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을 올바르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자漢字의 특성과 그것들의 통합관계로 이루어진 한문漢文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한자의 특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자는 어떤 뜻을 그림을 통하여 드러내는 뜻글자이다. 따라서 어떤 뜻을 단 하나의 그림(글자)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최초의 한자는 단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bulkyo21.com%2Fnews%2Fphoto%2F201710%2F38141_35100_2349.jpg) | | 예를 들면 태양의 모습()을 그린 ‘일日’은 최초에는 오직 ‘태양’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옥편을 찾아보면 그것의 뜻은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 ‘태양’을 제외한 나머지 뜻들은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요인으로 불어난 뜻이라고 할 수 있다. |
한자의 뜻이 불어나는 방법은 본래의 뜻(本義)과 의미가 유사하여 불어난 뜻(인신의引伸義)이거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소리가 유사하다는 이유로 빌린 뜻(가차의假借義)이 있다. ‘일日’이 ‘태양’이라는 본의本義로부터, 태양이 떠 있는 기간인 ‘낮’이라는 뜻을 취하게 된 것이나, 태양이 떴다가 다시 뜰 때까지의 기간인 ‘하루’라는 뜻을 취하게 되어 늘어난 의미들을 인신의引伸義라고 한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bulkyo21.com%2Fnews%2Fphoto%2F201710%2F38141_35101_2356.jpg) | | 또 오늘날 ‘말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운云’은 최초에는 구름의 모습(/*/)을 그린 것이므로 그것의 본의本義는 마땅히 구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말하다’라는 의미의 소리는 ‘운云’과 유사한 소리를 사용하였지만, 그것에 해당하는 글자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나중에 어떤 이유로 ‘말하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를 만들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러나 새로 만들지 않고, 단지 이미 같은 발음으로 읽히는 ‘운云’을 빌려 그 뜻을 나타내었으니 그것을 가차의假借義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문번역을 할 때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최초에는 인간들이 동굴 등에서 살았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집을 만들 때는 북쪽에 창을 내고 남쪽으로는 들고나는 문을 내었다고 하며, 이 때 ‘북쪽을 향한 창’의 모습()을 그린 글자가 ‘向’이라고 한다. |
즉 이것의 본의本義는 ‘북쪽으로 향한 창’이며, 오늘날의 주된 의미인 ‘향하다’는 그것들의 여러 가지 의미자질인 ‘북쪽’, ‘향하다’, ‘창’ 등에서 ‘향하다’를 취하여 ‘향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의미가 변천되는 과정에서, ‘向’이 ‘북쪽으로 향한 창’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뿐, 아직 ‘향하다’라는 의미로 변하지 않은 시기에 쓰인 문장에 ‘向’이 쓰여 있다면, 우리는 지금의 옥편에 그 뜻이 있거나 없거나 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북쪽으로 향한 창’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옥편에는 그 뜻이 있다고는 하지만, 의외의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를 불전佛典에서 들어 보자.
第六祖 彌遮迦는 行化北天竺國이라가 見雉堞上에 有金色祥雲하시고 嘆曰必有大人이 爲吾嗣法이리라 乃入城하니 有一人이 手持酒器하고 逆而問曰師는 何方而來며 欲往何所닛고
제6조 미차가 존자께서 북천축국에서 교화를 펴시다가 작은 성 위에 금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있는 것을 보시고 탄식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큰사람이 있어서 나의 법제자가 될 것이다.” 이에 성안에 들어가니 어떤 한 사람이 있어서 손에 술그릇을 들고 길을 막으면서 묻기를 “스님은 어느 지방에서 왔으며 어느 곳으로 가고자 합니까?”
상기의 예문에서 ‘역逆’은 주로 ‘거스르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흔히 “어떤 한 사람이 있어서 손에 술그릇을 들고 길을 막으면서 묻기를 …”과 같이 해석한다.
물론 “길을 막으면서”라고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은 것도 아니며 틀린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역逆’의 은나라 때 글자체인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사거리의 한 쪽 길을 의미하는 ‘’, 발을 의미하는 ‘’, 사람을 거꾸로 그린 ‘’ 등을 그림으로써, 길거리에서(彳) 발로 걸어(止)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모습을 통하여, 멀리서 오는 사람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위의 해석을 ‘영접하다’로 고치는 것이 좋다.
즉 성에 들어가는데, 들어가는 사람이 범죄자이거나 병이 있어, 막을 필요가 있거나, 성안의 상황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지 않는 한, 오는 사람을 막으면서 말하는 것보다는 맞이하면서 말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따라서 위의 해석은 마땅히 아래와 같이 고쳐져야 할 것이다.
제6조 미차가 존자께서 북천축국에서 교화를 行하시다가, 작은 성 위에 금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있는 것을 보시고, 탄식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큰사람이 있어서 나를 위해 법을 이을 것이로다.”하고, 이내 성안에 들어가니, 한 사람이 손에 주기酒器를 들고, 영접迎接하면서 묻기를 “스님은 어느 지방에서 왔으며 어느 곳으로 가고자 합니까?” 안재철 교수(제주대)는 광주서중, 광주일고,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중국음운학을 전공한 문학박사이다. 저서에는 <수행자와 중문학자의 만남 『緇門警訓의 문법적 이해> <수행자와 중문학자의 만남 『禪源諸詮集都序의 이해』> <수행자와 중문학자의 만남 『禪要(上·下)』> <『本義로 이해하는 540部首 漢字』> <『本義로 이해하는 상용한자 1200』> 등이 있다. 여러 저서 가운데 <수행자와 중문학자가 함께 풀이한 『金剛經』>과 <수행자와 중문학자가 함께 풀이한 『無門關』>는 수암 스님(현 태고종 중앙강원 대교과 강백)과 함께 지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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