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군 황등면 동련교회 설립자 백낙규 장로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
동학농민항쟁 소접주로 우금치 전투에 참여 한 익산군 황등면 동련교회 설립자 백낙규 장로 신앙과 영성에 관한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는 1900년도 남장로교 선교사 하위렴William W. Harrison에게 복음을 듣고 동련교회를 설립하신 백낙규 장로의 신앙과 영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일찍이 동학농민항쟁에 뛰어들어 소접주로 우금치 전투에 참여했지만, 패전 후 실의에 빠져 방황하고 있다가 복음을 듣게 된 특이한 신앙 이력의 소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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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기교회사를 뒤돌아보면 다양한 영성을 가진 분들이 출발하고 있지만, 백낙규야말로 역사의 한복판 격동의 시대를 지나며 기성에 회의하고 그가 들었던 복음을 따라 지향을 추구한 외곬의 신앙인으로 실천신앙과 영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분이다.
남장로교 초기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 한국기독교의 발아를 지켜보신 분으로 그가 익산군 황등면에 세운 동련교회는 올해 120주년을 맞는 유서 깊은 교회로 실재하고 있고, 한국기독교의 분열과 갈등 속에 기장에 속한 교회로 지역사회에 귀한 사역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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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로교 선교사를 다룬 많은 교회사 학자와 목회자들이 있지만, 아직도 묻혀 있는 초기교회 인물들을 세세히 다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이 책 백낙규 장로의 활동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잊혀 가는 그 시대와 초기교회의 진경을 새롭게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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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백낙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몸부림치던 초기 지도자들의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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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규가 맞닥뜨린 역사는 동학에 깊이 줄을 대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해방 이후 최근까지도 그렇게 엄연(儼然)했던 동학농민항쟁을 짐짓 내몰리던 역사로만 밀어두다 보니, 벼랑 끝에서 절규했던 민초들 이야기는 어느새 들여다볼 수 없을 만치 지워져 있었다.
많은 기록물을 뒤져보았지만,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참여한 인물들의 구체적 행적을 추적해둔 것들이 있을까 하는 기대는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흩어져 있는 구술과 기억을 찾아내 주섬주섬 엮어본다고 했지만 훼손되어 복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드러난 결과를 손에 들고 과정을 돌아보아야 하는 부분에 와서는 어쭙잖은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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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백낙규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백낙규를 이끌었던 영성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의도였지만 그래도 드러난 흠결(欠缺)이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시선을 돌려 백낙규가 활동했던 시공간을 조망하면서 조금이라도 그를 짐작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인 바람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지역을 오버랩시켜 지역 교회사에 드러난 교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동시대를 맞대고 고민했던 그들의 공통의 관심사가 무엇이었을지를 추적하다 보면 지역교회 저변에 깔려있던 인식 가운데 행여 드러나지 않은 백낙규의 지향점과도 일치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몸부림치던 초기 지도자들의 삶과 신앙 속에서 백낙규와 일치를 찾아내는 퍼즐게임은 독자들의 즐거운 상상에 맡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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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규의 삶 속에서
그가 매달렸던 실존적 상황을 살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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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규는 구한말에 태어나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사람으로 그를 기억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고 더구나 남아 있는 이야기들마저 흩어져 마모된 것뿐이기 때문에 둔탁해진 잔해(殘骸)만으로 그의 생애를 요연(瞭然)하게 살펴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남아 전해지는 것들이 희박하다 하더라도 그가 마주했던 시대적 상황을 탐색하고 활동했던 공간에 남겨진 흔적들만이라도 촘촘하게 거두어 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에 반사적일 때가 많은 법. 비록 망각에 묻히고 남아 있는 자취가 희미해졌다 할지라도 남겨진 자국들을 조심스레 인출(印出)해낼 수만 있다면, 달을 그리지 않고도 구름을 그려 달을 드러내듯 그의 삶의 윤곽을 짐작해 볼 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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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운탁월(烘雲托月)! 구름을 그려 달을 그려내듯 요흔(凹痕)의 언저리에 드러난 백낙규의 삶 속에서 그가 매달렸던 실존적 상황을 살핌으로 그의 영성과 신앙도 함께 엿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백낙규(1876-1943)가 살았던 시대는 어쩌면 조선의 역사 중 가장 어두운 질곡의 시기였다. 부정부패와 외세의 침략으로 격동을 치던 구한말 시기에 몰락한 양반으로서 고향을 떠나 동학에 몸을 던져 농민항쟁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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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걸고 역사의 가파른 협곡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벅찬 고뇌와 갈등에 시달리고 살았을지 헤아려봄 직하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개혁의 주체가 되어 보고자 몸부림을 쳤으나 패배와 좌절을 맛보았다. 밀려오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잃고 혼돈(混沌)의 세월을 살면서도 그는 거기서 끝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만난 복음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
하나님 나라에서 비전을 보았던 백낙규는 교회를 세우고 젊은이를 가르치려 학교를 세웠다.
끊임없이 치열함을 가지고 살았던 그였지만 목숨을 다할 때까지 어둠의 터널이 여전히 그를 가로막고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씨앗을 뿌렸으나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한 채, 황국화 신민 정책으로 학교가 폐교되고 교회가 문을 닫는 아픔을 겪으며 코앞에 둔 해방을 보지 못하고 향년 67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포로로 끌려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을 소망하며 외치던 스가랴 선지자처럼 백낙규도 역시 가난한 이웃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면서, 그들과 함께 해방을 꿈꾸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읊조리며 살았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노래 부르던 스가랴는 이 땅에 살았던 백낙규의 표상(表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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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슥 9:16)
구한말 조선 땅에 태어나 외세의 지배 아래 굴레 씌워진 민중의 삶을 살았지만, 그는 자기 삶에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올곧게 감당했다.
어두운 질곡의 삶을 살면서도 소망했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이루려 바라고 믿었던 바를 실천에 옮기며 살았던 그의 역정(歷程)을 살피며, 주변에 남겨둔 흔적을 따라 이야기로 풀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