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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다
증언자 : 홍순희(남)
생년월일 : 1960. (당시 나이 21세)
직 업 : 대학생(현재 용접공)
조사일시 : 1988.11
평화적 시위
우리 집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 부모님께서 우리 2남 3녀를 낳으신 후 2천오백 평 정도 되는 논을 팔지 않고 그대로 두고 광주로 이사를 했다. 중흥동 광주역 부근에 방을 얻어 살면서 아버님은 노동을 하시다 농사철이 되면 어머님과 함께 시골로 가셔서 농사짓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몇 년을 지냈다. 동생들과 나는 광주에서 학교에 다녔다.
1980년 5월에도 부모님은 시골로 농사를 지으러 가시고, 광주에는 동생들과 나만 있었다. 당시 나는 조선대학교 공업전문대학교 야간에 다니면서 낮에는 주로 공업사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을 하는 등 돈을 벌어서 학비를 마련했다.
10·26 이후 시국이 몹시 어지러웠기 때문에 우리 학교에서도 수업을 전폐하고 연일 '군부의 정권탈취 음모'를 저지하는 투쟁을 벌였다. 그 당시는 나도 공업사 일을 나가지 않고 아침부터 시위에 참여하는 등 나름대로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거의 밥도 굶고 다니면서 학교에서 나눠주는 빵과 우유로 식사를 대신했다. 5월이 되면서 시험도 거부한 채 학생들은 도청으로 진출했다. 그 당시에는 도청 앞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하고 데모를 하여도 전경들이 학생들을 때리거나 붙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붸기게 되면 오히려 자기들의 방패를 들어주면서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줬다.
16일 도청 앞 광장에서 있었던 평화적인 횃불시위 때 내가 속한 조는 금남로, 양동상가, 광주천변을 거쳐 도청 앞으로 다시 모였다. 그 당시 구호 중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을 외치면 시민들이 전두환이가 도대체 누구냐고 자주 물어봤다. 학생들은 10·26 이후 추이를 관심있게 지켜봤기 때문에 군부독재 정권의 재집권을 노리는 중심인물이 전두환임을 인식했지만 일반시민들은 굉장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횃불시위 후 우리들의 결의사항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이제 시위는 자제하고 최규하 대통령이 귀국하면 정국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본 후 그때 다시 결정하도록 하자'는 내용이 뚜렷히 생각난다.
최루탄 가스 자욱한 금남로
17일에 정국의 추이가 궁금하여 라디오를 틀었는데, 모든 방송에서는 시국에 관해서는 얼토당토 않는 말만 해댔다. 라디오에 분풀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라디오 사이클을 돌렸는데 북한 방송인 듯싶은 방송이 잡혔다. 내용은 이러했다.
"조금 전 서울에서 사복군인이 김대중 씨를 연행해 갔다. 밤 11시 30분경 경비하고 있던 사람을 밀치고 들어가려 하면서 소란을 피우자, 부인이 밖으로 나와 '이 땅에 민주화가 오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자 김대중 씨가 나와서 '떠들지 말아라. 내 발로 걸어가겠다'고 말한 후 방으로 들어가 옷을 입고 나와서 연행에 임했다."
18일날은 일요일이라 서방에 있는 교회로 예배를 보러 갔다. 11시 30분경에 예배가 끝나 친구와 함께 성경책을 집에다 갖다두고 걸어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갔다. 친구와 나는 금남로 5가에서 일고 쪽으로 가는 시위대에 합류하여 그때부터 계속 데모를 했다.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보도블럭과 도로변에 있던 화분대를 깨서 던지기도 하고 또 우리들에게도 건네줬다. 금남로는 가스차로 최루탄을 얼마나 뿌렸던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흐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다시 지하도 공사장 부근으로 와서 중앙로를 경계로 전경들과 투석전을 벌였다. 전경을 향해 돌을 던지고 돌아오다 뒷통수에 사과탄을 맞아 고통을 못 이겨 그곳을 빠져나왔다.
광주공원 주변에 있던 당구장으로 가서 세수를 하고 누워 있었다. 온몸이 화끈거려 죽을 지경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점차 나아졌다. 그때 광주천변에서 도청 쪽으로 가는 시위대가 있어서 그 속에 합류했다. 그때가 오후 3시경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당구장을 나온 직후 공수들이 들이닥쳐 당구장을 수색해 그곳에 있던 젊은 청년들이 모두 상무대로 연행되었다고 했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선배, 후배들도 그곳에서 당구를 치던 중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상무대로 끌려가 며칠씩 짐승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밤낮으로 고문을 당하고 나왔다고 했다 .
시위대와 함께 지금의 그랜드호텔 부근으로 와서 도청 주변에 있던 전경들에게 돌을 던지고 싸우다 도청 뒷쪽으로 밀려 양영학원으로 갔다. 노동부 쪽에도 전경들이 있었다. 학원 옆에 있던 고물상으로 가서 빈 병, 철근 등의 고물을 끄집어 내서 전경들에게 던져 그곳을 뚫으려다 결국 실패했다. 그때까지 앞에서 주동했던 학생은 태극기를 들고 다니면서 시위에 임했다. 그곳에서도 밀려 시위대는 동명동으로 붸겨가다 화천기공사 사장 집(현 금호문화재단)에도 돌을 던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위진압 경찰을 인질로 삼아
동명로에서 법원 가는 길로 가던 중 동명파출소를 불태우고 농장다리 쪽으로 의기양양하게 오는데 앞에서 전경 버스 한 대가 왔다. 경찰이 탄 오토바이 3대가 달려오다 시위대와 100여 미터 거리까지 접근하게 되자 오토바이는 도망가 버리고, 전경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위대가 포위하여 전경을 붙잡았다. 헬멧, 방독면, 곤봉 등을 뺏고 무장해제시킨 뒤 그들을 앞세우고 장동 사거리로 왔다.
그때가 오후 4시쯤 됐을 것이다. 전경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머니들이 시위대를 위해 떠온 물을 먹게 했다. 그중 나이가 굉장히 많이 든 어른이 있어 내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봤더니 어제 저녁에 명령을 받고 구례에서 왔다고 했다. 시위대들이 붙잡은 전경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옥신각신 하고 있을 때, 전남여고 앞길에서 군용 트럭이 오더니 우리들 앞에서 멈췄다. 처음으로 공수와 대면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들이 공수부대인지 전혀 몰랐다.
아마 2, 3대의 트럭이었던 것 같다. 트럭이 멈추자 곧바로 공수들이 뛰어내렸다. 우리는 도망가지 않고 구경하고 있자 공수들이 도열을 하더니 우리에게 달려들어 곧바로 구타와 살상을 시작했다. 그들은 M16 총에 착검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운동화를 신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도망갈 수 있었다. 부리나케 뛰어가다 뒤돌아보니 눈앞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한참을 달린 후 다시 돌아보니 붙잡힌 시민, 학생들은 트럭 밑에서 구타당하고 거의 실신하면 공수들은 짐짝처럼 트럭 위로 사람들을 던졌다. 그러면 트럭에 타고 있던 공수들이 다시 초죽음이 되도록 구타하는 것을 목격하고 치떨리는 분노를 느꼈으나 두려움이 엄습해 와서 되도록 멀리 도망갔다. 그 와중에서 부상자 한 명을 부축해서 동명로까지 가서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 부상자는 얼굴 껍질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였다. 정신없이 담을 넘어 집을 향해 갔다. 얼마나 많은 담을 넘고, 어찌나 빙빙 돌았던지 집에 도착하니 거의 10시가 되었었다.
19일은 전날 공수들이 잔인하게 휘두르던 대검과 곤봉이 두렵게 생각되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줄곧 집에 있었다. 집에서 전남대가 훤히 보이는데 그곳으로 헬기가 계속 왔다갔다하는 것을 봤다.
20일날도 집에만 있었다.
21일 아침부터 동네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와 그간의 공수들의 만행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몹시 흥분하고 술렁거렸다. 나는 걸어서 서방으로 갔다. 아침부터 시위대가 탄 차량이 왔다갔다했다. 시위차량을 타고 가던 중 중앙국민학교 앞에서 길이 막히자 그곳에서 내려 지프차를 잡아탔다. 전날 불타버린 MBC 방송국 앞에는 소방호스가 널브러져 있고 건물은 까맣게 타 있었다. 그 차를 타고 도청 뒤로 하여 지원동, 백운동까지 갔다가 다시 유동으로 온 뒤 차에서 내렸다. 걸어서 도청 앞으로 가보니 찌그러진 버스가 유리창이 깨진 채 있었고, 금남로 2가에서 리어커에 실린 시체 2구를 목격했다. 삼양백화점 앞에 서 있는데, 청년들이 "전남대에 공수들이 있으니까 쳐부수러 가자"고 하여 나도 그곳으로 갔다. 굴다리 부근에 공수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차에서 내렸다. 시위차량과 함께 돌을 던지면서 조금씩 밀고 갔다. 대한통운 트럭을 공수들이 있는 쪽으로 밀어 공수들의 저지선을 뚫고 전남대로 가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시민군이 타고 있던 장갑차가 공수들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달려가더니 멈췄다. 우리는 멍한 시선으로 지켜봤다. 장갑차 뚜껑이 열리더니 시민 2명이 고개를 내밀고 나오자 공수들이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 쳐 시민들과 함께 고함을 치면서 공수들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숫자적으로 우리가 훨씬 유리했다. 전대 정문 앞까지 밀리던 공수들이 깡통에 들어 있는 최루가스를 터놓자 안개처럼 눈앞이 뽀얗게 변해 버리고 어찌나 맵던지 우리는 다시 흩어져서 차를 타고 도청으로 갔다.
계엄군의 발포와 무기탈취
그날 아침부터 총성을 듣고 나는 우리에게도 무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오까지 관광호텔 앞에 있었는데, 계엄군이 쳐놓은 바리케이드를 향해 시민군이 차로 질주해 오면서 계엄군을 위협하는 것을 봤다. 얼마 후 수백 발의 총성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금남로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지금 무기를 탈취해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는 우유, 음료수, 담배 등이 많이 있었다. 버스 안의 자리는 모두 차고 한 두 명이 서 있을 정도의 사람들이 탔다. 나는 거기에서 데모 노래를 가르쳐줬다.
차안에 부상자 한 명이 타고 있어서 월산동으로 가서 원광대 부속 한방병원에 부상자를 내려주면서 병원문을 열어봤더니 입구에도 환자들이 있었다. 그 동네 주민이 싸준 김밥 바구니를 들고 차에 올라 포충사 앞으로 하여 대촌지서로 갔다.
무기고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는데, 우리 중에 총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어 그것으로 자물쇠를 쏴버리자 문이 열렸다. 모두 M1 소총 한 자루씩를 지급 받았다. 면사무소도 습격했으나 지키는 사람도 없고 무기도 전혀 없었다. 지서 무기고에도 탄약은 없어 우리는 총만 지급받고 다시 남평 쪽으로 가는데 20여 대의 차가 길에 서 있었다. 아마 나주서를 습격하고 돌아오는 차량인 듯 모두 총을 메고 있었다. "총알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대한통운 트럭에 있다고 했다. 가서 보니 박스에 실탄이 담겨져 있었다. 나도 허리띠에 하나 차고 주머니에 가득 탄창을 넣고 2.5톤 소방차 물탱크 위에 타고 왔다. 그곳에 있던 청년이 권총 2자루를 가지고 있길래 하나만 달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주지 않자 화가 나서 백운동 로터리에서 내려버렸다. 광주로 오는 길에 보니 포충사 지나서 급커브길에 차가 뒤집어져 있고 시민 4명 정도가 죽었는지 가마니로 덮여 있었다. 백운동에서 다시 미국에서 부품을 수입해 아세아공장에서 조립한 레커차를 타고 외곽도로를 거쳐 시내로 들어와서 사제 수류탄 3개를 지급받았다. 그곳에서 M1이 너무 무거워 어떤 청년의 카빈과 바꿔 메고 학동다리로 갔다. 그곳에서도 화순 쪽에서 탈취해 온 총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삼촌이 사시는 남동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총을 메고 들어가자 삼촌이 기겁을 하셨다. 밥을 먹은 후 다시 학동다리로 갔다. 그곳에는 10여 명의 시민들이 있었다. 집으로 가려고 큰길로 나왔는데 총소리가 어찌나 요란하게 들리던지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던 중 마침 숭실고 옆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그 친구 집으로 갔다. 밤새도록 주변에 있는 산과 길거리에서 총성이 끊이지 않아 한숨도 못 자고 다음날 아침 도청으로 갔다.
도청 탈환
거리에는 투사회보 등이 뿌려져 있었다. 도청이 시민들에 의해 탈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갔다. 큰방 아주머니가 총을 보면 야단칠 것 같아 화단에다 숨겨두고 점심을 먹은 후 전대로 가봤다. 운동장에는 각목, 가마솥, 야채 찌꺼기 등이 널려 있고 야전텐트가 불타고 있었다. 계엄군들이 급히 퇴각하면서 그대로 버려두고 간 물건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23일 총을 메고 돌아다니다 도청 앞 궐기대회장으로 가서 보니 동단위로 플래카드를 써서 들고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도청 앞에서 무기를 반납하고 해질 무렵 집으로 왔더니 시골에서 어머님이 오셨다. 광주가 위험하니 시골로 가자고 어머님이 성화셔서 동생과 어머님은 걸어서 먼저 출발하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늦게 출발했다. 집에 있는 총알이 마음에 걸려 주머니에 담고 광천교로 가서 광주천에 버리고 송정리 쪽으로 가려는데, 자전거가 빵구나서 걸어오다 외곽 지역에서 타이어를 방패삼아 총구를 밖으로 내놓고 달리는 시민군의 차량을 목격했다. 그날 밤은 중흥동 집에서 혼자 잤다.
24일 아침에 도청 앞으로 가서 궐기대회에 참석하고 집으로 왔다. 전날 시골로 가기로 했는데 내가 오지 않자, 걱정이 된 나머지 아버님이 걸어서 광주로 오셨다. 그날 밤 아버님과 같이 시골로 걸어가다 너무 어두워서 유덕동 마을회관으로 가서 아버님은 그곳에서 주무시고 나는 그 동네에 살던 청년을 한 사람 만나 서로 광주에서 겪은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 청년은 당시 시내 학원에서 수업을 받던 중 최루탄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자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그때 밖에 대기하고 있던 공수들이 머리를 곤봉으로 때려 거의 실신상태에 이르자 무릎을 꿇어 앉혀놓고 그곳에 잡혀 있던 시민들과 함께 긴 포승줄에 줄줄이 묶어서 트럭에 태워 상무대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상무대에 도착하자 차에 타고 있던 공수들이 그들을 발로 차버리자 한꺼번에 손이 묶인 사람들이 줄줄이 떨어지면서 그 청년은 팔이 부러졌다고 했다. 그가 온몸이 피범벅이 되자, 그들은 청년을 통합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했다고 한다. 치료를 받은 후 피묻은 옷을 빨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더니 옷이 마르자 차에 태워 양동시장 부근에다 내려줘서 풀려났다고 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아버님과 함께 걸어서 시골로 갔다. 하룻밤을 집에서 자고 다음날 인천에 사는 누나집으로 피신을 갔다.
누나집에서 며칠 지내던 중 오후에 따분해서 당구를 치고 돌아왔더니 형사들이 와서 내 짐을 풀어보고 갔다고 했다. 그 후로는 찾아오지 않았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광주로 왔다.
광주로 오는 기차에서 검문을 했다. 16절지에 수배자의 명단이 나와 있었다. 내 주민등록증을 보더니 검문하던 사람이 5·18 당시의 일에 관해 물어보길래 당시 있었던 일을 소상히 얘기했으나 그럴 리가 없다면서 믿지 않았다.
졸업 후 공업사에 취직해 다닐 때 만난 직장동료가 5·18 당시 기갑학교 교육생으로 있었는데, 18일부터 며칠 동안 죽은 사람을 운동장에 열을 지어 덮어놨는데 굉장히 많았다고 했다. 27일 하루만 해도 굉장히 많은 시체가 그곳으로 실려왔는데 당시 기갑학교 운동장에 있던 시체만 해도 수백 구가 넘을 것이라고 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죽은 사람을 직접 목격하고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 명이 쓰러져간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어야만 하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겠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올바로 인식하고 역사에 오점 없이 기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민중을 죽인 원인과 피해상황이 정확히 밝혀져야 하고 그 후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