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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의배(丁義培) 마르꼬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스의 순교
※ 두 선교사(宣敎師)들이 형장(刑場)으로 갈 때에, 영광스럽게 그들의 발자취를 다른 두 명의 신자와 동행(同行)했으니, 이들은 정의배(丁義培) 마르꼬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스였다.
① 정의배(丁義培) 마르꼬
㉠ 경기도(京畿道) 수원(水原)(그러나 관찬기록(官撰記錄)에는 서울 창동(倉洞) 태생『우포청(右捕廳)』병인(丙寅) 1월 15일) 고을의 양반가에 태어난 정의배(丁義培) 마르꼬는 한문선생(漢文先生)이었는데, 1839년에 우연히 앵베르(Imbert) 주교와 모방(Maubant), 샤스땅(Chastan) 양 신부의 순교(殉敎)를 목격하였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6세(원문 서한에는 45세. 45세가 맞는다. 왜냐하면 1866년에 그의 나이는 72세로 나오기 때문이다)였는데, 천주교를 위험(危險)한 도당(徒黨)이며, 조상들에게 제사(祭祀)지내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단죄(斷罪)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선교사(宣敎師)들과 갖가지 계급의 천주교인들이 아주 희한한 기쁨을 안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충격(衝擊)을 받아, 이렇게 놀라운 결과(結果)를 내는 종교를 연구(硏究)할 호기심(好奇心)을 갖고 책 몇 권을 장만하였다. 천성이 곧은 그의 마음은 이내 진리(眞理)를 깨달아,
천주교인은 좋은 사람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나는 정말 착한 사람 이 되려면 천주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 부르짖으며, 굴복(屈伏)하였다.
㉡ 페레올(Ferreol) 주교가 조선에 입국(入國)하였을 때, 그가 너무도 열심한 신앙과, 갈고닦은 덕행(德行)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 그를 회장(會長)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이 직책(職責)을 죽을 때까지 모든 이에게 유익(有益)하게 수행(遂行)했다. 베르뇌(Berneux) 주교는 정의배(丁義培) 마르꼬에 대해 일종의 경외심(敬畏心)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차례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노인을 보시오. 저분의 날들은 완전하고 저분의 길은 바릅니다. 나는 천국에 서 저분의 자리만큼 훌륭한 자리를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열성(熱誠)은 놀라웠으니, 끊임없이 신자와 예비신자를 가르치고, 병자(病者)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그들에게 성사받을 준비를 시키는 일을 하였다. 항상 변함이 없고, 입술에는 늘 미소를 띠고서 주야(晝夜)를 막론하고, 그를 부르는 사람들을 도와줄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가 성내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매우 가난하였지만, 신자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으려 하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식탁(食卓)은 늘 간소한 정도를 지나쳤었다. 왜냐하면 살아가는 데에 아내의일 말고는 다른 수입(收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신자가 그를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성인(聖人)처럼 공경(恭敬)하였다(APF XL, P. 62~63).
㉢ 박해(迫害)가 시작되자, 그는 조카 피영록(皮永祿) 바오로를 도망가게 하였으나(피영록(皮永祿) 바오로는 동생 기록(基祿)과 같이 과천(果川)으로 피신하였다.『우포청(右捕廳)』무진(戊辰) 윤(윤) 4월 15일<피영록공(皮永祿供)>, 주교님이 체포(逮捕)된 후로 자기로서는 브르뜨니에르(de Bretenieres) 신부 곁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신자들을 도와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숨으려 하지를 않았다.
그가 체포(逮捕)된 이야기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本稿 333쪽 참조). 포장(捕長)에게로 끌려갈 때에 그의 어깨에 오라가 걸렸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형식적인 것이었으니, 그는 결박(結縛)되지 않았었고, 군졸(軍卒) 2명이 그의 옷소매를 잡고 있는 것을 보고, 포졸(捕卒) 우두머리가
이 점잖은 노인을 혼자 걷게 내버려 두어라. 이분이 도망칠 염려는 조금도 없으니 그저 호위만 하고 또 너무 빨리 걷지도 말자!
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 정의배(丁義培) 마르꼬는 처음에 구류간(拘留間)에 갇혔다가 금부(禁府)로 옮겨져서 4일간을 머무르며, 위에 서술한 것과 같은 신문(訊問)과 형벌(刑罰)을 당해야 했다. 그가 천주교인들 중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같은 교인(敎人)들을 밀고하도록 강요(强要)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특별한 고문(拷問)을 가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이름만을 대고는, 관장(官長)에게
나으리의 눈에는 천주교를 믿는 것이 죽어 마땅한 죄로 보이는데, 저는 그 죄 를 저질렀고, 또 그 죄를 고집하고 있으니 저를 죽여주십시오.
하는 말만 반복하였다.
사형선고(死刑宣告)가 언도된 후, 그는 다시 구류간(拘留間)으로 옮겨져서 3월 11일까지 머물렀고, 그날 새남터 형장(刑場)으로 뿌르띠에(Pourthie)와 쁘띠니꼴라(Petitnicolas) 양 신부와 동행(同行)하는 기쁨을 누렸다(관변측 기록(官邊側記錄) 에 의하면, 그는 포청(捕廳)에서 2회의 신문(訊問)을 받은 후, 1월 16일 선교사들과 함 께 금부(禁府)로 넘겨져서, 전후 4회의 신문과 함께 신장(訊杖) 16도(度)를 맞았다. 선 교사들에게 군문효수(軍門梟首)가 선고되던 날(1월 20일), 정의배(丁義培)는 그간의 형 벌에 못 이겨, 망상적 초사(招辭)를 한 결과, 다시 취초(取招)를 받기위해 포청(捕廳)으 로 이송되었다.『남종삼국안(南宗三鞫案)』병인(丙寅) 1월 20일. 포청(捕廳)에서 다시 실시된 2회의 신문(訊問)에서 그는 불굴의 신앙(信仰)을 고백(告白)함으로써, 마침내 사 형선고(死刑宣告)를 받게 되었다.『우포청(右捕廳)』병인(丙寅) 1월 24일).
정의배(丁義培) 마르꼬의 머리는 네 번째 칼에서야 떨어졌다. 그의 머리는 3일동안 수염으로 매달려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그의 머리는 완전히 대머리가 되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나중에 돈을 주고서 그 귀중한 시신(屍身)을 빼내 올 수가 있어서 정중하게 매장(埋葬)하였다(APF XL, P. 63~64).
② 우세영(禹世英) 알렉스
㉠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황해도(黃海道) 서흥(瑞興)고을에서 유명한 선비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는데, 이 선비는 자기아들의 뛰어난 재질(才質)에 몹시 충격(衝擊)을 받아, 그의 교육을 특별히 돌보았다. 그가 18세가 되었을 때, 빛나는 성적으로 고거(科擧)에 급제(及第)한 길이었는데, 그때 김(金) 요한이라는 회장(會長)이 처음으로 그에게 천주교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의 마음에 천주교를 믿으려는 열렬한 욕망(慾望)을 일으켰다.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곧 아버지께 세례(洗禮)를 받으러 서울로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눈물과 꾸지람과 모진 대우를 무릅쓰고 아버지의 집에서 빠져나와, 몇몇 다름 예비신자들과 함께 베르뇌(Berneux) 주교의 발아래 와서 엎디었다. 거룩한 주교는 그의 정신(精神)과 통찰력(洞察力)과 드물게 볼 수 있는 그의 자질(資質)에 매우 끌렸다.
그러나 그의 신앙(信仰)이 가족들로부터 얼마나 무서운 유혹(誘惑)에 직면하게될 것인지를 예견(豫見)하고, 우선 그를 시험(試驗)하고자 했다. 주교(主敎)는 우세영(禹世英) 알렉스의 동행들에게는 모두 세례를 주어 고향(故鄕)으로 돌려보냈으나, 그에게는 새로운 사태(事態)가 발생할 때까지 세례를 주기를 거절하였다.
㉡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슬퍼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같은 은총(恩寵)을 주기를 주교에게 간청하고, 자기 가족이 무슨 일을 하던지, 천주의 도우심으로 신앙(信仰)을 굳게 지켜나가겠다고 다짐을 했다. 베르뇌(Berneux) 주교는 정의배(丁義培) 마르꼬에게,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주의 깊게 그를 관찰(觀察)하라고 이르고, 1주일 후에 정의배(丁義培) 마르꼬의 유리한 증언(證言)을 듣고 나서야 우세영(禹世英) 알렉스에게 세례를 주었다. 때는 1863년이었다.
주교는 신입교우를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그대가 천주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마귀를 섬기지 않도록 조심하 며, 부모님을 그대의 행복에 참여시키도록 힘쓰시오.
하고 일렀다.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아버지와 형제들에게서 매우 차가운 대접을 받았다. 매일 욕을 먹어야했고, 자주 매를 맞아야했다. 그는 수개월 동안을 참고 지내다가, 자기 자신의 나약(懦弱)함에 겁이 나서, 하루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생활을 줄곧 슬프게만 해드립니다. 그러니 떠나가게 해주십시오.
저 잘 됐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겠다.
하고 아버지가 선뜻 대답했다.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서울로 다시 올라와 정의배(丁義培) 마르꼬의 집에서 만 1년을 오로지 묵상(黙想) 속에서 지내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책을 베끼고, 자기 가족의 개종(改宗)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祈禱)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 그의 기도(祈禱)는 마침내 들어졌다. 그는 아버지의 기분이 훨씬 나아진 것 같아, 그의 소식(消息)을 여러 차례 물었고 그를 다시 보고자 하는 희망(希望)을 나타냈다는 말을, 황해도(黃海道)의 신자 2명에게로부터 들었다.
그는 서둘러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도착한 지 며칠 후, 아버지가 그를 따로 불러 가지고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임금님과 나라의 고관들이 천주교를 박해하고, 그 사람들을 죽 여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이교를 믿는 사람은 종교의무를 지키지 않고, 특히 조 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린다. 한편 네 머리가 꽤 영리해서 심한 오류(誤謬)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고, 또 마음이 착해서 네 늙은 아비와 온 가족을 일부러 슬프게 하지는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교의 비밀 을 가르쳐다오.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몹시 기뻐서 당장 천주교의 중요한 진리(眞理)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하느님의 은총(恩寵)의 도움으로, 몇 주일 후에는 그의 아버지와 온 가족(家族), 그리고 친척들 모두 해서 20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우씨(禹氏) 집안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어서, 개종한 뒤에 고향(故鄕)에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자유로이 신봉(信奉)하기 위하여, 평안도(平安道) 논재(논새를 서한원문(書翰原文)에 따라 논재로 바로 잡 았다. 논재는 평남(平南) 대동군(大同郡) 율리면(栗里面) 답현리(畓峴里)에 있는 한 마을)고을로 이사(移徙)했다. 우세영(禹世英) 알렉스의 아버지는 몇 달 후, 우러러 볼만한 신앙의 감정을 지닌 채 세상을 떠났다(APF XL, P. 59~60).
㉣ 박해(迫害)가 시작되었을 때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다른 신자 6명과 함께 붙잡혔다. 바로 전에 조정(朝廷)으로부터 매우 엄한 명을 받았던 관장(官長)은, 그들을 지극히 엄혹(嚴酷)하게 다루었다.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벌써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다리뼈가 허옇게드러났었는데, 두 번째 신문(訊問)을 당할 때에 심약하여 배교(背敎)한다는 말을 했다. 그는 이내 풀려났다. 관정(官庭)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울기 시작했고, 사람들에게서 베르뇌(Berneux) 주교와 브르뜨니에르(de Bretenieres) 신부가 붙잡혔다는 말을 듣고는
나는 파멸이야. 이제는 누구한테 내 죄를 고해하고 어디 가서 용서를 받나?
하고 부르짖었다. 그런 다음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진정한 뉘우침의 힘으로, 상처(傷處)를 처매달라고 하고서, 말 한필을 장만하여 서울을 향해 떠났다. 그를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말리지 마시오. 아마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소. 나는 내 죄를 고해하고 싶소. 그리고 신자들이 나를 아는 서울에서 모든 이가 내 치욕과 내 뉘우침의 증인이 되어주기를 원하오.
㉤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정의배(丁義培) 마르꼬의 집으로 달려가, 집안에 포졸(捕卒)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천주교인이라고 명백(明白)하게 선언(宣言)하였다.
그는 즉시 체포(逮捕)되어 구류간(拘留間)으로 끌려갔는데(우포청(右捕廳)』병인 (丙寅) 1월 24일), 거기에서 베르뇌(Berneux) 주교를 만나는 행운(幸運)을 얻었다. 자기 죄의 사함을 받은 것과, 그를 예수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해주었던, 그공경(恭敬)하올 주교의 권면(勸勉)으로 강해져서, 그는 형벌(刑罰)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참아 받았다.
그의 내력(來歷)을 알고 있는 관장(官長)은 그를 이기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네가 그렇게 젊으니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
아깝습니다.
하고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목숨을 건져라.
저는 그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네가 한마디 말, 네가 이미 한 적이 있는 한마 디 말을 해야 한다.
아, 그건 안 됩니다. 저는 그런 대가를 치르면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리하여 형벌(刑罰)은 전보다 훨씬 심하게 시작되는 것이었다.
우세영(禹世英) 알렉스는 뿌르띠에(Pourthie) 신부와 쁘띠니꼴라(Petitnicolas) 신부의 뒤를 따라, 정의배(丁義培) 마르꼬와 함께 죽음의 마당으로 끌려가, 그들과 함께 처형(處刑)되었다(APF XL, P. 60~61. 우세영(禹世英)의 나이는 22세. 그러 나 교회측 기록에는 21세. 그리고 교회측에서 부르던 이름은 우세필.『치명일기(致命日 記)』).
3. 왜고개에 묻힌 영광스러운 순교자(殉敎者)들
6개월 후, 9월 초(서한원문(書翰原文)에는 정확히 7월 20일로 기재되어 있다.APF XL, P. 43)에, 박해(迫害)가 약간 숨이 죽었으므로, 서울의 신자들은 새남터의 순교자(殉敎者)들에게 좀더 정중한 장례(葬禮)를 지내줄 생각을 하였다.
평소에도 가난한 그들은, 그 무서운 해의 재난(災難)을 겪은 후에는 한층 더 가난해져서, 관을 살 돈을 자기들끼리 모으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여러 신자들은 그들의 유일한 장신구(裝身具)인 끼고 있던 가락지를 내놓았다. 정해진 시간에 40 명가량의 신자가 밤을 타서 여러 갈래의 길로, 순교자(殉敎者)들이 묻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들은 시신(屍身) 7구, 즉 베르뇌(Berneux) 주교와 5명의 선교사(宣敎師), 그리고 우세영(禹世英) 알렉스의 시신을 파냈다. 정의배(丁義培) 마르꼬의 시신은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처형(處刑)된지 며칠 후에 그의 아내가 돈을 주고 거두어 갔었다. 그들은 그 시신(屍身)들을 하나씩 차례로 배열(配列)하고, 머리는 각각 그 몸뚱이 옆에 갖다 놓고, 임시로 짐승들이 건드리지 못하게만 해놓고, 날이 밝아올 무렵이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틀 후에 그들은 관(棺) 7개와 염포(閻袍)와 성수(聖水)와 예규(禮規)를 가지고 다시 와서, 굉장히 넓은 구덩이 세 개를 파서 그것들이 삼각형(三角形)을 이루게 했다. 삼각형의 정점(頂點)에 있는 가장 넓은 광중에 우선 베르뇌(Berneux) 주교의 관을 모시고, 왼쪽 광중에는 볼리외(Beaulieu) 신부와 도리(Dorie)신부의 관을 모셨다. 도리(Dorie) 신부의 머리가 쁘띠니꼴라(Petitnico -las) 신부의 머리가 서로 바뀌었던 모양이다. 시신확인(屍身確認)을 주재(主宰)한 신자들이, 그 선교사(宣敎師)들이 살아 있을 때 아무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실수(失手)를 하기가 쉬웠던 것이다. 관 하나하나에는 속에 이름을 적은 사발을 잿속에 묻어 놓았다(박순지(朴順之)의 초사(招辭)에 의하면 장주교의 치 명(致命) 후, 그는 최윤형(崔允亨), 신봉석(申鳳石), 홍성보(洪聖甫), 조성로(趙成老), 안중현(安仲玄), 박성운(朴聖雲)등 여러 신자와 더불어, 장주교(張主敎)의 시신을 몰래 가져올 것을 상의하고, 밤에 와서현(瓦署峴)에 묻고 염했던 것을, 김홍범(金弘範)의 집으로 가져갔으며, 최사관(崔士寬)은 회장으로서. 매장(埋葬) 장소에 같이 참석했다.『우포청(右捕廳)』무진(戊辰)
3월 30일. 그런데 병인순교자증언록(丙寅殉敎者證言錄)에 의하면, 왜고개로 이장(移葬) 을 주동한 신자가 박순집(朴順集)이었다고 하는 바, 박순집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경향잡지』 1935(7), p. 423~426 참조). 그곳, 서울에서 남쪽으로 5 리 되는 왜고개라고 불리우는 산위에, 순교자(殉敎者)들의 시신(屍身)이 영광스러운 부활(復活)을 기다리며, 안치(安置)되어 있는 것이다(그 후 7명의 시신(屍身)은 1899년 10월 30일 왜고개에서 용산신학교(龍山神學校)로 이장(移葬)되었고, 1900년 9월 10일 에 다시 종현대성당(鍾峴大聖堂)으로 이장되었으며, 병인순교자(丙寅殉敎者) 24위의 시 복(諡福)을 계기로 하여, 시복(諡福)에서 탈락(脫落)한 뿌르띠에(Pourthie) 신부와 쁘띠 니꼴라(Petitnicolas) 신부를 제외하고, 다시 절두산 지하성당(切頭山地下聖堂)으로 이장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브르뜨니에르(de Bretenieres) 신부의 유해(遺骸)는 가족들의 요청으로 1911년 말 본국(本國)의 가족묘(家族墓)로 이장되었다. Instrume -ntum(1899). Launay, Memorial, p. 9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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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