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은 한번 웃기기 위해 매번 새로운 소재를 개발 한다
가수형 강연, 개그맨형 강연
가수에 비해 개그맨은 더 고통스러운 직업인 것 같다.
가수는 자신의 히트곡을 되풀이해 불러도 열광적인 환호를 받지만,
개그맨은 항상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고 연습해도
단 한 번만 웃길 수 있기 때문이다.
늘 내 강의도 가수의 레퍼토리이기보다
개그맨의 일회성 공연과 같기를 바라왔다.
요청된 강연들을 즐기는 편이다.
요청받은 주제를 어떻게 전달할까 준비하는 과정뿐 아니라,
강연 도중에, 또 청중의 질문을 받으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 초기의 준비와 긴장은 사라져갔다.
늘 새로운 청중을 만난다는 사실은
같은 내용을 되풀이해도 그만이라는 교활한 허가조건이었다.
전문가.학생.주부.문화인.CEO.교사, 심지어는 외국인 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직종과 계층의 청중을 만나도
비슷한 내용, 비슷한 톤의 강연들이 반복됐다.
반응들도 좋았고 누구에게도 통한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개그맨에서 가수로 변신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최근 의뢰받은 강연은 큰 도전이었다.
파주 출판도시가 개최하는 '어린이 건축학교'에서
특별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대상은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100여명,
그야말로 강적들을 만난 것이다.
아동교육 전문가들은 어린이들의 집중시간은 불과 5분,
5분마다 주의를 끌지 않으면 실패한다고 충고한다.
처음엔 재미있겠다 싶어 승낙했는데 점점 부담이 더해갔다.
하는 수 없이 영민한 제자들을 불러 작전계획을 세웠다.
우선 강연 끝에 간단한 시험을 치를 것을 예고한다.
물론 성적순으로 줄 상품도 공개한다.
아이들이 익숙한 만화와 드라마를 이용한다.
주제는 한국의 전통건축물, '배추도사 무도사'란 애니메이션으로
기와집과 초가집을 설명하기로,
'대장금'을 편집해 궁궐건축을 보여주기로 했다.
동영상 자료를 구해 편집하고, 상품을 구입하고, 조교 3인의 역할을 나누고,
시험 문제지를 인쇄하는 등 군사작전을 하듯 한달을 준비했다.
단 한 시간의 강연을 위해 이처럼 많은 준비와 오랜 시간을 투여한 것도
무척 오랜만이었다.
드디어 강연 당일,
어렵사리 모인 청중을 대하니 우선 한숨부터 나왔다.
대부분 취학 전 아동들이 올망졸망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건 물론,
울며 보채는 아이,
앞까지 뛰쳐나오는 아이,
마이크를 쥐고 장난하는 아이들,
정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아동전문가들의 주문대로 떠들든 말든 강연을 시작했다.
시험과 상품 예고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아이들, 특히 부모들의 집중과 긴장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동영상이 나오니 아이들의 웃음이 시작됐고,
문답식 설명을 열띤 호응과 열기 속에서 마쳤다.
간단한 시험도 열심히들 치렀다.
여기까진 예상 밖의 대성공.
그런데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상품은 6개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는데,
만점자가 10명이나 나온 것이다.
일단 만점자들을 모두 불러내 축하해 줬지만 그 다음이 막막해졌다.
6명만 뽑아 상품을 주어야하는데,
주최 측과 부모들은 어서 정하라고 채근하지,
기다리는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동자는 초롱거리지,
뾰족한 방법은 금방 떠오르지 않지.
어찌어찌 어렵사리 해결은 했지만 그 당황과 진땀이란.
그래도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었다.
예상 외로 진지했고, 잘 알아듣고, 즐거워했다.
무엇보다 타성에 젖은 내 강연 생활에 긴장과 자극을 주었다.
데뷔 초기의 개그맨같이 열심히 준비하고 연습해야 성공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아이들에게는 가능한 경우의 수를 다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한편으로 떠오르는 건 내 아이들이다.
과연 친자식들을 위해 충분히 대비하고 연습했는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만한 정성을 쏟았는가.
그러나 아무리 변명해도 준비 안 된 아버지인 것 같다.
이미 늦었지만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앞으로의 준비를 기약해야겠다.
김봉렬 예술종합학교 교수,건축학
2004.11.09 19:09 입력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