽거나 혼잡하지 않고, 질서 있게 진행되었다. 성전을 건축하는 장소에는 어떤 연장도 사용하지 않아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성전 건축에 사용된 돌들은 채석장에 다듬은 후 가져와 연결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깨어지는 소리, 다투는 소리가 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과거에 있었던 소란함과 다툼, 그리고 분열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계이고 교훈일 것이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롬15:4).
성령의 조망 안에서 과거를 반추하면서 진리에 부합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겸허히 가려보고자 한다.
홍콩 사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홍콩 교회가 한 사역을 따르지 않는다고 파문해 버리고 새로운 홍콩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도한 나로서는 충격과 함께 사역과 교회에 관한 진리를 세심히 추구하게 되었다. 교회의 본질은 영광스러우나, 교회의 상태는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약해도 교회이고, 병들어도 교회이며, 사역을 따라도 교회이고 바울을 내쳐도 교회이다. 바울은 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바울은 자기를 내친 교회를 결코 파문하지 않았다. 교회의 간증인 금등잔대(촛대)를 옮기는 일은 오직 주님의 권한이다.
홍콩 교회 성도들은 온 우주의 성도들과 교통을 원했다. 그러나 사역의 결정으로 그들은 격리되었고, 성령의 교통하심에서 배제되었다. 이 얼마나 비극인가! 사역자들 간의 불화로 성도들이 고통을 받게 되다니. 그 후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것은 사역을 교회 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신부이기에 결코 사역을 교회 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역이 교회 아래에 있다. 사역자간의 불화가 결코 교회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이 어느 교회의 손상이 된 적이 없다. 바울이 베드로에 대한 책망으로 교회가 나뉘지 않았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2~23).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와 같은 사역자는 다 우리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은 교회를 위하지만 교회는 사역을 위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다. 사역자의 쓸 것을 위해서 헌금을 하려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다.
W.L와 죠셉 펑의 불화와 갈등으로 홍콩 교회와 온 세계의 교회들이 고통을 받았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며, 주님의 심판대에서 반드시 판단을 받을 것이다.
홍콩 교회는 1938년 위광휘(k.H. Weigh-W.N의 친구이자 동역자)형제로 인해 세워졌다. 1950년에 W.N가 그곳에 가서 그 교회의 부흥을 이끌었다. W.N는 대만에 있는 W.L를 홍콩으로 보내서 장로와 집사와 동역자를 안배하도록 하였다. W.L는 1965년과 1966년에 다시 홍콩을 방문하였다. 당시 죠셉 펑은 진리를 매우 추구하는 20대 청년이었다. 당시 홍콩 교회에 한 나이든 사역자이며, 장로가 이견을 가져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1970년 죠셉 펑이 LA에서 열린 국제집회에 참석하였다. 국제집회가 끝난 후 죠셉 펑은 W.L의 아파트로 가서 홍콩 교회의 상황을 교통하였다. 그때 죠셉 펑은 홍콩 교회의 나이든 성도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고 강조하였고, W.L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그 해, 가을에 이견을 가진 노 동역자로 인해 홍콩 교회가 큰 소요에 휩쓸리게 되었다. 나이든 장로들과 위광휘 형제가 W.L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W.L는 Chang Wu-chen 형제와 Abraham Chang 형제를 불러들여 홍콩 교회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W.L와 위광휘 형제와 또 다른 두 명의 나이든 장로들과 함께 나이든 성도들을 돕고자 죠셉 펑을 말씀의 사역자로 세웠다. 당시 위광휘 형제는 너무 나이가 많아 말씀을 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죠셉 펑은 그 때부터 홍콩 교회의 말씀의 사역자가 되어 교회의 도움을 주었지만, 두 명의 노 장로들과 자주 부딪히게 되었다.
그 후로도 W.L와 죠셉 펑은 그리 화평한 사이가 아니었다. 급기야 W.L는 죠셉 펑보다 연장자인 동역자 허드슨 두(Hudson Du)를 홍콩으로 보내 죠셉 펑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W.L는 1979년도와 1981년도에 홍콩 교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죠셉 펑은 아나하임에 갔는데, LSM과 홍콩 교회 간에 아주 큰 어려움이 그로 인해 야기 되었다. 그 사건의 상처와 후유증이 1년 이상 갔다.
홍콩에서 나이든 두 명의 장로가 W.L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죠셉 펑은 야심이 크고 성격이 나쁘다는 요지였다. 그리고 그들이 은퇴하게 되면 죠셉 펑이 홍콩교회를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 무렵부터 죠셉 펑은 W.L의 사역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했다.
1985년에 이르러 죠셉 평은 W.L의 사역에 대해 점점 더 강하게 비판했다. 그 해 6월 17일과 10월 6일에 홍콩 교회의 봉사자들에게 공개적으로 W.L의 사역에 대해 비판했다. 그의 비판의 요지는 이러하다.
1. 우리는 한 사람을 따라서는 안 된다.
2. 아나하임으로 전화를 하여 교회 상황을
보고하지 마라.
3. 영적 거인을 의존하지 말고 몸을 의존하라.
4. 성경을 읽지 않고 라이프 스타디만을 읽는 것은
심하게 잘못됐다.
5. 한 사람을 지나치게 높여 교황으로 만들고 있다.
6.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대체하는 왕을 세우고 있다.
7. 많은 사람들이 W.L가 회복이며 그가 없이는
회복이 없다고 생각한다.
8. LSM은 지속적으로 홍콩복음서방을 삼키려고
시도한다.
9. 지난 20여년 동안 회복 안에는 인수의 증가가 없다.
10. Bay Area(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하는
광역도시권, 중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상태는 가련하다.
11. 아나하임에 있는 중국어 집회는 끔찍하다.
12. 우리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조장하는
공산주의자들과 비슷하다. 20여년 동안 수없이
많은 책략이 자행되었다. 책략이 올 때마다
사람들이 추종하였다. 엄청난 압력이 늘 존재했다.
13. W.L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간신배들이고
아부하는 자들뿐이다. 그들의 실행에는
어떤 열매도 없다.
14. 우리는 어떤 사람도 높이지 않는다.
15. 우리는 오직 한 사람의 책만을 읽지 않는다.
16. 우리는 사역을 따르지만,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사역을 시험해 본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에 홍콩교회에서 이러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말들이 전혀 허구가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1986년 2월에 죠셉 펑은 시애틀(Seattle)을 방문해서 매우 분개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나하임 교회가 아주 나쁜 상태에 있는데, W.L가 극동에 있는 나이든 동역자들을 꾸짖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무렵 죠셉 펑은 회복역을 발췌하여 영어 행간 주석 신약성경을 만들어 대만복음서방에서 판매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W.L의 허락을 받고 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었다. 1985년 W.L는 죠셉 펑에게 그 문제를 언급했고, 그는 팔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1986년 1월 말까지 그 책은 여전히 판매되었다. 그리하여 W.L는 1986년 2월 22일, 아나하임의 장로훈련집회 마지막 날에 죠셉 펑과 공개 대화를 가지게 되었다.
죠셉 펑은 “생명 나무”라는 잡지도 발간하고 있었는데, LSM에서 출간된 책들을 인용하면서 출처도 밝히지 않았기에 W.L와 LSM에게 지적을 받아왔다. 이런 저런 문제가 불화를 키웠으며 결국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W.L는 1986년 3월 6일에 홍콩 교회의 네 명의 장로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와 죠셉 펑이 그해 2월에 나눈 대화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주의 회복이 고통을 받지 않고, 또 홍콩 교회가 손상되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솔직하고 진지하게 죠셉 펑에게 그가 주의 손에서 유용하고 주의 몸에서 보존되도록 권면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고, 90년도 초에 앤드류 유(Andrew Yu)의 인도하에 전세계 장로, 동역자들이 홍콩에 모여서 기존의 홍콩 교회를 폐하고 새로운 홍콩 교회 선포식을 감행하였다.
당시 내가 만난 홍콩 교회의 동역자들의 주장은 위에 언급된 내용과 거의 같았다. 그들은 회복이 점차적으로 로마 교회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했고, W.L를 지나치게 숭배한다고 말했다. W.L도 주님의 종들 중 하나이며, 사역자들 중 하나이라고 말했다.
홍콩의 동역자들은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우리를 설득하고자 했다. 극진히 우리를 접대하면서 지속적으로 자신들이 본 빛을 나누고자 했다. 한 형제는 이런 문제로 인해 W.N의 사역의 재고, 교회의 길, 교회의 사무와 같은 사역에 관한 책들을 수없이 읽고 또 읽었다고 했다. 그럴 때, 눈에 비늘이 벗겨지듯이 사역과 교회에 대해 분명한 빛이 임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조직화된 거대한 교단이 홍콩교회를 말살하고 있다고 느낀 것 같다. 당시 나는 홍콩교회의 동역자들의 말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다만 같은 뿌리에서 나온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비난하고 파문하는 상황에서 끝없는 슬픔과 비참함을 느꼈다. 사역을 따르지 않는다는 문제와 책을 판매하는 문제 등이 수 천 명의 성도들을 파문하고 성령의 교통에서 배제한다는 것이 과연 성경적일까라는 의문이 지속적으로 들었다.
초대 교회에서 어느 누구를 모든 사역자 중에 으뜸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로마 천주교의 가장 큰 오류가 베드로를 제 1대 교황으로 추대한 것이다. 사도들은 자신의 터 위에 최선을 다해 지역 교회들을 세웠으며, 온전케 하였다. 서로들 간은 영적인 교통을 유지한 채, 교제의 악수를 나눴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자신의 역할을 신실하게 수행했다.
신약성경도 많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참여했다. 어느 한 사람의 서신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이단 중에 마르키온(Marcion)이 있다. 그는 오직 누가복음과 사도 바울의 글만이 정경이라고 하고 다른 사도들의 글은 다 배제하였다. 오늘 우리도 어느 한 사람의 글만을 인정하는 우를 버려야 한다. 베드로와 바울의 글 뿐 아니라 야고보와 유다의 글도 인정해야 하고, 또 루터나 칼빈, 요한 웨슬리, 맥킨토시, 무디, 허드슨 테일러, 죠지 뮐러의 책도 다 우리의 영적 유산이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빛이 있는 사람과 영적 체험이 있는 사람들도 책을 만들 수 있다. 또 성경 해석도 각 가정의 장로들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억지로 성경을 풀지 않는 한, 성령의 조망으로 성경을 풀어 공급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성숙한 장로들에게 분명히 있다.
세월이 흐른 후 주님의 빛으로 인해 사역과 교회에 대해 더욱 분명해졌다. 교회는 정말 놀라운 것이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다! 만물이 탄식하며 교회의 나타남을 고대하고 있다. 그들에게 저주가 풀리게 하는 영광스런 존재가 그리스도와 교회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생활하는 교회생활과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생활에 상당한 갭이 있다.
많은 문제들은 거의 대다수 은사 있는 사역자들의 야심에서 비롯된다. 모두 다 성경말씀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외치지만, 으뜸이 되고자 하는 야심 곧 사탄이 가졌던 교만이 깊이 깔려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4~27).
내일이면 그들의 주님께서 극심한 십자가의 고난이 기다리는데,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 기도하기는커녕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났다. 주님께서 기도 중에 택하신 제자들까지 그러하다면 어느 누가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 영광이 족한 줄 모르고 그 중 누가 크냐고 다툼이 일어났다. 제자들 중 1인자로 우뚝 서겠다는 뜻이다. 1/12로는 만족을 얻지 못한다. 12제자가 아니라, 70제자, 아니 120문도 중에 하나가 되더라도 영광 중의 영광이리라. 이러한 권력다툼은 세상 정치에서 흔히 보는 모습이다. 남을 짓밟고 우뚝 서는 정글의 법칙은 세상 나라에서 지겹도록 일어나는 일이다. 한국 정치를 보라. 미국 정치를 보라. 남을 비난하고 모함하고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자신이 우뚝 서고자 하는 짐승들의 울부짖음을 매일 보고 듣지 않는가.
이방인의 임금들은 사람들을 주관한다. 사람들을 부리고 다스리며, 노예나 종들 취급을 한다. 거의 대다수 교단의 성도들은 이방인의 임금들과 같은 인도자들에 의해 노예와 종들 취급을 받고 있다. 함부로 주관해도 감히 대들지 못한다. 하나님의 종에게 마음으로라도 불평한다면 저주가 임하리라는 종교적인 세뇌가 철저히 된 탓이리라. 세뇌된 사람들은 노예로 사역자를 섬길 뿐 아니라, 그를 은인이라고 칭송하며, 숭배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패턴을 가진 문화는 주님이 정죄한 큰 성 바벨론의 문화이며, 세상 정치와 종교에서 보편화되었다.
주님은 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권력과 물질이 생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들여서 성도들을 섬기는 영역이다. 섬기는 리더십이 아니라, 군림하고 통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단체라면 분명 큰 성 바벨론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곳에서 속히 나와야 한다.
군림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은 사역자 중심과 성당, 예배당, 집회소 등 모임장소를 중시한다. 성전 중심의 구약에서는 필연적으로 온갖 비리가 성전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기도의 장소가 되지 못하고 강도의 굴혈이 된 것이다. 성전에서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가 만연되었고, 돈 바꾸는 탁자까지 예비된 것이다. 양과 비둘기는 하나님의 제사에 직접 관련된 중요한 제물이지만 돈을 버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겠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 이후로 참 된 교회는 건물을 의존하지 않고 각 가정에서 영적 예배를 드리게 되었기에 강도의 굴혈이 결코 될 수 없었고, 기도의 장소가 되었다. 주변 서너 가정이 합세하여 중심 되는 가정에서 예배를 하면서 교회 공동체로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아버지의 권위가 회복되었으며,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간증을 삶 속에서 표현하었고, 자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찬송과 기도와 말씀이 익숙하였고, 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자연히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부모님을 섬기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며 지체로서 자랄 수 있었다. 정체성이 확립된 아이들은 결코 전교조의 세뇌공작에 넘어가지 않는다. 각 가정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성전이 되었고 후탁 교인이 되어 예배당의 의자만을 따뜻하게 해주는 소위 평신도가 될 수가 없다. 장의자에서 내내 졸다가 광고를 알리는 땡 소리에 눈을 뜨는 한심한 평신도는 사탄이 짜놓은 오류의 시스템에 빠진 자들이다.
성전에서 거룩한 양과 비둘기를 파는 것이 정죄되었다면, 아무리 신령한 책자라도 교회에서 장사하는 것도 정죄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은 서점에서 파는 것이 합당하다. 또 훈련을 빙자해서 말씀을 돈으로 팔아서는 안 된다. 공기와 물이 공짜이듯 말씀도 값 없이 전파되어야 한다. 비용이 든다면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기도하여 도우심을 얻어야 한다. 사역과 교회는 결코 돈이나 권력의 문제로 얽혀서는 안 되며, 서로 깊숙이 연합해서도 안 된다. 사역과 교회는 분별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사역자 중심, 집회소 중심에서 성도 중심, 가정 중심으로 돌아와야 한다.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중국의 대약진운동에서 공동 식사, 공동 노동을 통해 가정이 무력화 된 것처럼 교회를 전체주의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듬뿍 들어간 맛있는 된장찌개가 칠성급 호텔의 뷔페보다 더욱 구수하고 맛있는 것처럼, 각 가정에서 사랑과 정성으로 선포하는 예언의 말씀은 미사여구로 가득한 어느 사역자의 말씀보다 더 영양가 있는 영적 양식일 것이다. 영적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겨서 스스로의 기능이 퇴보된 시대는 지나간 날로 족하다. 더 이상 사탄의 프레임에 갇혀 우민이 되지 말고, 깨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자.
말씀의 사역자, 출판사, 집회소 등이 교회 성도들을 나뉘게 하고 단절시킨다면 그 피해는 그리스도의 몸에게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성령과 성경만으로도 족하다. 사역자나 영적 책자들은 우리를 도우는 보조수단일 뿐이다.
첫 단추를 잘 못 끼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공간이 없어진다. 오늘 날 영적 첫 단추가 잘 못 채워졌다. 하나를 빠뜨리고 간 것이다. 그것은 성령님의 인도이고 다스림이다. 사도행전은 오직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으로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사도들의 배후에는 성령님이 계신다. 보이는 사도들에게만 주목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쳤을 때, 사람들은 모두 베드로와 바울을 주목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자라고 솔직히 고했으며 모두 성령님의 역사라고 선포했다. 오늘 날 이런 선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길 기도한다.
하나님은 계시록 일곱 교회에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신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각 교회들에게 반드시 있다. 동일한 말씀이 아니라 그 교회의 상황에 맞는 말씀이다. 획일화된 말씀은 온 세계를 조직화 하려는 영적 니므롯의 발상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사역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으로 격하시킨 것이 오늘날의 문제이다. 성령이 빠져있다. 첫 단추가 성령으로 맞춰지지 않고 사역자에게 맞춰졌다. 이것이 타락의 시작이다.
새 언약은 누구나 다 성령의 음성에 반응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을 주신다. 이 역량을 날마다 증가시키고 체험할 수 있어야 새 언약의 일꾼일 것이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